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76화
76.
“남자 탈의실 쪽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여자인 것 같았는데…….”
“여자 소리? 확실합니까?”
“……모르겠어요. 신음을 들은 것뿐이라 확실하진 않아요.”
물소리가 워낙 크게 울리는 데다, 사방이 타일인 목욕탕 특유의 내부 구조는 소리가 부딪히며 번졌다. 바깥에서 듣기엔 방향도 거리도 또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하임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귀를 더 바짝 열었지만, 방금 전의 미묘한 기척은 금세 다른 소리에 묻혀 흐릿해졌다.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었으나 남자 탈의실이었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
신음이 아까보다 더 분명하게 걸렸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짓눌리듯 끊기는 소리였다. 입이 막힌 상태에서 억지로 새어 나오는 듯한, 짧고 거친 신음이 물소리 사이로 스며 나왔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고통을 참고 있는 소리라는 게 인지되자 하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다시 들렸어요.”
하임이 탈의실 입구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확실해요. 이곳 어딘가에 누군가가 갇혀 있어요.”
무혁의 동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 왠지 소진 언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촉도 그렇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안에 들어가게 해 줄 테니 직접 살펴봐요.”
“……?”
“그렇다고 다른 사내 새끼들 좆 구경시켜 줄 생각은 없으니 좋아하진 말고.”
이 상황에 황당한 말을 해 대는 무혁으로 인해 하임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디 가지 말고 잠깐 기다려요. 귀마개 착용하고.”
그는 그녀를 대기용 소파에 앉히고는 홀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삐이이이―
날카로운 경보음이 스파 전체를 찢을 듯이 울려 퍼지자 하임의 어깨가 크게 튀었다.
* * *
무혁은 탈의실 안쪽을 크게 훑으며 걸음을 옮겼다. 줄지은 로커 사이를 지나며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지 살폈고, 유리문 너머로 이어진 스파 구역까지 시선을 흘렸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몸을 담근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온한 공기가 흐르는 공간 속에서 어색하게 튀는 기척은 없었다. 무혁은 입구 반대편 쪽, 더 큰 로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넉넉한 크기의 로커는 체격이 작은 성인 한 명쯤은 구겨 넣을 수 있을 듯했다. 손잡이를 가볍게 당겨 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객님, 도움 필요하십니까?”
뒤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무혁은 돌아보지 않고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이 로커도 사용 가능한 겁니까?}
{죄송하게도 이 구역은 스파 연간 회원 전용 로커입니다. 일반 투숙객은 팔찌에 적힌 번호의 로커를 사용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크기가 넉넉해서 여쭤봤습니다.}
{캐리어나 골프 백까지 보관이 가능합니다. 일반 투숙객의 경우, 큰 짐은 데스크에 맡기시면 됩니다.}
덤덤히 대꾸한 무혁은 배정받은 로커 쪽으로 향했다. 코트를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옷을 정리하는 척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기류를 살피던 그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틈에 손을 뻗었다.
벽 쪽에 설치된 화재경보기 버튼을 누르자 탈의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놀란 사람들이 물에 젖은 채로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혁은 한쪽 귀에 손을 지그시 갖다 대며 짧게 무전을 띄웠다.
“6층 스파, 남자 탈의실. 3분 줄 테니 어떻게든 밀고 들어와.”
그는 라이터로 마른 수건에 불을 붙이고는 휴지통에 대강 던져 놓았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내부는 한층 더 아수라장이 됐다. 직원들이 다급하게 안내하며 동선을 정리하려 했으나 통제를 벗어나는 듯한 분위기였다.
수건을 두른 채로 뛰쳐나오는 사람들, 바닥에 물을 흘리며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발걸음들이 뒤엉켰다. 그 혼란 사이로 요원들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들이 직원의 접근을 막아 내고 소화기로 불씨를 정리하는 동안, 무혁은 요원 무리에 섞여 들어온 하임의 등을 슬며시 밀었다.
“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얼른 살펴봐요.”
그녀는 곧바로 움직였다. 대형 로커 왼쪽부터 하나씩 귀를 가져다 대며 소리를 골라냈다.
경보음과 발걸음, 웅성거림이 겹쳐 들렸지만 그 안에서 다른 것을 찾았다. 세 번째, 네 번째를 지나 다섯 번째에 귀를 가져가는 순간 하임이 멈칫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다급히 무혁을 돌아보았다.
“여기예요……!”
무혁이 즉각 움직였다. 측면으로 돌아선 그는 로커 잠금쇠에 총구를 가까이 붙여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금속이 터져 나가듯 찢어지며 잠금쇠 부분이 통째로 날아갔다. 안에는 이민 가방 가까운 크기의 대형 캐리어가 있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지퍼를 잡아 올렸다. 닫혀 있던 틈이 벌어지는 순간, 경악한 하임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에 정말로 소진이 있었다.
몸을 제대로 펼 수도 없는 공간에 잔뜩 구겨진 채로,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손목과 발목은 단단히 묶여 있었고, 입은 두꺼운 테이프로 틀어막혀 있었다. 피부 곳곳에는 긁히고 터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열린 지퍼 틈 사이로 겨우 이어 오던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가늘게 떨렸다. 요원들이 서둘러 소진을 끌어내고는 결박을 풀었다. 입을 막은 테이프를 떼어 내자 그녀가 거칠고 가쁜 호흡을 터트렸다.
“언니, 소진 언니…… 정신이 좀 드세요?”
이내 게슴츠레 눈을 뜬 소진이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씨, 훈련 때도 이 정도로 처넣진 않았는데.”
그녀는 혼절 직전인 꼴을 하고서도 하임을 보고 피식, 웃더니 고개를 털어 냈다.
“이 나이 먹고 접혀 있으려니까 죽겠네. 조금만 늦었으면 진짜 뒤질 뻔. 하아―”
“신철민은.”
하임은 인정머리 없이 신철민의 행방부터 묻는 무혁의 태도에 속으로 기함했으나, 정작 소진은 개의치 않아 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 이미 백 오피스에 숨었거나 백 오피스 통해서 외부로 튀려 할지도 몰라.”
“확실한가?”
“얼핏 엿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은데 왠지 그럴 것 같은 기미였어. 변장하든 아니면 어디에 숨어서 내빼든 간에 객실에는 없을 확률이 높아. 덫 여러 개 쳐 놓고 빠지는 데는 도가 튼 새끼야.”
“…….”
“계속 미끼 던져 놓고 우리 발목 묶으려는 걸지도 모른다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무혁은 곧바로 무전을 잡고 명령을 내렸다.
“D조는 지금 당장 지하 백 오피스로 간다. 호텔 빠져나가는 짐차든 외주 작업 차량이든, 종류 가리지 말고 전부 확인해.”
무혁은 곧장 직원 전용 통로로 걸음을 옮겼고, 하임은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라붙었다. 한 박자 늦게 돌아본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혁 씨 옆이 제일 안전하잖아요…….”
행여나 저를 떼어 낼까 싶어 그럴듯한 핑계를 대자 무혁의 잇새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에게 하임은 떼어 낼 수 없는 혹인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준 덕에 시간이 단축된 것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리 와.”
무혁은 하임의 손목을 쥐고는 보호하듯 제 뒤에 세웠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매캐한 배기가스 냄새와 습기가 뒤섞인,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선 투입된 요원들이 구역을 나눠 움직이는 사이, 짐차와 외주 차량을 포함하여 열 수 있는 모든 문이 줄줄이 열렸다 닫혔다. 트렁크를 확인하고, 적재함을 뒤집고, 내부를 훑어보는 손길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쪽 라인 이상 없습니다.
-뒤편 차량 한 대 더 확인 중입니다.
무혁이 추가 지시를 내리는 동안, 하임은 기존에 주차되어 있던 차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대씩 시선을 옮기며 가만히 훑어보던 그녀는 혹시나 시동이 걸리지 않은 차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무혁 역시 미시동 차량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여겼는지 이내 하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신철민은 기관지 확장증을 앓고 있어요. 산소가 부족한 곳에 숨어 있으면 오래 못 버틸 겁니다.”
천명음이든 마른기침이든, 뭐라도 새어 나올 수밖에 없을 거란 조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