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EP003-진단
“여기 앉으시죠.”
“아, 네.”
좀 긴장되네.
몇 시간이나 이상한 기계를 몸에 붙였다가, 머리에 썼다가, 위에 섰다가…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검사를 끝낸 뒤, 진단을 받을 차례다.
“음… 승윤 씨, 손실 회피라는 말 아시나요?”
“네? 아니요.”
“인간의 심리인데, 같은 크기의 이익을 얻을 때의 기쁨보다 같은 크기의 손해를 얻을 때 고통이 두 배 정도 크게 느껴져요.”
“…그래서요?”
“그럼 만약에 손해보는 상황을 이익이라고 오해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스스로 손해를 보게 되는 상황을 선택하겠죠.”
둘 다 이득이라고 착각한다면 당연히 두 배의 이익을 보는 쪽을 택할 테니까.
내 대답을 들은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간다.
“지금 그게 승윤 씨가 얻은 디버프 특성의 효과입니다.”
“네?”
“손해, 정확히는 괴로운 상황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을 쾌락이라고 믿도록 감각을 혼동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승윤 씨가 괴로움에 이끌리도록 합니다. 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
“승윤 씨와 은지 양이 겪은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얼굴이 낯익은 빌런의 프로필을 앞으로 내민다.
이 여자, 이름이… 마스터마인드였지.
“연인을 지키려고 희생하는 모습이 이 빌런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았어요.”
“검사 결과, 승윤 씨의 피학 망상은 무조건 은지 양과 연결되도록 강제되어 있습니다.”
“그럼, 은지가… 죽거나 하는 그런 망상을…?”
“아니죠. 지갑에 있던 돈을 잃어버린 것과 누군가에게 돈을 빼앗기는 것. 느낌이 다르죠?”
빼앗긴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은지를, 빼앗긴다.
그럼 내가 어제 상상했던 그것들은 역시 이 특성 때문이었구나.
“그럼, 망상에 매튜 씨가 나온 게….”
“매튜 씨요? 망상에 지부장님이 나오셨나요?”
“…네.”
내 수긍은 은지를 매튜 씨에게 빼앗기는 망상을 했다고 고백하는 꼴과 같다.
분명 수치스러운데, 조금… 낯선 수치심이다.
“큰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치료죠.”
“그럼 지금부터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우선, 적절한 시기에 맞춰 욕망을 적절하게 해소해 망상의 주기를 늦춰야 합니다.”
“해소….”
“같은 욕망이라도 사람마다 해소하는 방법은 달라요. 승윤 씨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직접.”
“…….”
“망상만 계속 반복하면 현실과 망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게 돼요.”
욕망을 해소할 방법을 찾으라고?
당장 어제… 그 메스꺼운 망상을 하면서 발기한 걸 자위로 해소하는 것조차 너무 어려웠는데.
…막막하다.
“이 디버프 특성을 제거할 방법을 최우선으로 개발하라는 지부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개발되면 좋겠네요.”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승윤 씨의 협조도 필요해요.”
“제가 어떻게… 협조를 하면 될까요?”
“간단합니다.”
담당의가 책상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내 쪽으로 내민다.
새하얀 빈 종이 한 장과 볼펜 하나다.
“망상의 내용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써 주시면 됩니다.”
“…….”
“부끄럽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평범한 사람으로 치면 그냥 맛있는 음식을 먹는 상상을 했다, 이런 느낌입니다.”
“하아….”
“혹시 필기보다 녹취하는 쪽이 편하시다면 그걸로….”
“…아니요. 괜찮습니다.”
***
전부 적어서 제출했다.
병원에서 보았던, 은지가 매튜 씨에게 가슴이 만져지던 모습의 망상.
그리고 어제, 자리를 비운 은지가 슈트 치수를 핑계로 몸을 보이고 만져지던 망상.
내가 본 것들을 축소하거나 누락시키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건 결국 나를 고치기 위한 치료의 일환이니까.
“그럼 한 달 정도 뒤… 다음 검사 일정에 맞춰서 또 뵙죠.”
“...감사합니다.”
“특별한 증상이나 변화가 생기면 연락주세요. 바로 이곳으로 오셔도 되고요.”
“네.”
은근하게 속이 미식거리는 느낌을 무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은지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사람은… 매튜 씨.
“오빠! 끝났어?”
“으응… 끝났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승윤 씨.”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참는다.
이 자리에서 어제와 비슷한 망상을 저지르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협회 서울 지부는 승윤 씨의 치료를 굉장히 중요한 안건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부담 없이 방문하셔도 괜찮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매튜 씨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나도 손을 내밀어서 가볍게 악수를 하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게 와닿는다.
숱한 일들을 겪으며 헤쳐온 거칠고 단단한 히어로의-남성의 손.
…망상 속에서는 은지의 몸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그 손이다.
“그럼 가자, 오빠. 지부장님, 저희 이제 들어가 볼게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은지에게는 가벼운 목례를 한 뒤 돌아서는 매튜 씨.
나랑 은지도 집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검사는 어땠어, 오빠?”
“응? 어….”
은지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를 사실대로 털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네가 다른 남자에게 가슴을 주물리고,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망상으로 발기했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 치료가 되기 전까지는 그런 망상들이 계속 반복될 예정이라는 것까지.
“별 일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많이 복잡한 문제 같다. 맞지?”
“…맞아.”
은지는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너무나 소중한… 연인이다.
히어로가 되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괜찮아! 오빠가 나를 구해주려고 했고, 내가 다시 오빠를 구했잖아?
이번에도 난… 오빠를 도와주고 싶어. 그러니까 오빠 혼자 끙끙 앓지 말아줘, 알겠지?”
“…….”
네가 그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일수록 내가 말을 꺼내기 힘들어진다는 걸 알까?
의사는 분명 내가 욕망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지.
나는 지금… 그 방법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게 옳은 것인지를 몰라, 집에 오는 길 내내 고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고민에 몰두했다.
“오빠, 아직 배 안고프지?”
“…으응.”
“그럼, 저녁 먹으려면 멀었고… 오늘은 딱히 할 일도 없고.”
은지가 쭈뼛거리며 망설일 때에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수줍음이 많아서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긴 해도 이렇게 물어보면 솔직하게 말해주는 걸, 나는 안다.
“왜? 할 말 있어?”
“그… 있잖아, 오빠.”
“어.”
“앞으로 나, 많이 바빠질 것 같아서….”
“그래서?”
“…하, 할래…? 마지막으로 한 지도 조, 좀 됐잖아… 그치?”
은지가 무엇을 제안했는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도, 당연히 한 명의 남자로써 그런 종류의 일을 좋아한다.
게다가 상대가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예쁘고… 몸까지 완벽한 여자친구인데.
“…그래.”
“그, 그럼 나 먼저 씻을게!”
베시시, 수줍은 웃음을 지은 채로 은지가 까치발을 살짝 들더니 내 뺨에 쪽- 가볍게 입술을 부딪힌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화장실로 쏙 들어간다.
“…….”
나는 천천히 은지의 방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집에서 관계를 가질 때에는 매번 은지의 방에서 했었다.
나도 몇 번이나 누워 본 침대지만, 지금은… 침대 옆에 서서 바라본다.
쏴아아-
등 뒤에서 들리는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
은지가 몸을 씻고 있다. 나와 할 일을 위해서 하는 준비는 금방 끝나고, 곧 타월 하나만 두른 채로 나오겠지.
…하지만 그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하아. 또….”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이곳, 은지의 방 그대로.
하지만 상대는 바뀐다. 내가 아니라 매튜 씨가 이 침대에 앉아서 은지를 기다리고 있다.
망상 속에서, 내 눈에 보이는 이 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망상 속에서 은지가 들어온다.
“…….”
조금 부끄러운 듯 눈을 돌리고 있지만… 은지는 머뭇거린 끝에 침대로 다가간다.
내가 아니라 매튜 씨의 앞에 선다.
나보다 더… 훨씬 더 강한 남자 앞에서, 타월을 내린다.
“…….”
“오빠?”
“…어?”
타월을 두른 은지가 방문에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분명 방금 타월을 벗은….
…아.
“이제 오빠 씻어. 빠… 빨리 와야 해?”
“…그래.”
심장이 쿵, 쿵 뛰는 소리가 내 귀에도 아주 선명하게 들리고 있다.
수줍게 나를 재촉하는 은지를 지나쳐서 욕실로 들어왔다.
옷을 벗고 따뜻한 물을 튼다.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서도 나는, 망상을 멈추지 못한다.
쏴아아아-
“…….”
“…….”
어두운 침실 안에서 은지는 매튜 씨의 품에 안기겠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매튜 씨의 품에.
그리고 나보다 훨씬 강한 매튜 씨는, 분명… 나보다 더 클 거다.
…남자라고는 나밖에 만나보지 못한 은지는 그걸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허, 허억… 헉, 하, 하아….”
조금은 놀라고, 당황하면서… 내가 작은 거였다고 생각할까?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얼굴 바로 앞에서 그걸 보기도 하겠지.
나보다 더… 더 길고, 굵고, 두껍고, 단단하고… 남자다운 자지를 보겠지.
“하아… 아, 아….”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느끼는 순간은 역시… 삽입.
내가 들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들어가지만 길이, 두께, 굵기- 모든 게 우월한 자지가, 삽입된다면.
분명, 나와의 밋밋한 섹스로도 만족해주던 은지라면, 분명-
…그 삽입 한 번으로 깊은 절정을 느끼며 허리를 바르르 떨겠지.
“…….”
…그렇게 은지를 빼앗기는 걸까?
나보다 더 강한 남성의 밑에 깔려서 그 차이를 체감한 은지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오늘처럼 나에게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다시는 하지 않는 것 아닐까?
어쩌면, 다정한 은지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어쩌면….
나를, 비웃는 건 아닐까?
똑, 똑-
“오빠아… 거기 있지?”
“…어. 지금 나갈게.”
“으, 으응!”
몸을 대충 닦아버리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은지는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입술을 꼭 닫고 살살 내 눈치를 보던 은지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더니 어깨가 흠칫, 떨린다.
나도 은지를 따라서 시선을 내려본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자지는, 터지기 직전처럼 팽팽하게 발기하고 있었다.
내가 욕실에서 그려낸 망상에 현실성이 없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다.
자지가 조금 더 크다고 연인을 빼앗아? 말도 안돼.
…하지만 망상 속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망상은 달콤하다. 연인과 함께 침실로 향하는 이 순간에도 나는… 망상을 저지른다.
“…….”
우리의 첫경험에서 은지는 부끄럽다며 뒤로 하고 싶다고 했었지.
매튜 씨와 하게 될 때에도 그럴까? 그렇게 된다면, 그 밑에 깔려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차이를 확실하게 느낄까?
파앙-! 파앙-!
두껍고 묵직한 매튜 씨의 허리가 은지의 부드러운 엉덩이에 부딪히며 자지를 깊숙이 처박을 때마다 은지는 가버릴까?
나와 할 때는 닿지 않았던 부분을 자극 당하면서 새로운 절정을 경험하게 될까?
내가 닿았던 부분을 훨씬 더 거칠고 묵직하게 누르고 벌리며 파고드는 자지에 조금씩-
“오… 오빠, 괜찮아?”
“…….”
아무래도, 안되겠다.
나는 혼자서 이 망상을 감당할 자신도, 해소할 용기도 없다.
“은지야.”
“으응…?”
“나… 할 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