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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77화


77. 두 사람은 말을 아낀 채 차량 사이를 오갔다. 하임은 걸음을 늦추었다가 다시 붙이며 귀를 열었다. 금속이 식으며 내는 잔열의 울림과 멀리서 흩어지는 발걸음, 무전이 섞인 소리가 겹겹이 얹혀 있었지만, 그 안에서 걸리는 건 없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출구를 지키던 요원들의 보고도 비슷한 말만 되풀이됐다. 이동 차량 없음, 특이 사항 없음. 같은 문장이 이어지자 무혁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미 빠져나간 건 아닌지, 스치는 의심을 밀어 내려는 순간이었다. 하임의 고개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아직 살펴보지 않은, 구석에 세워져 있던 차량을 유심히 보던 그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무혁 씨!” 두 사람의 시선이 꽂힌 순간, 차량 안에서 무언가가 먼저 반응하듯 움직였다. 시동이 걸린 엔진음 위로, 아주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겹쳐졌다. 다음 순간. 쾅—! 별안간 공기를 짓누르는 충격이 터져 나왔다. 불꽃이 튄 것도, 차량이 폭발한 것도 아니었다. 문틈 사이로 쏘아 낸 압력이 그대로 퍼져 나가며 주변 공기를 세게 후려쳤다. “엎드려!” 가까이 있던 요원들이 동시에 몸을 숙였고, 무혁 역시 하임을 감싸안으며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소리까지는 막지 못한 탓에 정면에서 밀려든 충격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때렸다. “아…….” 귀 안쪽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꽂혔다. 순간 모든 소리가 끊겼다가, 곧 뒤엉킨 채 밀려 들어왔다. 낮고 높은 것이 구분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뭉개진 채 울렸다. 삐이이이― 하는 이명이 귓속을 파고들며 길게 늘어졌다. 숨이 턱 막힌 것처럼 가슴이 조여 오자 균형을 잃은 몸이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그때 무혁의 손이 먼저 들어왔다. 뒤로 넘어가려는 하임의 몸을 낚아채다시피 끌어당긴 그가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하임아. 나 봐.”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소리는 닿지 않았다. 대신 귀 안쪽에서 미묘하게 번지는 감각이 뒤늦게 인지됐다. 따듯하면서도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손을 들어 귓가를 만지자 손끝에 묻어나는 것이 선명했다. 피였다. “…….” 하임의 양쪽 귀에서 피가 흐르자 무혁의 안색이 더없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엔진이 살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무혁의 날 선 시선이 번쩍 들렸다. 이번엔 반대편 구석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 세단이었다. 순식간에 시동이 걸린 차가 급하게 핸들을 꺾으며 빠져나갈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짧은 혼란을 틈타 움직이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새까맣게 벼려진 동공으로 쏘아보던 무혁이 총구를 겨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시선만 곧게 박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연속으로 터진 발사음이 주차장 안에 낮게 깔렸다. 첫 탄이 앞바퀴를 정확히 꿰뚫었고, 이어진 탄이 다른 바퀴를 연달아 터뜨렸다. 고무가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차량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그 와중에도 핸들을 틀며 빠져나가려던 차체를 향해, 무혁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탄환이 유리를 정면으로 관통하며 깨진 파편이 안쪽으로 흩어졌다. 억지로 버티던 차량이 더 이상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미끄러졌다. 끼이이익—! 차가 옆으로 틀어지더니 그대로 기둥을 들이받았다. 둔탁한 충격음에 이어 보닛이 찌그러지며 앞부분이 크게 꺾였다. 잠시 뒤, 엔진 쪽에서 탁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무혁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저 냉랭한 시선만이 차량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노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요원들이 일제히 차량을 향해 몰려드는 사이, 무혁의 시선이 하임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축 늘어진 채 가쁜 호흡을 삼키고 있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고, 억지로 참으려는 숨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귀를 감싸 쥔 손 사이로 붉은 것이 계속 흘러 나왔다. “하임아.” 낮게 부른 목소리는 분명 가까이에서 떨어졌는데 그녀에게는 닿지 않았다. 하임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 겨우 말을 꺼냈다. “아, 안 들려요…….” “…….”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말끝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귓속에서는 여전히 찢어지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바깥의 소리는 전부 밀려난 채, 이명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태였다. 하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시야마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귀 안쪽이 비정상적으로 눌린 채 뒤틀리는 고통이 선연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무혁의 턱선이 단단히 굳었다. “무, 무혁 씨…… 나 아무래도…….” 힘겹게 뱉는 하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이내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은 하임을 제 쪽으로 당기며 이를 빠득, 갈았다. * * * 희미한 의식이 떠오르는 동안,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이상할 만큼 눌린 듯한 고요였다.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 전부 두꺼운 무언가에 막혀 있는 느낌이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둔하게 퍼지는 감각이 귀 안쪽에 머물렀다. 하임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흐릿한 시야가 조금씩 또렷해지면서 낯선 천장과 희미한 조명이 먼저 들어왔다. 이어서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형체가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하임아. 우리 강아지.” 입 모양이 먼저 보였다. 조금 늦게 눌린 채 흐릿하게 퍼지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봉주였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그 옆엔 삼동이가 서 있었다. “하임이 일어났다.” 밝게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읽혔다. 소리는 또렷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소진이 서 있었다. “괜찮아요?” 하임은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말라붙은 것처럼 쉽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그제야 몸의 감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무겁기만 한 몸, 팔에 연결된 링거 줄, 움직이려 할 때마다 따라붙는 묘한 이질감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잠시 숨을 고른 하임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할아버지, 삼동이, 소진 언니. 보고 싶었던 얼굴들 틈에서 눈동자는 다른 누군가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걸 놓치지 않은 소진이 쓰린 미소를 지었다. “캡틴은 잠깐 자리 비웠어요.” “…….”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 한창 바쁠 때라서요.” 소진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래도 밤에 시간 날 때마다 계속 왔다 갔어요. 하임 씨 깨어나는 거 보려고.” 말을 마치며 그녀가 힐끗 시선을 떨궜다 올렸다. “아까도 바로 옆에 있었는데,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요.” 하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이내 삼동이가 커다란 스케치북에 뭔가 휘갈기듯 쓰더니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하임이 수술 잘 됐어. 곧 나을 거야.   수술? 하임이 아리송한 눈빛으로 보자 삼동이가 다시 펜을 움직였다.   고막이 찢어졌는데 수술해서 붙여 놨어. 걱정 안 해도 된대.   하임의 시선이 글자 위에 머물렀다. 고막. 그 단어를 읽는 순간, 귓속을 짓누르던 둔한 감각이 더 또렷하게 인식됐다. 막힌 것처럼 먹먹한 상태와 깊숙한 곳에서 이어지는 희미한 울림이 뒤늦게 현실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갔다. 귀를 덮고 있는 두툼한 거즈가 손끝에 닿았다. “충격 때문에 양쪽 다 손상됐어요. 그래서 바로 수술 들어갔고 다행히 잘 붙였대요. 완전히 회복되기까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소진의 말을 전부 알아듣기는 힘들었으나 하임은 눈치껏 고개를 조심스레 주억였다.   지금은 잘 안 들리겠지만 조금씩 돌아온대. 걱정하지 마, 하임아.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다들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못 본 사이에 삼동이가 조금 똑똑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어렴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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