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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EP001-운


         운이 없었다.      평화롭고 소소하지만 행복했어야 할 우리의 데이트가 빌런의 테러로 엉망이 된 것은 명백한 불운의 영역이다.            경고. 경고. A급 빌런 마스터마인드 출현. 신속히 인근 대피소로 이동하시길 바랍니-            콰직- 퍼어엉-!!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경고 방송을 반복하던 스피커를 탑재한 차량이 한 순간에 폭발하며 박살난다.                    “하… 쫑알쫑알, 거슬리네.”            뒤이어 무미건조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몸을 숨긴 건물 외벽의 잔해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 같다.      빌런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건지, 자꾸 이 주변을 휘휘 돌아보며 배회한다.      이대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오, 빠….”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은지야….”      “나… 다리가, 너무… 너무 아파….”      “…조금만 참아, 제발….”            내 여자친구가 폭발의 여파로 무너진 건물 외벽에 깔려버렸다는 것.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뭐야? 이건.”      “…….”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건조한 목소리.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건… 위험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우리 둘 다 죽게 되겠지.            후들거리며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나서 몸을 돌려 빌런을 마주본다.      무감정해 보이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 살려줘.”      “내가 왜?”      “…나 말고. 여기 이, 이 사람만이라도… 살려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목숨 구걸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능력도, 힘도 없는 일반인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아~ 그런 사이? 참 눈물겨운 사랑이네.      “…제발.”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비웃는 빌런.      무섭다. 두렵다. 그만큼 간절하다.            “뭐… 좋아. 어차피 허탕 친 것 같으니까 살려줄게.”      “저, 정말?”      “물론 공짜는 아니고. 저 여자 목숨값은 치러야지.”            갑자기 내 쪽으로 빌런의 손이 뻗어오더니, 머리를 덮듯이 감싸 붙잡는다.      왜소하고 마른 체격이지만 힘이… 도저히 거스를 수 없을 정도다.            “네 시시한 사랑놀이가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아… 안돼, 하, 하지 마… 오빠, 오빠…!”            은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빌런의 손이 내 머리를 더욱 강하게 붙잡는다.      그러자 갑자기 두통을 넘어선 수준의 통증이, 머릿속을 쪼개는 것만 같은 고통이 일어난다.            “크, 으윽… 아, 악…!”      “오, 오빠…! 그만 해!! 오빠한테 소, 손 대지 마!!”      “오구, 무서워라.”            역겹고 메스껍다. 머릿속을 뒤집고, 멋대로 무언가를 지우고 다시 쓰는 느낌.      거칠고 우악스럽게 낯선 개념을 마음과 머리에 강제로 새기는 것만 같다.      까득, 까드득- 소름끼치는 이질적인 소음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구역질이 나올 만큼이나 끔찍한 감각이 끝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 고통 속에서 내 귀 바로 옆으로 몸을 숙인 빌런이 속삭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아프지? 근데… 앞으로는 아프고 싶어질 걸.”      “아… 아, 으….”      “네가 오늘 저 여자를 살려달라고 빈 거,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그때, 은지의 몸 위로 쓰러졌던 커다란 콘크리트 조각이 쩌저적-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나를 바라보던 은지의 눈이 순간 푸른색으로 반짝, 빛나더니-            콰아아앙-!!            폭발.      빌런이 이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 일으켰던 폭발과는 조금 다른 색깔의 불꽃이었다.      연보랏빛 불꽃이 폭발하면서 나도, 나를 붙잡고 있던 빌런도 크게 밀려난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머릿속에서 멎지 않은 저릿저릿한 통증과 함께 내 의식은 깊이 가라앉는다.      깊이. 끝도 없이… 깊이.                 ***                  “…….”            눈을 떴다.      내가 눈을 떴다고 하기에는, 그냥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낯선 천장, 낯선 공간, 그리고 내가 누운 침대 옆에는 낯선… 여자?                    “오빠! 저, 정신이 들어?”      “…은지?”            목소리는 분명 은지인데.      외모도 분명… 은지랑 닮았는데, 눈이랑 머리카락이 왜….            “아… 머, 머리 색깔 때문에? 갑자기 바뀐 거라서 나도 좀 어색해….”      “갑자기 바뀐 거라고?”      “으응. 그… 오빠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각성을 했잖아? 그때 변했어.”            각성… 은지가 각성을 했구나.      평범한 시민이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 잠재력을 각성을 하게 되면 히어로가 된다.      그 말은, 내가 빌런에게 잡혔던 그 때 은지가 히어로가 됐고… 나를 구했다는 뜻이겠지.      다행이다. 은지도, 나도 무사해서….            “네가 날 구해준 거구나… 고마워, 은지야.”      “아, 아니! 오빠가 먼저 날 구하려고 했잖아….”            나를 향해 수줍게 웃어주는 미소를 보니 분명 은지가 맞다는 확신이 선다.      조금 낯설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은지가 여전하다는 점에 조금 안심이 된다.      그나저나, 내가 기절한 뒤로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조금 궁금해지는데….            드르륵-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우리가 있는 쪽으로…?                    “어… 어?”      잠깐만. 이, 이 사람 설마….            “안녕하십니까. 히어로 협회 서울 지부장, 매튜 앤더슨입니다.”            중후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 이국적인 외모와 달리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이 사람은 매튜 앤더슨, 은퇴했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1세대 히어로들 중 한 명이다.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해 직접 방문하게 됐습니다. 미리 연락드리지 못한 점 양해 바랍니다.”      “아니, 어, 그… 왜…?”            너무 당혹스러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건 은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크게 떠진 눈을 깜빡이면서 나를, 그리고 매튜 씨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기만 한다.            “당황하신 점, 이해합니다. 질문에 앞서 먼저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 네.”      “좋습니다. 먼저 이은지 양.”      “네?”      “검사 결과 히어로 분류 등급 중 S급, 고유 특성 도깨비불 각성자로 판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은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벙벙한 상태다.      S급 히어로는 전국…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100명이 되지 않는 엄청난 존재다.      그런데 은지가 S급 히어로라고?      이거, 꿈은 아니지…?            “그리고 다음으로, 김승윤 씨.”      “네…?”      “승윤 씨의 경우는 조금 특수합니다.”            매튜 씨가 들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나에게 내민다.      얼떨결에 받게 된 종이에는 내 이름과 함께 낯선 글자들이 가득 적혀 있다.      그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굵은 글자로 강조된 문장.            ‘등급: F / 고유 특성: 망상 – 피학’            “…이게 무슨 뜻이죠?”      “승윤 씨는 A급 빌런 마스터마인드에 의해 강제적으로 고유 특성을 얻게 됐습니다.”      “네?”      “능력은 전무하지만 특성이 있는 이상 일반인으로 분류할 수 없기에 열외 등급, F등급을 임시로 부여했습니다.”            F라는 등급은… 솔직히 잘 와닿지도 않고,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옆에 적힌 망상… 피학?      이건 뭐지?            “빌런 마스터마인드는 특성이 없는 민간인에게 디버프형 특성을 부여하고, 이용합니다.      보통 자신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드는 식이지만 이런 특성은… 보고된 적이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요약하자면, 현재 승윤 씨의 특성에 대한 상황 파악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 특성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습니다.”            내가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특성이나 빌런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      솔직히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때 내 옆에 서있던 은지가 입을 연다.            “그, 저기… 지부장님…?”      “말씀하시죠, 은지 양.”      “오빠, 방금 정신을 차려서 지금은 많이 혼란스러울 것 같은데… 조, 조금 나중에 얘기하면 안될까요?”      “물론 괜찮습니다. 그럼 은지 양에게 전달해야 할 사항부터 말씀드리죠.”                    역시 은지는… 다정하다. 섬세하고, 언제나 나를 위하는 사랑스러운 연인.      매튜 씨의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은지의 겉모습은 아직 조금 낯설긴 해도 은지는 은지다.      그런 은지가 S급 히어로로 각성했다는 사실에 괜히 내가 다 뿌듯해진다.      빌런 때문에 데이트는 망쳤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거라면 오히려 운이 좋은-            찌릿-            “으, 윽….”            매튜 씨에게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은지를 가만히 보고 있던 도중, 갑자기.      머릿속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잔뜩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어?”            “…….”      “…….”            주변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방금까지 덤덤한 표정을 한 채로 은지에게 무언가 설명을 이어가고 있던 매튜 씨의 손이,      어느새… 은지의 가슴 위로 올라와, 손가락을 크게 벌리고 말랑한 살덩이를 한 움큼 쥐고 있다.                    “어… 어, 어라…?”            분명히 매튜 씨의 손이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데도, 은지는, 은지는… 저항하지 않는다.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얌전히, 가슴을… 내어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쾌한 위화감이 허리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쿵- 쿵- 뛰는 내 거친 심장 박동이 낯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은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눈은 저쪽에, 옷을 구기며 가슴 깊숙이 파묻힌 채로 꿈틀거리는 단단한 손가락에-            “…빠! 오빠! 괘, 괜찮아?”      “…어어?”            멀리서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아득한 목소리에 정신을 겨우 차렸다.      눈앞에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은지가, 그리고 그 뒤로 매튜 씨가 보인다.            “바, 방금….”      “방금? 왜? 호, 혹시 머리 아파?”      “…….”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문장.      ‘특성: 망상 – 피학’      그 특성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불길한 생각은 머릿속 저편으로 밀어내고 은지를 향해 애써 웃음을 지어보인다.      은지가 S급 히어로가 된 날인데… 웃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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