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세번째 아내 (2)
나는 트렁크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해지려면, 내 자리부터 만들어야겠지.
캐리어를 열고 셔츠를 옷장 옷걸이에 하나씩 걸기 시작했다.
거의 정리가 끝나갈 무렵
똑똑.
안방문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네?”
나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대답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거실엔 아무도 없고,
식탁 위에 라면 한 그릇.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
손바닥만한 메모지 한 장.
'냉장고가 비어서요. 라면밖에 없어요… 죄송해요.'
글씨는 둥글둥글했고, 마지막 줄엔 연필자국이 살짝 번져 있었다.
사과하려다 지운 흔적도 있었다.
나는 메모를 들고 소리없이 웃었다.
하~ 미치겠네.
그녀는 또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라면을 한 젓가락 들어올리는 찰나—
쿵.
화장실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렸다.
닫힌 화장실 문.
이젠 저기 숨은거야?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화장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안쪽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괜찮아요?”
가볍게 두드려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손잡이를 살짝 돌려봤다.
잠겨 있진 않았다.
나는 문을 천천히 밀었다.
조명이 켜진 좁은 공간.
세면대 아래, 차가운 타일 바닥.
그 위에—
정시아가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무릎을 감싸고, 얼굴을 파묻은 채.
그 작은 등이
가볍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괜찮아요?”
다시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움찔거리며
몸을 더 작게 웅크렸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미끄러졌어요.”
조용한 한마디였다.
“다치진 않았어요?”
“…괜찮아요. 그냥, 놀라서…”
나는 시선을 내리고, 그녀의 발목 근처를 살폈다.
다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창피해서인지, 아파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얼굴은 한없이 빨갰고,
두 눈동자는 물에 잠긴 홍당무 같았다.
“…죄송해요.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하하하, 알아요. 그런 말 안 해도 돼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나를 올려다봤다.
“처음이잖아요. 어색한 거, 당연한 거죠.”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손 좀 주세요.”
나는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끝을 얹었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정시아는 화장실 문턱 앞에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고맙습니다.”
그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내 진심은 그냥,
그녀가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거실로 돌아왔을 때, 라면은 아직 따뜻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내 맞은편에 앉았다.
“…같이 먹어요”
내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근데… 그거 하나뿐이에요. 라면이”
“괜찮아요. 나 배 안 고파요. 같이먹어요.”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 라면그릇으로 향했다.
하하, 라면은 못 참지.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수저를 꺼내 건넸다.
“진짜 같이 먹어요. 나도 혼자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정시아는 살짝 머뭇거리다 수저를 받았다.
그리고 라면을 한가닥,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떠서 숟가락 위에 올렸다.
허리를 살짝 굽히고, 입에 가져가는 모습은 꼭
유치원생처럼 소심하면서도 신중했다.
“후우… 후우…”
그녀는 작게 불며, 면발을 후루룩 삼켰다.
그리고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맛있어요.”
“우리… 동갑인데, 편하게 말 놓을래요?”
그녀는 다시 움찔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쪽만 놓으세요. 저는 아직 못 해요.”
“그럼, 니 손핸데?”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하하. 손해라고. 계속 존댓말하면 너만 손해라고.”
그녀는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나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적이며 말했다.
“난 기회 줬다. 니가 안 한 거야.”
“……네.”
귀여워 미치겠다. 정말....
그러면서 문득, 얘를 데리고 애를 낳을 생각을 하니,
웃음만 났다.
말이 되냐고...
밤이 되었다.
거실 조명은 자동으로 꺼지고, 안방 스탠드도 관계유도 조도가 켜졌다.
나는 이불을 정리하며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이제 같이 자야지?”
시아는 침대 옆에서 움찔 멈춰 섰다.
“말도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양손을 흔들며 뒷걸음질까지 쳤다.
표정은 진심이었다. 아니, 공포에 가깝달까.
“왜. 우리나라 법이 그래. 무조건 합방이야. 안 배웠어?”
“그런 거… 몰라요. 그런 법 없어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짜야.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까?”
시아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누구한테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정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나는 스피커폰으로 설정해놨다.
“야, 정한석. 지금 스피커폰이야.
내 아내가 우리나라에서 합방 안 하면 불법인 걸 모른다네.
부끄러워서 안 자겠대.
네가 사실대로 좀 말해줘.”
잠시 정적. 그리고 한석의 목소리.
“그거 감빵 가요. 결혼했으면 당일에 바로 같이 자야죠.”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석은 계속 말했다.
“야, 너 뭐해. 당연히 보지 벌리고 쑤셔야지. 출산정책 모르냐?
너 아내랑 같이 구속될래?”
시아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입술을 꼭 다물었다.
“봐봐.”
나는 한석과의 통화를 끊고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
“이래도 같이 안 자?”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가장자리에 살짝 앉았다.
“알았어요… ㅠㅠ…”
말끝이 떨리고, 귀까지 빨개졌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나 먼저 씻을까? 너 먼저 씻을래?"
"…그쪽 먼저요."
ㅡㅡㅡㅡ
샤워를 마치고
나는 자지를 덜렁이며, 그대로 알몸으로 욕실을 나왔다.
“꺅! 미쳤어요?”
"나 원래 알몸으로 자."
시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내더니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침대 쪽으로 갔다.
그녀의 등쪽에 일부러 몸을 붙이며 말했다.
“넌 안 씻어?”
“…그쪽 잠들면 씻을 거예요.”
“나 원래 옆사람이 자야 자는데?”
“…….”
그녀는 아무 말 없었다.
이불 속에 파묻힌 체, 귀만 벌겋게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팔을 베개 삼아 옆으로 돌아누웠다.
시간이 흐르고, 새벽 1시가 넘었다.
“정말 안 씻을 거야?”
“…….”
“너 좀… 더러운 거 아니야?”
“…왜 아직도 안 자요…”
“말했잖아. 옆사람이 자야 자.”
그 말에, 이불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씻고 올게요.”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이불을 정리했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시아가 나왔다.
목까지 꽉 잠긴 파자마, 바지 밑단도 발목까지.
머리는 물기에 살짝 젖어 있었고,
손엔 작은 수건을 쥐고 있었다.
“자, 이리 누워.”
내가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두드리자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조심 다가왔다.
"건드리면 죽일꺼에요"
침대 끝, 최대한 바깥쪽에
긴장한 몸으로 누웠다.
등을 돌린 채.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그녀의 등을 바라봤다.
“건드리면 죽여?”
그 말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진짜예요.”
나는 낄낄 웃었다.
“알았어. 안 건드릴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근데 같이 자는 거니까, 같은 이불은 덮자?”
그녀는 대답 없이
이불을 살짝 당겨 자기 몸을 가렸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가 귓가로 흘렀다.
“…네.”
나는 눈을 감았다.
이불 너머의 체온이 은근히 퍼져왔다.
그리고 묘하게,
자지가 다시 살짝 꿈틀거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잠든 척 그녀 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리고 천천히—
시아의 다리 위에 내 다리를 걸쳤다.
알몸인 내 몸이 그녀의 얇은 파자마를 타고 겹쳐지자
그녀가 작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허벅지에 닿은 자지가
빠르게 단단해졌다.
시아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약간 움찔거렸다.
그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
잠든 척, 숨만 천천히 내쉬었다.
그녀의 손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작은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내 다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움찔.
그녀는 짧은 숨을 삼키듯,
작게 입을 틀어막았다.
“흑…”
소리도 아닌, 울음도 아닌
멈춰진 숨소리 하나.
그녀는 내 팔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몸을 굳힌 채,
한밤을 새웠다.
아침이었다.
거실에서 조용한 소리가 났다.
눈을 비비고 나가보니,
시아가 조심스럽게 상을 차리고 있었다.
쏘세지, 오뎅, 떡볶이.
딱 봐도… 초등학생 입맛.
시아를 닮았다.
귀엽고, 순하고,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그런 밥상.
괜히 웃음이 났다.
“못 잤어?”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눈이 빨개져 있었다.
한밤을 그대로 버틴 흔적.
말은 그렇게 해도, 다 보였다.
우리는 말없이 마주앉아 떡볶이를 먹었다.
그녀는 떡 한 가닥을 입에 물고
졸린 눈으로 멍하니 국물을 바라보다가—
잠깐 꾸벅 졸더니
뺨에 국물을 묻혔다.
그러고도 그대로 다시 졸고 있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조용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말 없이,
그녀의 뺨에 묻은 국물을
혀로 핥았다.
짧은 숨이 튀어나왔다.
“어? 어? 방금 뭐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까지 벌어진 그녀.
귀까지 순식간에 붉어졌다.
나는 웃었다.
“국물 묻었길래.”
그녀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
얼굴은 이미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앞으로 너 홍당무라고 부를 거야.”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움이 턱까지 차올라
입을 가리고, 조용히 떡볶이 국물을 떠먹었다.
이런 거, 아주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