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화. 어느 아침
"후우…….”
나는 머리결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냈다.
온몸이 땀투성이를 넘어서 얇고 거친 이불이 다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어제 내가 미리 떠놓은 듯한 물이 보였다.
벌컥거리며 잔 바닥이 보일때까지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타들어가던 갈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방금 본 끔찍한 광경이 만들어낸 찌꺼기들이 가슴속에서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 광경은 내가 가진 불완전한 미래시가 평소에 보여주던 것과는 달랐다.
흐릿한 잔상도 아니었고, 몇 초 뒤의 단편적인 장면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끔찍하고 선명한 예언에 대해서 나는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촉수들은 뭐지?
그리고 왜 하필 아카데미였을까.
머릿속에서 그 풍경을 무의식적으로 다시 떠오른다.
검은 촉수들이 그녀의 몸 위를 단단히 묶으며 엉킬 때마다 그녀들의 몸이 덜덜 떨리며 절망하던 그 순간,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멍하니 바라만 보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냉수를 마시며 내려갔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쐐애액!
바깥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흐려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창가로 가 문을 열자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자 기분을 환기 시켜주었다.
그리고 아침을 깨우는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여인이 보였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짧은 금발, 얼음보다 더 투명한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 아래 여인으로서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몸매와 더불어 검술과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육체.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육신만큼이나 고귀한, 아니 고귀했던 신분.
루크레치아 폰 로엔하임.
그녀는 평소와 같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복장을 입고 여관 뒤뜰에서 검을 휘두르며 아침 운동 중이었다.
평범한 여자들보다 조금 큰 체구를 가진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들고 있는 큰 검은 그녀가 전신을 써서 휘둘러야 할 크기였다.
그 덕에 그녀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큰 가슴을 담은 상의가 아슬아슬하게 늘어나며 쏟아지지 않도록 버티고 있었다.
로엔하임.
제국의 북부를 감싸는 거대한 설산 산맥의 정복자이자, 북부 귀족들의 맹주, 로엔하임. 그게 바로 그녀의 가문이었다.
하지만 제국 내전 당시 그녀의 가문은 안타깝게도 반 황제파의 기치를 들었고 패배 후 철저하게 몰락했다.
모든 걸 빼앗긴 채 남은건 가문의 이름뿐이었다.
그 원한으로 황제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 법도 했지만, 로엔하임의 후계자인 그녀는 오히려 황제의 칼인 제국 기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그녀는 기사 아카데미에서 수석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여 가문의 부흥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밖에 수많은 수식어들이 있었지만, 그보다 내게 와닿는 건 나의 연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물끄러미 루크레치아의 훈련을 지켜봤다.
저 극강의 아름다움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그녀가, 한때 아카데미에서 벽안의 북풍이라 칭송받고 뭇 남성들의 욕망과 선망을 받던 그녀가 내 연인이었다.
물론 그 연인이 되기까지 아카데미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누군가 술을 산다면 해가 질 때부터 다시 뜰 때까지 쉼없이 이야기를 늘여놓을 그런 장대한 대서사시였다.
어찌됐건 그녀의 연인이 되었다는 건 정말 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모두의 선망을 받던 그녀가 나의 연인.
묘한 우월감이 차올랐다.
“후우….”
루크레치아는 잠깐 검을 나무 울타리에 기대어놓고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남들보다 땀이 많은 체질인 그녀는 이렇게 훈련을 한번하면 땀을 비오듯이 쏟아내곤 했다.
그녀의 흰 상의가 땀으로 푹 젖어 피부에 착 달라붙어 그 관능적인 곡선을 여실히 들어냈다.
한참을 숨을 가다듬던 그녀는 곧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의 입가에 다른 남성들에겐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 화사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후배님. 일어났군요.”
그녀는 특이하게도 학창 시절이나 연인이 된 지금까지도 후배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존댓말로 나와 대화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그저 얼굴을 붉히며 답을 안 해주는 바람에 내게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 앞에 서면 그런 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응…. 루크레치아.”
나도 처음엔 그런 그녀에게 존댓말과 선배님이란 호칭을 사용했었다.
다만, 어딘가 맘에 안들어하는 루크레치아의 태도와 내가 연인으로서 그녀와 동등해지고 싶은 마음에 지금은 나 혼자만 말을 놓았다.
“후배님? 밤잠을 설친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루크레치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내 안색이 좋지 않은지, 안부를 물어봤다.
“아…. 그냥 악몽을 좀 꿨어. 그리 심각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카엘, 오늘 일정은 엘레노아에게 들었습니까?”
“응. 오후에 마을을 습격한 마물들을 추적한다고.”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울타리에 걸쳐둔 수건을 들어 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수건이 가슴을 문지를 때마다 그 큰 가슴이 빈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삐져나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 작은 소리는 육체적으로 단련된 그녀에게도 들렸다.
그녀는 은은하게 얼굴을 붉히며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변태군요. 후배님은….”
“하하…. 아니, 그게…….”
내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듯, 루크레치아는 씩 웃으며 짐을 챙겨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루크레치아가 아침 운동의 마무리를 하는 동안 나도 슬슬 방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땀에 젖은 속옷들을 빨래통에 넣어두고 기사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기사 아카데미는 특이하게도 3개의 학년을 순차적으로 받은 다음 일정 기간 수료한 뒤 동시에 졸업시키는 기수제로 운영했다.
그렇기에 1학년, 2학년, 3학년이 동시에 졸업하여 같은 기수 내에서는 그 관계를 유지했다.
정복을 입고 희뿌연 거울 앞에 서자 1학년을 상징하는 말끔한 푸른 정복이 눈이 들어왔다.
학년별로 색상이 달랐는데, 2학년은 검은 정복, 3학년은 하얀 정복을 입었다.
다만 옷 위로 별다른 장식이 없는 나와 달리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의 가슴에는 자그마한 금 흉장이 달려있다.
엘레노아는 나의 또다른 연인이었다.
어쩌면 누군가 나를 오랫동안 저주할지도 모를만큼, 그녀 또한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였다.
엘레노아 폰 발테른
그녀의 가문은 현 제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로엔덤 후작령의 원주인이었다.
정확히는 제국의 정복전쟁에 맞선 왕국들의 연합군에 속해있던 발테른 공국의 공왕가였다.
그들은 뛰어난 공왕가의 지휘 아래 제국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봉신인 로엔덤 가문의 배신으로 전쟁에서 패배하고 공국이 제국이 흡수당해버렸다.
그 공으로 로엔덤 가문은 황제한테 후작의 작위를 받고 자신이 배신한 전 주군의 영지를 자신의 영지로 받았다.
어쩌면 공왕가를 무너트리고 공국을 빼앗아간 제국에게 원망을 품을만 했지만, 그녀는 그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고 자조하며 오히려 제국의 기사로서 황제에게 충성해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에 대한 감상만 그러할 뿐, 발테른을 배신한 로엔덤 가문에 대해서는 끔찍하리만큼 혐오했었다.
우연찮게 아카데미 시절 둘이 마주쳤던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의 표정은…….
어찌됐건 두 연인들의 과거가 어두웠을지라도 그들이 서 있던 위치와 명예는 한낱 평민인 내가 범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입학 당시 하위권의 성적이라 다른 학생들에게 자주 무시당했다.
간신히 부단한 노력 끝에 상위권까지 끌어올렸으나 졸업 때까지 수석을 단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고 그런 점은 여전히 내게 아쉬움과 자존심의 상처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성적 때문에 내 정복은 그 어떠한 기념 장식도 없이 말끔했다.
그 깔끔함을 거울을 통해 씁쓸하게 바라본 나는 곧 장비를 챙기고 복도로 나와 왼쪽 방으로 다가갔다.
오른쪽 방은 지금쯤 씻고 옷을 갈아입을 루크레치아의 방이었고 왼쪽 방은 아침 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엘레노아의 방이었다.
그녀는 아침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많았기에 늦잠을 자곤 하는 바람에 내가 자주 깨워줘야만 했다.
지금도 그녀가 자고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별다른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어머!”
어딘가 부끄러움이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옷을 입고 있는 엘레노아였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 3초간 멍하니 그녀의 몸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는 방금 전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평범한 속옷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큰 가슴을 감싸기 위해 앞에서 훅을 거는 브레지어는 붉은 색 레이스로 이뤄져 있어 야하기 그지 없었고 옷을 입는다고 숙이느라 답답해서 그런지 훅을 풀어두고 있어서 벌어진 브라 사이로 분홍빛 유륜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거기다가 마치 이곳을 보라는듯이 시선을 잡아 끄는 몸 곳곳에 있는 검은 점들….
입술, 가슴, 유륜, 배꼽, 허벅지….
어떻게 저렇게 남자의 시선을 끄는 곳에만 점이 박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몸이었지만 그 육감적인 몸은 언제 봐도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참! 카엘군. 갑자기 들어오면 어떻게 해?”
“아니…. 자고 있는 줄 알았어.”
“이 변태. 그토록 보고 싶었던 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푹신한 감촉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옷을 입다 만 엘레노아가 다가와 내 등을 껴안고 있었다.
입으로 귀에 바람을 불어넣은 엘레노아는 부끄러움을 잔뜩 타는 나를 바라보며 간드러지게, 마치 고귀한 귀부인처럼 웃었다.
“호호호. 카일군. 너무 부끄러움 타는 거 아니야? 도대체 밤의 야성적인 짐승은 어디로 간 거야?”
“너무 놀리지 마, 엘레노아.”
“하지만 이런 반응은 놀리고 싶어지는걸?”
엘레노아는 내 등 뒤에서 몇 번 더 장난을 친 뒤 방 안으로 들어가 갈아입던 옷을 마저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그녀의 허리춤엔 자그마한 완드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녀의 무기였다.
기사들은 크게 두 개의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육체파와 마법파였다.
둘 다 마력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사용했지만 그 발현의 형태는 달랐다.
육체파는 육체를 강화하고 육탄전에 특화된 타입이었고 마법파는 마력 자체를 이용해 전투를 펼치는 타입이었다.
엘레노아는 후자, 나는 전자였고 루크레치아는 두 타입 모두를 다룰 줄 아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자. 카일군.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
둘은 사이좋게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이미 정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아 있는 루크레치아가 보였다.
“오늘은 웬일로 안 늦었네.”
“미인은 잠꾸러기랍니다. 루크레치아.”
“많이 먹으면 오래 잔다는 것쯤은 알 텐데.”
“호호호.”
묘하게 서로 노려보는 것 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괜히 등에서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아침부터 훈련하는 루크레치아와 늦잠 자는 엘레노아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기엔 양심이 찔렸다.
“엘레노아. 그래도 늦잠 자는 그 빈도수가 좀 줄었으면 좋겠는걸. 너무 늦으면 미리 주문한 음식이 금방 식어서 맛이 없잖아.”
“카엘군이 그렇게 말한다면 조금 더 노력해볼게!”
“하아…….”
우리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미리 루크레치아가 주문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제국 기사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너무나도 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많은 기사들이 제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항상 재정난에 허덕이는 제국의 경제상 그들에게 주어진 지원금은 극히 적었다.
그 탓에 전직 대귀족인 두 사람의 자금으로 이 파티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도 허덕여서 아낄 수 있는 건 아껴야 했기에 우리가 먹는 음식은 평민들이 먹는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엘레노아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흑빵을 미적지근한 스프에 적시며 양손으로 잡고 이를 악물고 뜯어냈다.
“흐에! 너무 딱딱해.”
다만 그녀와 달리 나와 루크레치아는 육체파의 힘을 가졌기에 크게 식사하는 데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 모습에 엘레노아는 괜스레 뿔이 났는지 입을 열며 먹고 싶은 음식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스테이크! 고기 스프! 신선한 야채! 제철 과일! 먹고 싶어......”
“엘레노아. 이 시골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먹고 싶은걸.... 카엘군.”
파티의 지력을 담당하며 파티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어찌 보면 우리 중 가장 어른스러운 그녀였지만 이따금 그녀는 이렇게 우리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그녀의 어리광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어영부영 식사를 끝마친 우리는 곧 각자의 무구를 정비한 뒤 여관을 나섰다.
오늘 주어진 의뢰는 개척촌에서 발생한 마을 여성들의 실종 사건이었다.
마물의 납치로 의심되는데, 정확한 건 가봐야할 것 같았다.
“카엘군~! 얼른 와!”
잠깐 생각에 잠겨 있자 앞장서 걷고 있던 엘레노아가 손을 흔들며 나를 재촉한다.
멀리 내리쬐는 햇살 사이로 앞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오늘 꾼 악몽 같은 예언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그 참담하고 끔찍한 미래는 언젠가 나에게 다가와 괴롭힐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은 없었다.
그야…….
내 연인들은 최강의 기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으니까.
나는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들을 향해 다가가며 임무의 목적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