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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화


03. 햇살이 유독 뜨겁게 내리쬐는 늦봄. 점심 이후의 교양 강의를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음 발표는 각자 편한 사람들끼리 조를 이뤄서 진행합니다.” 학생들의 졸음을 깨운 건 교수의 한마디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앓는 소리가 나왔으나 교수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쌩하니 강의실을 나갈 뿐이었다. 유월의 과 특성상 조별 과제가 없었다. 조별 과제가 빡빡하기로 유명한 필수 교양이 있긴 했으나 함께 수강한 해수의 도움으로 수월히 완료할 수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마지막 학년이 되었으니, 이젠 스스로 해 보겠다고 객기를 부렸더니 결국 이 모양이었다. 딱히 이렇다 할 친구가 없는 유월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저기, 선배.” 그때, 한 목소리가 유월을 붙잡았다. 유월은 잠시 멈칫하고서 상대를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강의실을 오며 가며 얼굴을 익힌 이였다. 강의 첫날 강제로 시켰던 자기소개에서 분명 3학년이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전 김지현이에요. 그, 다른 게 아니고 방금 조별 과제 이야기 들으셨죠? 아직 팀원을 못 정해서 그러는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하실래요? 민지 선배도 저희랑 같이하기로 했는데.” “민지?” 친하지는 않아도 말은 자주 섞었던 과 동기였다. 아는 이름을 곱씹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민지가 알은 척을 하며 다가왔다. “야, 김지현. 같이 말하자니까 먼저 가서 불쑥 말 걸면 어떡해.” “먼저 가 버리면 안 되잖아요. 전 말 걸 기회만 계속 엿봤다구요!” “하여간 정신없어.” 통통 발을 구르는 지현을 보며 한숨을 내쉰 민지가 다시 유월을 바라보았다. “그냥 같이하자, 유월아. 어차피 너도 조 구하기 귀찮잖아.” 그녀 말대로 여러 사람과 말을 섞으며 조를 짜는 것이 당장의 과제보다 더 피로할 터였다. 괜찮겠지. 아예 모르는 아이들도 아니니까……. 손목시계를 확인하던 유월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현이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잠깐만 카페에서 이야기해요.” 유월은 팀원들과 함께 교내 카페로 향했다. 계산을 마치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주제를 정하고, 각자 무엇을 맡을 것인지를 정했다. 지현은 넉살 좋게 벌써부터 유월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발표는 제가 할까요? 아, 아니다. 유월 언니가 하는 게 더 좋겠다.” “나?” “야, 김지현. 너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냐?” 유월이 눈만 깜빡이자, 민지가 지현을 말렸다. 그럼에도 지현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무슨 소리긴요. 당연히 유월 언니가 하면 자던 사람도 일어나서 집중할 테니까요. 왜, 이 교양 여학생이 많이 듣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이번 수강 정정 기간에 남학생 수가 늘어난 거 보면 딱 답 나오죠.” “……그래?” “아, 언니, 다 알면서 왜 그래요. 언니한테 말 좀 붙여 보려다 그냥 돌아간 남학생만 몇 명인데.” 지현의 표현은 거침없었으나, 저를 향한 호감은 분명했다. 그러나 해수를 제외한 타인의 관심은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어색하게 웃은 유월은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현의 말을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동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뭐…… 확실히 유월이가 발표하는 게 나을 것 같긴 하다. 자료 조사하려면 연락이 필수인데, 그게 어려우니까.” “아, 아니야. 나 핸드폰 샀어.” “네? 유월 언니, 설마 여태까지 핸드폰 없었어요?” 지현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응. 집이 엄해서.” 정확히는 살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해야 옳았다. 물론 대학에 입학한 뒤로 핸드폰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해수가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4학년이 되자 조금 번거로워졌다. 졸업 작품 준비로 해수는 야간작업이 잦아졌고, 매번 찾아가 핸드폰을 빌릴 수는 없었다. 유월은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으니 더 편할 것 같다고 전했고, 잠깐 생각하던 해수는 그게 좋을 것 같다며 핸드폰을 마련해 주었다. 이미 세팅이 다 된 상태였지만 유월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와……. 난 절대 안 돼요. 핸드폰 없이 어떻게 살지?” “지현아, 넌 중독자 수준이야……. 누가 365일 내내 핸드폰만 쥐고 살아.” 동기가 장난스럽게 일갈하자 지현이 입술을 삐쭉였다. 그러더니 유월에게 번호를 알려 달라며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해수가 아무한테나 알려 주지 말라고 했지만, 동기들이니까……. 유월은 조심스럽게 자기 번호를 찍어 주었다. “아! 나왔다!” 핸드폰을 가져가기 무섭게 진동벨이 울렸다. 지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핸드폰 중독이란 말에 뾰로통했다가 좋아하는 음료가 나오자 금세 해맑은 웃음을 띠었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모습이 솔직해서 귀여웠다. 그에 비해 자신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에 유월은 테이블 밑으로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럼 분배는 어떻게 할까요? 각자 하고 싶은 것부터 말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시 조별 과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한 유월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미안, 나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 “어? 벌써요? 커피 이제 막 나왔는데?” 픽업해 온 커피를 앞으로 옮겨 주던 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동기가 익숙하다는 듯 빨대를 입에 물며 말했다. “걔 데리러 가야 하나 보네. 오늘은 좀 이르다?” “걔요? 누구요?” “너도 알걸? ‘미대 조소과 걔’라고.” 아. 짧은 명칭에도 누구인지 알겠다는 듯 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유월 언니. 안 그래도 그거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그들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게 느껴졌지만, 유월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 나 일단 가 봐야 해서……. 미안해.” “언니? 언니!” 채 붙잡을 틈도 없이 유월이 카페를 나섰다. 목적지인 예술 대학은 넓은 캠퍼스에서도 유독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유월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쳐 냈다.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후덥지근한 기운이 조금 가셨다. 유월은 손부채질하며 익숙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시간표상으로는 분명…….’ 미대 건물은 특유의 짙은 물감 냄새로 가득했다. 앞치마는 물론 옷까지 튄 물감을 개의치 않아 하며 다니는 사람들 틈을 유월이 지나갈 때였다. “아니, 그래서 제가요.”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모퉁이를 돌던 무리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물통에 담긴 물이 출렁이며 촤악, 소리가 들렸다. “으악! 헉, 죄송합니다! 혹시 젖은 데는 없으세요?” 여학생 하나가 유월에게 사과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물이 튀진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젖은 데는 없어요.” “그래도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잘 보고 다녔어야 했는데.” “채색하는 날 흰옷 입고 온 애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아, 진짜 오늘인지 몰랐다니까요!” 뒤편에 있던 학생이 장난스레 구박하자 유월과 부딪힌 학생이 곧장 반박했다.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메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달리 여학생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신입생 티를 풀풀 풍기는 여학생은 한눈에도 활발하고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야, 그만 붙잡고 빨리 사과해.” 그때, 뒤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어울려 있던 무리 중 하나였다. 다른 학생들처럼 짙은 녹색 앞치마엔 얼룩덜룩한 물감이 잔뜩 묻어 있었는데, 오래도록 지우지 않고 내버려둔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키는 남들보다 훌쩍 컸고, 얼굴은 단정해 보였다. “너 맞지? 권해수 친구.” “네? 해수 선배 친구요?” 그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월은 조금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이제는 좀 익숙하다고 느낄 법도 하건만,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그 뒤에 이어질 반응 때문이었다. “대박. 나 소문으로만 들어 봤는데. 드디어 보는구나.” “왜? 뭔데?” “그 있잖아. 해수 선배의 다리…….”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팔을 툭 쳤다. 그제야 실수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도망치듯 한국대에 진학했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그녀가 조용히 숨죽여 산다고 해도 그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 권해수의 다리를 망가뜨린 사람이었다. 그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 다른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난감하다는 듯 굴리는 눈동자에서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지만, 유월은 그저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어색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유월이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남자가 “야.” 하고 불쑥 유월을 불렀다. “자.” 그 말과 함께 물감 묻은 앞치마에서 그가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 “……네?” “받으라고.” 그가 팔을 흔들자, 유월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딸기 맛 사탕이었다. “사과값.” 그가 아까 그 자리에 서 있는 후배 무리를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철없는 후배를 대신해 선배로서 하는 최소한의 예의.” “……괜찮아요. 이런 건 딱히.” “안 괜찮으면 버리고.” 그가 씩 웃으며 복도의 한구석을 턱짓했다. 쓰레기통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사람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물건을 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유월이 머뭇거리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맛있으면 말해. 더 줄 테니까.” “…….” “또 보자.” 인사를 남긴 채 그가 멀어졌다. 유화 물감 냄새가 천천히 사라졌다. 이상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유월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뜻밖의 일로 시간이 지체되었다. 유월은 부리나케 대형 실습실로 향했다. 시기 상관없이 과제가 많은 미대 특성상 몇몇 학생들은 성실하게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유월은 넓은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부서진 석고들과 반죽을 기다리는 덩어리들. 유화 물감 냄새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지만, 무리 없이 대상을 찾을 수 있었다. 반쯤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햇빛이 그의 옆얼굴에 비쳤다. 투명하고 하얀 피부에 비해 입체적인 이목구비와 유독 색이 짙은 입술은 예술 서적에서 익숙히 본 것만 같았다. 그에 비해 무표정한 얼굴과 무언가를 집중해 응시하는 눈빛이 서늘하다 못해 신경질적이었다. 그에게서는 베일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은 유혹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살아 숨 쉬는 조각상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유월은 숨 고르는 것도 잊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텅 빈 것만 같았던 눈동자에 따스한 생기가 들어찼다. “유월아.” “……아, 응.” 정신을 차린 유월이 해수 곁으로 다가갔다. “미안. 연락받고 바로 출발했는데, 조금 늦었지.” “아니, 괜찮아. 어차피 과제 하고 있었어.” “그때 말했던 졸업 작품이야?” “미리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아서.” 해수가 그리 말하며 유월의 허리춤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해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그가 기분 좋다는 듯 작게 이마를 비볐다. “더 해야 해? 나 밖에서 기다릴까?” “아니, 이제 끝났어. 오늘은 이만 쉴래.” 해수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가방은 나한테 줘.” “유월아. 매번 말하지만 짐 정도는 내가 들 수 있어.” “그래도. 얼른 이리 줘.” 유월이 가방을 뺏어 가다시피 들자, 해수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지팡이를 든 해수가 유월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쏟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권성 그룹의 외아들이자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러나 굴지의 미술 천재라 불리는 권해수와 이름 모를 집안의 딸. 교통사고 현장에 그녀도 함께였다는 것은 권성 측에서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소문에는 한계가 있었다. 소문은 점점 퍼져 유월의 과에도 닿았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입맛대로 새롭게 재단되었고, 유월은 어느새 해수의 다리를 강제로 망가뜨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을 권성에서 가만둘 리 없었지만, 소문은 그럴듯하게 들렸고 유월은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버거웠으나 나중에는 편해졌다. 그녀가 소망했던 친구란 존재는 이미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장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해수를 먼저 태운 유월이 옆자리에 탔다. “바로 집으로 갈게요.” 유월의 말에 장 기사는 별다른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거동이 불편한 해수를 위해 그가 입학했을 때부터 기사가 항시 학교에 대기해 있었으나, 본래 그 역할이 장 기사의 몫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해수의 야간작업으로 하교가 늦어진 어느 날, 김 기사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를 본 유월은 자신이 운전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냐고 먼저 물었다. 그때 김 기사가 반색하며 자신이 기꺼이 운전을 가르쳐 줄 수 있노라고 말했다. 제게 운전을 배운 사람이 많다면서.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유월이 해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운전?” 그러나 해수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너한테도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서…….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면 해수 너한테도 좋지 않을까?” “…….” “……혹시 싫어?” “싫다기보다는.” 해수가 웃었다. 그러나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곤란한 기색이 드러났다. “운전대, 잡을 수 있겠어?” “아…….” “지금도 악몽 꾸잖아.” “…….” “정말 괜찮겠어?”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해수가 안아 주지 않으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제가,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이래서 표정이 좋지 않았구나. 사고를 겪은 건 해수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에게 미안해진 유월은 운전하지 않겠다고 했고, 해수는 잘 생각했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 기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날 이후 그를 볼 수 없었다. 건너 듣기론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졸려.” 해수가 어깨에 불쑥 머리를 기댄 탓에, 유월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가 칭얼거리듯 말끝을 늘이며 말했다. “유월이 이야기 들을래.” “내 이야기?” “응……. 오늘은 별다른 일 없었어?” 해수의 물음에 유월은 “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별다를 게 없던 유월의 일상에 나타난 새로운 변동이라면. “교양 수업에서 조별 과제를 시켰어. 아는 애들이 별로 없어서 난감했는데, 먼저 말 걸어 준 애들이 있어서 걔네랑…….” “먼저 말 걸어 준 애들?” 더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해수가 끼어들어 말이 끊기고 말았다. 그 순간 차가 천천히 속도를 낮췄다. 힐끔 본 창밖엔 빨간불이 켜져 있었다. 백미러로 장 기사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유월은 자신이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학 설명회 때 유월이 겪은 일 때문인지, 해수는 그녀가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해수의 상태는 장 기사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기도 했다. 유월은 해명하듯 덧붙였다. “나쁜 애들로는 안 보였어. 3학년 여자애 하나랑, 과 동기 하나야.” “…….” “그 애들이랑 카페 가서 각자 뭘 맡으면 좋을지 이야기했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카페에 간 것은 새내기 이후로 처음이었다. 조별 과제 때문이었으나 아주 조금은 두근거렸다. 그런 유월을 가만히 응시하던 해수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카페에서 이야기하다 오느라 늦은 거야?” “아, 그건…….” 이어진 물음에 유월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했다. 진실을 숨길 때마다 항상 괴롭지 않았던가. 해수는 그런 유월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작은 머리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아주 작은 생각의 흐름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마침내 유월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 사실 너희 과 건물에서 사탕 하나를 받았어.” “사탕?” “이거…….” 유월이 머뭇거리며 사탕을 꺼냈다. 해수를 만나기 직전, 남자 선배에게서 받았던 사탕이었다. “너를 잘 아는 선배 같더라고. 선의로 주셨는데, 버리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게 후배의 무례를 지적한 사과임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의 불편한 다리를 언급한 일이 사과를 할 만큼 무례한 일로 여겨진다는 걸 구태여 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해수는 잠시간 사탕을 응시했다. 때마침 차를 스쳐 지나간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가 그의 시선에 맺혔다가 사라졌다. 아주 찰나, 그의 안광이 서늘하게 번뜩이는 것 같았다. “……나한테만 단내가 나는 게 아니었네.” 그가 문득 웃었다. 기가 찬 것 같기도 했고, 그럴 줄 알았다는 것 같기도 한 웃음으로. “응? 뭐라고?” “이거 나 줘, 유월아.” 무어라 되물을 틈도 없이 해수가 물었다. 그의 말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 작은 재촉에 안도한 유월이 포장지를 벗겨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 “과제 하는 애들은 어때?” “아, 다 좋은 애들 같아. 봐 볼래?” 마음이 놓인 유월은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한 조원들의 번호를 하나씩 보여 주며 설명했다. 평소 유월이 핸드폰을 보여 줘도 그는 항상 덤덤했다. 마치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사람처럼.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해수가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했다. 프로필 사진을 휙휙 넘겨보는 눈이 어쩐지 집요하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가 교양 신청까지 해 줄걸. 유월이 고생하겠네.” 때마침 파란불이 켜졌고, 차가 다시 앞으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항상 해수 너랑 같이 들었잖아. 한 번쯤 내가 듣고 싶은 걸 선택하고 싶었는걸.” “그랬지. 그래서 후회하고 있어.” “응?” 해수가 등받이에 툭 고개를 기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하는 거였는데.” 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조별 과제를 하게 된 것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듯했다. 하기야 조별 과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경 쓰는 일 없도록 할게.” 그 말에 해수가 웃었던가. 확신할 순 없지만 다정한 미소를 자주 보여 주는 그였으니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차 내부가 어두워, 그의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 차가 멈춘 곳은 오피스텔 단지 앞이었다.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천희영은 해수에게 이 오피스텔을 선뜻 내주었다. 학교가 저택과 멀어 이동이 어려울 테니 유월과 함께 편히 지내라는 말과 함께. 높은 천장과 크게 트인 통창. 하얀 대리석 바닥이 깔린 집은 대학생의 자취방이라고 하기엔 과한 감이 있었다. 게다가 성인 남녀가 한집에서 함께 지낸다니. 누가 듣기라도 하면 기함할 일이었으나 천희영은 단호히 동거를 명했다. “도련님 때문인 건 알지만, 그래도 차라리 우리가 여러 번 드나드는 게 낫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아주머니들 중 한 명이 걱정스럽게 말했으나 유월은 알았다. 그들의 동거는 성인 남녀가 아니라 고용인과 사용인 관계라 가능했다는 것을. 그를 증명하듯 유월과 해수 사이엔 우려할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월은 조금 떳떳할 수 있었다. 해수의 작업이 평소보다 일찍 끝난 덕분에 오랜만에 함께 저녁을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유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해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치울게. 앉아 있어.” “내가 할게. 다리도 불편한데…….” “정유월 씨.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는 해수 때문에 유월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싱크대에 접시를 가져다 놓는 그를 지켜볼 때였다. 문득 진동 소리가 들렸다. 정말 작은 소리였다. “유월아.” “응?” “너 전화.” 해수가 아니었다면 그게 자신의 핸드폰 진동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유월이 눈을 깜빡이며 주머니를 살폈다. 정말 제 핸드폰에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매일 연락하는 해수와 장 기사를 제외하면 어머니가 통화 내역의 전부였던 터라 화면 속 뜬 이름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아, 받았다. 언니! 유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현이었다. 어디 시끄러운 곳이라도 갔는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지현의 목소리 뒤편으로는 동기가 “진짜 유월이가 전화를 받았어?” 하고 되묻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언니, 지금 뭐 해요? 혹시 학교 근처예요? “아, 나는.” 유월은 말하다 말고 해수를 힐끔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해수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수는 소리와 향에 예민한 편이었다. 혹시 그가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월이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집이라서.” ―에이, 아쉽다. 시간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지현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유월은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아, 그게 사실은……. 잠깐 뜸을 들이던 지현이 에라 모르겠다는 듯 불쑥 본론을 꺼냈다. ―언니, 혹시 조소과 그분이랑 사귀는 사이예요? “뭐?” ―아, 막 다른 걸 캐물으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게 사실은…… 제가 아는 선배가 언니한테 관심 있다고 해서요. 남자 친구 있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워낙 두 분 사이가 좋잖아요. 한 번만이라도 물어봐 달라고 하더라고요. 곤란한 질문이면 미안하다며, 지현이 덧붙였다. 유월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이런 질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유월이 조심스레 거절하면 상대방은 남자 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던졌다. 남자 친구가 없다고 하면 그럼 한번 만나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그녀를 다그쳤다.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관심이었기에 무슨 말을 듣든 유월은 끝내 거절했다. “왜 싫다는 거야? 설마 너…… 그 권성 아들이랑 진짜 사귀기라도 해?” 그때마다 상대방은 하나같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타이밍은 제각각이었으나 묻고자 하는 바는 하나였다. 설마, 네가? 가해자인 네가, 감히 권해수를? 자신을 향한 혐오 섞인 눈빛이 닿을 때마다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월은 어느 순간부터 해수를 평범한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을, 부드러운 미소를, 따스한 온기를 느낄 때마다 가슴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그건 설렘이었고 안도였으며, 죄악인 동시에 구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달달한 관계가 될 수 없었다. 도련님과 가정부의 딸. 피해자와 가해자. 평생 다리를 저는 자와 그런 그를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자. 둘의 역할은 명료했고, 그 선을 넘어갈 수 없었다. 그건…… 사람이라면 결코 없어야 할 일이었다. 만약 해수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마다 유월은 제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마음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 ―진짜 남자 친구예요? “아니야. 해수랑 나는, 그냥…….” 대답이 없자 지현이 재차 되물었다. 유월은 망설였다. 우리의 관계를 굳이 정의해 본다면, 아마도……. “그냥, 가족 같은 사이야.” ―아, 진짜요? “응. 워낙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사이라…….” 유월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냥 친남매 같아. 누나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우린.” 굳이 역할을 따지자면 제가 누나고 해수 쪽이 동생일 것이다. 저는 해수를 항상 챙기는 쪽이었으니까. 물론 해수가 없으면 잔뜩 초조해하는 제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유월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지현이 이해했다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잘 말해 보겠다던 지현은 과제와 관련한 이야기를 마저 전달한 후, 전화를 끊었다. 타인과 이런 대화를 한 게 처음이라 그런지, 어째 정신이 쏙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작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린 유월이 우뚝 몸을 굳혔다. 언제부터였을까. 해수가 벽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절뚝이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유월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등 뒤로 감췄다가, 다시 손을 바로 했다. 그러나 주머니에 꽂지도, 당당하게 내보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 방금 조원한테 전화가 와서. 혹시 시끄러울까 봐 나와서 통화하고 있었어.” “…….” “어, 언제부터 있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나 부르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태풍이 몰아치기 전의 한밤처럼 고요한 낯으로 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해수야?” “응.” 유월이 재차 물었다. 그제야 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유월은 그가 억지로 화를 꾹꾹 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당혹감에 유월이 눈을 한번 깜빡인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통화가 늦어지는 것 같길래. 들어와서 씻어.” “아, 응. 그런데 해수야…….” 그녀가 더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가 먼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월은 머뭇거리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해수의 말대로 목욕까지 마치고 나니 밤이 되었다. 잘 시간이 되었으나 유월은 불안한 얼굴로 해수의 작업실 앞을 서성거렸다. 악몽을 꾸는 그녀를 위해, 해수는 매일같이 자기 전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러나 침실로 가야 할 해수가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작업이 늦어질 때도 꼭 도중에 나와서 유월을 안아 주고 들어갔는데……. 결국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유월이 먼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옅은 베이지색 카우치 뒤로는 새로운 작업물을 기다리는 이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아래 놓인 캔버스 속 그림이 궁금했으나,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지 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작업대로 쓰는 책상 앞에 해수가 홀로 앉아 있었다. 주황빛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문을 좀 더 열어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조각상에 유월의 상이 맺혔다. 그제야 힐끗 해수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해수야. 안 자? 시간도 늦었는데…….” 유월이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해수가 대답 대신 시계를 확인했다. 평소, 잠자리에 들던 시간에서 한참은 지나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미안, 오늘은 할 일이 좀 있어. 먼저 자, 유월아.” 그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무어라 덧붙여 보려고 했지만, 미약하게 좁아진 미간에서 신경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졸업 작품과 전시 준비로 신경 쓸 게 많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방해가 될 수는 없었다. “……응, 미안. 수고해.” 유월은 작은 인사를 남기고서 문을 닫았다. 예의 그 미소도, 돌아오는 인사도 없었다. ***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드나 싶었는데, 결국 유월은 작은 신음과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그녀가 가쁜 숨을 내쉬며 제 몸을 더듬었다. 얼굴, 목덜미, 팔, 다리. 강박적으로 훑어 내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겨울이 아니라 괜찮겠지 싶었는데, 또 악몽을 꾸고 말았다. 유월은 한숨을 내쉬며 양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최면이라도 거는 양. 그러나 심장은 여전히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꿈인 걸 알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해수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만 확인하고 올까. 아주 잠깐만……. 유혹을 이기지 못한 유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 한 줄기 희미한 빛이 가느다랗게 번져 있었다. 해수의 방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는 걸까. 건강도 안 좋은 애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망설이던 유월이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하아…….” 낯선 호흡 소리가 유월의 발목을 붙들었다. 열에 들뜬 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은 해수의 방이었다. 순간 유월은 숨을 죽였다. 큰 열병을 앓기라도 하는 듯, 얼핏 들어도 거친 숨소리는 제가 열감기에 걸렸을 때 내었던 소리와 비슷했다. 아니, 그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어딘가 아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쩐지 손잡이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은 예감. 이 문을 연 일을 후회하게 될 것 같은, 아주 강한 예감이. 그냥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방에서 새어 나온 빛이 유월의 얼굴을 세로로 그어 내렸다. 일말의 망설임을 드러내듯 아래로 떨어져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느리게 위로 들렸다. 이내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두운 방,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등이 한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나 그녀가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후…….” 늘 단정했던 까만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채 하얀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고, 선이 고운 눈매 때문에 웃을 때마다 사르르 휘어졌던 눈은 고통스럽다는 듯 일그러져 있다. “아, 하아…….” 늘 상냥한 말만 내뱉던 붉은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새어 나온다. 초조하다는 듯 두어 번 입술을 핥다가 해결되지 않음에 초조해하며 질끈 깨문다. 턱에 고여 있던 땀을 따라 유월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얀 선액을 질질 흘리는 선단과 굵은 기둥 그리고 그 기둥을 감싼, 툭 튀어나온 핏줄 다발들.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시뻘겋고 굵은 성기는 말 그대로, 흉측했다. 사람의 것이 맞는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 만큼. 늘 유월을 다정히 감싸 주었던 손이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유월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헉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자 느리게 제 성기를 흔들던 해수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유월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떡, 어떡하지. 뭐라고 해야……. 그때였다. 해수가 눈을 떴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꺾은 그가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순 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착각인가 싶을 만큼 찰나였다. “좋아. 아…….” 그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하고 빠른 손길로. 이미 몇 번이나 사출한 듯 하얀 액체가 성기와 손바닥에 눌어붙어 있었지만,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듯 탁, 탁, 연신 자신의 살덩이를 강하게 흔든다. 성기를 쥔 탄탄한 팔뚝에 선명하게 핏줄이 돋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듯 움찔거리며 허리를 튕긴다. 무언가를 향해 강하게 제 성기를 들이박는 것처럼. “유월아, 거기. 거기 좋아, 응…….” 유월아, 정유월. 연신 으르렁거리며 제 이름을 부르는 그는 무자비하게 제 욕구를 털어 넣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며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옷을 다 입고 있는데도 유월은 어쩐지 발가벗겨진 채 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알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의자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흔들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좀 더. 아주 조금만 더 도달하면 된다는 듯이, 멈추지 않고 강하게. “아, 아아.”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던 신음이 점점 거칠어진다. 짙은 눈썹이 강하게 일그러지고, 찔걱, 찔걱, 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강해진다. 참아 왔던 것을 내뱉듯,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턱이 점점 하늘로 올라가고, 땀에 젖은 탄탄한 목울대가 크게 일렁인다. 그 순간. “유월, 아. 아, 하아……!” 씨근거리는 귀두 끝에서 주욱, 흰 액체가 튀어나왔다. 이미 나오고 있음에도 몇 번이고 허리를 들썩이던 그의 몸짓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열에 들떠 잔뜩 붉어진 그의 눈매가 제 손을 적신 정액을 응시한다. 손을 움직여 묻은 것을 가볍게 어루만지자 무게를 이기지 못한 묵직한 액체가 아직도 배꼽에 올라붙은 성기 위로 떨어졌다. 제 성기를 내려보며 나른한 미소를 짓는 해수는 이 행위가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유월은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저런 식으로, 야한 얼굴을 하는 해수는, 단 한 번도……. 그때였다. 문득 해수가 고개를 들어, 문 쪽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깜짝 놀란 유월이 재빨리 문 쪽에서 멀어졌다.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다가,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숨을 죽인 채 청각을 곤두세웠다.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릴 뿐, 뒤따라 나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방금 목격한 장면이 머리를 지배했다. 방금…… 뭘 본 거지. 해수가, 나의 도련님이 자위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혹시 작은 신음이라도 새어 나갈까 입을 틀어막고 있던 유월이 스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득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유월은 조심스럽게 바지를 벗었다. 팬티가 푹 젖어 있었다. 해수의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에, 유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 어느 겨울밤, 유월이 고등학교 과정을 앞뒀을 때였다. 집안 행사를 끝마치고 온 해수는 잔뜩 시달리기라도 했는지, 유독 지쳐 보였다. 유월은 약을 먹이는 것을 끝으로 얼른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었다. “유월아.” 약을 막 먹였을 때였다. 목욕을 마치자 졸음이 오는지, 해수가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월이 너는 어떤 사람이 좋아?”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잠기운에 한 말이라기엔 저를 응시하는 해수의 눈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어른들에게서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건가 싶으면서도 유월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전에도 물어보지 않았어?” “그랬지. 아직도 변함없나 싶어서.” “나야 똑같지. 변할 게 뭐 있겠어. ……난 다정한 사람이 좋아.” 이상형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기준만 말해 보자면, 아버지와 반대인 사람이 좋았다. 저를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람. “다정한 사람.” 예상한 답변을 들은 사람처럼, 해수가 느리게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문득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그가 허벅지 위에 올려진 왼손을 가볍게 튕기고 있었다. 엄지를 손바닥 안쪽으로 말아 쥐었다가 가볍게 튕기는 행동은 그가 생각에 잠길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이윽고 해수가 피식 웃었다. “어렵네, 그거.” “어려워?” “응, 내가 제일 못하는 거야.” 권해수가 다정하지 않으면 누가 다정하다 할 수 있을까. 나른한 말투와 저 표정을 보니, 역시 피곤한 것이 분명했다. 어서 마저 약을 먹이고 재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유월이 사탕 껍질을 막 벗겼을 때였다. “나 더워, 유월아.” 문득 들리는 말에 유월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열나는 것 같은데…….” 해수가 미약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놀란 유월이 사탕을 내려놓고선 해수의 이마 위로 손을 대었다. 미열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목욕한 직후여서인지 정말 감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열은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아파?” “응…….” “다른 약 가져올게. 잠깐만 기다리면…….” “약 말고.” 유월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 해수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이렇게 있을래.” “…….” 정말 감기일 수도 있으니, 약을 먹어야 한다고 엄하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제 손바닥에 얼굴을 맡긴 채 어리광 피우는 해수가 정말 편해 보여, 쉽게 내칠 수 없었다. “시원하다, 유월이 손.” 그게 기분 좋았는지, 해수가 작게 웃으며 유월의 손에 폭 얼굴을 기댔다. 뺨이 눌리면서 그의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불퉁한 떼를 쓰는 아이 같다. 그 모습이 귀여워 유월이 픽 웃자 해수가 눈꺼풀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해수가 조금 열 오른 눈가로 그녀를 응시한다. 웃음기라곤 사라진 고요한 눈빛에, 어느새 유월의 웃음기 또한 서서히 사라졌다. 이건 두 사람 사이에서 이상할 게 없는 행동이었다. 아픈 곳을 말하고, 아픈 곳을 찾고, 서로를 바라보고, 이따금씩 어리광을 부리고. 그러나 뭔가가……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열이 오르는 건 해수이건만, 입안이 바싹 말랐다. 온몸의 감각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손끝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오로지 해수만 보였다. 해수 또한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와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아주 느릿하게, 유월의 얼굴을 훑었다. 눈동자를, 코를, 마지막으로 입술까지. 그 집요한 눈길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축축한 땀이 손바닥에 고일 것 같아, 마른침을 삼킨 순간이었다. 옅게 미소 지은 해수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피할 틈도 없이, 도톰한 입술이 그녀의 손바닥을 꾹 누른다. 사르륵,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손을 부드럽게 간지럽힌다. 아니, 이 감각이 머리카락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입술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의 숨결 때문인지 유월도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다시 살며시 손바닥에 뺨을 기댄다. 붉은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인다. “단 냄새 난다.”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와 함께 열감 오른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유월이한테.”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러므로 그녀가 손을 떼어 낸 건 본능이었다. 유월은 쿵쿵거리는 가슴을 꾹 억눌렀다. 별 의미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사탕을 만지기도 했고, 해수는 단걸 좋아하니까. 그 냄새를 찾은 것뿐. 아무런 이유도 없다. 불꽃이라도 만진 것처럼 애꿎은 손만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그녀가, 결국 제 등 뒤로 손을 감췄다.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여, 열은 안 나는 것 같아. 약은…… 일단 내일 상황 봐서 먹든지 하자. 아직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너 약 먹는 거 싫어하기도 하고…….” “…….” “나, 나는 이만 가 볼게. 엄마가 찾을 시간이라.” 유월이 얼버무리며 방을 빠져나가려고 한 순간이었다. “나는 안 물어봐?”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프다고 할 땐 언제고, 해수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뭘 말하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넌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데?” 유월의 물음에 해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무수히 많은 선택지 중에서 무언가를 꼽아 보는 듯하던 그가 이내 명쾌히 내뱉었다. “인내심 좋은 사람.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 “잘 가, 유월아.” 좋은 꿈 꿔. 다정히 웃는 해수를 향해 유월은 다른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그날 밤, 꿈을 꿨다. 특별할 것 없는 꿈이었다. 제게 다가온 해수가 ‘유월아.’ 하고 저를 부르고,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다정히 웃는. 일상과도 같은 꿈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초경을 했다. 또래보다 한참 늦게 찾아온 알싸한 통증은 첫사랑의 감각과 닮아 있었다. 그렇기에 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꾹꾹 억누른 감정은 더 이상 꿈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그래야만 했는데. 해수의 자위를 목격한 그 밤, 겨우 잠든 유월은 번쩍 눈을 떴다.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유월은 떨리는 손을 내려 아래를 확인했다. 분명 갈아입었던 팬티가 다시금 축축이 젖어 있었다. 유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 해수의 자위를 목격한 날 밤, 유월은 젖은 팬티를 빨면서도 혹시 그에게 들킬까 봐 숨죽여야 했다. 자연스럽게 빨래는 길어졌고, 그럴수록 해수의 자위를 끝까지 지켜봤다는 자괴감과 아래를 적셨다는 수치가 동시에 밀려와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런데도 또다시 그를 떠올리며 아래를 적시고 말았다. 유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해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한 번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식욕은 물론이고 수면욕, 성욕조차도. 그래서 유월은 해수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본 것은 어떠했던가. 그는 제 성기를 붙잡은 채 연신 허리를 쳐올렸다. 눈앞의 욕정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신음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을 성욕으로 일그러뜨리며 수음하는 건, 분명한 사내였다. 앞으로 해수를 어떤 눈으로 봐야 할까. 그리고 저는 해수를 어떻게 봐야 할까. 과연 우리는 예전처럼 서로를 볼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연신 떠다녔다. 유월이 다음 날 잘 잤냐고 묻는 해수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톡톡, 누군가 검지로 유월의 책상을 두드렸다. 지현이었다. “언니, 오늘 수업 끝나고 뭐 해요? 어제 못다 한 조별 과제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혹시 시간 괜찮아요?” “아, 잠깐만.” 유월은 해수의 시간표를 떠올렸다. 오늘은 야간작업이 있는 날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마 시간이 조금 남을 터였다. “응, 괜찮을 것 같아.” “그럼 수업 끝나고 어제 갔던 카페에서 봐요. 괜찮죠?” 유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해수야. 나 그때 말한 조별 과제 때문에 모여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야간작업 맞춰서 가도 될까? 답장은 빠르게 왔다. 그래. 늦어지면 연락해. 너무도 간결한 연락에 유월은 내심 안도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별 과제가 반가웠다. 머릿속을 꽉 채운 해수 생각을 조금이나마 떨쳐 낼 수 있을 테니까. 과제 준비는 생각보다 순탄했다. 지현은 생각보다 똑 부러졌으며, 동기 민지도 맡은 부분을 성실히 소화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저, 언니.” 슬슬 마무리를 지어 갈 때쯤이었다. 가방을 정리하던 지현이 넌지시 운을 떼었다. “혹시 이다음에도 시간 괜찮아요?” “응?” “아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조원들끼리 술 한잔하고 싶어서요. 나 언니한테 궁금한 것도 진짜 많은데.” “아…….” “안 돼요, 언니?” 지현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애교스러운 말투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수와 만날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결심했다는 듯 유월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짜죠? 되는 거죠?” 지현이 신난다는 듯 앞장을 섰다. 술집에 들어가 자리에 앉은 유월은 술잔을 받는 스스로가 어색했다. 지현이 그런 유월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잡아챘다. “생각이 많을 땐 술이죠. 언니, 얼른 한잔해요.” “지현아, 유월이도 너처럼 말술일 거라 생각하지 마.” “아, 맞네 맞네. 죄송합니다아.” 장난스럽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술잔이 오고 가니 점점 몽롱해졌다. 해수에게 말하지 않고 술자리에 왔다는 죄책감은 지현이 따라 주는 술로 인해 사라져간 지 오래였다. 그렇게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1차가 끝났다. 지현은 2차를 가자며 붙잡았고, 동기는 1차에 유월이 지현을 상대해 주어 자신이 편했다며 2차는 제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제 가 보라며 유월을 보낸 동기는 지현에게 질질 끌려갔다. 유월은 반쯤 취한 얼굴로 멍하니 손만 흔들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눈앞의 인영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장 기사님……?” 그녀의 부름에 그가 상태를 가늠하는 듯 위아래로 유월을 훑어보았다. “많이 마셨니?” “아, 아니요. 그렇게 많이는……. 그런데 장 기사님께서 여긴 어떻게…….” 더듬거리며 말하던 유월의 눈이 뒤늦게 크게 뜨였다. 황급히 확인한 시간은 해수의 야간작업이 끝났을 시간보다도 한참 지나 있었다. “해, 해수는 어디 있어요? 아직 학교에 있어요?” “타라.” 장 기사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몸을 돌렸다. 그 단호함에 좀 더 초조해진 유월은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차가 향하는 곳은 그들의 오피스텔이었다. 해수가 먼저 집에 왔다는 뜻이었다. 화났을 거야. 걱정도 많은 아이인데……. 겨우 인사만 남긴 유월은 허겁지겁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해수의 방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역시 먼저 온 게 분명했다. 얼굴을 보기 위해 발을 내디디려던 순간, 어제 보았던 광경이 다시금 떠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헐떡이던 해수가. “…….”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잊기 위해 마신 술인데, 열기 때문인지 더 생생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해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지만, 돌아왔다는 건 알려야 했다. 유월은 심호흡과 함께 해수의 방문에 노크했다. “해수…….” 그런데 채 열기도 전에 스르륵 문이 열렸다. 해수 특유의 체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씁쓸한 향……. 유월이 눈을 크게 떴다. 꽤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지,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은 해수는 카우치 앞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캔버스가 간간이 놓여 있던 게 전부였던 유리 테이블 위로는 술잔이 놓여 있었다. 꽤 많이 마신 건지, 코르크 마개가 뽑힌 병은 어느 정도 비워져 있었다. “유월아.” 그녀가 곧장 이곳에 올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해수가 옅게 웃었다. 유월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해수, 너…… 술 마셨어?” “응.” 그가 순순히 긍정했다. “너한테서 아무런 연락이 없길래, 동기들이랑 술이라도 마시나 싶었거든.” “……아, 그건.” “그래서 나도 한잔하고 있었어.” 해수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이면 같은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 “글쎄…… 빠져나갈 구멍?” “…….” “너무 궁지로 몰아서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이렇게라도 만들어 줘야지.” 그가 손에 쥔 잔을 응시한 채 나른히 중얼거렸다.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인지 그의 눈가가 옅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던 그날처럼. 취했구나. 유월은 확신했다. 막 스무 살이 되던 날, 해수와 유월은 일탈이란 명목하에 처음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유월은 그때 해수의 술버릇을 깨달았다. 해수는 취하면 더 고요해진다. 장난스러운 농담도, 웃음도 모두 걷어 낸 얼굴로 지그시 저를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눈이 내리기 직전의 어두운 하늘 같기도 했고, 번개를 머금은 하늘처럼 사나워 보이기도 했다. 그 고요한 눈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해수의 진짜 얼굴은 아닐까 하고 무심코 생각할 정도였다. “적당히 마시지.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 “무슨 일 있었어? 작업이 잘 안 돼?” 해수는 대답 대신 잘 세공된 술잔을 손에서 가만히 흔들었다. 짙은 술이 만들어 낸 파도가 술잔의 벽면을 가볍게 때렸다. ……왜일까. 침묵도, 언성도, 분노도 없는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을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어두운 방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평소에 맡기 힘든 짙은 알코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때, 가만히 술을 한 모금 들이켜던 해수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쓴 약을 먹을 때마다 짓는 표정이다. 유월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을 먹은 게 아니니, 물을 마시는 게 좋을 것이다. 생각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그래서 유월은 한쪽에 따로 마련된 물잔을 그에게 건넬 때까지만 해도, 차라리 그가 취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른 해수는 간밤의 일을 아주 잠깐 잊게 해 주었으니까. 어쩌면 이대로 잘 덮어 둘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자신만 티 내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나 제게 내밀어지는 하얀 손을 본 순간, 유월은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유월아, 거기. 거기 좋아, 응…….” 그의 손을 흠뻑 적셨던 정액을,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아름다운 얼굴을, 토해 내듯 중얼거리던 제 이름을. 유월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손을 빼냈다. 쨍그랑! 잘 세공된 크리스털 잔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미지근한 물이 그녀의 발을 흠뻑 적셨다. “아, 아…….” 유월은 당황스러운 음성만 중얼거렸다. 정신이 확 들었다.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 “미안해. 잠깐 다른 생각이 나서…….” 유월은 황급히 몸을 굽혔다. 조각 난 잔해가 컸으니, 빨리 줍는다면 티 나지 않을 것이다. “얼른 치울게.” “유월아.” “다친 데는 없지? 잘게 부서진 건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이, 일단 너 다칠 수도 있으니까 이것 먼저 치우고…….” 유월은 다소 고집스럽다 싶을 만큼 바닥에 고정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안 된다. 그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래서 해수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정유월.” 그러나 그의 부름 한 번에, 모든 행동이 멈췄다. 그대로 굳은 그녀의 시야에 해수의 다리가 보였다. 자신이 망가뜨린 다리가. 이상하게 숨을 쉴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유월아.” 해수가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곤 그녀의 귓가에 상냥하게 속삭였다. “어제, 봤어?” 숨이 멈췄다.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유월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위로 들려 올라갔다. 그 긴 침묵을 해수는 기꺼이 기다려 주었다.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매단 채로. “뭘…….” 마침내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뭘 말하는 거야?” “뭐겠어, 유월아.” 해수가 가볍게 웃었다. 겨우 생각한 대답이 그것뿐이냐는 듯이. “내가 자위하는 거, 가기 직전에 네 이름 부르는 거, 잔뜩 싸고도 모자라서 몇 번이고 더 흔드는 것까지.” “…….” “전부 봤냐고 묻고 있는 거야.” 해수가 상냥히 속삭였다. 천사 같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언어들이 유월을 향해 쏟아졌다. 들켰다.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해수에게 들켰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성욕을 해소하는 건 나쁜 행위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제 이름을 불렀다고 한들, 함부로 방을 엿본 사람은 저였다. “미, 미안해.” 유월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냥 가려고 했는데, 소리가 들려서. 호, 혹시 아픈 건가 하고…….” “쉬이. 혼내는 거 아니야, 유월아.” 유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자, 해수가 겁먹지 말라는 듯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정작 시선으로 범해진 것은 자신이었으면서, 유월을 달래는 말을 읊는 해수는 얼핏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해수의 다정한 음성에 유월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거든.”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였다. “단내가…… 여기까지 나서.” 향을 음미하듯 그의 가슴팍이 느리게 들썩였다. 하아……. 취한 듯, 혹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꾸역꾸역 참고 있어 조바심이 난 듯 숨을 내쉰 그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입에 침이 고이는데.” “……해, 해수야.”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가 있어야지.” 굽힌 유월의 무릎 사이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질척했다. 유월은 간밤 실금을 들킨 아이처럼 황급히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나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아니 해수의 자위를 봤을 때부터 그녀의 아래는 젖어 있었다. “유월아.” 그런 그녀를 향해 해수가 속삭였다. “지금도 젖었어?” “아…….” “단내가 나, 어제처럼.” 귓가로 스며드는 숨결이 길었다.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비밀을 애써 숨기려는 사람처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이건. 이건, 그러니까…….” “이상하지, 유월아.” 그녀의 말을 끊은 해수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널 아무한테나 질질 흘리는 애로 키운 적이 없는데, 왜 벌써부터 젖어 있을까.” 그의 반듯한 미간이 미약하게 좁혀졌다. 문제아를 마주하기라도 한 듯 단호한 얼굴이었다. “다른 놈들 보면서도 아래를 적셨어? 그 새끼들도 맡을 수 있을 만큼 단내를 질질 흘렸나?” “아니야!” 그 앞에 죄인이 된 유월은 떨리는 목소리로 부정했다. 해수가 수음하는 것을 보며 아래를 적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권해수뿐이었다. “그런 적……. 그런 적 없어, 해수야. 아니야.” “그러면.”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면 뭔데, 유월아.” 어느새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해수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그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 조각에 찔렸는지 무릎에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났다. 그러나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온몸이 그에게 옭매인 것처럼 해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 해수가 입을 연 날, 목을 기꺼이 내어 주었던 그날처럼.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에 발끝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길 반복해도 해수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유월은 이 눈빛을 알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던 도련님의 끈질긴 눈빛을. “나, 난…….” 유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제가 진심을 다해 도망친다면 다리가 아픈 해수는 저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한테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정유월은 권해수에게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존재였으니까. 수치로 뜨거워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유월이 토해 내듯 대답했다. “……너한테만 그랬어.” “…….” “너, 너한테만 젖었어. 다른 사람은 없어. 해, 해수, 너뿐이야.” 기어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음기 섞인, 조각난 말이었으나 해수는 칭찬하듯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유월은 그런 그에게 매달리듯 몸을 기댔다. “잘했어, 유월아. 잘 말했어.” “흑, 흐윽.” “나 때문에 젖었구나. 응. 나한테만 젖는 거야. 착하기도 하지.” 그가 중얼거리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저 당사자에게 제 음란한 마음을 고백했다는 사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울지 마, 유월아.” 해수가 그런 그녀를 달래듯 얼굴 이곳저곳에 입술을 눌렀다. 다정하게 어르는 듯한 스킨십에 유월의 울음기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일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 해수는 기꺼이 제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일전의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다. 용서를 받았으니까……. “자, 그럼 이제 보여 줘.” 그러나 이어진 음성에 그녀의 숨이 다시금 멈췄다. “……뭐?” “나 때문에 젖었다며. 그럼 보여 줘야지.” 해수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보며 아래를 적셨으니, 그것에도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하는 투였다. “해, 해수야.” 유월이 다급히 제 뺨을 감싼 해수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해수야.” 아직은 괜찮았다.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 다 술을 마셨다는 구실도 있었으니, 어쩌면 없었던 일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상은 안 된다. 그건 성에 무지한 그녀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이상 간다면, 더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녀가 설득하듯 말했다. “그건 안 돼.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것만은 제발…….” “정유월.” 바쁘게 움직이던 입이 작은 부름 한 번에 멈췄다. 해수가 유월을 내려보았다. 모든 사고를 정지한 채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로 눈물 젖은 눈망울 속에 오직 저만을 담는다. 뼈에 새긴 학습이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는 복종이었다. 빠듯하게 차오르는 만족감을 삼켜 낸 해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쪽 보고 다리 벌려. 네 손으로 직접.” *** 유월은 울었다. 직접 바지를 내리는 순간부터 팬티를 벗고, 책상에 누워 다리를 벌리는 순간까지 어쩌면 이러다 탈수가 오는 게 아닐까 하고 무의식 중에 생각할 만큼. 그러나 해수는 그런 유월을 달래 주지 않았다. 예술 작품이라도 관찰하듯, 의자에 앉은 채 그녀의 행동을 그저 관망할 뿐이었다. 마치 간밤 그녀의 시선을 그대로 돌려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유월은 떨리는 손을 억지로 들어 제 허벅지를 잡았다. 그러곤 아주 천천히 벌렸다.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잔뜩 젖은 음부가 그대로 공기에 노출되었다. 몇 없는 체모는 이미 잔뜩 젖어, 그녀의 음부를 가려 주지 못했다. 다 보일 것이다. 아래까지 전부. 얼마나 젖었는지도…….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수치심에 다리를 감싼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릎에서 새어 나온 피가 얼굴에 묻는 것조차 신경 쓸 수 없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였다. “유월아.” 타이르는 듯한 음성과 함께 발목이 붙잡혔다. 반항할 새도 없었다. 그 즉시 다리가 활짝 벌어지고, 쩌억, 물 많은 과일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벌려야지.” 갑자기 트인 시야로 제 양 발목을 붙잡고 있는 해수가 들어왔다. “내가 볼 수 있을 만큼. 응?” 그 말과 함께 해수가 발목을 더 벌렸다. 꼭 다물려 있던 음부가 밖으로 드러났다. 안에 한가득 고여 있던 액체가 기다렸다는 듯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꿀에 잔뜩 절인 과육 같은 모양새가, 유월에게도 들이밀어졌다. 아, 아아. 유월이 목 졸린 사람처럼 희미한 소리를 내었다. “아, 역시 이 냄새였구나.” 그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나는 냄새였어…….” 취하기라도 한 듯 몽롱한 얼굴의 해수가 그녀의 젖은 음부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게 해수에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몰려오는 수치심에 유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해수가 문득 눈매를 야릇하게 접었다. “키스 먼저 하고 싶긴 한데.” “…….” “그건 나중에 질리도록 해 줄게.” 우선 이거 먼저 먹고. 무슨 말이냐고, 채 물을 틈도 없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이어질 행위를 알아차린 유월이 눈을 크게 떴다. “해, 해수야. 안 돼. 거긴……! 아응!” 고개를 저으며 발버둥 쳤으나, 저항은 짧았다. 해수가 그녀의 아래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곤 진작부터 흐무러진 살을 핥기 시작했다. “아, 히익!”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생경한 감각에 유월이 몸을 떨었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종아리가 덜덜 떨리고, 발끝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강한 압력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두툼한 혀가 갈라진 틈 주위를 핥았다. 달큼한 맛을 보다가, 조금 더 진한 맛을 퍼내기 위해 그 좁은 입구 속으로 꾸역꾸역 혀를 집어넣었다. 날렵한 코를 파묻어 가면서까지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개를 비틀었다. 그 진한 체취를 기억하려는 듯, 깊은숨을 들이쉬는 것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느껴질 정도였다. “맛있어, 유월아.” 문득 해수가 음부에 입술을 붙인 채 중얼거렸다. “앞으로 사탕 대신 네 보지 먹을래.” “거, 거기에 대고 말하지, 아아……!” “훨씬 맛있잖아. 더 달고, 냄새도, 후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다시금 음핵을 머금었다. 혀끝을 세워 삭삭 핥기도 하고, 넓게 펴서 전체를 맛보다가, 이내 쯥쯥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았다. 처음으로 과육의 단맛을 본 짐승처럼 게걸스레 빨고 집착적으로 달라붙었다. “이, 이거 안 돼. 해수야, 그만, 으읏……!” 애원하듯 그를 불렀지만 흡착하는 힘은 더욱 거세질 뿐,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강탈할 수 있다는 듯 음핵을 쭉쭉 빨았다. 그녀를 둘러싼 힘이 점점 커졌다. 처음 겪는 감각이 거대하게 몸을 부풀리던 것이, 한순간에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아, 아흣……!” 그녀의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절정이었다. 가뜩이나 물로 젖은 아래가 울컥거리며 젖어 들었다. 그 또한 이를 느꼈는지 맞닿은 점막 사이로 해수가 가볍게 웃었다. “빨아 줘서 느꼈어?” 해수가 뜨끈하게 열이 오른 질 주름을 혀로 핥으며 물었다. “처음인데도 내가 빨아 줘서 간 거야?” “아니, 아니야. 아니야…….” “으응, 아니구나.” 해수가 가볍게 대꾸했다. 헐떡이는 와중에도 부정하는 그녀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에, 유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다시 해야겠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다시 눈을 번쩍 떴다. 무엇을, 하고 물을 틈도 없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입구로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흐읏……!” 생각지 못한 침입에 유월의 안이 한껏 수축했다. 확 조여드는 내부에 해수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아직 하나밖에 안 넣었는데 벌써부터 조이면 어떡해, 유월아. 힘 풀어.” “손, 손 빼 줘. 안 돼. 이건……!” “왜?” 해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허벅지에 뺨을 기대며 천진하게 말했다.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그의 하얀 뺨을 물들였다. “입으로도 못 느꼈으면 이건 더 괜찮지 않나.” “아니야, 그게 아니라, 으응……!” 달래듯 말한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구 근처를 살살 문질렀다가, 부드러운 내벽을 비비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를 톡톡 건드리다가 안쪽을 꾹 밀어 올렸다. 분명 혀가 아닌데도, 혀처럼 질 전체를 탐닉하는 움직임에 유월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해, 해수야, 나, 흐읏……!” “괜찮아. 잘 먹고 있어.” “아니야, 그걸 말하는 게……. 아응!” 거절하기 무섭게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애액을 퍼 올리는 손길이 늘어나자, 젖은 마찰 소리도 더욱 커졌다. 아름다운 손이었다. 신의 얼굴을 하고, 신을 닮은 조각을 만들던 해수였다. 그 손가락이 점점 늘어나, 지금은 그녀의 안을 파헤치고 있다. “이거 봐, 유월아.” 안을 세차게 치대며 해수가 웃었다. “엄청 젖었어. 여기까지 뚝뚝 흐르는데…….” “아으, 아, 아아!” “들려? 이 소리?” 쿨쩍, 쿨쩍! 잔뜩 젖은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유월은 눈을 질끈 감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음란한 소리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해수는 그런 유월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손을 털었다. 주름 사이사이 고인 애액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더욱 거세졌다. 손바닥 안쪽 도톰한 부분으로 음핵을 노골적으로 짓누르며, 손가락으로는 안을 쑤셨다. 그때였다. 배 속에 찰랑찰랑 고여 있던 무언가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은. 뭔가, 뭔가 오고 있다. 머리칼이 쭈뼛거리며 서는 느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유월이 벗어나기 위해 몸을 바동거렸다. “해수야, 놔, 놔줘. 이상해. 나, 나아……!” 해수에게 직접 다리를 벌리면서도 내보인 적 없는 반항이었다. 그만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까지 유월의 안을 마음껏 괴롭히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음부를 응시하는 눈빛이 약점을 포착한 사냥개처럼 가늘어진 것 같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아, 아아앙!” 그와 동시에 그가 먹음직스러운 과실을 다시 덮쳐 물었다. 쯔으읍, 소리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아올리며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고, 강하게 안을 치댔다. 강한 마찰에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허리가 저절로 들썩였다. 벗어나기 위해 종아리로 해수의 어깨를 내리치고, 책상을 짚어 가며 발버둥 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허벅지를 붙잡은 해수의 악력은 더욱 강해졌다. “이, 이상해, 나, 더, 더는……. 해, 해수야……!” 강렬한 감각이 유월의 머리끝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몸이 덜덜 떨렸다.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해수야. 해수야. 애처롭게까지 한목소리로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부름에 화답이라도 해 주듯, 해수가 다리 사이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선이 고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의 미소에 본능처럼 가슴이 떨린 순간이었다. 해수가 도톰한 입술로 유월의 음핵을 살짝 깨물었다. “아, 아아아!” 강한 감각이 유월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좁은 곳에서 가는 물줄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 돼. 보지 마. 보, 보지 마……!” 유월이 손을 내려 음부를 가렸다. 그러나 손쉽게 그 저항을 막아 낸 해수가 몸을 낮췄다. 팔뚝에 선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안쪽 고인 물을 퍽퍽 퍼 올리며 고개를 젖힌다. 아름다운 얼굴이 유월의 액체를 기꺼이 받아 마신다. 혀를 살짝 내밀고 입을 열어 받아 마시는 모습은 황홀해 보이기까지 했다. 더러워. 안 돼. 제발……. 조각난 말에 맞춰 핏, 핏, 힘차게 새어 나오던 물줄기가 점차 줄어들었다. 더 받아먹을 수 없어 아쉽다는 듯 질 주름 사이사이 고인 물까지 전부 핥아 내고 나서야 해수는 고개를 들었다. 꿀꺽. 큰 소리와 함께 단단한 목울대가 움직였다. 기어이 그녀의 액체를 전부 삼킨 사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유월을 내려다보았다. “달다, 유월아.” “하, 하윽…….” “오래 참았다가 먹은 보람이 있을 만큼, 너무 달아.” 성수가 어울리는 얼굴이 그녀의 보짓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흐, 흐윽…….” 수치심에 저절로 울음이 터졌다. 해수에게 직접 아래를 벌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안면에 물을 싸지르기까지 했다.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무너지고, 오직 본능밖에 모르는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 “유월아, 또 우는 거야?” 해수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유월은 그가 자신을 울린 사람이라는 것도 잊은 채 연신 눈물을 쏟았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번 더 빨아 주려고 했는데, 너무 울어서 안 되겠다.” 해수가 유월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눌렀다. 진정할 동안 기다려 주겠다는 듯, 한참 동안 눈물을 핥아 먹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울음이 조금씩 줄어들고 나서도 열기로 정신이 멍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월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졸려?” “응…….” “사람들이랑 술 마셔서 더 피곤하겠네.” 맞장구쳐 주는 다정한 목소리에 맞춰, 유월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유월아.” 그때 그녀의 귓가에 쪽쪽거리던 해수가 작게 속삭였다. 숨겨 왔던 비밀을 말해 주듯이. “그간 내가 많이 봐줬잖아. 그렇지?” 무엇이냐 물을 틈도 없었다. 뜨겁고 묵직한 무언가가 음부 위로 턱, 내려앉았다. 열감으로 흐릿했던 유월의 눈동자가 천천히 선명해졌다. 쿠퍼액으로 잔뜩 번들거리는 귀두와 핏줄이 가득 돋은 굵직한 선단. 그녀가 간밤 훔쳐보았던, 얼핏 흉측하게까지 느껴지는 성기가 금방이라도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원초적인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찢, 찢어질 거야. 저게 들어오면 분명……. 유월이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로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해수야, 이건, 이건 안 돼. 제발 그만, 아, 아아……!” 그러나 반항은 찰나였다. 성기가 그녀의 안을 밀고 들어왔다. 묵직한 감각이 유월을 강타했다. 시뻘건 쇠기둥이 몸을 절반으로 쪼개는 것 같은 감각에 신음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아직 선단밖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좁은 건 알고 있었는데…….” 해수의 반듯한 이마가 고통스럽게 찌푸려졌다. “힘 좀, 풀자, 유월아.” “아, 아으…….” “내 좆 끊어 먹고 싶은 거야?” 그가 그리 말하며 한 차례 더 허리를 밀어 넣었다. 꾸득거리며 밀려온 성기가 그녀의 내벽을 억지로 벌렸다. 그러나 난생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인 내벽은 쉽게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하하.” 문득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비틀어, 책상을 벗어나려던 유월은 홀린 듯 시선을 들어 올렸다. 순간 어린 시절, 저를 향해 웃던 도련님이 겹쳐졌다. 봄날에 날아온 나비를 보며 웃던 도련님을. “예쁘다, 유월아.” 그 나비를 보며 해수는 웃었다. 봄을 닮은 웃음으로. 유월이 사랑했던 미소였다. 유월이 몽롱한 머리로 기억을 떠올릴 때였다. “예쁘다, 유월아.” 그날과 같은 미소를 띤 채 해수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내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는지 넌 모를 거야.”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쿵. 강한 압력과 함께 그의 자지가 그녀를 완전히 꿰뚫었다. “……!” 유월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강한 통증에 눈앞이 잠깐 하얗게 변했다가, 서서히 돌아왔다. “아, 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리던 유월이 힘겹게 눈을 내렸다. 그와 몸을 깊게 밀착하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던 성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그 거대한 게 어디로……. “여기야.” 그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해수가 자신의 자지를 삼켜 볼록해진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낮게 속삭였다. “밤새 훔쳐봤던 자지, 여기 있어.” “아, 흐읏…….” “네가 전부 삼킨 거야, 유월아.” 해수가 눈매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아니야. 그럴 리, 그럴 리 없는데. 유월의 입술이 달싹이던 찰나, 해수가 그녀의 골반을 붙잡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거칠게 안을 치받기 시작했다. “하윽……!” 버거운 감각에 유월의 턱이 저절로 벌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눈앞에 별이 튈 때마다 눈물도 함께 흘러내렸다. “아, 유월아.” 허리를 세차게 털던 해수가 탄성을 내뱉으며 웃었다. “네 안, 너무 좋아. 생각한 것보다 더 뜨겁고, 축축해서…….” 그가 다시금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빠르고 강한 움직임에 내벽이 굵은 선단을 따라 나왔다가, 단숨에 안쪽으로 처박혔다. 그때마다 유월의 눈앞에서 조각난 세상이 다시 새롭게 만들어지고, 다시 부서지길 반복했다. 커다란 귀두가 좁은 질 안쪽을 파헤치며 자궁을 연신 짓뭉갰다. 도드라진 핏줄 다발로 좁은 질을 구석구석 비벼 올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몸짓은 일종의 침략이었다. 잔인한 약탈이었다. 퍽! “하읏!” 다시금 절정을 맞이한 몸이 경련과 함께 물을 질질 흘렸다. 그를 보던 해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눈 풀릴 정도로 좋아할 줄 알았으면, 하아, 진작 박아 줬을 거야.” 상체를 숙인 침략자가 피가 맺힌 무릎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의 얼굴도 따라서 피가 묻어났다. 함께 트럭에 치였던 그날처럼. “병신처럼 기다리지 말고 보지부터 잔뜩 빨아 줄걸. 유월이 너는 변태니까, 그걸 훨씬 좋아했을 텐데…….” “아, 아응! 아아!” “우리 너무 멀리 돌아왔다, 그치?” 젖은 살들이 강하게 치받는 소리 사이로 그의 웃음 섞인 말이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음란한 날숨에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그냥, 처음부터 하나가 되어 버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움직임이 한계를 모르고 거세졌다. 그의 눈동자가 궁지로 사냥감을 몰아넣은 짐승처럼 번뜩인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 쿵. 뜨거운 좆이 그녀의 한계점을 단숨에 쑤셔 박았다. 내벽과 성기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맞물렸다. 잔인한 쾌감이 그녀를 꿰뚫는 동시에 뜨거운 것이 좁은 자궁 안으로 쏟아졌다. 정액이었다. “하아, 씹…….” 꿀럭거리며 그녀의 자궁에 오래도록 깊고 진한 정액을 내뱉던 그가 상체를 숙여 유월의 입술을 삼켰다. 정신없이 섞이는 뜨거운 혀로,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위로는 해수의 입가에 묻어난 자신의 피를, 아래로는 그의 정액을 받아들인다. 엉망으로 뒤섞이는 액체가 하나가 되어 스며든다. 태초부터 같은 피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느릿하게 혀가 떨어졌다. 간신히 숨을 허락받은 피식자처럼 힘겹게 눈꺼풀을 들자 달뜬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해수가 보였다. “잘 먹네, 우리 유월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칭찬하며 그가 뭉근하게 허리를 돌렸다. “전부 삼켰어. 착하기도 하지…….” 상냥한 어조와 달리 피가 새어 나온 무릎을 핥는 몸짓은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집요했다. 오랜 사정이 끝나자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유월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직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머리는 용암을 부은 것처럼 멍했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다 끝난 거겠지. 시달릴 만큼 시달렸으니, 이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윽……!” 그러나 곧 내벽으로 다시 파고드는 감각에 유월은 번쩍 눈을 떴다. 하얀 정액이 엉겨 붙은 자지가 다시 그녀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왜 계속……. 끄, 끝난 거 아니었어?” “끝나다니.” 해수가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작은 웃음을 흘렸다. “여기가 아직도 젖어 있잖아.” 해수가 그녀의 오른 발목을 잡아들었다. 허리를 살짝 물리자 잔뜩 엉겨 붙은 흰 점액질이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녀와 그가 함께 싸지른 것이었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아깝게……. 마저 먹어야지.” 해수가 열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붉은 눈가가 흥분과 기쁨으로 젖어 있었다. 눈앞에 다디단 과육을 두고 입맛을 다시는 굶주린 짐승처럼. 유월이 물기 어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해, 해수야. 차마 내뱉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모습에 좆대가리가 저절로 뻐근해졌다. 당장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듯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예뻐, 유월아.” 내 밑에서 우는 모습이 너무 예뻐. 뒷말을 삼킨 해수가 그녀의 눈가를 핥았다. 그와 동시에 몸이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항이라도 하듯 질이 다급히 조여들었으나, 이미 해수에게 완벽히 맞춰진 몸은 환영하듯 그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아, 하읏……!” 여린 여체를 눕히기 위해 아무렇게나 쓸어 버렸던 화구가 거센 움직임에 맞춰 덜컹거렸다. 유월이 시선을 돌리자 한쪽에 놓인 유리 공예품에, 풀린 눈을 한 자신이 비쳤다. 그리고 그런 제게 미친 듯이 좆을 박아 넣고 있는 도련님. 포만감 어린 미소를 짓는 해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유월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 찌릿한 통증에 유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너른 가슴팍이었다. 이게 뭘까. 유월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탄탄한 팔뚝부터 넓은 가슴팍. 깊은 잠에 빠진 듯한 해수의 예쁜 얼굴은 마치 포도주를 잔뜩 먹고 잠든 신화 속 남신 같았다. 그런데 해수가 왜 여기에……. 굳었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 이내 모든 것을 깨달은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헉 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아 다급히 입을 가렸다. 그러나 잠귀가 예민한 해수가 이를 못 들을 리 없었다. 작게 인상을 찌푸리던 해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깬 해수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맑고, 어딘가 서늘했다. “유월아.”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웃는 그는 평소와 같았다. “잘 잤어?” “…….” “오늘은 너도 나도 악몽 안 꿨겠다. 그치.” 그가 유월의 뺨에 입술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해수는 스킨십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전과 같이 느낄 수가 없었다. 유월은 황급히 해수의 품에서 벗어났다. “해, 해수야.”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어제…….” 그러나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끈적이는 아래가 이어질 말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잤다. 정말 해수랑 잤어. 자 버렸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패닉으로 굳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유월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해수의 시선이 문득 어딘가로 미끄러졌다. 반사적으로 그녀도 따라서 시선을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술. 그래, 술이 있었다. “취해서. 취해서 그런 거야.” 희망이라도 잡은 듯 유월이 말을 이었다. “너도 나도 어제 많이 취했잖아. 이건 술기운에 벌어진…… 사고 같은 거야. 그러니까.” “사고.” 해수가 작은 웃음과 함께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살짝 입매를 올려 웃는 모습은 꼭 유월이 그리 말하리라고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사고라는 건, 유월아.” 문득 해수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내 다리가 병신 됐을 때의 일을 사고라고 말해.” “……!” 심장이 쿵 떨어졌다. 유월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숨구멍이 저절로 조여 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해수는 흔들림 없는 얼굴이었다. “그건, 나는.” 절뚝. 잊고 있던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난…….” 절뚝. 눈앞에 과거의 기억들이 펼쳐졌다. 숨이 점점 거칠어지던 찰나였다. “유월아.” 해수가 유월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작은 손길만으로도 소리가 사라졌다.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유월이 색색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넌 잊을 수 있어?” 그가 고저 없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발정 난 개처럼 좆질 하고, 넌 위아래 물을 질질 흘릴 정도로 좋아했던 거. 지금도 줄줄 흐를 정도로 네 안에 싸지른 것, 전부 다.” “…….” “없던 일로 할 수 있겠어?” 날것 그대로인 말에 유월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가 저를 향해 몇 번이고 정액을 밀어 넣던 감각이 다시 펼쳐지는 것 같아 눈앞이 어지러웠다. 해수는 그 눈동자에 어린 혼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핏 그의 눈동자에 즐거운 기색이 떠올랐으나 혼란에 빠진 그녀는 읽어 내지 못했다. 마침내 유월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하, 할 수 있어.” “…….”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난 지금처럼 네 옆에 있을 거고, 널 도울 거야. 그리고…….” 유월은 착실히 제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해수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었다. 그 대상과 어떻게 살을 섞을 수 있겠는가. 해수를 위해서라도 안 될 일이었다. “그래.” 그녀가 두서없는 말을 흘리고 있을 때, 해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그가 웃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슬픔이 어려 있었다. 마치 버려질 것을 예감한 동물처럼. 유월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미안해, 해수야. 나는…….” “괜찮아, 유월아.” 해수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늘 그랬듯 다정히 등을 쓸어내려 주며 속삭였다.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은 유월의 훌쩍임에 의해 사라졌다. 해수는 조용히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밤새 제가 물어뜯었던 자리를 응시하는 해수의 눈빛이 깊고도, 여유로웠다. *** 그날 이후, 변한 것은 없었다. 유월은 그를 도왔고 해수는 미안해하면서도 그녀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어깨에 기대고, 몸을 맡기는 과정에서 그녀가 걱정했던 성적인 뉘앙스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 그날 일을 가위로 오려 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뭔가 달랐다. ‘고마워.’ 하며 웃는 해수의 미소에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월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해수가 저와 거리를 두고 있다. 유월은 초조했다. 자신을 피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해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잘 웃어 주었고, 그녀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자기 전 안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정한 속삭임도 함께이지 않은가. 그래서 유월은 차오르는 물음을 억눌렀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한 건 유월, 그녀 자신이었으므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본격적으로 더위가 찾아왔다며 뉴스에서 떠들어 대던 날, 예술 대학 앞에서 유월은 해수에게 말했다. “나 오늘 잠깐 너희 집에 다녀올 거야.” “우리 집?” “응. 이모님들께서 반찬을 챙겨 두셨다는데, 사모님 파티 준비로 일손이 부족한가 봐. 날도 더워서 대중교통 이용하기도 좀 그렇고, 내가 대신 가져와야 할 것 같아. 집 들렀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올게.” 학교에서 본가로. 그리고 오피스텔에 들렸다가 다시 학교로. 결코 단순하지 않은 거리였으나 유월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로 돌아왔다. 오직 해수를 돕겠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그 번거로움을 감수했다. 전부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는 자신의 결심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강박적이기까지 한 노력이었다. 해수는 그런 유월을 막지 않았다. 그게 전부 제 의지임을, 해수도 알기 때문이라고 유월은 생각했다. “작업 끝나갈 때쯤 전화해. 금방 데리러 올게.” “응. 수업 잘 들어, 유월아.” 다정한 인사와 함께 해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월은 곧장 돌아가지 않고, 잠깐 그 앞에서 서성였다. 그녀가 강의실까지 데려다줄 때, 그는 종종 작게 난 강의실 창문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곤 했다. 몸을 숙여 키보다 낮게 난 창문에 얼굴을 맞추고선 장난스럽게 ‘고마워.’ 하고 입 모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날 이후, 해수는 그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유월은 혹시나 해 머뭇거렸다. 장난을 가정해 다시 그를 불러 볼까 싶었지만, 해수를 향해 다가가는 학생들을 보고선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걸 보니, 꽤 친해 보였다. 하기야 조소과 특성상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일이 잦았다. 해수는 다리가 불편했으니,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해수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해수한테 친구들이 있었구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해수만큼 이 건물에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에 비하면 유월은 딱히 이렇다 할 친구들이 없었다. 해수를 제외하고는. 친구를 사귈 자격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용기도 없었으니까. “…….”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자각한 유월은 이야기 나누는 해수를 잠시간 지켜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벌써부터 냉방을 가동하기라도 한 건지,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 수업이 끝난 후, 유월은 곧장 해수의 본가로 향했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월이 왔어? 세상에, 더 예뻐졌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제가 자주 와서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휴, 한창 바쁠 대학생이 돕기는 뭘 도와. 알아서 잘 커 주면 그게 도와주는 거지.” 아주머니가 넉살 좋은 웃음을 흘렸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땐 가만히 웃는 게 제일 좋았다. 아주머니가 조용히 미소 짓는 유월을 향해 농담인 척 하소연을 시작했다. “말이라도 고마워. 날이 갈수록 더 바빠지는 것 같다.” “사모님 일 때문에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절레절레 내젓는 고갯짓에서 지긋지긋한 기색이 엿보였다. 재기를 널리 알리려는 듯 천희영은 파티를 열거나 빠짐없이 참가했다. 화려한 수식어 뒤에 있는 사람들의 고됨은 당연히 천희영의 알 바가 아니었다. “말도 마. 허구한 날 파티에, 행사에. 아주 죽어나겠어. 슬럼프일 때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면 요새는 육체적으로 힘들어. 오죽하면 그때가 그리워서 원. 그런데 있지. 얼핏 들으니 다른 사람이 대신 작품을 만드는 건 아니냐는 말이 있더라고 글쎄?” “아줌마.”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유월이 몸을 굳혔다. 이쪽으로 다가오던 천희영이 유월을 발견하고선 붉은 입매를 끌어 올렸다. “유월이도 있구나. 여긴 웬일이니?” “안녕하세요, 사모님.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이모님들께서 반찬 줄 게 있다고 하셔서 잠시 들렀어요.” 해수의 이름은 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의 신경을 긁으면 곤란했으니까. “그래, 먹는 게 중요하지. 가뜩이나 아픈 아인데. 안 그래도 해수 먹을 것 좀 챙겨 달라고 했는데, 잘 전달된 모양이네.” 그러나 대학 진학 이후, 천희영은 부쩍 해수의 건강을 신경 썼다. 어머니가 아들을 살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유월은 어딘가 께름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공부는 잘되어 가고 있니? 4학년이라 바쁘진 않고?” “사모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잘되고 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뭘. 허구한 날 파티만 해도 너 하나는 충분히 챙길 수 있어.” 천희영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유월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천희영의 손이 천천히 유월에게 다가왔다. 뺨이라도 때리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유월아.” 그녀의 손이 내려앉은 곳은 유월의 어깨였다.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 “그러니까 네가 해수 잘 챙겨 줘. 알았지?” 유월의 어깨를 다독인 천희영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아주머니가 괜히 저 때문에 미안하다며, 어서 어머니께 가 보란 말과 함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유월은 문득 옷소매가 살짝 내려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목덜미에 해수가 깨물었던 잇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는 것도. 유월은 황급히 옷을 끌어 올렸다. 해수와 관계를 맺은 지도 수일이 지났다. 목덜미에 자리 잡았던 붉은 울혈도 얼추 사라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못 봤을 거야. 유월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 부엌에서 어머니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유월을 발견하곤 덤덤히 인사했다. “왔구나. 생각보다 늦었네.” “앞에서 사모님을 마주쳐서……. 반찬은 어디 있어요?” “저기에 정리해 둔 거 그대로 가져가면 돼.” 유월은 보자기로 싸 놓은 반찬을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니만큼 어머니에게 안부를 물을까도 했지만, 힘들어 보였기에 조용히 물건만 가지고 나갈 생각이었다. “유월아.” 문득 어머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월이 해수를 따라 오피스텔로 나간 이후, 모녀 사이는 어쩐지 서먹해졌다. 그런 어머니의 부름이 조금 낯설었던 유월이 몸을 돌렸다. “……약은 잘 먹고 있지?”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유월은 “뭘…….” 하고 되물으려다 곧 “아.” 하고 깨달았다. 대학 입학 후로 어머니는 꼬박꼬박 영양제를 보내주었다. “잘 먹고 있지?” “꾸준히는 아니지만 잘 먹고 있어요.” “빠뜨리지 말고 잘 먹어. 너…… 가뜩이나 몸도 안 좋잖아.”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유월의 생리 불순을 말하는 것이었다. 초경 때부터 유월은 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편이었다. 해수의 계속된 질 내 사정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은 이유였다. “무슨 뜻인지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챙겨 먹고 있어요.” “…….”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유월이 부엌을 나설 때까지 어머니는 딸의 눈을 마주 보려 들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유월은 별다른 말 없이 집을 나섰다. 여전히 햇볕은 뜨거웠고, 양손에 묵직하게 들린 짐은 무거웠다. 그래도 저를 챙겨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아주 조금은, 기뻤던 것도 같다. 오피스텔에 들러 가져온 반찬을 정리한 뒤, 유월은 다시 학교로 향했다. 전화가 오면 바로 해수를 데리러 가야 했으니, 학교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 언니!” 교정을 걸어가다 지현을 마주쳤다. 함께 있던 동기들이 “누구야?” 하고 되물었다. 유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랑 같이 조별 과제 한 언니야. 내가 먼저 같이하자고 들이댐.” “그럴 줄 알았다. 하여튼 저 오지랖.” 능청스러운 지현의 말에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유월을 향해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고 인사했다. 유월은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조별 과제를 언급해 준 덕분에 유월이 ‘조소과 옆 그 애’라는 건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언니, 어디 가요? 수업 다 끝났는데.” “아, 기다릴 사람이 아직 학교에 있어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학교에서요? 으악, 재미없겠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던 지현이 문득 물었다. “언니, 괜찮으면 우리랑 놀다가 갈래요?” “……어?” “학교에서는 딱히 시간 때울 만한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나, 언니랑 이야기도 더 해 보고 싶은데.” 지현이 애교스럽게 물었다. “과제도 잘 끝냈잖아요. 이런 조원들도 흔치 않은데, 그 기념으로요.” “하지만 네 친구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애들도 좋아할 거예요.” 지현이 기다렸다는 듯 “괜찮지?” 하고 되물었다. 친구들이 오히려 사람이 많은 게 더 재밌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네?” “…….” 유월은 망설였다. 저들의 친절함은 유월이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유월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활짝 웃으며 캠퍼스를 거니는 저 웃음이 부러웠다. 다정히 팔짱을 끼며 또래 친구들과 투닥거리는 모습은 감히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이었다. 문득 해수가 과 동기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떠올랐다. 타인과 눈만 마주쳐도 움츠러드는 저와 달리, 해수는 타인과 익숙하게 대화를 나눴다. 공식 행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공식 행사나 파티에는 참석하는 편이었기에, 저보다는 더 능숙한 게 당연하겠지만……. 모르는 척했던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가고 싶었다. 다른 건 바라지 않고, 그냥 이야기만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해수가 그랬듯이, 나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럼 나 잠깐만 통화 좀 하고 올게.” 자리를 옮긴 유월이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냈다. 짧은 통화음이 지나간 후, 곧장 목소리가 들렸다. ―응, 유월아. “저, 해수야.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혹시 바빠?” ―아니야. 잠깐 쉬는 중이었어. 왜? “그게…… 전에 말했던 과제 같이했던 후배 기억나? 걔가 같이 놀자고 해서. 오래 노는 건 아니고, 너 끝날 때까지만 얘네랑 같이 있으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덧붙이면 덧붙일수록 이상하게 변명처럼 들렸다. ―해수야. 그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분명 ‘해수야.’ 하고 다정히 부르는 목소리였다. 잠깐만. 상대방을 향해 짧게 대꾸한 해수가 다시 대답했다. ―미안, 유월아. 애들이 불러서 나 이만 가 봐야겠다. “아, 그, 그럼…….” ―응, 재밌게 놀아. 돌아온 것은 순순한 승낙이었다. 도리어 유월이 당황해 되물었다. “괜찮아? 정말로?” ―응. 정말 괜찮아. 가끔은 그런 곳도 가 봐야지. “…….” ―난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고 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금 ‘권해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녀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이제 정말 끊어야겠다는 말에 유월이 허겁지겁 대꾸했다. “해수야. 끝나면 전화해. 알았지?” 전화해야 돼. 나 학교 앞쪽에 있을 거니까, 바로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약속이라도 받듯, 유월이 재차 덧붙였으나 해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전화를 끊었다. 지현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성공이에요?” “……응, 그런 것 같아.” 유월의 말에 지현이 신난다는 듯 앞장을 섰다. 그녀의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핀잔하면서도 유월을 자연스럽게 무리에 끼워 주었다. 꿈꿨던 일인데도 유월은 따라가는 내내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목 안에 잘 집히지 않는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기껏 해수에게 승낙을 받고 와 놓고도, 유월은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만 쥐었다. 언제라도 전화가 오면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당장이라도 그에게 갈 수 있도록. 그러나 장소가 카페에서 술집으로 바뀔 때까지도,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무음으로 해 놓은 것도 아니고, 알림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쯤이면 연락 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함께 술을 마시던 지현과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누군가를 반겼다. “와, 오빠 진짜 왔네요?” “이 자식들이, 오라고 해 놓고 왜 이제 와 모르는 척이야?” 낯선 목소리에 유월이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본 얼굴이었다. “안녕. 또 만났네.” “……아.” “사탕은 잘 먹었어?” 그제야 떠올랐다. 해수를 데리러 가던 날, 미대 건물에서 마주쳤던 선배였다. 앞치마를 벗고 모자를 쓴 그는 단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난기 가득해 보였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예요?” 지현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와, 이 오빠 모르는 척하더니, 이미 안면 튼 상태였잖아?” “왜?” “아니, 저 오빠가 나한테 먼저 물어봤거든. 유월 언니 남자 친구 있는지 물어봐 달라면서……. 어쩐지 순순히 온다고 하더라. 소름. 다 계획된 거였어.” 지현의 말에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참 고맙다고 대꾸하며 유월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의 옆자리에 있던 아이들이 티 나지 않게 앞머리를 정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그가 곧장 유월에게 물었다. “오늘은 웬일로 여기 있네. 해수한테 안 가 봐?” “……작업할 게 있다고 해서요. 기다리고 있어요.” “남자 친구도 아니라고 들었는데, 정성이네.” 웃으며 건네는 말에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해수는 남자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선을 그은 건 유월 본인이었다. “사탕은 잘 먹었어?” 그때, 그가 메뉴판을 건성으로 넘겨보며 물었다. 유월이 “네?” 하고 되묻자 그제야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한다. “잘 먹었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어서.” “아…….” “설마 진짜 버렸어?” “아, 아니요. 버리진 않았고,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먹었어요.” “다른 사람? 누구. 권해수?” 유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의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반응이 뜨거워졌다. 조소과 남신과 아는 사이냐며 묻는 목소리에, 유월이 머뭇거렸다. “남신 말고 여기 있는 사람한테 집중 좀 해 주지?” “아, 질투하지 마요, 오빠. 그거 엄청 추해요.” “남신 앞에서 난 일개 시민이야? 이거 좀 서러운데.” 그가 전혀 서운하지 않은 얼굴로 씩 웃으며 턱을 괴었다. 잘난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몇몇 여자아이들은 수줍게 그를 힐끔거렸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해수에서 그에게로 옮겨졌다. 기회라 생각한 유월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다. 취한 사람들과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틈에서, 유월은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음만 계속될 뿐 해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늦게 받는 일은 있어도,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은 없었는데. 불안한 마음이 점차 커졌다. 혹시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해수에게 몇 번 더 전화를 걸던 유월은 이번엔 장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사님. 저 유월이에요. 갑자기 죄송해요.” ―무슨 일이지? “그, 다름이 아니라 해수가 연락이 안 되어서요. 작업 끝나면 제가 데리러 가기로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혹시 아시는 거라도 있으시다면.” ―데리러 가기로 했다고? 장 기사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알아서 가겠다고 연락받았다. 작업이 길어질 것 같다던데. 너도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고. “…….” ―너는 연락 못 받았니?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알아서 가겠다니. 분명 데리러 가겠다고 했는데. 몇 번이나 말했는데……. 입만 뻐끔거리던 유월은 전화가 끊어졌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저 머리가 멍했다. 장 기사님께 미리 말을 전했다면, 제게도 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입술을 깨물던 유월은 다시 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연결음을 따라 유월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 미술 대학,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 너머로 작은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대 건물은 한밤에도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넘쳐 나는 과제를 위한 학교 측의 배려였으나 가끔씩 그 안에서 다른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야, 나 왔다!” 누군가 덜 닫힌 문을 발로 밀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양손에 들린 검은 봉지가 묵직했다. “대박, 진짜 안 들켰네?” “들키면 좆되는 건데 몰래 들어왔지. 발끝에 존나 힘줘서 종아리가 다 아프다.” 너스레와 함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학생이 봉지에서 캔 맥주를 꺼냈다. 그러곤 둥글게 모여 앉은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건넸다. “너희들도 이거 다 받았으니까 공범이다. 나만 죽는 거 아니야.” “야, 괜찮아. 말만 안 해서 그렇지, 선배들도 다 이러고 졸업했어.” “하여간 회화과 새끼들은 얌전히 처마실 것이지. 왜 우리까지 이 지랄을 하게 하냐.” 투덜거리면서도 규율을 어기는 게 내심 재밌었는지, 하나같이 묘하게 들뜬 얼굴이었다. “에이, 그래도 설마 무슨 일 생기겠어?” 상기된 낯으로 캔 맥주를 따던 여학생 하나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쏠렸다.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늘어진 조각상과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모두의 시선에도 해수는 가벼운 웃음을 띄울 뿐이었다. “야, 괜히 해수 부담스럽게 하지 마.” “뭐 어때. 그냥 하는 말인데.” 동기의 나무람에 여학생이 가볍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치, 해수야?” 그러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해수의 캔 맥주를 대신 따 주며 웃었다. 스치듯 손이 닿은 순간, 해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마워.”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캔을 건네받았다. 여학생이 수줍게 웃었다. “그나저나 진짜 놀랐어.” 술이 하나둘씩 들어간 후, 한 학생이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물어본 건데, 해수가 갑자기 끼겠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맞아. 그건 그래.”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동기들이 일제히 해수를 바라보았다. 조소과 권해수는 같은 과 내에서도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장애가 있는 권성 그룹의 외동아들. 충분히 관심을 끌 만한 타이틀이니, 입학 때부터 그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학생 대다수는 해수에게 ‘베푸는 입장’이라 여겼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들어 있기 마련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화제의 인물인 권해수를 마주한 이들은 그게 편견이란 걸 깨달았다. 권해수는 자신의 장애를 숨기지 않았다. 비웃어도 그만, 안 비웃어도 그만이라는 듯 고고하게 행동했다. 벽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학교 사람들과는 일절 대화를 섞지 않았다. 도움을 받아도 그때만 옅게 웃어 줄 뿐, 그 이상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권해수를 이렇게 불렀다. 살아 있는 석고상. 그 석고상이 작고도 시시한 음주 파티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의아함보다는 신기함이 더 컸다. 혹시나 권성과 친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 이들도 있었다. “술 싫어하지 않아? 한 번도 술자리 참석하는 걸 못 본 것 같은데.” 그러자 해수가 옅게 웃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야.” “왜? 술 못 마셔?” “그것보다는…….” 해수가 말끝을 늘렸다. 살짝 미끄러진 시선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제어가 잘 안되어서, 조금 힘들거든.”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실수할 순 없잖아.” 의미가 생략된 말이었으나 학생들은 다른 의미로 이해한 듯했다. 이해한다는 둥 서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대결이라도 하는 듯 서로 만취했을 때의 에피소드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틈에서 해수는 조용히 캔을 옆에 내려놓았다. 술을 위해 이 자리에 낀 게 아니었으니까. “해수야, 넌 안 마셔?” 그러자 옆자리의 여자 동기가 조용히 물었다. 상기된 얼굴로 보아, 작게나마 건배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응, 속이 별로 안 좋아서.” “아……. 한 잔도 어려워? 나 손이 좀 심심한데.” “…….” “정말정말 한 잔도 힘들어?” 동기가 살갑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입가에 습관적인 미소를 단 해수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정말이지…… 수작이 뻔히 보이는 짓이었다. 대충 맞춰 주면 더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의 알코올도 입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적당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담았던 알코올이 행위 내내 입안에 맴돌았다. 몇 년을 참아 왔는데, 그 향조차 방해였다. 결국 키스 대신 그녀의 보지를 실컷 빨긴 했지만, 아쉬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롯이 그녀의 맛을 느끼기 위해 아껴 놓은 것을, 그걸 고작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의 건배 하나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 사이엔 어떠한 방해도 없어야 했다. “미안, 힘들 것 같아.” “아…….” 해수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말 거절할 줄 몰랐는지 동기가 민망해하며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제게 닿은 시선이 거둬지자 자연스럽게 미소도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눈동자에 서늘한 권태가 어렸다. “…….” 그가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말아 쥐었다. 하얗고 길어서 고우면서도 뼈마디가 툭툭 불거져 남성적인 손가락이 무언가를 쥐는 모양새로 변했다. 이내 그가 무언가를 찧듯 툭, 툭, 가볍게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그때마다 손등 위로 돋아난 핏줄이 꿈틀거렸다. “해수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기의 부름에 그의 손이 멈췄다. 동기가 옆을 눈짓했다. 해수의 핸드폰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울리던데.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러자 해수가 가볍게 웃었다.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진작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이. “안 받아도 되는 전화야.” “응? 안 받아도 돼? 누구길래?” “아, 뭐 그런 건가? 스토커?” 흥미로운 주제를 잡은 것처럼 동기가 눈을 빛냈다. 순식간에 시선이 해수를 향해 쏠렸다. “그냥.” 긍정하는 대신 조용히 미소만 짓던 해수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버릇 좀 들이려고.” 그가 곤란하다는 듯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겁먹을까 봐 상냥하게 대해 줬는데 영……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해수의 말에 역시 잘생긴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저희끼리 환호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는 사람만 아는 다른 세상 정보를 권성의 외동아들에게서 직접 들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급속도로 해수에게 호감을 느낀 동기들이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음성들 속에서 해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지금쯤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초조해하며 발을 동동 구를까, 아니면 그 예쁜 눈에 눈물을 가득 매달고 있을까. 아아. 그녀의 눈물을 떠올리자 문득 목이 말랐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숨결마저 한입에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이미 발목에 사슬이 묶여 있는 줄도 모른 채, 제게로 돌아올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 참, 손이 많이 간다니까. 우리 유월이는. 느릿한 숨을 내쉬는 해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유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해수가 이토록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일부러 받지 않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제가 걱정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해수였으니까. 그렇다면 왜 제게는 연락하지 않은 걸까? 내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전화하면 바로 가겠다고 분명 말했는데, 왜 장 기사님한테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과 현재의 상황이 어긋나, 결론이 내려지질 않았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따라 불안함도 점점 커져 갔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유월은 발신인도 확인하지 않은 채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해수야? 지금 어디인……”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돌아온 목소리는 예상과 훨씬 벗어나 있었다. 발신인은 천희영이었다. ―또 무슨 수작질을 부렸어? 한번 내 인생 망쳤으면 됐지, 또 망치려고 들어? 네까짓 게 감히?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날카로운 유리를 긁는 소리 같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 ―그걸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네?” ―해수가 미술을 관두겠다잖아! 그게 너 아니면 또 누구 때문이야! 옆에 붙여 놨더니 애 마음 하나 못 잡고 이 사달을 내? 이유를 알 수 없는 책망이 돌아왔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둥, 너 하나쯤 없애는 건 일도 아니라는 둥 살벌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유월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해수가 미술을 관두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타인에게서 전해 들었다. 지금껏 그 일에 대해 제게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정보들은 흘러들어 오는데, 둑으로 막아 둔 것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멍했다. “여기서 뭐 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퍼뜩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먹먹한 귓가로 주변의 소음이 쏟아졌다. 미대 건물에서, 술자리에서 유월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던 남자 선배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와서 찾으러 왔어. 주변이 밝아도 혼자 있기엔 좀 위험할 텐데.” “아…… 죄송해요. 잠깐 통화하느라.” “전화 오래 걸려? 안 받으면 좀 이따 해도 되지 않나.” “그게…….” “어, 잠깐만.” 유월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그가 문득 가까이 다가왔다. “너한테서 달달한 냄새난다.” 그가 웃으며 내뱉은 말에 유월의 뺨이 굳었다. “난 널 아무한테나 질질 흘리는 애로 키운 적이 없는데.” “다른 놈들 보면서도 아래를 적셨어? 그 새끼들도 맡을 수 있을 만큼 단내를 질질 흘렸나?” 순간 해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유월이 그를 힘껏 밀쳤다. “하, 하지 마세요!” 지나가던 주변 사람들도 돌아볼 만큼 큰 목소리였다. 당황한 그가 주변을 향해, 그런 거 아니라고 아는 후배라고 과장된 해명을 했다. 시선이 거둬지고 나서야 그가 어이없다는 듯 유월을 내려다보았다. “전담 냄새가 밴 것 같아서 장난친 건데. 좀 민망하다. 무슨 장난을 못 치겠네.” “…….”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너한테 아무 냄새도 안 나. 난다고 해도 여기 담배 냄새가 더 심해서 맡을 수도 없어.” 그러니 일단 들어가자고, 아이들이 걱정한다는 말이 이어졌지만, 그녀의 귀엔 닿지 못했다. 냄새가 정말 난 거면 어떡하지. 해수한테 약속했는데. 해수한테만 젖겠다고, 아무한테나 단내를 흘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몸을 움츠린 유월은 자꾸만 팔을 쓸어내렸다. 몸에서 나는 단내가 옷에도 밴 건 아닐지 신경 쓰였다. 전처럼 아래가 축축하게 젖은 건 아닌지, 지금 당장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해수에게 당당해질 수 있었다. 해수에게 약속했으니까……. “……정유월? 너 얼굴이 왜 이래?” 그가 돌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아픈 거야? 왜 이렇게 창백한……. 야!” 그러나 주변의 소음이 다시금 멀어지고, 쿵, 무언가 내리찍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쿵. 쇠로 만든 무언가로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절뚝. 절뚝. 절뚝절뚝절뚝절뚝절뚝절뚝절뚝. “……저, 저 이만 가 볼게요.” “뭐? 간다고? 어디를……. 야!” 황당해하는 남자를 뒤로한 채, 유월은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를 부르는 외침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가야 했다. 그의 곁으로. *** 해수는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저녁 9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왁자지껄한 흐름 속에서, 해수는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을 가볍게 뒤집었다. 수많은 부재중 통화 위로 장 기사의 연락이 와 있었다. 해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해수가 미지근해진 맥주 캔을 손에 쥐었다. “어? 해수야, 술 마셔도 괜찮아?” 그러기 무섭게 동기가 물었다. 망설임을 들킨 것처럼, 잠깐 놀란 눈을 하던 해수가 멋쩍게 웃었다. “다들 마시는데 나만 안 마시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하긴. 너무 빼는 것도 보기 안 좋아.” “그래그래. 조금만 마셔.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아, 잠깐! 우리 방금 사 온 맥주 남았지? 다 식은 거 말고 이거 마셔.” 진작에 술기운이 오른 동기들이 기다렸다는 듯 재촉했다. 반짝이는 눈빛들에선 그가 술 마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어떤 기대감까지 어려 있었다. 이를테면 권성 그룹 외동아들의 술버릇은 무엇일까 하는 아주 고리타분한 호기심 같은. 해수는 주저하는 듯 캔 맥주 입구를 엄지로 쓸었다. 시끄러운 말들 속에서도 예민한 청각이 하나의 소리를 찾아냈다. 시간이 되었다. 그가 표면에 맺혀 있는 물방울을 쓸었다. 용기라도 내듯, 입가로 가져간 순간이었다. “해수야!” 다급한 말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낯선 이였다. 그러나 조소과 학생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뭐야? 쟤가 왜 여기 왔어?” “해수 네가 불렀어?” 누군가 물었으나 해수는 대답 대신 놀란 눈으로 유월을 응시했다. 쉬지도 않고 달려온 듯, 숨을 거칠게 내쉬던 유월이 해수의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에 들린 맥주 캔을 잡아 들었다. 그러곤 흥분한 얼굴로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아픈 애한테 술을 먹이면 어떡해요?” “네? 뭐라고요?” 동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저기요.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왜 우리한테 화를 내요? 우리 과 학생도 아니잖아요. 마음대로 들어온 건 그쪽 아닌가?” “……해수 몸이 좋지 않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그건 알지만……. 아니, 그쪽이 해수 어머니라도 돼요? 무슨 참견인데요? 막말로 우리 과 학생도 아니면서 이렇게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돼요? 그동안 다 참고 있었던 거지, 거슬려하는 사람 한둘 아니었거든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유월의 말 한마디에 억지로 술을 먹인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학생들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왜 저래?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괜히 찔려서 저러는 거 아니야? 애초에 잘못은 본인한테 있으면서. 평소라면 뒤에서 속삭였어야 할 말들이 거침없이 유월을 향해 쏟아졌다. 꽉 쥔 주먹이 천천히 떨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귀에 심장을 가져다 대기라도 한 것처럼 쿵쿵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유월이 더듬거릴 때였다. 해수가 그만 말하라는 듯 팔을 뻗었다. 그가 난처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유월이 잘못 아니야. 내가 걱정시켜서 그래.” “……해수야.” “분위기 망쳐서 미안해, 얘들아. 난 이만 가 볼게.” 당사자인 해수가 그리 말하니, 과 아이들도 더 덧붙일 수 없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빙그레 웃은 해수가 “가자, 유월아.” 하고 유월을 이끌었다. 유월은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부축했다. 절뚝거리는 그의 걸음에 맞춰 작업실을 나왔다. “야, 진짜 웃긴다, 쟤.” 그리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비난이 쏟아졌다. “생긴 건 순하게 생겨 가지고, 완전 미친 애였잖아? 성깔이, 와.” “이쯤 되면 해수가 붙잡혀 사는 게 맞는 듯. 누구 때문에 해수가 저렇게 됐는데. 뻔뻔하지. 해수만 불쌍하다.” “내가 봤을 땐 이 기회에 권성 쪽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은데. 가정부 딸에서 권성 안주인. 인생 역전이지. 까놓고 말해서, 처음부터 계획된 걸 수도 있다고 본다.” “아, 이 미친 새끼! 이거 완전 개또라이 아니야!” 분명 바깥에 아직 그들이 있는 걸 아는데도, 누구 하나 입을 다물지 않았다. 거짓과 진실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귓가로 쏟아졌다. 유월은 우뚝 선 채, 그 비난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제가 반박할 주제나 될까. 애당초 이 모든 잘못은 유월에게 있었다. 그저 자신의 불안함이, 해수가 또다시 술을 입에 댔다는 사실이 과한 반응을 불러온 것이다. 미친 건, 저였다. “유월아.”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말들이 서서히 줄어들 때까지, 유월을 가만히 지켜보던 해수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그에 유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뭘 몰라서 하는 말들인 거, 너도 잘 알잖아.” 다정한 말과 달리 해수는 제 눈을 보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분명 안듯이 그를 부축하고 있는데도, 해수와 멀리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입술이 떨렸다. “이제 가자, 너무 늦었다.” 해수가 먼저 몸을 움직였지만, 유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입술이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왜 나 안 불렀어?” 조용한 물음에 해수가 움직임을 멈췄다. “데리러 가겠다고 했잖아. 내가 네 연락 기다리고 있는 거, 누구보다 제일 잘 알면서…….” “…….” “왜 장 기사님한테는 혼자 간다고 한 거야? 너…… 미술도 관두겠다고 했다면서.” 그 중요한 일을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어? 나한테는, 적어도 나한테는 말할 수 있었던 일이잖아. 너에게 나는.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잖아. 생략된 말을 해수 또한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여전히 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수야.” 유월은 입술을 깨물다가 참았던 말을 꺼냈다. “혹시 너…… 나 피해?” 그 말에 해수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아주 찰나, 해수의 입술이 달싹였다가 다시 다물리는 것이 보였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애써 참아 내기라도 하는 양. 빠르게 망설임을 거둔 그가 습관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월아,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시선이 거두어졌다. 지금 그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유월은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말해 줘, 해수야.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 “말해 주면 고칠게. 내가, 내가 뭐든지 고칠게.” “……네 문제가 아니야, 유월아.” “그럼 뭔데!” 유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뒤늦게 깨달은 유월이 초조함으로 튀어오르는 목소리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알려 줘, 해수야. 나……. 나 정말 힘들어서 그래.” “…….” “네가 피하면, 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유월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부탁이야, 해수야.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유월아.” 나지막한 부름에 유월의 입이 멈췄다. 그녀의 말이 멎자, 해수가 몸을 완전히 제게로 돌렸다. 과실에서 새어 나오는 눈빛이 해수의 얼굴을 비추고,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넌 아무런 잘못도 없어.” 그는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슬퍼 보이기도 하고, 얼핏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문제는 나야.” “……뭐?” 생각지 못한 말에 유월이 멍하니 입을 달싹였다. 작은 머리로 힘겹게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그녀를 향해 해수가 친절히 귓가에 뒷말을 흘려 주었다. “넌 아니겠지만…….” “…….” “내가 더 이상 널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졌어.”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하기엔, 몸이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욕에 젖은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해수를.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때와 같은 눈이었다. “빨고 싶어.” 그 눈으로, 해수가 저를 보고 있었다. “넌 좋아서 엉엉 울고, 난 개처럼 위아래 흐르는 물을 받아먹었던 그날처럼.” “……해, 해수야.” “그게 생각나서 도저히 집중할 수 없어. 머릿속에 그날 일만 생각나. 모든 작품이 전부 너로 변해. 그럼 난 손에 쥐고 있던 걸 전부 내려놓고, 미친 듯이 내 좆만 흔들어.” 해수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훔쳐봤던 그날처럼.” “……!” 날것 그대로의 속삭임을 들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배 속에 다시 뜨거운 것이 뭉쳤다. 그가 말했던 단내가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무릎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미 다 아문 무릎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해수야, 나는…….” “하지만 유월이 넌 아니잖아.” 그가 힘겹게 이어지려던 유월의 말을 잘랐다. “넌 그날 일을 없었던 일로 하길 원한다고 했지만, 난 그러지 못해. 못 하겠어, 유월아.”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어떤 남매가 서로에게 욕정을 품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게 맞아. 이어지는 말에 유월은 눈을 깜빡였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러는 게 맞는다니. “유월아.” 해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더는 날 도와주지 않아도 돼.” “……뭐?” “나 때문에 너도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 알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어. 네가 곁에 있어 줬으면 했으니까.” 그가 헝클어진 유월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그녀의 멍한 눈동자에 어린 날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해수의 얼굴이 담겼다. “하지만 그게 전부 내 욕심이라면, 널 놔주는 게 맞겠지.” 다정히 뺨을 쓸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 팔을 붙잡고 있는 유월의 손 위로 겹쳐졌다.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감싸고선 떼어 냈다. 그 순간, 멈춰 있던 유월의 사고가 다시 움직였다. 유월이 허겁지겁 해수의 팔을 감싸 쥐었다. “아니야. 아니야, 해수야.” “유월아.” 타이르는 듯한 부름에 유월이 재차 고개를 저었다. 강하게 힘을 주면 그가 힘들어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힘을 뺄 수 없었다. 일생의 절반을 해수 곁에서 살아왔다. 그는 제가 보살펴야 할 도련님이자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죄악이기도 했지만 삶의 방향이기도 했다. 악몽과 환청에서 구해 주는 구원자였다. 해수가 없다면 저는……. 상상만 해도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았다. 그래, 권해수는 정유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가해자인 정유월이 피해자인 권해수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나는,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해수야.” 그가 없으면 정유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짓밟아 버린 그 꽃처럼, 힘없이 스러질 존재였다. 그녀가 재차 도리질 쳤다. “그러지 마, 해수야. 욕심 아니야. 그건, 그건.” 그녀가 더듬거리며 적당한 이유를 떠올렸다. 그러나 모든 사고가 불안감에 잠식되어 버렸는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생각해 내야 했다. 해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저도 해수의 곁에 있을 수 있고, 해수도 미술을 관두지 않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그때였다. 저를 내려다보던 해수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가던 유월이 제 무릎을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너한테서 달달한 냄새 난다.” 하필 그 말이 생각난 건, 우연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아니,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해수를 잡을 수만 있다면. 유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나도 그래.” 그녀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도 계속 생각했어.” “…….” “지, 지금도 젖었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젖은 거야.” 그녀의 말에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고요한 눈은 처음 만났던 그날을 닮아 있었다. 그에 유월은 더욱 초조해졌다. 왜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거야. 지금도…… 저를 빨고 싶다고 했으면서……. 감내하듯 그의 시선을 버티고 있을 때, 해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 취했어, 유월아.” 인상을 찌푸린 채 미약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그는 허탈해 보이기도 했고, 반쯤은 체념한 듯도 보였다. “저번처럼 후회할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아니야.” “또 상처받고 싶지 않아. 나 정말 못 버텨, 유월아.” “아니야!” 유월이 강하게 대답했다. 최근 들어 이보다 더 확신에 찼던 순간이 있었던가. “나 한 잔도 안 마셨어. 정말 제정신이야.” 조급해진 사고가 이유를 되짚었다. 해수는 어쩌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닐까. “……확인하면 되잖아.” 생각이 미치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네가 직접 확인해 줘.” 그 말에 해수의 눈이 다시 깊어졌다. 입가의 작은 호선이 사라졌을 뿐인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어디를.” 되묻는 목소리가 어쩐지 음습했다. “어디를 확인했으면 하는데.” 유월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옷을 입고 있는데, 발가벗겨진 채 그의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유월이 힘겹게 내뱉었다. “내 아래…….” “…….” “내 아래가 젖었는지, 확인해 줘. 그날처럼.” 세차게 떨리는 목소리가 절벽 끝에 선 초식 동물처럼 위태로웠다. 그제야 해수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상체를 낮췄다. 그의 체취를 닮은, 서늘한 향이 가득 들어찼다. “괜찮겠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족끼리는 이런 짓 못 해, 유월아. 한번 시작하면 난 멈출 생각이 없고.” “…….” “그래도 괜찮아?”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쥔 기분이었다. 놔줄까, 말까.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쥔 채 그리 묻고 있는 것 같다. 도망갈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응.” 하지만 대답은 하나였다. “괜찮아, 해수야. ……해 줘.” 속내를 실토하듯 중얼거린 말에 해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유월은 고개를 숙인 채 해수의 팔만 붙잡았다. 해수야, 제발. 제발 가지 마. 속삭임을 멈추지 않으며. “유월아.” 다정한 물음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똑바로 서 있는 해수의 다리가 들어왔다. 자신이 망가뜨린 다리가. “집에 갈까?” “…….” “우리 집으로 가? 응?” 그가 재차 물었다. 제 뺨을 작게 간지럽히는 그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어린 것처럼 보였으나, 알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정신은 망가져, 과거와 현실을 분간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유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차게 끄덕일수록 그의 입가에 어린 웃음은 더 짙어졌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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