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EP0080-0075화-벽 너머의 남자
쿵! 쿵!
“어이~! 형씨. 아직도 포기 안 했어?”
“…….”
“어이~ 어이~”
쿵!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쇠막대를 내리쳤지만, 돌벽에서는 작은 부스러기만 떨어져 나올 뿐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쨍그랑!
쇠막대가 바닥을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뭐야? 이제야 지친 거야? 그러길래 아까 포기했으면 좋잖아?”
“…….”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한동안 쇠막대로 돌벽을 두드린 탓에 양손은 이미 엉망이었다.
손바닥의 살갗은 찢어졌고 부어오른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쇠막대는 탈출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주변을 탐색하다가 찾은 도구였다.
게다가 벽 한쪽에는 누군가 오랫동안 두드려 부수려 한 듯한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지금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나약했다.
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거친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엘레노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쇠막대를 휘둘렀지만, 벽은 처음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망가진 손보다 그 사실이 더 쓰라렸다.
제풀에 지쳐 주저앉은 채 쇠막대와 벽에 남은 흔적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이 모든 것이 의도된 것처럼 느껴졌다.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 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기만이 아닐까 싶었다.
쇠막대와 벽에 남은 흔적도 전부 절망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남겨 둔 것 같았다.
젠장.
마력만 있었더라면 이런 벽쯤은 단번에 부수고 나갔을 텐데….
여기에 갇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정신이 한계까지 몰리는 기분이었다.
“형씨.”
갑자기 벽 너머의 남자가 친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렇게 기죽어 가만히 있지 말고 왜 여기 들어왔는지 얘기라도 좀 해봐. 벽만 보고 있으려니 심심해서 죽겠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엘레노아가 어떻게 됐을지 걱정돼 머릿속이 복잡한데 자꾸 옆에서 시끄럽게 말을 걸어대며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어이. 듣고 있는 거 맞지? 정 말하기 싫으면 거기 있는 여자한테 박아서 화라도 푸는 건 어때? 큭큭.”
나는 눈을 감은 채 애써 그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감옥 내부에서 보이는 바깥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보았던 하늘은 분명 푸른빛이 선명했다.
해가 한가운데 떠 있던 것으로 보아 한낮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갇힌 지 고작해야 반나절….
아니, 벌써 반나절이나 흘렀다는 뜻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엘레노아는….
“나가고 싶지?”
“…….”
또 무슨 시답잖은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걸까.
“내가 이곳에 갇힌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간 잡혀온 놈들을 보면 둘 중 하나더라고…. 모든 걸 체념하고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자신은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로엔덤에게 당한 걸까.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한두 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내 앞에 쓰러져 있는 여자도 볼프람에게 몸을 유린당한 후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듯했다.
바로 옆에서 쇠막대로 벽을 두드려댔는데도 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가 이따금 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그런 여자의 모습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엘레노아가 볼프람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형씨처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빠져나가려던 놈들도 있었지. 그놈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로엔덤의 후계자 놈한테 자기 연인이 붙잡혀 있더라고!”
남자가 감옥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다들 똑같아.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미친놈처럼 쇠막대로 벽을 두드리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지. 어떻게든 여기서 나가겠다고 말이야.”
웃음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남자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쇠막대, 내가 넣어둔 거야. 벽에 남은 흔적도 마찬가지고.”
“…….”
“희망을 품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꽤 재미있거든.”
곧이어 남자의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이 개자식!”
당장이라도 벽 너머로 넘어가 남자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방법이 있었다면 저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를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엘레노아를 찾으러 갔을 것이다.
“후우….”
나는 몇 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치솟은 감정을 억눌렀다.
여기서 화내고 발광해봐야 나만 지칠 뿐이었다.
“이봐. 이봐…!”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맞닿은 벽에 바짝 붙은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감옥이 떠나가도록 떠들어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길을 알아.”
“…….”
“알려줄까?”
거짓말일 것이다.
또 나를 우롱하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그렇지?”
남자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짜야. 내가 어떻게 그쪽에 쇠막대를 넣어 두고 벽에 흔적까지 만들었겠어? 거기다가 내가 괜히 이렇게 조용히 말하겠어?”
잠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간수들은 애초에 이곳에 별 관심도 없긴 하지만,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들키면 나는 바로 죽는다고.”
“그렇다면 왜 아직도 여기에 갇혀 있지? 길을 안다면 진작 도망쳤을 텐데.”
“크흐흐…….”
남자가 목을 긁는 듯 낮게 웃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해야 할 일?”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제쳐두자고. 어때? 그 통로를 통해 밖을 구경하고 싶지 않나?”
정말 비밀 통로가 있는 걸까.
“정말로 있는 건가?”
“그래. 정말이라니까?”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었고, 남자의 말을 들어 본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증명해 봐.”
“그 전에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하지.”
남자의 목소리에 다시 웃음기가 섞였다.
“형씨도 사랑하는 여자가 로엔덤의 후계자에게 붙잡혀 있는 거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크크큭. 조심하는 게 좋아. 그놈 물건이 여간 두꺼운 게 아니야. 거의 손목만 하다니까? 그런 거에 박히면 보지가 벌려져서 다시 조이지 못할 걸? 어지간한 크기로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겠지. 아마 그놈의 물건에 박힌 년들은 평생 놈의 물건에 목매면서 애원할 거야.”
“……시답잖은 소리는 그만하고, 통로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질문에 대답했으니, 이제 내가 시키는 일 하나만 하면 정말 알려주지.”
그냥 이대로 무시해 버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비밀 통로를 알고 있다는 말부터 거짓말처럼 들렸다.
또다시 나를 가지고 놀려는 수작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엘레노아를 구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내 손으로 걷어찰 수는 없었다.
“……뭘 원하는 거지?”
“흐흐. 별거 아니야.”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낮게 웃었다.
“요즘은 간수들도 잘 오지 않아서 너무 조용하거든. 꽤 심심했단 말이지. 거기 반쯤 정신을 놓은 여자 있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갇혀서 즐길 수 있는 낙이라곤 그 여자 신음 소리밖에 없거든. 박든 뭐 쑤시든 상관 안 할 테니까 다시 좀 듣게 해줄래?”
“……당신.”
“하기 싫으면 관둬.”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지만 말이야. 싫으면 그대로 앉아 있기나 해.”
나는 눈앞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몸 곳곳에 남은 이빨 자국과 상처, 음부에서 흘러나온 흔적으로 보건대 얼마나 유린당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또다시 괴롭히라고…?
아무리 엘레노아를 구해야 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차마….
“뭐, 네 연인이 저 여자처럼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계속 가만히 있어도 좋아.”
남자의 목소리가 복잡한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다.
“조만간 여기 빈 감옥 중 하나에 버려질 테니까.”
그가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아, 이왕이면 내가 있는 방에 넣어줬으면 좋겠군. 오랜만에 지루함이라도 달랠 수 있게 말이야. 큭큭. 그놈이 보지를 아주 박살 냈을 테니까 내가 박아봐야 즐기지도 못할 테고…. 뒷구멍이나 입보지로 가지고 놀아야겠어.”
젠장! 젠장!
저 역겨운 소리를 하는 남자를 당장이라도 때려 눕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역겨운 건, 그의 말을 그대로 상상하며 머릿속에서 엘레노아를 유린당하게 만들어 버리는 나 자신이었다.
내 앞의 여자처럼 정신이 붕괴된 채, 얼굴도 나이도 신분도 모르는 벽 너머 남자의 자지를 빨고 있는 엘레노아를 떠올리니 역겨운 흥분감과 함께 분노가 치솟았다.
지금 내가 물불을 가릴 처지였던가?
일면식도 없고 고작해야 같은 제국 기사라는 공통점 하나뿐인 이 여자가 엘레노아보다 소중한가?
나는….
미안하지만 엘레노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터벅! 터벅!
여자를 향해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꿀꺽.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다짐했지만 바로 앞까지 다가가니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엘레노아를 위해서….”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이빨 자국이 가득한 다리를 지나쳐 그녀의 음부로 손을 뻗었다.
아마도 볼프람이 사정했을 정액이 그녀의 음부를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흘러나와 바닥에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질척…!
정액이 가득한 음부에 손가락을 넣자 께름칙한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빌어먹을….
“흐으응….”
여자는 자신의 음부에 손가락이 들어가자 방금 전까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것과 달리 옅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혹시라도 정신을 차린 건 아닐까 했지만….
“흐읏….”
여자의 초점 없는 눈은 허공 어딘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씨. 그 녀석의 자지에 며칠 동안을 박혀서 손가락 한 개 정도로는 아무런 느낌도 못 준다고. 팍팍해 팍팍!”
보이지도 않는데 저 벽 너머의 남자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두 예측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있는 곳을 볼 수 있는 모종의 방법이 있는 건가….
“후우….”
심호흡을 한번하며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일말의 죄책감을 잠시 저 멀리 밀어냈다.
그러고는 손가락 두 개를 더 집어넣어 갈고리처럼 굽힌 뒤 질벽을 긁었다.
“하윽!”
푸슈슛!
손을 움직이자마자 애액이 정액과 뒤섞여 뿜어져 나왔다.
“하윽! 기스…. 허읏!”
기스? 누구지?
“형씨. 감질나게 하지 말고 좀 더 팍팍!”
찔꺽! 찔꺽!
“하악! 하악! 기스! 더…! 더 해 줘…. 기스!”
“……젠장.”
푸슛! 푸슈슛!
여자는 누군지도 모를 이름을 불러 대며 애액을 뿜어냈다.
그렇게 한동안 여자의 음부를 쑤시며 신음을 듣다 보니 어느새 벽 너머의 남자가 조용해졌다.
“이제 이 정도면 됐지?”
“…….”
“이봐!”
아무런 대답도 없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응? 아…. 그래. 뭐 보이지가 않으니 딱히 재미는 없네.”
남자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신이 나 떠들어 대던 것과 달리 어딘가 김이 빠진 듯했다.
물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이제 알려줘.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남자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가 알려준 것은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의 위치였다.
어째서 그런 장치가 감옥에, 그것도 하필 이 방 안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남자가 말한 대로 벽면을 더듬어 유난히 안쪽으로 들어간 돌 하나를 찾아냈다.
양손으로 힘껏 밀어 넣자 돌이 서서히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르륵
곧 낮은 진동과 함께 벽 일부가 옆으로 밀려나며 사람 한 명이 겨우 기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무운을 빌지, 형씨.”
벽 너머에서 다시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아. 이걸 까먹을 뻔 했네. 참고로 제국 기사의 힘을 막는 약은 대략 사흘 정도면 효력이 사라져. 아마 형씨도 그 약을 먹었을테니까 사흘 전까지 탈출하지 못하면 얌전히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약효가 떨어질 때쯤 먹이러 올테니까.”
“…사흘?”
“그래. 길을 잃은 채 힘까지 돌아오기 시작하면, 놈들도 금방 눈치챌 테니까.”
믿기 어려운 정보였다.
마력을 막는 약….
그런게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부정하기엔 이미 내 몸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게르하르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준 저녁 식사에 들어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남자의 말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 두었다.
사흘, 사흘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다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들키기 전, 엘레노아와 함께 도망쳐서 사흘을 버티면 된다.
나는 몸을 낮춘 채 구멍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통로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폭도 몸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게다가 눅눅한 흙냄새와 곰팡내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코를 찔렀다.
사방을 꽉 막은 돌벽이 조금씩 몸을 짓누르는 듯했지만 거친 숨을 삼키며 어둠 속으로 계속 기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이동하고 있으니 통로가 위로 올라가는지 아래로 내려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은 채 얼마나 나아갔을까….
그저 앞만 보고 정신없이 기어가던 중,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급히 속도를 높였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빛은 벽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조심스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구멍에 눈을 대자 안쪽의 풍경이 들어왔다.
“……!”
엘레노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