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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EP053-흔적


“아침부터 왜 전화야?” ‘…레나. 다음 예정일이 언제라고 했지?’ “확정된 건 없지만 아마 내일. 오늘은 간단하게 진찰만 할 거야.” ‘…….’ “왜?” ‘…아니야. 알겠어.’ “너… 쓸데없이 이상한 짓 하지 마. 특히 남자 쪽.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평소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실실거리면서 웃던 새끼가 갑자기 왜 이래? ‘그럼, 그럼… 알고 있다고.’ “…끊어.” 뭔가 수상한데, 내가 신경 쓸 이유는 딱히 없지. 나는 다음 진료 일정이 잡힐 때까지 하던 거나 마저 할까. 협회에서 일을 하니까 데이터베이스 접근하는 것도 쉽고, 좋네. 프로필 검색, 김승윤. 강제로 특성이 부여됐다고 해서 절차 상 히어로로 등록을 해주다니, 나한테는 잘된 일이지. 권한이 부족해서 디테일한 정보는 없긴 해도 기초적인 조사 정도는…. “음…?” 가족이 없군. 고아… 뭐, 테러가 일상이 된 시대에 고아는 흔해. 그럼 반대로… 그 골빈년의 이름이… 아, 그래. 이은지. 반대로 이쪽은 부모가 멀쩡하잖아? 내가 예상한 건 반대였는데. 불쌍한 고아를 주워서 데려다 키우는 그런 감동 이야기 말이야. 그 외에… 6년을 만났다고 했으니 같은 대학교를 나온 건 당연하고. ‘특이사항 – 비상 연락망에 연인(김승윤)의 연락처만 기재. 가족(부모)과 교류 일절 없음. 히어로 공식 데뷔 발표에도 부모는 참석하지 않음.’ “…흠.” 절연? 애정 결핍으로 인한 의존증? 글쎄… 아직 확실하지 않아. 괜히 입 밖으로 꺼냈다가 의심을 사게 될 수 있으니 구체적인 정황이 파악될 때까지는 입을 닫도록 할까. ***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뭐지, 이 남자… 그 사람이잖아. 도그마 씨. 의사가 어제 망상을 해소한 이후 몸 상태를 체크한다며 잠깐 치료 센터로 오라고 해서 나왔더니….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1층 앞에서 이 사람이랑 딱 마주쳐버렸다. 우연… 인가? “당신이 승윤 씨죠? 헤이즈 씨 남자친구.” “어, 네… 맞습니다. 혹시 어쩐 일로…?” “아아~ 그냥 어떤 사람인지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얼굴? 어차피 나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사람이 되게 호감형이시네. 헤이즈 씨가 좋아할 만 한데요?” “…….” “에이, 너무 경계할 필요 없어요. 악수나 한 번 할까요?” “그만 하시죠, 도그마 씨.” 등 뒤에서 낯익은… 하지만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도 믿고 있지 않았던 친절한 이웃, 미라지 씨였다. “승윤 씨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 지부 소속 히어로 미라지입니다.” “하하하… 알겠어요. 전 그냥 인사만 하러 온 건데. 설마 히어로가 민간인을 해치겠어요?” 도그마 씨는 악수 대신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그대로 뒤로 돌아 사라졌다. 진짜 그냥 인사만 하러 온 건가…? “승윤 씨, 괜찮으신가요?” “어… 네, 네. 치료 센터를 가는 길이었는데….” “혼자 외출하시면 위험합니다. 치료 센터에 갈 때라도 가능하면 헤이즈 씨와 동행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번엔 제가 동행해드리겠습니다. 가시죠.” 뭐, 뭐지. 진짜 하나도 생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았어. 지난 일이지만, 망상에 이런 좋은 남자를 등장시켰던 게 조금 미안해지네…. *** “미리 전달한 것처럼 오늘은 가볍게 진찰만 진행할 예정이야.” “그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먼저 어제 귀가한 뒤로 느껴진 특이사항이 있나?” 특이사항… 어쨌든 여러 모로 수고를 해준 은지에게 마사지를 해줬다는 점 말고는 딱히…. 아. 그… 피어싱이랑 태닝에 대한 얘기가 있긴 한데, 해야 하나? “숨기려고 머리 굴리지 말고 말해.” “머리 굴린 게 아니라… 도그마 씨의 특성 같은데, 은지가 자기 몸에 피어싱이 달리는 환상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걸 들으니까 조금… 반응이 왔다고 해야 하나….” “그냥 당신 취향 아니야?” “예?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취향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렇게 격하게 부정할 필요 있나?” 만약 이게 내 개인적인 취향이라면 약간의 수치심을 감수하면서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은지에게 그런 요소가 적용되었다는 사실에 뭔가 흥분을 느껴버린 것 같아서 좀… 찝찝해. “당신의 특성이랑 상황, 취향이 맞물려서 반응이 온 게 아닐까 싶은데.” “…무슨 말이죠?” “그러니까… 당신은 원래 그런 취향이었던 거지. 그런데 망상 – 피학이 얽히면서 약간 다르게 작용한 거야.” “어떻게요.” “다른 남자가 네 여친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 “그리고 그런 상황에 반응해서 흥분, 욕망이 올라온 거지. 내가 입으로 네 발을 빼 준 직후라서 미미한 수준이었던 거고.” 아니… 난 인정할 수 없다. 6년을 만나면서 감히 은지에게 그런 쇳조각을 달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생각을 해보니까 지난번, 지부장이 당신 여친 가슴에 자기 이름을 휘갈겼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건 왜….” “다른 남자의 흔적이 네 연인의 몸에 남는 상황에도 흥분하는 건 아닐까 싶네.” “…….” “다시 말해 원래는 당신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취향이 있었지만, 망상 – 피학 때문에 왜곡된 것.”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이 있었다고? 벼,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왜냐고? 어제 은지가 그런 취향을 언급하면서 벼, 변태라고 했다고…! 나까지 같은 변태가 된다는 거잖아. “아하… 당신, 인정하고 싶지 않구나.” 뜨끔. “어제도 말했잖아? 나는 당신의 비밀을 꿀꺽- 삼켜줄 의사라고.” “아… 아뇨. 오늘은 입으로 부탁드릴 일 없어요.” “나도 그런 제안을 한 적 없어. 단지… 자신의 증상을 숨기는 환자는 절대로 완치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네.” “…….” “본인의 취향을 인정하기 어렵다면 내가 조금 도와줄 수도 있는데.” “피, 필요 없어요.” “당신이 마조 돼지 새끼라는 모욕을 들으면서 흥분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봐.” 약간의 불안함이 마음을 스친다. 혹시, 아주 만약의 가능성이겠지만 정말로 내가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은지에게 문자 하나만 남길게요.” “얼마든지. 오늘은 당신이 여친에게 피어싱을 달고 싶어하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검사라고 똑똑히 전해둬.” “…….” 오늘 아침부터 좀 갑작스러운 일이 많네. 그래도 입으로 할 생각은 없다고 하니까, 기껏해야 손으로 한다는 거지…? …일단 은지에게 문자는 남겨두자. 그냥, 치료 센터에 들른 김에 간단한 검사를 진행할 것 같다고. ***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지능이 높은 사람들의 성욕이 평균보다 조금 더 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거든.” “그건 성욕이랑 관계없는 것 같은데요….” “여기 앉아.” 어두운 상담실에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내가 의자에 앉아, 의사는 내 뒤로 돌아와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시간을 오래 쓸 생각은 없어. 나는 당신이 반응했다는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자극을 줄 거야.” “어떻게요?” “당연히 말로. 평소처럼… 약간의 가학성을 섞어서.” “…하아.” “시간은 10분. 10분이 끝날 때까지 발기… 아니다. 사정만 하지 마.” 그럼 쉬운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 당장 이틀 전에 자지에 손도 대지 않고 여섯 발 연속으로 사정했지. “시작하지. 눈 감아.” “…….” 어두운 시야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어깨에 닿아 흔들리는 머리칼. 머리 바로 옆에 의사가 있는 게 분명하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도그마의 특성은 착시를 일으키는 계열이거든.” “…….” “이건 간단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생각보다 아주… 강력해.” “…….” “예를 들어서 어젯밤에 집으로 돌아온 당신의 연인의 몸에 이미 피어싱이 박혀 있다고 생각해봐.”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망상을 빚어낸다. 새하얗고 커다란 은지의 가슴, 그 끝에 맺힌 분홍빛 유두. 그리고 그것을 꿰뚫는 다른 남자가 박아 넣은 증표. “당신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연인의 몸이 어떻게 변하고 더럽혀지는지 꿈에도 모르는 채로, 연인은 변해.” “…후.” “그 남자의 위로 올라타 허리를 흔들 때에는 가슴과 함께 피어싱이 크게 흔들리겠지. 당신은, 못보겠지만.” “…….” “마사지를 해줬다고 했나? 누구는 자신의 것이라는 증거로 피어싱을 꽂기 위해 움켜쥐었을 가슴을… 당신은 부드럽게 풀어준 거지.” 나는 결코… 그런 종류의 액세서리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까. 이것도 망상 – 피학의 영향일까? “발기했네. 바지를 입고 있어도 아주 잘 보일 정도로.” “…….” “그럴 줄 알았어… 한심한 새끼. 여친 몸에 다른 남자가 달아준 피어싱을 상상하면서 꼴린 거지, 결국.” “…하아.” “날이 갈수록 네 여친의 몸에는 다른 남자의 흔적이 늘어가.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 “하루는 골반에 나비 모양의 문신이, 다른 하루는 가슴에 이 가슴이 누구 건지 증명하는 이름이.” “하… 하아.” “물론 너 같은 마조 새끼의 이름이 들어갈 공간은 없어.” 나는 지금 흥분하고 있나? 정말, 나도 결국 도그마 씨처럼 은지의 몸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변태인 건가? “그러다가 만약… 하루는 피어싱과 문신으로 더럽혀진 연인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해봐.” “…….” “놀란 네 앞에서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하지. 이건 그냥 도그마가 씌운 환상이다. 곧 풀릴 거다. 당신은 믿을 거야?” 나는… 나는,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다. “…네.” “병신.” 비웃음이 섞인 속삭임에 허리가 움찔, 떨린다. 팬티 속에 갇힌 자지가 꿈틀거리며 해방을 원한다. “여자친구를 믿는 거야? 아니면 모른 척 눈을 감아야 더 오래 괴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너 같은 마조 돼지 새끼라면 당연히 후자야. 맞지?” “…하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늘은 네 여친이 어떤 피어싱을 달고 돌아올까 기대하면서 딸이나 치는 거지.” 아마 시작부터 대딸을 받았더라면 이미 사정을 하고도 남았을 거다. “어때? 이래도 인정하지 않을 거야?” “…….” “그냥 고개를 끄덕여. 네 자지가 팬티 속에서 움찔대면서 좆물을 지린 탓에 상담실 바닥이 더러워지는 건 나도 싫거든.” “…아, 알겠어요. 인정… 할게요. 됐죠.” “처음부터 그럴 것을… 이제 눈 떠.”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의사도 내 귀에 닿을 듯 가까이 붙어있던 입술을 거두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다음에 도그마에게 부탁을 할 때에는 피어싱이 당신 눈에도 보이게 해달라고 말할게.” “…….” “오늘은 검사 끝. 이제 돌아가.” “…네.” “아, 발기한 것 때문에 불편한가? 조금 더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내가….” “돼, 됐습니다! 저 갑니다.” *** 상당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진찰이긴 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는 나아. 일단 적어도 의사가 내 몸에 손을 댄 건 아니지. 그리고 은지에게 이 사실을 곧바로 전하게 된 것도 아니야. “그,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데 당연히 흥분하는 게 정상이지.” 상황이 나에게 불리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치료 센터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그때. “오빠아아아아!” 이번에도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정확히는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내 뒤로 누군가 착지하는 묵직한 소음이 따른다. 내가 남긴 문자를 보고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참 귀여운 부분이 아닐 수 없…. “…….” “웅? 왜? 오빠?” 뒤로 돌아서서 은지를 마주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차라리 내 눈이 고장난 거라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음에도. “오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은지의 배가 만삭의 임산부처럼 불룩하게 부풀어오른 모습에 몸이… 굳어져버렸다. 뭘까,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 안에 든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 것 같다는 끔찍한 괴로움은. 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더없이 역겨운 불쾌함은… 대체 뭘까. “우, 우욱….” “어어? 오, 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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