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초상화 2
42화. 초상화 2
나는 한동안 광장 한쪽에 드리운 그늘 아래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까 루크레치아의 가슴을 보고 얼굴을 붉혔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진지한 자세로 초상화를 그리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도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오직 화가만을 바라본 채 가만히 모델이 되어주었다.
왠지 모르게 둘만의 세계에 빠진 모습에 괜히 가슴 한쪽이 시린 기분이었다.
“음…….”
그보다 날씨가 굉장히 더웠다.
어제와 달리 내리쬐는 햇빛이 상당히 따가웠다.
한동안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그 열기를 못이기고 그늘로 들어올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앉아서 가만히 있는 루크레치아가 걱정되었다.
평소에도 루크레치아는 땀을 쉽게 흘리는 체질이었는데 이런 날씨에선 더 많이 흘렸다.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추운 북부 출신이라 그런 걸까….
유독 더위에 약한 루크레치아에게 지금 날씨는 최악이었다.
원래라면 능력을 이용해서 얼음을 만들어 몸을 시원하게라도 했겠지만 초상화를 그린다고 가만히 앉아있느라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흰 셔츠가 잔뜩 젖어 있어서 멀리서 봐도 안에 입고 있는 흰색 레이스의 속옷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필이면 사람이 북적거리는 광장이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힐끗거리는게 느껴진다.
“으음…….”
한동안 열심히 목탄을 놀리던 화가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는 그림과 루크레치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루크레치아가 시선만 살짝 움직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라기보다는…… 이대로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화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날이 너무 덥습니다. 땀도 많이 흘리시고 자세도 처음보다 조금 흐트러지셨습니다. 물론 최대한 맞춰 그릴 수는 있지만 이 상태로 계속 진행하면 원하신 느낌을 살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루크레치아는 잠시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그녀도 셔츠가 생각보다 많이 젖어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
화가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화실로 옮기시겠습니까?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고, 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쪽이라면 훨씬 편하게 그릴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루크레치아가 나를 바라봤다.
대답은 내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화가를 바라보다가 다시 루크레치아를 보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루멘시아의 얼굴이 스쳤다.
다른 화가들은 이 더위에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
지금 이 제안이 루크레치아와 루멘시아가 준비한 무대로 오르는 길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목 안쪽이 말라붙었다.
화실로 옮기자는 말은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술렁였다.
“카엘?”
루크레치아가 나를 불렀다.
나는 뒤늦게 그녀를 바라봤다.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던 루크레치아가 지금은 더위 때문에 조금 지쳐 보였다.
“괜찮으신가요?”
루크레치아가 물었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좋아. 화실로 가자.”
말하고 나서야 내가 꽤나 흔쾌하게 대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루크레치아의 눈이 아주 찰나였으나 조금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엘…. 조금 놀랐어요. 바로 대답할 줄은….”
“밖이 너무 덥잖아. 너도 힘들어 보이고….”
“……알겠어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크레치아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화가에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화가는 안도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그는 서둘러 화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루크레치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끝으로 젖은 셔츠를 살짝 떼어냈다.
“하아…… 덥네요.”
“괜찮아?”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그녀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혀주려고 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게 잠시 중단된 덕분인지 루크레치아도 그제야 능력을 사용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얼음 조각이 맺혔다.
그리고 얼음 조각을 손수건에 감싸 목가에 가볍게 눌렀다.
차가운 감촉이 닿자 그녀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
“조금 괜찮네요.”
“진작 했으면 됐잖아.”
“자세가 흐트러지면 그림에 지장이 생기니까요.”
“그림보다 네 몸이 먼저지.”
내 말에 루크레치아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긴 하네요.”
젖은 셔츠 위로 남아 있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그 사이 화가는 화구 상자를 정리하고 이젤을 접었다.
“제 화실은 이쪽 골목을 지나면 바로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화가의 뒤를 따라 광장의 성당 옆길로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자 낡은 목재 문이 달린 건물이 나왔다.
화가의 화실은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큰 방 중앙에는 사람 하나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변을 빙 둘러 여러 개의 이젤이 세워져 있었다.
벽에는 완성되지 않은 초상화와 풍경화들이 기대어 있었고 한쪽 선반에는 화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용한 흔적이 있는 화구들이 이젤들 주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보면 혼자서 쓰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준비하는 동안 저기 물병이 있으니 목 좀 축이고 계세요.”
화가는 들고 온 화구 상자를 내려놓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이젤을 다시 세웠다.
그러는 사이 루크레치아는 물병에 담긴 물에 살짝 얼려 시원하게 한 뒤 목을 축였다.
잠시 후 화가가 중앙의 단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이쪽에 앉아주시면 됩니다.”
화가는 루크레치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처음보다 조금 더 편한 자세로 앉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얼굴 방향만 제가 말씀드리는 쪽으로 유지해주시면 됩니다.”
루크레치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상 위로 올라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네. 좋습니다.”
화가는 다시 이젤 뒤로 돌아갔다.
나는 방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화가는 다시 목탄을 들고 루크레치아의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목탄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 화실 안에 작게 퍼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의 손이 멈췄다.
그는 종이 위에 잡아둔 윤곽과 루크레치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상의 단추를 한두 개 정도만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루크레치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단추를요?”
“네. 너무 더워 보이십니다. 표정도 조금 굳으셨고요. 옷깃이 목을 조이고 있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답답해 보입니다.”
화가는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루크레치아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허락을 구하는 듯한 기색이 아주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거절해야 할까….
아니 단추 한두 개쯤 푸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위 때문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괜찮아.”
내가 작게 대답하자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거기서 멈출 줄 알았던 손이 세 번째 단추까지 내려갔다.
옷깃이 조금 더 벌어졌다.
땀에 젖어 있던 흰 셔츠가 느슨하게 열리며 그 사이로 그녀의 하얀 목선과 쇄골, 그리고 깊게 파인 가슴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
가슴 안쪽이 서늘하게 조여들었다.
동시에 아랫배 쪽이 묵직하게 뜨거워졌다.
“이 정도면 되나요?”
그녀는 단추에서 손을 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네. 충분합니다.”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탄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그는 오로지 초상화를 그리는 행위에만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따금 그의 시선이 루크레치아의 가슴께로 향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꿀꺽….
루멘시아가 만든 무대 위에 올랐다는 긴장감에 침이 바짝 말라갔는데 정작 화가는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제안 때문에 화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달아오른 것과 달리 그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목탄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다.
사각 사각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가는 마침내 손을 멈췄다.
“끝났습니다.”
화가는 완성된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흰 종이 위에는 목탄의 검은 선만으로 그려진 루크레치아가 있었다.
그 단순한 선 때문에 그녀의 분위기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잘 그렸네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목탄으로만 그린 그림인데도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초상화를 어떻게 보관해야할지 고민부터한 내 자신이 멍청해질만큼, 어떤 방법을 강구하든 보관하고 싶은 물건이었다.
“감사합니다. 모델이 워낙 훌륭하셨습니다.”
“그렇다는데 루크레치아?”
“……마음에 들어요.”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보였다.
루크레치아는 한동안 말도 없이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쭉 뻗었다.
손끝이 조심스럽게 종이 가장자리로 향했다가 닿기 직전에 멈췄다.
“……괜찮네요.”
루크레치아가 작게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만족감이 아주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
내가 묻자 루크레치아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짧은 대답에 화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루크레치아는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조금…… 낯설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확신했다.
루크레치아는 이 그림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묻자 화가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뇨. 돈은 괜찮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화가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이정도나 되는 작품을 그냥 공짜로 준다는 얘기인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정말 괜찮습니다. 모델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좋은 그림이 나온 것 같아서 오히려 뿌듯합니다. 대신 가능하다면 한 장 더 그릴 수 있을까요? 물론 이번엔 목탄이 아니라 물감으로 색을 넣고 싶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얼굴로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어느새 사라지고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루크레치아를 뜨겁게 바라보는 한 명의 남자였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지금 입고 계신 옷보다 조금 더 어울리는 의상으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화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의상은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 모델분들을 자주 그리다 보니, 화실에 참고용 의상과 소품을 몇 벌 갖춰두고 있거든요.”
그는 안쪽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과 말에 묘한 기대감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역시 그냥 끝날리가 없었다.
루멘시아가 마련한 무대는 내가 애써 눌러둔 욕망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 안쪽이 떨리는 것을 애써 눌러 삼키며 루크레치아를 바라봤다.
루크레치아도 어느새 나를 보고 있었다.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분명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볼게. 조금 더 자극적으로. 조금 더 솔직하게.
문득 어제 엘레노아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때 고귀했던 그녀들이 고작해야 나같은 놈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들의 노력에 부응해야하지 않을까…….
움찔…!
나는 하체에 피가 몰리는 걸 느끼며 화가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루크레치아도 괜찮지?”
“……카엘만 괜찮다면요.”
화가의 얼굴에 안도와 기대가 동시에 번졌다.
“감사합니다. 의상은 안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는 화실 안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그 문 너머가 탈의실입니다. 마음에 드시는 의상이 있으면 아무거나 입으셔도 됩니다. 혹시 맞지 않거나 불편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알겠어요.”
루크레치아는 짧게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한번쯤은 멈추고 나를 돌아보지 않을까 했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탈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탈의실 안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정말 아름다운 분을 연인으로 두셔서 부럽습니다.”
“…….”
그 소리를 같은 공간에서 듣고 있는 화가의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그런 아름다운 연인을 이제 이 남자 앞에 드러내야 했으니까….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화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목탄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한쪽에 치우고 새 캔버스와 물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화실의 문이 열렸다.
“엇…. 손님이 계셨네?”
문밖에서 몇 명의 화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와 차림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여기 있었군요. 에밀”
“광장에 안 보인다 했더니, 손님을 모셔왔습니까?”
그들은 화가, 그러니까 루크레치아의 초상화를 그려준 에밀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일찍 오셨군요. 이분은 손님이긴 한데 모델분은 아닙니다. 모델분은 잠시 탈의실로 옷을 갈아 입으러 가셨거든요.”
“모델이라…. 마침 그릴 사람이 없어서 물건이라도 하나 올려놓고 그려볼까 했는데 혹시 우리도 그릴 수 있습니까?”
그들의 말에 에밀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얼굴엔 어떤 당황스러운 기색이나 미안함같은 감정은 없었다.
마치 아까 전 그림을 그리던 때처럼 무덤덤하고 당연한 표정이었다.
이것도 루멘시아가 준비한 걸까….
이제와서 그게 정말 중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내 가슴 속 욕망이 속삭이는대로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자자 모델분 나오기 전에 빨리 준비들 하자고”
그들은 내 대답에 반색하며 곧 빈 이젤 앞에 한 명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해도 한명의 화가만 있던 화실은 어느새 여러 명의 작업장이 되어버렸다.
나는 루크레치아가 과연 저 탈의실에서 어떤 의상을 입고 올지 미칠듯이 기대됐다.
곧 저 문이 열리고 루크레치아가 나오면 그녀는 이제 단 한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시선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내 욕망에 따라 허락해버렸다.
딸깍.
그때 탈의실의 문이 열렸다.
화가들은 화구들을 만지던 손을 일제히 멈춘 채 루크레치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크레치아는…….
“하아….”
옅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화실 안으로 들어왔다.
치마로 덮여 있었던 그녀의 엉덩이는 이제는 완전히 드러나 있었고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듯, 양옆으로 살랑거리며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로 한 장의 천이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천은 너무나도 얇아서 그 너머의 윤곽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곤 그 천 뒤에 나체가 아니라 착 달라붙은 천이 가려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안쪽의 천도 얇아서 밖에 있는 천을 들추면 아마도 그녀의 음부가 그대로 보일 것 같았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누군가의 인도에 루크레치아는 중앙 단상으로 향했다.
그녀의 상체는 오직 단 한장의 흰색 천으로 된 아주 얇은 레오타드를 입고 있었다.
가슴을 완전히 가려주긴 했으나 너무나도 얇아서 그녀의 큰 유두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옷 위에 장식된 꽃무늬 문양들이 그녀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가려주긴 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얇은데 그녀의 땀에 젖기까지 한 옷은 사실상 그녀의 나신을 보여주는 것과 다를바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 걸린 얇은 장신구 띠가 가느다란 금속음을 냈다.
찰랑
작고 맑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화실 안의 공기를 더 간질이듯 흔들거리며 음심을 자극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도대체 저 탈의실 안에 어떤 옷들이 있길래 그녀가 이걸 택한걸까.
아니 저 탈의실에 과연 이 옷말고 다른 옷이 있긴 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동안 루크레치아는 아까 전 초상화를 그릴 때처럼 중앙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는 어느새 늘어난 사람들의 숫자에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몰라 했다.
한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녀의 눈동자가 곧 나를 향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늘빛의 눈동자가 나에게 무언가 갈구하듯 반짝였다.
그 시선을 마주한 채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그리곤…….
끄덕.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루크레치아의 흔들리던 기색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외쳤다.
동시에 루크레치아를 향한 지시가 내려졌다.
“모델분. 다리를 좀 벌려주시겠어요?”
“…….”
쫘악
루크레치아는 말없이 나를 한번 쳐다보곤 그대로 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그리고 화가들의 캔버스에 그녀의 모습이 담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