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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 악몽


 묘한 갈증에 잠에서 깼다.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더듬어 물을 찾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분명히 어제 자기 직전 떠둔 게 있었을 텐데, 의아했다. 차츰 돌아오는 눈의 초점에 들어온 풍경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는 낯설어진 곳이었다. 그야 그럴게, 이곳을 떠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었으니까. ​ 기사 아카데미 ​ 제국의 적을 무찌르는 검이자 또한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 황제의 이름 아래 신분의 벽을 넘어, 오롯이 본신의 능력으로만 그 위명을 쟁취하는 곳. 또한 내가 꺾이고, 부러지고, 쓰러져도 끝끝내 나만의 길을 걸어 그 영광을 함께 쟁취한 곳. 그리고 내가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를 처음으로 만난 곳. ​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너무나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때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그녀들이 아카데미에서 보여준 능력들은 얼기설기 기워놓은 내 자존감에 균열이 갈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들을 사랑했다. 자존심이 깎이고 부러지고 무너져도, 그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들을 나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끝끝내 그녀들의 사랑을 쟁취해내고 우리 셋은 제국 전역을 떠돌며 제국 기사로서의 편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의 출발점이 바로 눈앞에 있는 아카데미였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꿈일까? ​ 그런데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나는 뺨을 몇번 꼬집어봤다. ​ 묘한 통증이 올라온다. 단순한 꿈같은 것은 아니었다. ​ 그렇다면 내 미래시? 하지만 미래시는 고작해야 눈앞의 짧은 미래를 잔상처럼 보여줄 뿐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진 않는다. ​ 물론 내가 정말로 아카데미에 와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하룻밤 사이에 그 먼 거리를 이동해서 아카데미에 도착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 여러 가정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봤지만 딱히 와닿는 건 없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제외했던 미래시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강하게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주려는 듯. ​ “…….” ​ 일단은 아무래도 상황 파악부터가 먼저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 오랜만에 찾은 교정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던 햇빛은 검게 물들어 아카데미 전체를 검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멸망한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풍경이었다. ​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정원을 거닐었다. 한때 아카데미를 무성히 뒤덮던 녹음의 풀들은 이미 연갈색으로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봄이 되면 꽃잎들을 흩날리던 나무들도 기괴한 형태로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어떤 생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개미조차…. ​ 츠왑❤️! ​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것이 바닥을 스치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았다. ​ 저 멀리 보이는 강당이 유력했다. 입학식과 졸업식, 그리고 특별한 수업 때를 제외하면 거의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나는 불현듯 불길함을 느꼈지만 발걸음은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 츠왑❤️ 츠왑❤️ ​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는 선명해졌다. 끈적한 무언가가 어딘가에 닿고, 스치고, 감겨드는 소리. 그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싶지 않았지만, 내 직감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 끈적한 무언가가 부드러운 살결을 휘어 감싸며 스치고 조이는 소리. ​ “하아...❤️” ​ 이 알 수 없는 꿈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정말로 이게 내게 닥칠 미래인걸까? 나는 강당의 문을 잡고 잠시간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 봐야만 했다. 내 능력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을…. ​ 나는 긴장으로 굳은 손을 움직여 강당의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와 증기가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강렬함에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그리고 질척이는 소리와 낮은 울림, 그 사이에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옅은 신음소리들이 내 고막에 맴돌았다. ​ 쯔왑❤️! 쯔왑❤️! “흐으으❤️….” ​ 열기가 잦아들자, 나는 조심스레 팔을 내렸다. 그리고 눈 앞의 예언을 맞이했다. ​ 강당은 검은 촉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살아 있는 둥지처럼 꿈틀거렸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 뒤덮은 이 검은 덩어리들은 숨을 쉬듯 팽창하고 수축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끈적한 액들을 바닥에 철퍽철퍽 떨어트리며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자아냈다. ​ 그리고 그 중심에 하나의 괴물이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그 괴물을 맞이하려고 했지만 그 흐릿한 상은 나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얼 나에게 보여주려고 하는거지? ​ 그 순간……. ​ “하으으❤️….” ​ 중앙에 뭉쳐 있던 검은 촉수들이 갑자기 쫘악 갈라지며 그 안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공간엔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있었다. ​ 검은 촉수들은 그녀들의 몸을 꽁꽁 묶은 채, 일체의 거짓도 없이 말 그대로 ‘범’ 하고 있었다. ​ “아…….” ​ 나는 마치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눈앞에서 내 사랑스러운 연인들이 능욕당하고 있었다. 검은 촉수들이 그녀들의 백옥같은 피부를 감싸며 사지를 움직인다. 허공에서 내려온 끝이 뭉축한 촉수들이 그 끝을 커다랗게 벌려 그녀들의 가슴을 집어 삼키고 탄력 있는 촉수들이 그녀들의 커다란 가슴을 휘감아 쥐며 촉수 사이로 가슴 살들이 삐져 나온다. 몇몇 촉수들은 그녀의 몸에 백탁액을 뿜어내며 잔뜩 영역표시를 흩뿌리고 있었다. ​ 차마 바라볼 수도 없었고 보이지도 않는 그녀들의 소중한 비처는 멀리서도 그 크기를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촉수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 항상 침착하며 냉철하게 파티를 제일 앞에서 이끌던 루크레치아는 무기력하게 눈물을 흘리며 촉수가 들이닥칠때마다 들리지 않는 애원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명석한 두뇌와 상황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파티의 두뇌 역할을 담당하던 엘레노아는 완전히 죽은 눈으로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촉수들의 공격에 당하고 있었다. ​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달려가야 한다고, 검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괴물을 찢어발기고, 그녀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몸은 꿈속에 못 박힌 듯 굳어 있었다. ​ “아아…….” ​ 그녀들의 하복부 근처에는 처음 보는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검붉고도 불길한 빛. 그 빛은 마치 그녀들의 생명과 의지를 갉아먹는 것처럼 보였다. ​ 내가 한동안 그 끔찍한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그녀들도 나를 발견했는지 힘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루크레치아의 눈물 어린 눈동자도, 엘레노아의 흐린 시선도 나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러나 그녀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들의 입 모양을 읽으려고 했다. ​ 제발…. 내게 말해줘. 어떻게 해야 이 풍경을 막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너희들을 구할 수 있는지……. ​ ‘이건 모두…. 카엘…….’ ​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눈을 떴다. ​ 조금 좁지만 아늑한 방, 창문에서 내리죄는 햇살, 막 갈아넣은 짚단 덕분에 푹신한 침대. 밖에선 옅은 기합과 함께 파공성이 들려왔다. ​ 나는 온몸에 땀이 젖은 채 여관 방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숨을 헐떡이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아직도 내 눈앞에 그 거대한 괴물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내 눈은 유린당하는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한낱 악몽으로 치부할 꿈이 아니었다. ​ 이건 예언서였다. ​ 나와 루크레치아, 그리고 엘레노아 우리 모두의 파멸이 담긴 예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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