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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두번째 아내 (1)


새로 배정받은 집에 들어갔다. 뭐, 똑같다. 정수정이 떠난 뒤, 모든 소리가 멈춘 것 같다. 새 아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TV 화면에 뉴스가 흘렀다. "한때 0.17명까지 떨어졌던 합계출산율은 출산헌법 개정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번 발표된 합계출산율은 0.87명을 기록… 출산율 증가세가 32개월째 유지되고 있습니다. 출산관리국은 합계 출산율이 3.0명을 기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출산 장려정책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선천성 불임인구의 증가, 생식능력의 감소는 심각한 문제로 보건, 환경당국의 특단의 대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출산정보 시스템에 로그인했다. 이주영 / 32세 / D등급 자연스럽게 사진에 눈이 갔다. 긴 머리, 옅은 화장, 말이 없는 눈. 예쁘긴 했다. 딱, 정해진 틀 안에서. 수정이 누나처럼 감정을 찢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살 것 같은 얼굴. 상대남편들의 평가점수 4.9/10 D등급의 마지막 라인이다. 남편들의 평가 코멘트 “미작성” “미작성” “노코멘트” “동전의 양면” “미작성” "조심하세요" 뭐지? 이 여자? 띠리리~ 현관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엔 ‘조심하세요’가 자꾸 맴돌고 있었다. 소리가 났던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낯선 여자가 들어섰다. “어— 안녕?” 긴 머리, 연한 니트, 쿨톤 립. 아담한 체형. 딱, 안정형 미인.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실내화로 갈아신으며, 미소 지었다. “이주영이야. 앞으로 한 달, 잘 부탁해.” 그 말투. 편했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너무 낯설지도 않은. “네… 진태유입니다.” “…어색하겠다, 지금. 나도 그래.” 그러곤 그녀는 씩 웃으며 캐리어를 끌고 거실 쪽으로 들어왔다. 마치 원래 있던 집처럼 익숙하게 움직였다. “짐은 좀 있다가 풀 거야. 근데,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네? 갈수록 국가시스템이 성의가 없어.”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도 없었다. “밥 먹었어? 삼겹살?” “네” “냄새 조금 났어. 맛있었겠다.” "..." “그럼 나 씻고 올게. 샴푸 냄새 진하더라도 이해해줘. 나 민트 좋아하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녀의 향이 거실에 남았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봤다. 왜 점수는 4.9인지. 왜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잘 웃는 여자였다. ㅡㅡㅡㅡ 샤워기 소리가 멈춘 후, 문이 열렸다. “후— 살아났다.” 이주영은 젖은 머리를 타월로 감싼 채,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집 안이 훅, 따뜻해졌다. 나는 의미 없이 TV를 켜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소파 옆에 앉았다. “같이 잘래?” “…네?” 그녀는 웃으며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내가 두 번째 아내지? 첫 아내가 아직 그리우면 말해. 시간 줄 수 있어.” 그 말에, 말이 막혔다. “그리워해도 돼. 니가 사람이라는 증거니까.” 이건, 어디까지가 배려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런데 편했다. 너무 편해서, 더 불안했다. “자, 잠자리 강요 아님. 오해 노노.”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ㅡㅡㅡㅡ “일어났네?” 따뜻한 국물 냄새에 눈이 떠졌다.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달그락 소리. 햇살보다 먼저, 북어국이 아침을 깨웠다. 이주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냄비 앞에 서 있었다. 머리는 반쯤 묶였고, 입가엔 익숙한 미소가 떠 있었다. “새벽에 나가서 식재료 좀 사왔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밤, 우린 같은 침대에서 잤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오늘이 전국민 부부들의 첫 아침이잖아. 매달 반복되는 날이긴 한데… 마트에 아침밥 차려주려는 아내들이 많더라고. 괜히 나만 손 놓고 있긴 그래서~ 히히.” 그녀는 밥상을 차리며 말했다. 북어국, 계란말이, 오징어젓, 묵은지볶음, 콩나물무침, 마늘 짱아찌. “잘 먹어야지~ 20살인데. 크큭. 삼겹살 먹었으면 술한잔 했을거 같아서 북어국도 끓여봤어. 좋아해?” "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북어국이 시원했다. 그녀는 내 밥위에 슬쩍 반찬 하나를 얹었다. 어색하지 않게, 딱 필요할 때, 딱 내 입맛대로 “콩나물 좋아하네?” “…관찰력 좋으시네요.” “아냐, 난 그냥… 밥 같이 먹는 거 좋아해서.” 순간, 마늘짱아찌 그릇을 집어드는 그녀 손이 눈에 띄었다. “…이건 안 먹나봐?” “예. 그건 좀…” “오케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익숙하게 내 앞에서 그 반찬을 치웠다. 정수정이 떠올랐다. 마늘짱아찌를 싫다던 나에게 “처먹어, 씨발아.” 라고 말하던 누나. 나는 작게 피식 웃었다. ㅡㅡㅡㅡㅡ “다녀올게요.” 구두를 신으며 말했다. 현관 앞, 이주영이 환하게 웃었다. “오늘 출근하는 날이야?” “네. 원래는 재택인데, 일주일에 한 번은 출근하래요.” “그럼… 같이 나갈까? 산책 겸 마트 들르고 오게.” “네. 날씨도 좋고.” 주영은 슬리퍼를 끌며 따라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조심스레 한마디 더 건넸다. “아… 오늘, 저녁 늦을 수도 있어요.” “응.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아니면… 늦더라도, 나랑 같이 먹을래?” “…고마워요.” 주영은 쿡,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하루!” ㅡㅡㅡㅡ 내 직장은 IT용역 개발사. 공식 명칭은 [시큐어 인텔리전스 개발소] 국가 시스템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외주업체 중 하나다. 나는 그중에서도 출산관리국 UI 개편팀 소속. 담당 업무는 출산정보시스템 프론트 개선. 화면 배치, 터치 반응 속도, 색상 가시성. 임산부와 일반 사용자 모두가 쓰기 쉽게 만드는 게 목적이다. 출산율이 곧 국가 존망과 직결되는 시대. 작은 버튼 하나 바꾸는 데도 6개 부처의 승인이 필요했다. 오전 9시, 사무실 도착. 출입게이트 앞에서 손바닥 스캔. 바이오 인증을 통과하면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 안, 직원들은 대부분 C~D등급. 말수도 적고, 표정도 없다. 우리 같은 등급은 그저 월급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자리에서 노트북을 켜려는데,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내부 알림] A등급 김도훈 팀장, 오늘 본사 방문 예정입니다. 모든 팀원 정장 착용 권장. '김도훈'. 우리 팀 팀장이자, A등급. 근로의무가 없음에도 종종 출근하는, 소위 말하는 "출근 자발자" 월 1회 볼까 말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오전 11시. 정말로 그가 왔다. 블랙 셔츠에 재킷.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지만, 그는 대충 손만 흔들었다. “어어, 앉아요 다들. 나 그냥 심심해서 온 거니까.” 그 말투는 생각보다 가볍고 느슨했다. 하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A등급은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삶이다.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풍기는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는 몇 명에게만 짧게 말을 걸다 내 자리로 왔다. “어— 진태유 씨? 출산정보 프론트 맡고 있죠?” “네. 사용성 개선이랑 접근성 쪽…” “보고 있어요. 지난번 반응속도 개선안, 깔끔하던데요?”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시간 돼요?” “…네?” “우리 집에서 밥 먹어요. 매번 재택근무에 보고서만 주고받다보니, 좀 갑갑해서.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나도 사람인데.” 그 말은 명령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복도로 사라졌다. 뒤에 남은 동료 한 명이 작게 중얼였다. “와… A등급 초대받았네. 대박.” 오후 5시. 근무를 마치고 1층 로비로 내려갔을 때, 검은 세단이 서 있었다. 도어에 붙은 작은 마크. [A등급 전용 차량]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줬다. “진태유 님 맞으시죠? 김도훈 팀장님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차 안은 정숙했고, 창문은 암전 유리로 밖이 보이지 않았다. 30분쯤 지났을까. 차가 멈췄다.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저택이었다. 잔디가 넓고, 구조는 2층. 자동문, 정원 관리 로봇, 외관부터 다른 세상. 현관문 앞에서 가사도우미가 나와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이 열리자, 향긋한 와인 냄새가 퍼졌다. 그리고— 응접실, 소파 옆에 전라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의 등장 따위는 관계 없다는 듯 한 알몸. 노랗게 염색된 딱 어깨에 찰랑거리는 웨이브 머리, 하얀 살결. 아무렇지 않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김도훈 팀장이 와인을 들고 내게 말했다. “인사해요. 이번 달 아내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와인을 들었다. 그 여자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도훈오빠 부인, 서아린이에요.” 탄력있는 큰 유방과 왁싱이 된 뽀얀 보지가 자연스럽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인사했다. 자세를 낮추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게 A등급의 삶이구나. 자지가 꼴려, 불편했다. “식사 준비됐습니다.” 가사도우미 안내에 따라 거실 뒤쪽 식당으로 향했다. 긴 테이블에 흰 식탁보, 코스 요리용 접시 세팅. 천장엔 은은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김도훈 팀장은 상석에 앉았고, 나는 그의 오른편 자리에 안내받았다. 왼편엔 아까 그 여자, 서아린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얀 살결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나는 어색하게 물컵을 들며 시선을 피해보았다.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여자가 내려왔다. 둥글게 불러온 배, 배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 역시 알몸이었다. 두 눈이 자연스레 배로 향했다. 배 위엔 선명한 임신선이 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지은 사람처럼. "비켜요." 임신한 아내가 두번째 아내, 서아린에게 나즈막하게 말하자, 앉아있던 서아린이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서열이 확실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배가 불편한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서아린이 앉아있던 내 맞은편 자리에 힘겹게 앉았다. 도훈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집 아내들은 옷을 안 입는 게 원칙이에요. 임신이든 아니든.” “…네?” “난 사람의 몸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 집 안에선요. 보기 좋지 않아요?” "아, 하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웃었다. 임신 7개월. 여자의 배는 불룩했고, 젖가슴은 무게를 못 이긴 듯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다. 배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한 손은 허리를 받치고 있었고, 불룩하게 나온 배 아래에, 검은 보지털과 붉은 보지틈이 비쳤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이를 품은 여자의 모습은 아름답다. 특히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수저를 들며 자연스럽게 웃었다. “입덧은 지났어요. 지금은 다 잘 먹어요.” 그녀가 고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식사가 시작됐다. 샐러드, 오리훈제, 바질 크림 수프, 그리고 구운 도미. 와인잔이 세 번쯤 비워질 무렵, 내 옆의 여자— 김도훈의 두 번째 아내가 조용히 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긴장했죠?” “…네? 아, 아닙니다.” 그녀는 천천히 웃으며 오른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는— 내 무릎 위로, 손이 올라왔다. 나는 순간, 숨이 걸렸다. 그녀는 시선을 내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도훈 오빠가 그랬어요. 게스트가 오면, 긴장 풀어주는 건 내 역할이라고.” 그녀의 손이 조금 더 올라왔다. 허벅지 안쪽, 바지 천 사이로 손가락이 스쳤다. 그 순간, 마주 보던 임신한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익숙해지면 좋아요. 여기선 그런 게, 당연한 순서예요. 맞죠? 여보?” 도훈 팀장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녀는 배 위로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예전에 이런 비슷한 날, 밥 먹으면서 오셨던 손님 자지를 잡아 드렸거든요. 그때가… 1월 12일. 배란일 바로 전날이었어요.” 도훈은 아무 말 없이 와인잔을 돌렸다. 그의 무표정은, 어쩌면 이 모든 흐름을 이미 수십 번 반복해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아직 포크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내 허벅지 위, 그 부드러운 손의 압력. 옆자리의 나른한 숨결. 그리고 앞자리의 배— 이 모든 것들이 식욕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이건 A등급의 식사법이었다. 도훈이 내게 잔을 들어 보였다. “자, 건배. 우리 모두의 등급 상승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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