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화
01.
“얼른 짐만 챙겨서 나와. 시간 없어.”
분주한 말소리에 유월은 몸을 움츠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밤이 되면 누군가 욕설과 함께 현관문을 두드렸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절대 문을 열어 줘선 안 된다고 당부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어머니가 먼저 문을 열어 주었고,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짐은 다 챙겼어?”
“예. 다 챙겼어요. 아이 짐도 챙겼고요.”
‘아이’라는 말에 모자를 눌러쓴 중년 남성이 유월을 바라보았다. 유월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그가 혀를 찼다. 그러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얼른 나와. 애 아빠가 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며.”
“예, 예. 유월아, 얼른 가자.”
어머니가 유월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월은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탔다.
“엄마,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아빠는요?”
유월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사를 하는 것처럼 짐을 한가득 쌌는데, 아버지는 함께 가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그러자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어머니가 말했다.
“이사 가는 거야.”
“이사?”
“응. 엄마랑 유월이,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안전한 곳으로.”
안전한 곳을 힘줘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유월은 아직 의문이 가시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품속으로 저를 꼭 끌어안는 탓에 더 묻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만 도로를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멈춘 곳은 커다란 대문 앞이었다.
한 번 짧게 클랙슨을 울리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대문을 지난 트럭은 바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자 아직 꺼지지 않은 전조등이 저택을 비췄다.
하얀 눈이 쌓인, 잘 정돈된 소나무들. 추운 날씨 때문에 흐르길 멈춰 버린 작은 연못과 작은 돌담길이 놓인 정원.
잠깐 닿을 시선을 위해 오래도록 정성스레 손길이 닿았을 정원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그것은 유월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어서 들어가요. 사모님은 안쪽에 계셔.”
“예, 예.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재촉에 어머니는 유월을 데리고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을 뿐인데 휘몰아치던 바람과 눈보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 안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훈훈했지만 그걸 느낄 새도 없이 모녀는 안내하는 이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문이 열렸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커다란 소파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여자를 본 유월은 ‘어머니 다음으로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집에서도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우아하게 허리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 구부정하게 몸을 수그리고 있던 어머니와는 달랐다.
그리고 향기.
어머니에게서는 항상 반찬 냄새와 퀴퀴한 반지하 냄새가 났다. 그런데 그녀에게서는 꽃을 바른 것 같은 향기가 났다.
모녀에게 익숙한 가난의 냄새 따위 평생 겪어 본 적 없는 사람. 겪어 볼 일 없을 사람. 그녀가 그들을 안내한 이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인가요?”
“예. 안녕하세요, 사모님.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으음, 아니에요. 급하다고 재촉했던 건 내 쪽이잖아.”
어머니가 굽신거리며 인사하자, 사모님이라 불린 여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눈앞의 유월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아이인가요?”
“예. 유월아, 어서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저, 저는 정유월이라고 합니다.”
유월은 엉거주춤하게 인사하면서도 무슨 상황인가 싶어 연신 어머니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외면이라도 하듯 끈질기게 유월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유월이. 예쁜 이름이네. 체격이 작아 보이는데, 학교는 다니고?”
“내, 내년에 중학교에 올라가요.”
“나이도 적당하고.”
유월이. 초등학생. 이름과 학교를 반복해 중얼거린 그녀가 돌연 빙긋 웃었다.
“누구와 달리 벙어리는 아니구나.”
“…….”
입매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어쩐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벌레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라도 하는 듯한 눈빛.
유월은 저 눈빛을 잘 알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돈이 떨어졌을 때마다 저런 눈빛으로 자신과 어머니를 보곤 했다. ‘이걸 어디에 팔아넘겨야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눈으로. 그리고 그다음엔…….
순간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떨리는 손을 몸 뒤로 감춘 채 한 발짝 두 발짝 물러나자, 사모님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 가는 거니? 아직 제대로 말도 안 했는데.”
“아, 아픈가요?”
“뭐?”
“저…… 저는 아픈 건 싫어요.”
“유월아!”
일순간 사모님이 멈칫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유월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으려 하자 사모님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녀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많이 아프다는 기준이 뭘까? 손으로 때리는 거?”
“……벼, 병이요.”
“어떤 병?”
“…….”
“괜찮아. 말해 봐.”
“소주병이나 재떨이 같은 거……. 뜨, 뜨거운 물도 있고…….”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듯 유월이 헐떡거렸다. 그러나 사모님은 더 이어질 말을 기대하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유월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깨, 깨지고, 떨어지고…… 아, 아파요. 눈앞이 뜨거워져요……. 그, 그리고 다시 어두워지면…… 다시 아침이 와요.”
“……그리고 다시 밤이 오면?”
“밤이 오면 바, 반복돼요. 수, 숨이 막혀서…….”
더듬거리는 제 말이 답답할 만도 하건만 사모님은 유월을 제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마치 돈이 될 만한 사업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온 아버지처럼.
“사모님. 받아만 주신다면, 정말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여자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어머니가 애원하듯 말했다.
“으음? 나 아직 아무런 말도 안 했어요. 사람을 뭐로 보고? 나 그렇게 냉정한 사람 아니야.”
서운하다는 듯 과장된 투로 말하던 여자가 유월을 바라보았다.
“우리 유월이가 그런 걸 무서워하는구나. 괜찮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여자가 달래듯 유월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방과 달리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장 기사.”
그녀의 말에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풍채 좋은 아저씨였다.
“일단 애 좀 씻기고 방으로 안내해 줘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인사는 내일 해도 되겠지.”
가정부에게 물티슈를 받아 든 여자가 손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기사라 불린 사내가 물었다.
“들이시는 겁니까?”
“벙어리였다가 나아졌다며? 한번 이겨 내 봤으니 고치기도 잘하겠지.”
동병상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며, 여자가 유월을 힐끔거렸다. 서늘한 눈빛에 유월이 흠칫 몸을 떨자 그녀가 빙긋 웃었다.
“우리 유월이, 푹 자고 내일 보자. 친구는 내일 소개해 줄게.”
“가, 감사합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뭘.”
연신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를 향해 가볍게 대꾸한 여자가 방을 빠져나갔다.
이게…… 끝인 걸까? 유월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장 기사라 불린 아저씨를 따라 방을 나왔다.
“오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야?”
뒤늦은 호출에 아주머니 두 분이 눈을 비비며 나오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유월의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저는 유미선이고, 얘는 제 딸 정유월이에요. 가정부 일은 오래 해서, 걱정하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아, 그 새로 구한다던.”
어머니의 인사에 아주머니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다시 문을 열어서 좀 관리할 게 많긴 한데, 드나드는 손님이 적어서 견딜 만할 거야. 요리랑 청소만 좀 신경 써 주면 돼요.”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좋아요. 그런데…….”
돌연 아주머니 한 분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이 애가 도련님의……?”
“예.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아이고, 드디어 찾았네. 잘된 일이야.”
잘됐다는 말에도 어머니는 어째서인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유월이 무슨 이야기냐는 듯 쳐다보아도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일단 쉬어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아주머니들은 유월과 어머니가 지낼 방을 안내해 주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반지하 집은 벽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오늘처럼 추운 날이면 그 틈새가 입을 더욱 쩍, 벌리며 한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이 방은 아니었다. 깨끗한 벽지. 피부를 감싸는 따스한 온기. 사모님을 닮은 은은한 향. 한기를 이불 삼아 잠들었던 유월과 어머니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유월이 어머니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우리 이제부터 여기서 사는 거예요?”
유월의 물음에 얼마 안 되는 짐을 풀던 어머니가 멈칫했다.
“유월아.”
그녀가 돌연 유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아이의 팔을 다정히 쓸어내렸다.
“이제 우리 여기서 사는 거야. 팔릴 걱정 없이, 아빠 무서워할 걱정 없이.”
그 말에 유월은 늘 반복되었던 일상을 떠올렸다.
기억 끝자락에서 존재하는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다. 가끔 퇴근길에 어머니 생각이 났다며 꽃을 사 오곤 했으니까. 그때마다 어머니는 햇빛을 선물받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함과 동시에 천천히 사라졌다.
작은 정원이 딸렸던 집이 좁은 원룸이 되자, 꽃 대신 술병을 쥐었다. 좁은 원룸이 반지하로 변했을 땐, 어머니의 머리채를 쥐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쥐고 흔들면 돈이라도 나오는 주머니처럼, 흔들흔들흔들.
그렇게 어머니마저 깨진 술병처럼 널브러졌을 때가 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퀭한 눈빛으로 어떻게든 집 안 곳곳,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헤매었다. 옷장 위, 서랍 안, 오래되어 낡아 빠진 어머니의 장바구니. 한참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을 때는 마지막으로 유월을 응시했다.
“…….”
그 눈빛은 유월을 돈, 그 자체로 보는 시선이었다. 그때만큼은 아버지가 정말 괴물로 보였다. 자신을 순식간에 잡아먹을 것 같은 괴물. 단단한 창문도, 그 어떤 두꺼운 문도 기꺼이 부수고 들어올 무시무시한 괴물.
겁에 질린 유월이 히끅, 숨소리를 내면 괴물은 곧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저게 나이만 조금 더 찼어도…….”
아버지의 눈빛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어머니 다음은 항상 유월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술에 취하지만 않으면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서.
하지만 유월은 알았다. 어머니의 기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신기루처럼 덧없는 것이라고.
그를 증명하듯 아버지는 며칠 안 가 또다시 술병을,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쳇바퀴처럼 반복되었던 굴레를, 어머니는 정말 벗어나기로 한 것일까?
“그럼 우리 이제 아빠랑 같이 안 살아요?”
“응. 우리 둘이서만 사는 거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그 말에 유월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어머니가 어린 딸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엄마.”
한참 후, 유월이 물었다.
“도련님이 누구예요?”
유월의 물음에 등을 토닥이던 손길이 멈추었다.
순간 어머니의 숨이 멈춘 것 같은 착각에 유월은 고개를 들었다.
“유월아.”
오른쪽 눈에 자리 잡은 멍이 눈에 들어왔다. 그 멍 자국을 가리기 위해 늘 고개를 숙였던 어머니가 유월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엄마랑 유월이랑 오래오래 행복해지려면, 우리 유월이가 엄마 많이 도와줘야 돼. 그래 줄 수 있지?”
“엄마……?”
“할 수 있지?”
어머니가 그러쥔 양어깨가 점점 아파 왔다. 불안한 시선으로 붙잡힌 어깨를 흘깃 내려보자 어머니가 여기 보라는 듯, 유월의 몸을 붙잡았다.
“대답해야지.”
“어, 엄마…….”
“엄마 도와주겠다고 해야지. 어서.”
어머니의 눈빛은 불처럼 이글거렸다. 무언가를 태워 죽이고 싶다는 듯, 모조리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듯,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겁에 질린 유월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어머니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거세게 일렁였던 눈빛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우리 착한 유월이…….”
어머니가 다시 유월을 끌어안았다. 품속에서, 유월은 방금 보았던 어머니의 눈빛을 떠올렸다.
한 줄기 죄책감. 그러나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무언가에서 벗어났다는 희열. 그것이 한데 어우러진 눈빛.
그리고 며칠 후, 유월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권해수. 그 아이를 만나고 나서부터.
***
“권해수. 도련님 이름은 권해수야.”
그로부터 며칠 후, 한 번도 맡은 적 없는 좋은 냄새와 옷을 입고 나서야 유월은 자신이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도련님께서 많이 아프셔서 또래 친구가 없거든. 그래서 유월이 같은 친구가 필요한 거래. 기왕이면 같은 아픔을 겪었던 친구가 곁에 있어 주면 훨씬 상태가 호전될 거라더라.”
얼마나 아프길래 나 같은 친구가 필요한 걸까. 유월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것인지, 아주머니들은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
처음은 사소한 이야기였다. 이 으리으리한 저택이 권씨 일가의 것이며, 권씨 일가는 곧 대한민국의 대기업 중 하나인 권성을 뜻한다는 것을.
권성을 일궈 낸 권 회장이 직접 풍수사와 함께 고른 터라고 했다. 그를 증명하듯 권성은 날이 갈수록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높아지는 권성의 이름과 달리 권씨 집안의 기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첫 시작이 바로 권 회장, 권충혁의 아내였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첫 아들을 출산하고 얼마 뒤 돌연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인 권 회장의 수순을 따라가기라도 하듯, 아들인 권재찬 또한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권성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 이후로도 다수의 여자가 권성의 저택을 드나들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그 이후 ‘권성에 발을 디딘 여자들은 전부 명줄이 짧아진다.’라는 말이 돌았고, 결국 권성은 저택의 문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영 굳게 닫혀 있을 것 같던 문이 다시 열리게 된 것이, 바로 권재찬과 이 집의 사모님, 천희영의 재혼이었다.
천희영이 직접 이 저택에서 새로 시작하겠노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양아들인 권해수와 함께.
“뭐, 이 저택에서 살아남아야 진정한 권성의 안주인이 될 수 있다나. 어쩜, 예술 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또라이인지…….”
천희영을 떠올리는 듯 쯧쯧, 혀를 차던 아주머니가 뒤늦게 아차 실수한 얼굴로 말을 바꿨다.
“어쨌든…… 그 사고 이후로 도련님께서 말을 못 하셔. 처음부터 말을 못 하셨던 건 아닌데, 사고가 워낙 그랬던지라.”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전했다. 여덟 번째 생일을 맞던 날, 그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그것도 권해수의 눈앞에서.
“이야기만 들어도 내 가슴이 다 벌렁거리는데, 그걸 목도한 도련님께선 그 충격이 오죽하겠어.”
아주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로 말을 잃으셨지. 이사님께서도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신 것 같긴 한데, 차도가 없었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치료해야 한다는데, 곁에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가 함께 있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더라.”
“…….”
“물론 또래 친구분들이 곁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서 말끝을 흐렸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유월을 보면서 ‘도련님의 친구’라는 말을 붙였지만, 끝말은 항상 맺어 주지 않았다.
유월은 조용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해수가 궁금한데, 정작 해수의 친구가 되라는 어른들은 그에 대해선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마치 입에 담기를 꺼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수. 권해수. 저와 비슷한 일을 겪은 아이. 그래서 친구가 필요한 아이. 나와 비슷한 아이.
어떤 모습일까. 나처럼 많이 울었을까? 나처럼…… 많이 무서웠을까?
“유월이도 도련님처럼 아픈 적 있었지? 언제 그런 거야?”
유월이 도련님의 존재를 곱씹고 있을 때, 아주머니 한 분이 불쑥 물었다.
어린 시절, 유월 또한 말을 잃은 적이 있었다. 유월이 이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
“아, 그게…….”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은 잘 안 날 거예요.”
머뭇거리던 유월이 대답하려던 때,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태생적으로 기질이 조금 예민한 애들이 있잖아요. 우리 유월이도 그런 편이었어요.”
“아니, 뭐. 우린 그냥 어떻게 치료됐는지 궁금해서……. 알잖아. 도련님은 그 좋은 의사들을 다 붙여 줘도 안 고쳐졌다는 거.”
“알아서 고쳐졌어요. 다른 이유는 없고요.”
어머니의 단호한 반응이 머쓱했는지 아주머니들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자, 유월이 다 됐다.”
어느새 머리를 다 빗긴 어머니가 거울 속 유월을 바라보았다.
“우리 딸, 잘할 수 있지?”
유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가 웃었다. 유월은 그 미소가 좋았다.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자신이 꼭 쓸모 있는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으니까.
문을 열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유월을 반겼다.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장 기사였다.
“가자. 도련님께서 기다리신다.”
유월은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장 기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사고 이후 5년 동안 비어 있었다던 저택은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신발을 신어 한순간에 바뀐 자신처럼.
“여기다.”
아저씨가 발걸음을 멈췄다. 유월이 문 앞에 천천히 다가서자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직접 문을 열라는 뜻이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작은 손이, 천천히 손잡이 위로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유월이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높고 커다란 창문을 반쯤 가린 커튼 때문일까. 분명 점심이 막 지난 무렵인데,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걸까. 분명 여기 도련님이 있다고 했는데. 작은 인기척이라도 찾기 위해 유월이 두리번거리던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건 인형이었다.
정확히는 인형처럼 보이는 소년이었다.
단정한 까만 머리카락. 한 번도 햇빛을 보지 않은 것처럼 하얀 피부.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는 기다란 속눈썹 때문인지 묘하게 회색빛이 돌았다. 그리고 왼쪽 뺨의 작은 점과 빨간 입술까지.
신이 정성을 들여 빚은 인형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도련님.”
그것이 인형이 아님을 깨달은 건 뒤따라 들어온 장 기사 덕분이었다. 그의 부름에 아이는 유월을 응시하던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오늘부터 도련님과 함께하게 될 아이입니다.”
“저, 정유월입니다.”
유월은 자신이 잠깐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흠칫 놀란 유월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동갑인 걸 알지만 저 아이는 ‘도련님’으로, 자신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 작은 호칭만으로도 존댓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언제 고개를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통은 상대방 쪽에서 인사가 돌아올 때 고개를 들었는데, 저쪽에서 응답을 해 주지 않으니 타이밍을 알 수 없었다.
‘지, 지금이려나……?’
유월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도련님의 시선은 여전히 제게 닿아 있었다.
“…….”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은, 무기질적인 눈빛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내면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유월은 곧 도련님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쪽에서 빤히 쳐다보는 게 더 실례였다. 유월은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유월을 지켜보기만 하던 아저씨가 짤막하게 대답하곤 몸을 돌렸다.
채 붙잡을 틈도 없이 아저씨가 방을 나갔다. 맞물리는 경첩 소리가 이 방에 남겨진 사람이 둘뿐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유월은 바보처럼 문과 도련님을 번갈아 보며 “어, 어…….” 하는 소리만 내었다.
“…….”
허둥거리는 저와 달리 도련님은 너무도 가볍게 시선을 거뒀다. 잔뜩 긴장한 저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양.
당황해 마구잡이로 흔들리던 유월의 시야에 문득 반짝반짝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불투명한 바닥 위로 고개 숙인 유월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것을 밟고 있는 건 자신이었으나, 값어치만큼은 바닥이 저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엄마랑 유월이랑 오래오래 행복하려면, 우리 유월이가 엄마 많이 도와줘야 돼. 그래 줄 수 있지?”
순간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제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어머니는 슬퍼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빛 한 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집으로 또다시 돌아가야겠지.
“도, 도련님. 뭐 하고 계셨어요?”
모든 숫기를 쥐어짠 유월이 쭈뼛거리며 도련님 곁으로 다가갔다.
도련님, 권해수의 손에 들린 것은 새 모양 인형이었다. 잘 살펴보니 그의 앞엔 여러 색깔의 새 인형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새를 좋아하는 걸까. 친구가 없어서 또래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는 잘 몰랐지만, 적어도 남자아이들이 인형보단 로봇 같은 걸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인형 놀이라면 같이 어울려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새를…… 좋아하세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권해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도 새를 좋아해요. 어, 어릴 때 앵무새를 키운 적이 있는데, 잠깐 문을 열어 준 사이 날아가 버려서 잘 키우진 못했지만, 음…….”
이런저런 말을 던지는 유월과 달리,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에는 아무런 흥미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차츰 작아지는 목소리를 억지로 높였다.
“가, 같이 놀아도 될까요, 도련님?”
“…….”
유월의 물음에 권해수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손에 쥐고 있던 인형을 내밀었다.
용기 낸 보람이 있는 걸까. 유월은 실로 오랜만에 기쁜 미소를 지으며 도련님이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머리 없는 인형이었다.
“어…….”
유월은 바보처럼 중얼거리며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새 인형의 머리가, 머리가 없었다. 누가 억지로 뜯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멍한 시야에 산더미처럼 쌓인 새 인형이 들어왔다. 그 인형들도 전부 머리가 없었다. 실밥이 잔뜩 늘어진 몸통에서 꾸역꾸역 밀고 나온 솜들이 보였다.
“도, 도련님, 이것들은…….”
유월은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 진짜일까 봐.
“…….”
더듬거리는 유월과 달리 도련님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기만 했다. 머리 없는 새 인형에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자신의 눈을 응시하던 권해수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아래로 내려왔다.
창백하게 질린 게 분명한 뺨, 작게 벌어진 입술, 덜덜 떨리는 손끝까지…….
“……!”
유월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세찬 움직임이었으나 권해수는 그저 유월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저를 보고 겁에 질린 상대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듯이.
저건 사람이 맞을까.
불경하게도, 권성의 도련님을 향해 유월이 주제도 모르고 그리 떠올렸다. 그러나 이미 잔뜩 겁먹은 몸은 이곳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했다.
“아……!”
주춤거리며 뒷걸음치기만 바빴던 몸이 힘없이 뒤로 고꾸라졌다. 발치에 걸린 무언가 때문이었다.
잘린 새 머리였다.
까만 동공이 유월을 응시했다. 하나, 둘, 셋……. 바닥에 나뒹구는 새 머리들과 여러 쌍의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아아…….”
유월은 떨리는 시선을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바닥으로 넘어지고 나서야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독수리의 헌팅 트로피.
그리고 그 가운데 무감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권해수.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유월은 정신을 잃었다.
***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지.”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렸다.
“전에 있던 애들은 더했다니까.”
“나쁘게 생각할 거 없잖아. 무슨 일이 생기면 사모님께서도 책임져 주신다고 하셨고. 유월이 학교나 자기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일단은 꾹 참는 게…….”
무슨 말일까. 더 자세히 듣고 싶어 몸을 움직이자 말소리가 뚝 끊겼다.
“유월아.”
처음으로 보인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 너머로 어머니와 함께 가정부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어머, 드디어 일어났네!”
“정신이 좀 들어? 몸은 좀 괜찮고?”
한 옥타브 높은 음성이 정신을 깨웠다. 유월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응, 네 방이야! 기억나지? 아줌마가 여기서 너 옷 갈아입혀 준 거!”
“목소리 좀 낮춰. 애 놀라겠다!”
어떻게든 내 정신을 깨워 주려는 건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그러자 함께 계시던 다른 아주머니가 그녀의 팔을 찰싹 때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갑자기 쓰러졌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데. 장 기사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아주머니가 핀잔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속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나저나 어쩌다 그런 거야? 나이에 맞지 않게 영 말랐다 싶더니,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
유월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입을 열 때마다 아빠의 분노 섞인 말들과 함께 물건들이 날아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엔 아버지가 없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모두 유월에게 다정했다.
유월이 조금이라도 밥을 남기면 가뜩이나 말랐다며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자 했고,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면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유월의 어머니도 함께.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머니도 이곳에 와서 행복해하시니까. 이분들이라면……. 유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응?”
“도련님께서 인형의 목을 자르고 계셨어요. 새…… 인형들을요.”
“…….”
“벽엔 새의 머리가…… 있었고요.”
보잘것없는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주머니들은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유월의 팔을 쓸어 주던 어머니의 손은 우뚝 멈췄다. 방금까지도 많은 말이 오갔던지라, 유월은 그 침묵이 의아했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걸 깜빡했네.”
“같이 나가자. 응.”
미처 잊고 있었다는 듯 아주머니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순식간에 유월과 어머니, 두 사람만 방에 남겨졌다. 그때까지도 유월의 어머니는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엄마?”
“피곤하겠다, 유월아. 오늘은 이만 쉬어.”
“어, 엄마.”
유월이 모든 힘을 짜내 어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떠나려던 움직임은 멈췄으나, 여전히 어머니는 저를 바라보지 않았다.
“도, 도련님이 좀 이상해요. 도련님이 저를…….”
“유월아.”
두서없이 내뱉던 말은 작은 부름에 멈췄다.
“엄마랑 유월이는…… 이런 거 익숙하지?”
질문을 곧장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익숙하다는 걸까. 온통 낯선 것들뿐이었다. 잘 다듬어진 머리카락도, 값비싼 옷도, 신발도. 전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유월이 손을 빼려고 하자 어머니가 다시금 딸아이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것은 유월을 혼낼 때 손목부터 붙잡던 아버지와 비슷한 악력이었다.
“다를 거 없어. 과묵한……. 그래, 아빠랑 성격이 비슷한 또래 친구라고 생각하면 돼.”
“…….”
“집에 돌아가는 건 더 싫잖아. 조금만 버티면 이렇게 좋은 게 잔뜩 있는데…….”
“…….”
“우리 유월이는 잘 해낼 거야. 그렇지?”
엄마 딸은 할 수 있지?
어쩌면 절박하기까지 한 음성으로, 어머니가 물었다.
그제야 유월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
그날 이후, 유월은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잠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쓸모없음을 알아본 사모님께서 저를 내치시진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은 채로.
“유월아, 안녕. 오늘도 날씨가 참 좋지?”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주머니들은 여전히 유월을 찾아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어머니와 함께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고, 새 옷을 입혀 주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겪든 이 상황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월은 해수가 무서웠다. 용기를 내 입이라도 열라치면, 귀신같이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유월은 몸속에 얼음을 와르르 부은 것처럼 쩡 하고 굳어 버렸다.
스스로도 바보 같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저 감정 없는 눈을 볼 때마다 넘어진 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첫 만남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뭐가 어찌 되었든 유월은 그 아이가 무서웠다.
터진 봉제선 너머로 잔뜩 튀어나왔던 솜뭉치. 그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 권해수가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목 잘린 인형. 그다음은 꼭 자신이 될 것만 같아서.
그러나 정작 두려움의 대상인 해수는 그런 유월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유월조차 무심코 ‘내가 안 보이나?’ 하고 생각할 만큼.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유월은 해수에게 제대로 된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했다.
천희영의 인내심이 바닥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직도 변한 게 없니?”
유월의 기절 소식을 들었을 땐, 아이가 너무 놀란 것 같아 걱정이라며 안쓰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정확히 둘째 주에 사라졌다. 셋째 주엔 인상을 찌푸렸으며, 넷째 주엔 결국 벌컥 화를 내었다.
“옆에 붙어 있는 거 맞아? 한 달이나 됐는데 왜 아직도 차도가 없어?”
“사모님, 또 이러신다. 유월이가 얼마나 열심인데요.”
“하지만 그대로잖아! 할 만큼 했는데 아직도 변함이 없으면 어떡해! 내가 이러려고 당신들 사채 빚을 전부 갚아 준 줄 알아?”
천희영의 분노에 어머니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애가 벙어리였던 건 맞아? 거짓말한 건 아니고?”
“그건…….”
“아이고, 사모님.”
그러자 다른 아주머니가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애써 유월을 두둔했다.
“그래도 이만큼 버틴 애가 없었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유월이만큼 오래 버틴 애가 있었나요?”
“그건…….”
“도련님도 유월이가 싫지는 않은가 봐요. 그게 아니었으면 애초에 도련님 방에나 들어갈 수 있었겠어요?”
“……그랬지. 아주 똑똑히 기억해.”
문득 천희영이 수긍했다.
“제 자식을 밀어 넣을 땐 언제고, 더 이상 못 하겠다며 학을 뗀 부모들만 몇 명이었는데. 내가 그걸 잊었을까.”
그런데 저건 무슨 뜻일까?
유월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뜻을 묻기도 전, 천희영이 유월을 홱 돌아보았다.
“한 달 뒤가 해수 생일이야. 그때 할아버님을 포함해 권씨 일가가 모두 저택으로 올 거야. 내가 어떻게든 애를 고쳐 놓겠다고 했거든. 아마 다른 손님들도 함께 오겠지.”
유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천희영이 유월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한 음절이라도 좋아. 어떻게든 권해수, 그놈의 입이 열리게 해. 반드시.”
욱신거리는 어깨와 표독스러운 사모님의 눈빛. 유월은 도움이라도 청하듯 어머니를 바라봤지만, 어머니는 늘 그랬듯 딸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 대신 유월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예쁜 옷을 입혀 주고, 예쁜 구두를 신겼다. 딸이 ‘도련님의 친구’로 지낼 수 있도록. 그래서 권씨 일가의 저택에 조금 더 오래 있을 수 있도록.
유월은 결국, 자신에게 덜컥 떨어진 시한폭탄을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은 부족했고, 해수에 대해 아는 건 많이 없었다. 애당초 권해수만 봐도 몸이 굳어 버리는데, 무슨 수로 입을 열게 한단 말인가.
“우리 유월이가 고생이 많네.”
그런 유월이 짠했는지, 몇몇 가정부가 해수에 대해 아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참, 도련님께서 정원 걷는 걸 참 좋아하시거든. 겨울만 되면 그쪽에 처음 보는 꽃이 피어나서 그러신가 봐. 그 꽃을 드리면 어떨까?”
“아이고, 뭐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정확한 정보도 아니면서 괜히 애 마음만 심란하게 하지 말고 일이나 해. 오늘 사모님 쪽 손님들 오신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
“아니, 그럼 이 작은 애가 어떻게든 해 보려고 뽈뽈거리면서 돌아다니는데, 보고만 있어? 뭐라도 알려 줘야지.”
맞으면 잘된 일이고, 아니면 안타깝다는 투였다. 애당초 유월이 얼마나 힘든지, 힘들어질지는 그들과 관계없는 일이었기에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유월은 그 불확실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정원으로 향한 유월은 곧, 천천히 흔들리는 한 송이의 꽃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묻기라도 한 듯 작고 봉긋하게 솟은 땅 위에 피어 있는 꽃은 아주머니의 말대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대로 뽑으려던 유월의 손이 천천히 멈췄다.
이 꽃을 꺾으면, 해수는 정말 좋아할까?
저 때문에 꽃이 두 번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면, 해수에게서 유일한 행복을 빼앗는 셈이 아닌가.
작은 손이 차마 꽃줄기를 움켜쥐지 못하고 애꿎은 허공만 맴돌고 있을 때였다.
“야.”
앳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반질반질한 구두코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너야? 어른들이 말했던 ‘권해수 친구’?”
아이가 새초롬한 얼굴로 물었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면 몸을 움츠리는 저와 달리, 그 아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유월은 그 행동만으로도 아이가 저와는 다른 부류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제야 유월은 사모님 쪽 손님이 오늘 저택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아주머니들의 말을 떠올렸다. 해수를 핑계 삼아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려는 게 분명하다며, 천희영을 헐뜯는 말들도 함께. 그렇다면 이 아이는 그 손님들과 함께 온 아이일 터였다.
“해수는 지금 어디 있어?”
유월의 침묵이 긍정이라고 느낀 듯, 아이는 이어서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이름을 묻기보다는 먼저 본인의 의문이 먼저인 아이였다.
“……그건 왜?”
유월은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왜긴. 보고 싶으니까 그러지!”
여자아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 오빠가 어릴 때 본 적 있는데, 나보다 예쁘다고 계속 그러잖아. 너무 궁금해서 보고 싶었는데, 해수가 갑자기 아파서 만날 수가 없었어.”
“……아픈 걸 알면서도 만나려는 거야?”
“그게 왜? 어차피 말만 못 하지 다른 건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도 그건 알아.”
“…….”
“그래도 궁금하잖아. 난 궁금한 건 못 참거든.”
유월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상대방의 아픔 따위는 자신의 호기심을 누를 이유가 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말인데, 친구야.”
그때, 그 아이가 덥석 유월의 손을 잡았다.
“나랑 하루만 양보해 주면 안 돼? 어른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
“사실은, 해수랑 미리 친해지고 싶어서 애들이랑 같이 부모님 졸랐거든. 생일날에 맞춰 오는 애들한테 자랑하려고. 그런데 오늘 온 애들 중에서도 내가 제일 먼저 친해지고 싶은 거 있지.”
아이가 애교 부리듯 말끝을 늘였다.
“생각해 봐. 다 같이 다가가면 해수도 부담스러워할 거 아니야. 미리 친구 한 명 사귀어 놓으면 해수한테도 좋고, 나도 다른 애들한테도 자랑할 수 있어서 좋잖아! 그치?”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더없이 좋은 생각이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 듯.
유월은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손은 따뜻하고 말랑거렸다. 손바닥을 자주 맞고, 아버지를 피해 더듬거리며 방을 피하느라 곳곳에 흉터를 달고 사는 자신과 달리.
아, 이 아이는 정말 사랑만 받고 자랐구나.
그러니 저 한 송이 꽃에도 망설이는 제 마음 따위는 아마 모르겠지. 평생 모르겠지…….
유월이 대답이 없자, 아이가 재촉하듯 잡은 손을 흔들었다.
“다른 거 필요 없어. 해수 방이 어딘지만 알려 주면 돼!”
“…….”
“응? 해 줄 거지? 나한테 양보하는 거다?”
“……싫어.”
“……뭐?”
유월이 아이의 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손이 뿌리쳐지자 혹시 제 행동이 너무 거칠었나 싶어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마른침을 삼키고선 입을 열었다.
“지, 집안 어른들이 혼낼 거야.”
“알아. 그러니까 너만 비밀로 해 주면.”
“그리고 안 봐도 알아. ……해, 해수가 더 예뻐.”
뒷말이 볼품없이 떨렸다. 유월이 처음으로 타인에게 내뱉은 오기였으니까.
그때였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유월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넓은 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그들 방향으로 크게 뚫린 창문만이 있을 뿐.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아이에게도 들린 듯했다.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너, 두고 봐.”
유월을 째려보던 그 아이는 홱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때만 해도 유월은 처음으로 내뱉은 자신의 반항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통쾌한 감정도 있었다. 해수가 좋아한다던 이 꽃을, 윤선아의 시선에서 지켜냈으니까.
하지만 그날 오후, 유월은 괜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아이, 윤선아가 뒤이어 도착한 자기 친구들과 함께 유월과 놀고 싶다고 찾아온 것이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며 저들끼리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자리를 비웠으니, 아이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유월이는 도련님의 친구라서…….”
“그럼 해수랑 같이 놀래요! 그래도 되죠?”
“그건 더 힘들 것 같아요. 도련님께선 따로 움직이실 수가 없어서요. 참, 이걸 어쩐다…….”
아주머니가 난감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으나, 그 이후로는 뻔했다.
“도련님이랑은 어렵지만 유월이랑 노는 건…… 네, 괜찮을 것 같네요. 너도 괜찮지, 유월아?”
“…….”
어른들이 자리를 비웠어도 권력은 여전히 남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이어졌으니까.
이후로는 뻔했다. 악의로 똘똘 뭉친 감정이 괴롭힘 말고 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참을 만했다. 아버지처럼 거센 손찌검이 날아오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았다. 참을 수 있었다.
“야, 얼른 잠가!”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윤선아와 그 친구들이 창고에 있는 공을 가져오라고 했다. 유월이 공을 막 집어 들었을 때, 문이 닫혔다.
닫힌 공간을 무서워하는 유월은 재빨리 손잡이를 돌렸지만, 단단히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 열어 줘!”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래도 될까? 어른들한테 혼나면 어떡해? 날도 늦었는데.”
“괜찮다니까? 어차피 쟤 찾는 사람 아무도 없어.”
누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윤선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쟤네 엄마도 여기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어른들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
“그래 봤자지.”
윤선아가 비웃으며 말했다.
“부모도 버린 애를 누가 찾아.”
그 말에 문을 두드리던 주먹이 멈췄다.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유월은 꼼짝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윤선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부터? 아버지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부터?
그 순간, 저를 집어삼킨 어둠과 함께 저편의 기억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리 예쁜 유월이.”
“어, 엄마.”
“엄마 청춘, 인생, 자유 다 뺏어 간 우리 유월이…….”
“엄마,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요…….”
아버지에게 맞아 엉망인 얼굴을 하고서, 유월을 바라보며 희미한 웃음을 흘리던 어머니.
“너만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짓무른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유월은 듣지 않으려는 듯 귀를 틀어막으며 더욱 웅크렸다. 더 깊은 곳으로 숨는 쥐새끼처럼.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도록. 자신의 상상 속, 유월의 입부터 차례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추웠다. 날씨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추웠다.
그 때문이었다. 녹슨 쇠가 시끄럽게 얽히는 소리를 바로 듣지 못한 것은.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텅 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창고 너머로 쏟아지는 빛이 눈을 찔렀다. 그리고 그 앞의 인영. 유월을 내려다보는 누군가.
“……엄마?”
저도 모르게 그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엄마가 아니었다.
권해수.
시리도록 무정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이는 권해수였다.
유월은 놀라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깜빡였다. 순간 제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저 무기질적인 눈은, 저 무표정한 얼굴은 분명 권해수였다.
“어…….”
유월이 저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해가 이미 저문 겨울, 어두운 창고로 스며드는 건 마당을 밝히는 작은 등불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는 유월이 이상할 법도 했다.
그러나 권해수는 저를 한 번 쓱 쳐다본 후 창고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잠깐 안쪽을 둘러보던 권해수가 다시 유월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유월은 처음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였다.
“…….”
그러다 또다시 저를 바라보는 권해수와 눈이 마주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제가 담겼다. 아무런 감정 없는 눈빛이었으나, 이곳에 존재하는 유월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
그 순간, 눈가에 뜨거운 것이 툭 떨어졌다. 차가운 냉기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에, 유월은 홀린 듯 손을 들어 눈가를 쓸었다. 손과 뺨에 축축한 무언가가 묻어났다. 그게 눈물인 것을, 유월은 뒤늦게 인식했다. 그를 기점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여린 뺨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
유월은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나 감정을 자각 못 한 아이의 서툰 움직임이었다. 오히려 제 눈물을 얼굴 전체에 퍼뜨리는 꼴밖에 되질 못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권해수는 이 저택에서 제일 두려운 존재일 텐데. 왜 저 까만 눈을 본 순간 마음이 놓이는 걸까. 어둠 속에 숨은 저를 찾아 준 존재가 처음이라서일까.
그러나 권해수의 입장에선 자신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것처럼 보일 터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 유월이 엉망이 된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 할 때였다.
“죄, 죄송해요. 도련님. 제가 일부러 이러려던 게 아니라…….”
그 순간 권해수가 성큼, 유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눈물범벅인 유월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고요한 눈동자는 마치 타인의 눈물을 처음으로 본 사람 같기도 했고, 눈앞의 광경을 기억 속에 새기려는 것도 같았다.
유월은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권해수를 응시했다.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손가락과 입술은 덜덜 떨릴 정도이건만, 누군가 얼굴을 꽉 붙들고 있기라도 한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히끅.
시선이 거둬진 건 딸꾹질이 터지고 나서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유월이 뒤늦게 합하고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내뱉은 음절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유월이 숨바꼭질 도중 들킨 아이처럼 눈을 굴렸다. 어떡하지. 뭔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데……. 뭐라고 운을 떼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유월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정작 권해수는 예의 그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소년이 창고를 빠져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소년이 사라진 곳은 다른 풍경이 자리할 뿐이었다. 열린 문. 마당을 빛내는 작은 등. 스며드는 찬 바람…….
문이, 열렸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유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문이 닫힐 것 같아 후다닥 창고를 빠져나왔다. 반사적으로 창고 문을 굳게 걸어 닫고, 아직 정돈되지 않은 숨을 고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권해수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난 계속 여기 갇혀 있었겠지.
‘……도련님은 왜 여기 온 걸까.’
뭔가를 찾으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왜…….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유월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심장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쿵쿵 뛰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편 유월이 도망이라도 치듯 창고를 벗어났다.
얼굴이 빨간 유월을 보며 아주머니들이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지만, 유월은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그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뀌지 않았다.
먼저 제일 크게 바뀐 것은 창고에 갇힌 다음 날, 윤선아를 비롯한 그 무리가 저택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부모가 애들의 몸 상태가 나빠진 것 같다며 저택을 서둘러 떠났다고 한다. 원초적인 괴롭힘이 사라졌으니, 유월의 마음도 차츰 안정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뀐 것은…… 더 이상 권해수가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유월의 쓰임새를 살피는 이 저택에서, 오로지 권해수만이 유월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월은 처음으로 용기를 내, 해수의 방문을 스스로 두드렸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간은 어른들이 문을 열어 주었으나, 지금은 혼자였다. 혹시라도, 전처럼 널브러진 새 인형이 있지는 않을까. 유월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월은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방은 깨끗했다. 정말 그날의 기억은 전부 제 환상이었던 것처럼.
여전한 것은 권해수뿐이었다.
해수는 가만히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여전히 열리지 않는 입이었지만…… 유월은 해수가 앉아 있는 곳으로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도련님, 안녕하…….”
습관처럼 인사를 건네려던 유월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어떻게든 입을 열게 만들려는 사람이 더 많았다면, 해수는 말 못 하는 지금을 더 편하게 느낄지도 몰랐다.
그 평화를 깨서는 안 되었다. 유월은 입을 합, 다물었다. 조용히 눈만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해수 앞에 앉았다. 그렇다고 인사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어서, 그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아주 잠깐, 해수의 시선이 제게 닿았다. 그러나 곧 얼마 안 가 떨어졌기에 유월은 제가 해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안도한 유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술가인 천희영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멀지 않은 곳에 그림 도구가 있었다.
그림은 그려 본 적 없지만, 도련님이 그림을 좋아하시는 것 같았으니까……. 눈치를 보던 유월이 그림 도구를 가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뭘 그릴까 하다가,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벽에 걸린 헌팅 트로피를 따라 그렸다. 비교를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도화지로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그림이 완성됐다.
완성작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유월은 곧 해수가 저를 쳐다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제야 자신이 해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유월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렇게 원했던 눈 맞춤인데, 막상 마주하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 어……. 더듬거리던 유월은 검사를 맡듯 그림을 들어 올렸다.
“부, 부엉이를 그렸어요.”
“…….”
“저기 벽에 걸린 새요…….”
어색하게 덧붙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이 빤히, 그림을 응시했다. 그 눈길이, 왜 저 헌팅 트로피와 달리 왜 자신의 그림에는 몸이 있냐고 묻는 것 같아, 유월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박제될 때 아팠을 테니까, 그림으로라도 안 아팠으면 해서…….”
“…….”
“아픈 건 싫잖아요. 저도, 도련님도 아, 아팠으니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해수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다.
희망을 가지고 슬쩍 그림을 내렸을 땐, 이미 해수의 시선이 거둬진 뒤였다.
다른 평가는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고, 여전히 입은 굳게 닫힌 채였다. 그러나…… 유월은 그게 좋았다. 의미 없는 행동을 해도 저를 한심하게 보지 않는 것 같아서. 그 까만 눈이, 왠지 ‘그렇구나.’ 하고 대답해 주는 것 같아서.
물론 나중에 벽에 걸린 헌팅 트로피가 부엉이가 아니고 매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어디 구석진 곳으로 숨어 버리고 싶긴 했지만…….
어쨌든 유월은 해수를 찾아가는 것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유월이 예전처럼 우울해하지 않자, 어른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조금 더 기다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천희영은 유월을 닦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하고 있다며 격려하기도 하고, 고생이 많다며 웃어 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안도하듯 유월을 끌어안았다.
***
그러나 그 잠깐의 평화는 얼마 가지 않았다. 여전히 해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의 생일이 다가올수록 천희영은 속이 타들어 가는지 초조해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 또한 어둡게 가라앉았다. 도련님의 입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대로 쫓겨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가정부 아주머니들이 그래도 이곳에서 일한 것이 경력이 될 것이라며, 위로할 정도였다.
“자기도 알잖아. 사모님께서 어떻게 권성에 시집오게 됐는지. 도련님의 진정한 어머니가 되어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면서. 그, 그 그림 심리치료라던가?”
“웃기지도 않지. 그 미술 학위인가 뭔가, 그거 따는 데 그 대단하신 집안 입김 들어간 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래도 그 대단한 가문 덕분에 사모님 자리 꿰찬 거 아니겠어. 그러니 어떡해. 도련님의 치료에 집착해야지. 도련님께서 입을 못 열면 그대로 끝이니까.”
그 말 뒤엔 항상 해수가 희생되어 불쌍하다는 말이 붙었으나, 유월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해수가 입을 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수록, 그래서 천희영의 속이 타들어 갈수록, 아주머니들은 기뻐했으니까.
그리고 그 안쓰러운 시선 끝엔 항상 유월이 있었다. 항상 천희영의 패악질을 당하는 자신들보다 더 짠한 처지의 아이 보듯 했다.
그럼에도 유월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해수가 유월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저 또한 도련님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유월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수의 생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이 지나면 해수도 저도, 어른들의 시선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평소처럼 말없이 꾸벅, 인사하려던 유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그 말에 해수의 무감한 시선이 유월에게 닿았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 다시 말을 붙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월은 대답하는 대신 배시시 웃었다. 마지막인 만큼, 그간 못 했던 말들을 후회 없이 하고 싶었다.
“저도 오늘은 도련님이랑 같이 그림 그릴래요.”
“…….”
“그래도 될까요?”
해수는 유월을 한번 힐긋거리고선 다시 자신의 그림에 집중했다. 승낙의 의미로 알아들은 유월은 한쪽에 마련된 그림 도구들을 가져와 맞은편에 앉았다.
사각사각.
연필과 색연필 그리고 물기를 머금은 붓이 움직이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익숙해지기 위해 억지로 한 행동이었으나, 오늘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그림을 끝마친 유월이 붓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노을이 방 안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해수는 아직도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무표정한 소년의 얼굴에 노을이 비스듬히 걸쳐졌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오렌지빛 그림자를 응시하던 유월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정말 그림을 잘 그리시네요.”
“…….”
“그거 아세요? 저는 도련님처럼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아, 그러니까 또래 중에서는요. 사실 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도련님처럼 잘 그리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제 말을 듣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월은 계속 말을 이었다.
“비슷하게라도 따라잡고 싶었는데…….”
유월은 해수의 그림에 비해 엉망인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실력이 새삼 우스워 옅게 웃음이 나왔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마지막. 그래. 앞으로 제가 권해수를 볼 날은 없을 것이다. ‘도련님의 친구’라는 역할도 오늘로 끝일 테니까.
“도련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고개를 들던 유월의 입이 그대로 멈추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해수가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해수는 종종 유월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물끄러미 응시하곤 하다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거두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달랐다. 옅은 회색빛 도는 눈빛이 제게 묻고 있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냐고.
처음으로 돌아온 반응에 이별을 고하게 될 줄은 몰랐던 유월은 더듬거리면서도 대답했다.
“마,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일부터는 여기 안 올 거예요. 못 온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
“그래서 도련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려고요.”
도련님은 관심도 없을 테지만, 유월은 그에게 줄 생일 선물을 정했다.
바로 자신이 이 저택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었다.
유월은 저를 바라보는 소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자신의 진심을 담아.
“생일 축하드려요, 도련님.”
“…….”
“하루 이르지만 이 말은 내일 못 전할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말을 덧붙이던 유월이 멈칫했다. 아, 과자 같은 거라도 챙겨 올 걸 그랬나. 빈손으로 축하하려니 무엇해진 유월이 아주머니들이 가끔 챙겨 주곤 했던 과자나 사탕 같은 것을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덜컹,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해수가 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얀 손이 닿은 곳은 제 목덜미였다.
잘린 새의 머리들이 떠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걸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권해수까지.
유월은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해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니……. 멈춘 게 맞나?
제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저 손의 종착지는…….
제 목을 감싼 유월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의 잔뜩 겁먹은 표정을 보았을 텐데도 해수는 물끄러미 유월을 바라볼 뿐이었다. 미안함도, 당황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응시할 뿐.
“도, 도련님.”
저한테 뭘 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작은 물음이 입안에서 맴돌았으나, 내뱉을 수 없었다.
“…….”
저 무감한 눈이 어떤 답을 줄지 알 수 없어서.
유월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그날 밤 유월은 자리에 누워서도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어머니가 무슨 일 있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유월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는 마음과 그보다 더 큰 당장의 공포가 어지럽게 뒤섞였던 탓이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들었던 유월은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유월아, 얼른 일어나 봐.”
“음…….”
반사적으로 눈을 뜬 유월은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흠칫했다. 오늘로 그들은 이 집을 떠나야 할 테니까.
“얼른 준비해야지.”
그러니 꾸중을 받아도 모자랄 텐데, 정작 어머니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체념을 이불처럼 덮고 잠들었던 어머니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유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준비요……?”
“오늘 해수 도련님 생일이잖아. 회장님이랑 이사님께서 오실 테니까 잘 준비하라고 사모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어. 이것 봐.”
사모님께서 직접 준비한 원피스라며, 어머니가 실로 기쁜 얼굴로 유월에게 말했다. 겨울과 어울리는 순백색 원피스였다.
바깥으로 나오자 가사도우미들을 포함해 여러 고용인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가자, 바쁘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천희영이 보였다.
“사모님.”
“바빠 죽겠는데 왜…… 어머나, 유월아!”
잠깐의 부름에도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대꾸하며 돌아본 천희영의 얼굴에 순식간에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유월이, 예쁘게 입었네? 아줌마가 직접 고른 원피스야. 마음에 들어?”
평소답지 않게 다정한 태도였다. 유월은 반사적인 거부감을 참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거 가지고. 피부도 하얘서 유월이랑 정말 잘 어울린다. 그렇죠?”
“저는 이런 안목은 없어서……. 사모님께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미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얀 원피스와 비교되는 차림이 송구하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연신 앞치마에 닦으면서.
딱히 미선의 반응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는지, 천희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유월아, 해수는 어디 있니?”
“……네? 해수 도련님이요?”
“얘가 아침부터 안 보여서 말이야. 네가 한번 찾아볼래? 나나 장 기사 같은 사람들이 찾아 나서면 아마 끝까지 안 나올 거야. 늦지 않게 꼭 데려와야 해. 알았지?”
“그래, 유월아. 엄마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해. 도련님 좀 모시고 와. 할 수 있지?”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뭔가, 이상했다. 여전히 해수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 천희영은 초조해해야 했고, 어머니는 쫓겨날까 안절부절못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마치 오랜 기다림의 보답을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천희영의 관심은 이미 새롭게 들이는 장식품으로 쏠린 지 오래였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유월은 장애물이었다. 유월은 멋대로 수면에 내던져진 부표처럼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가 열리는 넓은 정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저마다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 틈에 권해수는 없었다.
순간 유월은 망설였다. 지금 이대로 도망쳐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어제의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권해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굳은 채, 덜덜 떨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 눈빛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어제처럼…….
어깨가 붙잡힌 건 그때였다. 화들짝 놀란 유월이 몸을 물렸다. 처음 보는 단정한 얼굴의 사내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미안해. 갑자기 놀랐겠다. 계속 불러도 못 듣길래.”
반사적으로 유월의 어깨를 쓰다듬으려던 소년은 뒤늦게 자신의 손을 거뒀다. 그러곤 머쓱하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었다.
“미안, 동생한테 하던 게 습관이 되어서.”
“……누구세요?”
“아, 난 윤준서야. 너 기억하지? 윤선아라는 애인데.”
알지만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유월의 경계가 심해지자 준서가 알 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얘기 들었어. 오빠로서 대신 사과할게.”
“…….”
“원래는 직접 데려와서 사과시키려고 했는데, 권해수 집 근처는 절대 안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바람에…….”
윤준서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제 잘못이 아닌데도 여동생을 대신해 사과했다. 그러나 유월의 신경을 사로잡는 건 따로 있었다.
“……왜 안 오겠다고 한 건데요?”
“응?”
“혹시 도련님이 무슨 일이라도.”
유월의 목소리 끝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잘린 새의 머리들.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 제게 뻗던 하얀 손이 순식간에 겹쳐졌다.
“응? 아니야, 그런 거. 해수가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럼 새 머리는요?”
“새?”
“새 머리들을 잘라서…… 헌팅 트로피도 그렇고…….”
기대 따위 없이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윤준서는 무언가 아는 듯 답했다.
“아, 그거…….”
잠시 망설이던 그가 말을 이었다.
“해수가 어릴 때 키우던 새가 멋대로 밖으로 날아간 적이 있어. 그런데 하필이면 고양이한테 물려서 머리가…….”
작은 새였지만 그 처참한 광경에 모두가 놀랐다. 그 당시, 권해수의 ‘친구’였던 윤준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나 정작 권해수는 덤덤했다. 피투성이인 새를 직접 안아 들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경악한 사람들의 표정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목 꺾인 새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소년.
오싹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권씨 일가와 친해지기 위해 ‘권해수의 친구’ 자리를 노리던 재벌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식들을 숨겼다. 준서도 아버지의 부름에 다시 본가로 복귀해야 했다.
“애가 좀 특이한 것 같긴 한데 어른들 말처럼 미친놈은 아니야. 어떤 사이코가 직접 새 무덤을 만들어 주겠어? 그냥 내다 버리지.”
순간 떠올랐다.
“참, 도련님께서 정원 걷는 걸 참 좋아하시거든. 겨울만 되면 그쪽에 처음 보는 꽃이 피어나서 그러신가 봐. 그 꽃을 드리면 어떨까?”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유월의 발치에 무언가가 밟혔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해수가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던, 그 꽃이 유월의 발에 밟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봉긋한 봉우리. 딱 작은 새 한 마리가 묻혀 있을 만한 크기. 그곳에 핀 꽃을 자신이 밟고 있었다.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유월은 해수에게서 자신을 겹쳐 보았다.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슬픔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박제될 때 아팠을 테니까…… 그림으로라도 안 아팠으면 해서…….”
“…….”
“아픈 건 싫잖아요. 저도, 도련님도…… 아, 아팠으니까…….”
그래서 잘도 기만 섞인 말을 내뱉었다. 더 이상 아프지 말자고. 공감대를 내세우며 어설프게나마 위로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었다. 해수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했으면서, 저는 어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으면서……. 저 또한 해수를 어른들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겁에 질려 꾹 쥐었던 주먹, 경멸과 두려움이 섞였던 눈빛. 그리고 외면.
제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그와 달리, 저는 그에게 무엇을 바랐던 걸까.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어, 잠깐만!”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유월은 돌아보지 않았다. 도련님을 찾아야 했다. 찾아서, 사과를 전해야 했다.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것처럼 굴어 놓고 너를 두려워했다고. 다시 친구가 되어 달라고.
유월은 숨을 몰아쉬며 해수를 찾았다. 그러나 축하를 위해 방문한 사람들 틈에서 아무리 찾아도 해수는 보이지 않았다.
빨리, 빨리 찾아야 하는데…….
“얘!”
날카로운 부름과 함께 유월의 왼쪽 어깨가 홱 돌아갔다. 천희영이었다.
“해수 어디 있니? 곧 회장님이랑 이사님 도착하신다는데!”
“찾고…… 찾고 있어요. 저도 도련님을…….”
“찾으라고 말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못 찾아! 왜 이렇게 느려 터진……. 얘! 어른이 말하는데 어딜 가는 거야!”
천희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월은 그녀의 짜증을 뒤로하고 빠져나갔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도련님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유월의 발걸음이 멈춘 건 그때였다. 물건을 나르기 위해 고용인들이 이용하는 쪽문, 그 너머. 늘 그렇듯 단정한 차림의 도련님은 무감한 얼굴로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찾았다.
유월이 탁, 참아 왔던 안도의 숨을 토해 냈다. 이쪽에 있어서 못 찾았구나.
그런데 왜 도로에 서 있는 거지?
짧은 의문이 스친 순간이었다.
해수와 눈이 마주쳤다.
해수는 평소처럼 물끄러미 유월을 응시했다. 유월이 그곳에 있는 것을 진즉에 눈치챈 것처럼 또렷한 눈빛이었다.
“…….”
소년의 입에서 작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눈 속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꼭 동화에서 보았던, 지독히도 아름다운 설녀 같았다.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응시하던 시선이 옆으로 미끄러진 것은 그때였다. 홀린 듯 해수를 바라보던 유월은 반사적으로 그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내 유월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큰 트럭이 해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련님.”
유월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눈앞의 트럭을 보고 있음에도 해수는 움직임이 없었다.
치인다.
분명 치일 거야.
그걸 알면서도 왜…….
그 순간, 여러 말이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도련님께서 말을 못 하셔. 처음부터 말을 못 하셨던 건 아닌데, 사고가 워낙 그랬던지라…….”
“여덟 번째 생일날 눈앞에서 어머니의 사고를 목격하셨거든.”
“워낙 몸이 안 좋으셨던 분이라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거였는데, 하필이면 그때…….”
“도련님도 그날 이후로 말을 잃으셨어. 그럴 만도 하지. 눈앞에서 엄마가 차에 치이는 모습을 봤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어.”
사고. 엄마의 죽음. 그 이후 말을 잃고, 감정을 잃은 소년.
죽음의 순간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아이.
본능적으로 발이 움직였다.
유월이 해수를 꽉 끌어안았다. 보호하듯 트럭이 오는 방향으로 제 몸을 돌린 순간, 품속의 해수가 눈을 들어 유월을 바라본다. 처음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작은 새처럼 흔들림 없이 저를 응시한다.
살아 있다.
아직 살아 있어.
“도련님.”
유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쨍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쿵-!
이후 끔찍한 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점점 꺼져 가는 소리였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뒹굴고 있는 술병이었다.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드는 달빛이 술병에 반사되어 유월의 눈을 찔렀다. 유월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있는 인영을. 핏발 선 눈을.
“너만 없었으면…….”
염원을 담은 중얼거림이 귓가에 맴돈다. 유월은 힘겹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달빛에 반사된 하얀 손이 유월의 입을 틀어막는다.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다.
살려 줘.
누가 나 좀 살려 주세요. 제발…….
그 순간, 차의 경적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빠아앙―
가득 메웠던 소리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공간이 하얗게 변했을 때 유월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인지한 것은 하얀 김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소독약 냄새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아래로 똑똑 떨어지는 수액. 가습기에서 내뿜는 김을 보며 유월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여긴…… 어디지?
유월이 사고가 천천히 움직였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하얗게 내리는 눈. 어린아이의 존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속도를 낮추지 않은 트럭. 시야를 가득 메운 환한 빛. 그리고…….
도련님.
유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튕겨 나가듯 침대를 벗어나자, 링거줄이 당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유월의 어머니가 다급히 유월을 붙잡았다.
“세상에, 유월아!”
“도련님은요?”
“…….”
“도련님은 어디 계세요?”
“……유월아.”
“도련님…… 괜찮으신 거 맞죠?”
유월은 희망을 담아 말했다. 불투명한 병원 창문으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제가 보였다.
그렇다면 도련님은, 내가 감쌌던 도련님은 나보다 더 낫지 않을까.
분명 그럴 거야. 분명…….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이 상할 대로 상한 어머니의 입이 아주 느릿하게 열렸다.
“……사고였어, 유월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세차게 떨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유월은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러곤 미처 잡을 틈도 없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저들끼리 이야기 중이던 사람들이 붕대를 칭칭 감은 어린 유월을 확인하곤 놀란 눈을 했다. 그러나 시선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복도를 달려가는 유월의 눈동자가 바쁘게 병실의 이름들을 살폈다. 권해수, 권해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문을 열었다.
1인실이었다. 부러 밝은 분위기를 위해 커튼을 활짝 걷었는지, 넓게 트인 창문에선 햇빛이 쏟아졌다. 바쁘게 움직이며 온기를 내뿜는 가습기와 그 아래, 쌓여 있다시피 놓인 과일 바구니들엔 쾌차를 바란다는 상투적인 문구로 가득했다.
여러 색깔과 온기를 꾸역꾸역 채워 넣은 듯한 곳. 그 중앙에 해수가 누워 있었다.
그 머리엔 저와 똑같이 붕대가 감겨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과 왼쪽 다리에도 붕대를 감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에 유월이 숨을 멈추기도 잠시, 느릿하게나마 들썩이는 가슴팍이 보였다.
살아 있다.
도련님이 살아 있어.
유월의 얼굴에 안도가 채 퍼지기도 전이었다.
성난 발소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유월의 어깨가 홱 돌아갔다.
짝―!
묵직한 통증과 함께 삐익― 이명이 울렸다. 유월은 멍하니 입만 벙긋거렸다. 잠깐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천희영이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천희영의 노기가 병실을 울렸다.
“애를 고쳐 놓으라고 했지, 언제 더한 병신 만들라고 했어?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어?”
“진정하십시오, 사모님. 유월 양도 많이 다쳤습니다.”
“뭘 그만해? 전부 얘 잘못인데! 트럭 기사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쟤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해서 핸들을 해수 쪽으로 꺾어 버렸다잖아! 쟤만 아니었으면 멀쩡히 있던 해수가 다리병신이 되는 일은 없었다고!”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그만하시라며 천희영을 말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얘, 너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 그 더러운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수작 부린 거 아니냐고! 입이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란 말이야!”
지나가던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방 안을 힐끔거리다 유월을 발견하곤 조용히 수군거렸다.
쟤 때문이라고?
세상에, 하필이면 권성 그룹의 아들을…….
그 가운데에서, 유월이 부풀어 오르는 뺨을 붙잡으며 귓가로 흘러온 말을 멍하니 곱씹었다.
나 때문에 도련님이 다쳤다.
나 때문에.
내가 그를 구하려 했기 때문에…….
강한 죄책감이 유월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턱이 덜덜 떨렸다.
“이까짓 년만 아니었어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천희영의 손이 다시금 허공에 들렸을 때였다.
콜록.
침대 쪽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유월의 고개도 천천히 돌아갔다.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이내 눈꺼풀이 두어 번 깜빡이며 옅은 회색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해수야!”
유월이 움직이기도 전, 아이를 밀친 천희영이 빠르게 해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니? 정신이 좀 들어? 엄마 알아보겠어?”
“…….”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선생님 모셔 와요. 정신과 쪽 선생님도 같이…….”
“……월아.”
정신없이 지시를 내리던 천희영의 입이 뚝 멈췄다. 병실에 자리한 모두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권해수를 바라봤다. 흘러나온 누군가의 음성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언어를 배우는 아이처럼, ‘아, 아.’ 하는 소리만 내뱉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월아. 정유월.”
이윽고 해수의 입에서 단어가 흘러나왔다. 흐릿하지만 선명한 음절로.
천희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똑같이 당황한 듯 굳어 있던 장 기사가 뒤늦게 의료진들을 부르러 갈 동안에도 유월은 얼어붙어 있었다.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환청을 들은 건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도련님이 말을, 그것도 내 이름을 부를 리가…….
“정유월.”
그 생각을 깨 주기라도 하듯, 미성이 다시금 귓가에 닿았다.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가던 유월이 나중엔 튀어 나가듯 그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회색 눈동자가 저를 담았다.
“유월아.”
믿을 수 없었다. 해수가 웃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며.
“도련님, 지금…….”
화등잔만 한 눈을 하고 유월은 바보처럼 해수를 불렀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길고 단정한 손이 유월의 얼굴에 닿았다. 톡, 검지가 눈가를 쓸었다.
“울, 지 마.”
해수의 검지에 눈물이 묻어났다.
“울지, 마, 유월아.”
소년이 더듬거리며 조각 난 언어를 이어 붙였다. 이제 막 단어를 배우는 것처럼 서툴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도련님…….”
유월이 멍하니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덜컹,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의료진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나가 달라는 말에 유월의 어머니가 황급히 아이를 데리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허공에 홀로 남겨졌으나 해수는 여전히 유월을 향해 미소 지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그녀의 모습이 가려지고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도.
***
찰나가 영원 같다. 유월은 지나가면서 들었던 그 말이 비로소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유월 양?”
부르는 음성에 유월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해수의 병실에서 나온 간호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정유월 양? 여기 없나요?”
“여, 여기 있어요.”
먼저 대답한 건 유월의 어머니였다.
“무슨 일…… 있나요?”
“일단 들어오시겠어요? 선생님께서 뵙기를 원하세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유월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갔다.
의사의 얼굴이 좋지 않아 유월은 멈칫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유월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그들보다 조금 뒤쪽. 홀린 듯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유월은 저 표정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들 뒤엔 백발의 노인과 무표정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유월은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해수의 조부 권충혁과, 친부 권재찬이었다.
“회장님. 이사님. 오셨습니까.”
병실 안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유월의 어머니가 재빨리 유월을 이끌고선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 인사가 익숙하다는 듯 권충혁과 권재찬은 머리 숙인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다.
널따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권충혁이 양손을 지팡이 위에 얹었다.
“시작하지.”
유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권충혁이 말했다. 의사가 서툰 손길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예, 그러니까…… 먼저 진전을 보이지 않았던 언어 문제가 호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호전.”
“예. 전에 말씀드렸던 심리 치료가 효과가 있었던 듯합니다. 요 몇 년간 말을 하지 않아 또래에 비해 발음은 좀 어색하겠지만 이렇게까지 호전된 것도 아주 기적적인 일입니다. 차츰 연습하다 보면 나아질…….”
“혀가 길군.”
끝없이 이어지는 의사의 말을 권충혁이 잘랐다.
“본론.”
“아, 그게…….”
의사가 난처한 듯 애꿎은 차트만 넘겨보았다. 의사를 눈앞에 두고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병명은 십자인대 파열입니다. 부분 파열이 아니라 완전 파열이고, 재건 수술을 해 볼 수는 있겠으나, 워낙 상태가 좋지 않은지라…….”
유월을 몇 번 힐끔거리던 의사가 결국 채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선고하듯 말했다.
“……경과에 따라 향후 다른 보호 기구 없이는 걷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유월의 어머니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 말을 끝으로 병실에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권회장의 입이 굳게 닫혀 있는데, 그 누가 함부로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의료진 모두 진땀을 흘렸다.
“진단은 이게 끝인가?”
그 순간, 권충혁이 낮게 내뱉었다.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만 나가는 게 좋겠군.”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 말에 의료진들이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우리끼리란 말에 당황한 유월의 어머니가 나가야 하나 망설일 때였다. 의료진이 전부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천희영이 기다렸다는 듯 유월을 향해 쏘아붙였다.
“이제 어떡할 거야? 우리 해수 다리 어떻게 할 거냐고!”
“사, 사모님. 죄송합니다. 저희 유월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줌마는 빠져! 남의 아들 인생 망쳐 놓고 사과하면 단 줄 알아? 대체 딸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어머니가 무릎을 꿇었다. 몇 번이나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말해도 천희영의 분노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 고치라고 했지, 누가 더 큰 병 가져오라고 했어?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거야! 해수가 어떤 앤 줄 알아?”
오히려 권충혁과 권재찬이 침묵으로 그 광경을 방관하자 천희영이 더 당당한 태도로 미선을 몰아갔다. 잘못은 모두 미선과 그녀의 딸 유월에게 있다는 듯이.
그때까지도 유월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유월의 호흡이 잘게 떨렸다. 손이, 아니 다리가. 아니, 신체의 모든 부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 때문이야. 내가 도련님의 다리를 망가뜨렸어. 내가, 나 때문에…….
“유월아, 너도 사과드려. 얼른……!”
어머니가 성마른 손길로 유월의 팔을 잡아당겼다. 사죄가 익숙한 자의 재촉에 유월의 고개가 바닥으로 기울었다. 공허한 눈동자에 버티고 선 자신의 두 발이 담겼다. 감히 권해수의 다리를 망가뜨리고도 멀쩡한 두 다리가…….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감히 도련님을……. 입으로는 수백 번 맴돌았으나 감히 내뱉을 수 없어 입술만 덜덜 떨었다.
“권해수.”
권재찬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생각은 어떻지.”
유월은 홀린 듯 권재찬이 응시하는 곳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관망하듯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해수가 뒤늦게 제게 묻는 질문임을 인식한 것처럼 “아.”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괜찮아요.”
이내 해수가 옅게 웃었다. 언제 무표정한 얼굴이었냐는 듯이.
“치료, 하면, 되니, 까.”
힘겹게 더듬거리며 내뱉던 소년이 곧 유월과 눈을 마주했다.
유월아. 이리 와.
그 눈동자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 유월은 홀린 듯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해수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다리가 허공에 들려 있었다.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창백한 손은 생채기로 가득했다. 환자복에 숨겨진 몸 또한 그러하리라.
“정유월.”
그럼에도 상처를 가득 안은 소년은 웃어 보였다. 인형이 처음으로 인간의 미소를 흉내 내기라도 하는 듯, 어색한 미소였다.
“나, 네 이름은, 말할 수 있어.”
그럼에도 해수는 웃었다.
“처음으로, 생각난 게, 네 이름이었거든.”
나 잘했지. 해수가 칭찬해 달라는 듯 유월을 바라보았다.
소년 특유의 천진난만하면서도 다정한 음색에 유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련님…….”
끝끝내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죄책감으로 차마 내뱉을 수 없었던 말들을 그제야 털어놓는다.
“어, 어떡해요. 도련님 다리가, 다, 다리를 이대로 영영 못 쓰게 되면…….”
“유월아.”
“다 제 잘못이에요. 저, 저 때문에. 제가 못나서…….”
“정유월.”
다정한 음색에 유월의 울음이 멈췄다. 잔뜩 빨개진 채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웃기지도 않은지 해수가 유월을 향해 창백한 손을 뻗었다.
“유월이, 네가 안 다쳤으면, 됐어.”
짓무른 눈가를 쓸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상처 가득한 뺨을 타고, 목선을 타고 내려간 손이 유월의 목덜미에 멈췄다. 분명 부드럽게 목뒤를 감싸는데, 유월은 꼭 그 손이 제 목을 조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월이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해수가 입을 열었다.
“네가, 곁에 있어 줄 거잖아.”
“…….”
“그렇지?”
그 물음에 유월이 멈칫했다.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는 강한 믿음이 해수의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그런 강력한 믿음을 타인에게서 받아 본 게 유월은 처음이었다.
상처투성이인 얼굴로, 만신창이인 몸으로 입을 열어 준 소년.
정유월을 믿는 권해수. 그 사실만으로도 유월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유월은 질끈 눈을 감았다. 전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제 목을 기꺼이 내어 주기라도 하듯.
“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유월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해수는 더할 나위 없이 예쁘게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선물 받은 사람처럼.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용서였다. 유월의 눈가를 타고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속상하다는 듯 해수가 작게 탄식했다.
“또, 우네.”
해수가 반대쪽 손을 뻗어 유월의 눈가를 쓸었다. 열감이 오른 눈가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유월이는, 울보인가 봐.”
장난기 어린 음성에 미약한 기쁨이 묻어났다. 불현듯 유월은 창고에서 저를 빤히 들여다보던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타인의 눈물을 본 것처럼 관찰하던 모습. 살아 있는 인형 같던 그 모습을.
그때, 두 사람 사이로 낮은 음성이 다시금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끝난 것 같군.”
권재찬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자 권충혁이 헛기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보! 아버님!”
갑작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던 천희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권 충혁이 말했다.
“일단 수술 일정부터 잡아라.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아비보다 먼저 지팡이 신세 질 일 있냐.”
“네.”
권재찬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제 아들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힘 닿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제 핏줄을 보는 눈빛에서 한 치의 애정도 느낄 수 없었다. 절망을 예상하던 어머니는 반전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그때 권재찬의 비서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미선 씨, 저와 잠깐 이야기 좀 하실까요?”
“무, 무슨 이야기를…….”
“별거 아닙니다. 애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비서는 미선을 데리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책임 소재를 미루기 바쁘던 천희영은 수술 날짜를 잡는다는 말에 재빨리 병실을 나섰다. 권해수의 법적 보호자이자 어머니는 자신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 혼란 속에서도 해수의 시선은 여전히 유월에게 닿아 있었다. 맹목적이면서도 끈질기게.
***
따뜻한 햇볕과 달리 차가운 바람이 해수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무심히 바람결을 느끼던 해수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파리가 돋아나기 시작한 나무 위로, 작은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드디어 한풀 꺾이고, 새로운 계절이 가져온 소리였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해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는 약 올리듯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충분히 잡을 수 있을 만큼 느릿한 날갯짓이었으나 해수는 가만히 손을 내렸다. 바닥으로 느릿하게 떨어진 손의 반대편은 목발을 쥐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가정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의 사고 이후, 1년이란 시간 동안 해수는 몇 차례의 수술을 더 겪었다. 바퀴에 일그러진 다리를 맞추고, 어떻게든 두 발로 걸을 수 있도록.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서 있을 수는 있으나 그뿐, 보조 기구를 이용하지 않으면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는 사람들과는 달리 해수는 덤덤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사람처럼.
“재활을 꾸준히 하다 보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겁니다.”
그래도 휠체어가 아닌 게 어디냐며, 의사는 최대한 긍정적인 부분을 끌어내려 했지만 어색한 위로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의사의 말이 마냥 가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팔을 고통스럽게 하던 목발이 지팡이로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변화였으므로.
“도련님.”
상념을 지워 낸 가정부가 해수 쪽으로 다가갔다. 부름에 응답하듯, 소년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권 이사님께서 도련님과 어울리는 걸로 만들어 주셨어요.”
“…….”
“앞으로 이걸로 걷는 연습 하시면 될 거예요.”
그녀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해수에게 내밀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가 물끄러미 물건을 응시하다가, 곧 단정한 손을 뻗어 지팡이를 건네받았다.
한창 뛰어놀기 바쁠 소년과 지팡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잘 정돈된 저택의 풍경과 어우러지니, 꼭 중세 시대의 어느 귀족 집안의 도련님처럼 보였다.
“정원이 넓으니까 여기서 걷는 연습 하시면 될 거예요.”
가정부의 조언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지팡이를 건네받은 해수는 그 끝으로 툭툭, 무심하게 잔디를 두드릴 뿐이었다.
“저희가 계속 지켜볼 테니까, 만약 넘어지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정유월.”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끌어오던 가정부의 말이 뚝 끊겼다. 내내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해수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유월이.”
해수가 아예 몸을 틀어 가정부와 마주 섰다.
“유월이가 안 보여.”
해수의 단조로운 말에 가정부는 “아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요 몇 년간 말하지 않았던 터라 아직 말이 어눌하다는 건 권씨 집안의 고용인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홀로 남겨진 해수와 대화할 땐 발음이 매끄러웠다. 그간 유월과의 대화 덕분일까.
“유월이는 잠깐 자리를 비웠어요.”
“……비워?”
“네. 이제 유월이도 중학교 진학을 해야 하니까요.”
가정부는 유월의 가정 사항을 최대한 돌려 말했다.
사고 후, 유월이 해수의 입을 열었다는 것을 높게 샀는지 권씨 일가는 모녀를 내쫓지 않았다. 그간은 해수와 홈스쿨링을 했다지만, 이 근처 학교들은 교복값만 해도 가정부의 한 달 치 월급을 뛰어넘었다. 이해관계를 아는 어른들로서는 슬슬 선을 그어 주어야 할 시기였다.
“학교는 정해졌는데, 절차가 조금 복잡한가 봐요. 기다리시면 금방 올 거예요.”
“…….”
가정부의 설명에 해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감정이라는 걸 처음 배운 사람처럼 이질적이었던 소년의 표정은 유월과 함께하면서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해수는 자주 웃었고, 가끔씩은 슬퍼하는 표정도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정유월의 존재가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만약 상황을 모르는 이가 지금의 해수를 본다면 나아진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목발 대신 지팡이로 바뀐 것도 기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항상 해수 앞에서 죄인처럼 쩔쩔매던 유월도 조금은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문득 가정부는 유월을 생각했다. 중학교에서 새 친구를 사귈지도 모른다며 잔뜩 상기되어 있던 작은 아이의 얼굴을. 그 작은 기대 하나만으로도 기뻐하던 유월을 생각하면, 그리고 해수를 생각해서라도 이편이 나았다.
“아파.”
그때였다. 가정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시종일관 말이 없던 해수가 툭 내뱉었다.
“네? 도련님, 지금 뭐라고…….”
“여기.”
해수가 건조한 얼굴로 제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아파.”
가정부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갑작스러운 호출에 달려온 의사가 숨도 고르지 못하고 해수를 살폈다. 다리를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살펴보던 의사가 난감한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다리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럼, 이 통증은 어떻게 된 거죠?”
통증 이야기에 작업도 마다하고 달려온 천희영이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게, 저희로서는 당장 그걸 알 방도가…….”
“이제야 좀 멀쩡해지나 싶었는데, 왜 또 아프냔 말이야!”
천희영이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유월이 끼어들면서 해수가 사고를 당한 거라고는 하나, 그를 잘 돌보지 않은 잘못은 천희영에게도 있었다.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 또 통증이라니. 천희영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 때였다.
“도련님!”
앳된 소리와 함께 작은 체구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식을 듣고 온 유월이 헐레벌떡 해수 곁으로 갔다.
“괜찮으세요? 많이 아파요? 어디가, 어디가 아파요? 어느 쪽이요?”
가방을 채 벗어 놓을 틈도 없이 해수의 다리를 살피는 모습은 다소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유월을 바라보던 천희영이 문득 멈칫했다. 해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안 아파.”
“하지만 아프다고 분명…….”
유월의 시선은 계속 다리에 고정된 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가지 말걸. 내가 왜 나갔을까. 도련님 곁에서 챙겨 드려야 했는데. 내가 그랬어야 했는데…….
끝도 없이 이어지던 생각은 “유월아.” 하는 단조롭고도 간결한 해수의 부름에 끊겼다. 고개를 들자, 해수와 눈이 마주쳤다.
“너 없어서.”
“…….”
“그래서 아팠나 봐.”
근데 이젠, 괜찮아. 해수가 빙그레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유월은 사색이 된 채로 더듬거렸다.
“아, 그, 그게…… 다른 일이 있어서……. 일부러 말없이 나간 건 아니에요. 도련님이 괜히 신경 쓸까 봐…….”
“응.”
“이, 이제 안 갈게요. 도련님 옆에 있을게요.”
“응.”
그거면 됐다는 듯 해수가 창백한 유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통증을 말하던 소년은 온데간데없었다.
“…….”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그 둘을 지켜보던 천희영이 툭 내뱉었다.
“이제 나가 봐요.”
“예?”
“진단 내리고, 나가 보라고.”
당황하던 의사가 유월과 해수를 돌아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유월과 그런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는 권해수. 집착적으로 보일 만큼 꽉 잡은 손. 판단은 빨랐고, 진단명은 하나였다.
환상통.
사고 후 후유증 중 하나로, 느껴질 리 없는 통증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원인 해결을 위해 천희영은 유월의 어머니에게, 해수를 따라 중학교 과정을 홈스쿨링으로 돌리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권씨 저택에 계속 기거할 것을 덧붙이면서.
“그래서 저 도련님이랑 같이 수업을 듣게 될 것 같아요.”
겨울이 물러가고 봄의 초입에 들어선 어느 오후, 해수의 걷기 연습을 도와주며 유월이 말했다.
목발을 이용해 겨우 한 걸음 떼는 게 전부였던 해수는, 이제 지팡이에 의지해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유월은 뛸 듯이 기뻤다.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도련님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그러나 권씨 일가 그 누구도 해수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나 무관심할 수 있을까. 그래도 혈육인데.
하기야 사고 이전에도, 교통사고를 목격한 트라우마로 말을 잃은 해수를 찾아오는 이는 한 명도 없지 않았던가.
유월은 생각했다. 자신만이라도 해수의 곁에 있어 주자고.
그러니 중학교에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해수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도련님이랑 앞으로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요.”
“…….”
“걷는 것도 도와줄 수 있고, 무거운 물건 나르는 것도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고 또…….”
“유월아.”
나지막한 물음에 유월의 고개가 들렸다. 해수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불쑥 물었다.
“왜 날 계속 도련님이라 불러?”
조각난 단어를 더듬거리며 내뱉던 소년은 이제 어느 정도 문장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유월과의 대화 덕분이었다.
다행인 일이었으나 이렇게 불쑥 물어 올 때마다 유월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수와 같이 홈스쿨링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해수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속죄를 위해서였다. 여전히 저는 가해자이자 가정부의 딸이었고, 해수는 피해자이자 도련님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월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도련님은 도련님이니까 당연히…….”
“이름으로 부르기 싫어?”
“네? 그건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데 왜 계속 난 도련님이야? 우린 나이도 같은데.”
속상하다는 듯, 해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만 너랑 친한 것 같아.”
아래로 깔린 기다란 속눈썹 아래, 서운함이 그득했다. 어, 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유월이 고개를 저었다. 사모님께 혼난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에요. 부를, 부를게요.”
“진짜?”
“네. 진짜.”
그러자 해 보라는 듯 해수가 저를 바라봤다. 속상함과 서운함은 어디 가고, 끈질긴 집요함만이 어려 있다. 유월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권해수.”
“…….”
“해수야.”
조심스러운 부름이었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응.”
그러나 해수는 웃었다. 고작 이름 하나 불러 준 것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다. 그는 마음을 열어 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게.
해수의 웃음이 봄과 함께 찾아왔다. 눈물이 날 만큼 벅차고 따스한 햇살과 함께. 그만큼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어떻게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유월은 결심했다. 이 미소를, 권해수를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서 지켜 주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