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EP002-망상
매튜 씨는 일정이 있다며 우리에게 명함을 남겨주고 돌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이게 꿈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침대에 앉아있을 뿐이다.
방금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방법은 없지만… 빌런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것,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오빠… 괜찮아?”
“…응. 괜찮지.”
“방금은? 어디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오빠. 알겠지?”
“그럼.”
은지는…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런 이타적인 마음씨 덕분에 히어로로 각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S급으로.
“아까 지부장님이랑 말했는데, 오빠만 괜찮으면 퇴원은 언제든지 해도 된대.”
“그래? 그럼 가자. 나 멀쩡해.”
“바… 바로? 괜찮겠어, 오빠?”
“괜찮지. 아예 바로 다시 데이트하러 갈까? 아까는 좀… 많은 일이 있었잖아.”
걱정을 좀 덜어내도 된다는 뜻으로 뱉은 가벼운 농담에도 베시시 웃는 은지는 역시 사랑스럽다.
그런 은지가 방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상한… 상상 속에서는 다른 남자에게 가슴을 만져졌다는 게,
…조금 찜찜하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불쾌… 불쾌해야 할 일인데 자꾸 생각이 난다.
이것도 그 망상 특성 때문인 걸까?
“집부터 가자, 오빠.”
“그래. 가자.”
***
은지와 나는 동거하고 있다.
오랫동안 큰 충돌 없이 5년이나 연애를 해왔기에 어색함은 거의 없다.
아침에 같이 손을 잡고 나갈 때에만 해도 이런 식으로 귀가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더라.”
“누구? 나? 아니면 오빠?”
“은지 너. 머리색깔 때문인가봐.”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느껴졌다.
히어로로 각성을 하면 머리색이나 눈의 색깔이 변하는 건 나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은지가 히어로라서 쳐다본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예뻐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으음… 오빠가 보기엔 어때? 머리.”
“예뻐. 예전이랑 똑같이.”
“어색하지 않아? 아니면 예전 색깔처럼 염색할까?”
“괜찮아. 지금도 보기 좋아.”
나 하나 때문에 이런 독특한 머리색을 포기하는 건 너무 아쉽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집, 우리의 공간, 우리의 보금자리. 집.
사실 방금까지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조금 마음이 놓인다.
그래서일까, 은지의 휴대폰이 자꾸 우우웅- 진동하며 무언가를 알리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은지야. 뭐 문자 온 것 같은데?”
“응? 아, 이거… 아까부터 뭐가 자꾸 오더라. 살짝 보니까 히어로 지부 쪽에서 보낸 것 같아.”
“그럼 빨리 확인해야지. 얼른 읽어봐.”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은지는 이제 S급 히어로다.
남자친구인 내가 히어로의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얼핏 봐도 문자가 잔뜩 쌓인 휴대폰을 확인하는 은지의 옆에 앉아서, 나는 매튜 씨에게 받았던 서류를 꺼내본다.
‘등급: F / 특성: 망상 – 피학’
“…….”
“으으… 오빠, 문자에 어려운 말들이 너무 많은데…?”
“천천히 읽어. 하나씩.”
“그럼 먼저… 앞으로 신입 히어로 교육을 이수해야 한대. S급이라서 추가 교육이 예, 예정… 윽.”
“소리내서 읽을 필요는 없지 않아?”
“아니지! 오빠도 알아둬야지.”
“나도?”
“웅. 남자친구잖아.”
내 옆에 딱 붙어서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댄 채로 계속 문자를 읽는 은지.
“그리고… 슈트. 맞춤 슈트 제작해야 해서 치수도 재야 한대.”
“그렇겠지.”
“또, 기초 체력 트레이닝… 파트너 히어로 배정…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 으으으! 마, 많다아….”
은지가 휴대폰 버튼을 꾹 눌러서 화면을 끄더니 앞에 놓인 테이블에 탁, 엎어버린다.
그리더니 냅다 내 품에 와락 안겨서 팔로 목을 휘감고 꼬오옥- 끌어안는다.
나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은지를 살짝 안아주면서 묻는다.
“왜 그래?”
“그냥… 앞으로 조금 바빠질 것 같아서, 미리.”
“바빠지겠지. 고생도 많이 하고.”
“…그래도 각성한 건 좋아. 그래서 오빠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때 테이블에 뒀던 은지의 휴대폰이 다시 진동한다.
이번에는 규칙적으로 연속해서 울리는 걸 보니 문자가 아니라 전화다.
“전화 왔네?”
“좀만, 좀만 더.”
“하하… 얼른 받아.”
품에 달라붙어 있던 은지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휴대폰을 든다.
화면에 띄워진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
“여보세요? 누구세요?”
전화를 받은 은지는 바로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뜨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지, 지부장님? 아… 아직 번호 저장을 안해서, 네, 네… 헤, 헤헤….”
나도 명함을 받았었지?
연락을 할 일…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장을 해둬야겠네.
“네… 아, 그래요? 네. 네… 오늘, 음… 네!”
전화는 5분 정도로 짧게 끝났다.
통화를 마친 은지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더니, 가벼운 한숨을 폭 내쉰다.
“퓨후우우.”
“왜? 무슨 일인데?”
“히어로 신분증 등록해야 하니까 지부로 오래.”
“그래? 근데 지부장님, 그러니까 매튜 씨가 직접 전화를 한 거야?”
“웅. 원래 S급 히어로는 각 지부에서 지부장이 직접 전담한대.”
“오… 특별 관리네.”
“아무튼 그래서, 오늘 잠깐 갔다가… 오는 김에 슈트 사이즈도 재고, 자잘한 검사도 몇 개 하래.”
각성을 한 첫날부터 바쁘구나.
그럼 내가 걸림돌이 되면 안되지.
“갔다 와. 내가 저녁 준비하고 있을게.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 잠깐이었지만 오빠 퇴원도 했고, 나 히어로도 됐고!”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겉옷을 걸치고 나갈 준비를 하는 은지를 따라서 현관 앞까지 간 다음,
쪽. 가볍게 입술을 살짝 부딪힌다.
“금방 갔다올게!”
“천천히 와. 차 조심하고.”
문이 닫힐 때까지 틈 너머로 손을 흔들어주는 은지.
쿵, 문이 닫히고 나면 집에는 나 혼자 남게 된다.
“…….”
다시, 방금까지 은지와 앉아 있었던 테이블 앞에 앉는다.
내려놓았던 종이를 들고 신경을 써서 읽어보지 않았던 설명을 읽어본다.
‘특성: 망상 – 피학은 현재 제거 방법이 명확하지 않은 디버프형 변종 특성입니다.
특징은 성장형 특성이라는 점으로, 조건이 맞물리면 더 강한 출력이 가능해지는 구조입니다.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떻게 성장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정밀 검사가 강하게 권장됩니다.
기본적으로 피학 망상은 괴로운 상황을 과장시킨 망상을 강제하여 특성 소지자가 그것을 바라게 합니다.
해소하지 못한 망상은 부가적인 디버프를 부여하는 식으로 작동하며….’
“…오케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도 히어로나 특성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야 하나?
은지도 이런 것들에 익숙해질 텐데.
은지… 그래, 은지도.
…은지는 슬슬 도착했을까? 히어로 협회 서울 지부, 여기서 멀지 않잖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설명을 더 읽는 건 포기했다.
저녁은… 은지가 좋아하는 닭갈비를 먹을까?
아니면….
“…….”
평범한 생각이나 고민은 자꾸 천장에 부딪혀서 턱턱 막히는 느낌이다.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막힘없이 쭉, 쭉- 뻗어나간다.
S급 히어로는 지부장이 직접 관리한다고 했지?
그럼 은지도, 매튜 씨가 담당해서 관리한다는 뜻이고.
오늘은 맞춤 슈트 제작을 위한 신체 사이즈를 잴 예정이니….
그려진다.
감긴 눈 너머의 캄캄한 시야 너머로, 매튜 씨와 단둘이 서있는 은지가.
몸에 딱 맞는 히어로 슈트를 만들려면 당연히 옷을… 벗어야겠지.
“…….”
“…….”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앞에서 겉옷을, 셔츠와 바지를 벗고 서있는 모습.
선명한 상상은 자꾸만 가지를 뻗으며 더 나아가려고 한다.
히어로 슈트 안에는 보통 속옷을 입지 않는다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이즈를 잴 때에도….
“…….”
은지가 손을 등 뒤로 돌린다.
툭, 후크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속옷.
그리고 드러나는 맨가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매튜 씨의 앞에서 몸을 가리지도 못하고 서있는 나의 연인.
“…….”
“…….”
물 속에 스피커가 잠긴 것처럼 소리가 먹먹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참 대단하다. 내가 모르는 영역을 알아서 채워준다.
‘아래도 벗어야 합니다.’
‘아… 아래도요?’
‘네. 슈트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습니다.’
“하… 하아. 하, 아….”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허리에 걸린 끈에 손가락을 걸고, 아래로 천천히 당겨 내리는 은지.
‘다음으로 팔 들어주시죠. 가리시면 안됩니다.’
‘아, 네….’
은지의 바로 옆에 선 매튜 씨가 손에 든 줄자로 천천히 허벅지, 허리… 그리고 가슴까지, 측정을 시작한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은지의 매끄러운 살갗 위를 오고 가면서 스칠 때마다 은지는 몸을 움찔, 떨지만….
…얌전히, 자신의 몸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한 순간.
어느새 줄자는 사라져있고, 매튜 씨의 한쪽 손이 은지의 가슴을… 그리고 다른 손은 배에서 점점 아래로-
“허, 허억…! 헉, 허, 허억….”
쿵. 뻗어 나가던 망상의 줄기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눈이 뜨여졌다.
돌아온 시야에서 제일 먼저 보인 건 덜덜 떨리고 있는 손.
그리고… 다리 사이, 바지를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잔뜩 부풀어오른 무언가의 실루엣.
“…허.”
설마.
나, 지금….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앞에서 몸을 보여주는 상상을 하면서 발기….
우우웅-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진동한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해본다.
은지의 문자다.
‘나 이제 도착! 저녁은 닭갈비 어때? 지부장님이 금방 끝날 거래.’
‘알겠어. 준비 해둘게.’
‘좋아~ 그리고 오빠, 내일 정밀 검사 받으러 오래! 같이 가자.’
‘그래.’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보냈지만 여전히 바지 밑 긴장감은 꺼지지 않는다.
게다가 왜… 왜 그런 상상을 했고, 왜 발기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차라리 딸이라도 한 번 친다면 진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망상을 반찬으로 자위를 한다니, 그건… 그건 좀 아니잖아.
“후우우….”
천천히 심호흡을 반복하자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다.
닭갈비나 하자. 은지가 좋아하는 닭갈비.
그리고 이런 상상을 했다는 것까지 전부… 잊어버리자.
내일 검사를 받으면 뭔가 해결책이 나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