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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78화


78. 하임이 눈을 뜬 지 며칠이 지났다. 청각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말소리는 한 겹 얇은 막을 사이에 둔 것처럼 둔하게 퍼졌고, 작은 소리는 놓치기 일쑤였다. 그런 불편함이 분명 존재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은 편안했다. 전처럼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병실 안은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복도를 오가는 부산스러운 발걸음, 의료진이나 환자들의 목소리 따위도 느낄 수 없었다. VIP 병동이라 일반 병동보다는 고요한 편이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예외적으로 들렸을 법한 소음이 귀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 그 차이를 또렷하게 체감할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이대로라면 굳이 여담 마을에 틀어박혀 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가끔은 습관처럼 귀를 열어 보려다가 멈추곤 했다. 전처럼 집중하면 뭐라도 들려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제 생각만큼 청각이 따라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답답함이 스쳤지만,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거의 같은 흐름으로 흘러갔다. 침대에 기대앉아 식사하고, 약을 먹고, TV를 켜 놓은 채 시간을 보내거나 삼동이와 수다를 떨었다. 삼동이의 조잘거림을 들어주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뉴스는 잠잠했다. 채널을 몇 번이나 돌려도 비슷한 뉴스만 반복될 뿐이었다. 경제, 정치, 사고 소식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정작 자신이 겪은 일과 맞닿아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라는 듯이. 나중에 소진에게 물어보니 기밀 기관들이 얽힌 데다가, 외부로 새어 나갈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였다. 슬쩍 하루타의 행방에 관해서도 물었으나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대답을 피하는 기색이 분명한 걸 보아, 어쩌면 하루타가 그날 잘못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하여 하루타를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무혁도 병실에 매일 다녀갔으나 이상하게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늦은 밤에만 잠깐씩 짬을 내어 왔다 갔기 때문이다. 일부러 자지 않고 버텨 보려고도 했으나 약기운 탓에 의식이 흐려지기 일쑤였다. 이틀 뒤 오후, 하임은 느지막한 오후에 봉주가 매일같이 내미는 컵을 받아들었다. 김이 은근하게 올라오는 컵에선 익숙한 향이 퍼졌다. 입안에 머금자마자 퍼지는 씁쓸한 맛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대로 삼켰다. “할아버지, 어째 농도가 점점 더 진해지는 것 같은데.” “알면 잔말 말고 마시기나 혀. 며칠을 침대에 박혀 있었는데도 그리 비실비실해서 어쩔 겨.” “에이, 비실비실하다니. 나 볼이 완전 포동포동해졌는데?” “그게 포동포동한 거면 삼동이는 풍선이여?” 소파에서 기분 좋게 과자를 세 봉지째 비우던 삼동이가 하임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시방, 저놈은 약수 한 방울도 처마신 적이 없는디 왜 뒤룩뒤룩 살이 찌는 겨. 운동 배우면서 검은 띠 따겠다고 설치더니 식탐이 검은 띠여.” 장가가면 집안이 거덜 나겠다는 둥 색시 등골이 휘겠다는 둥, 봉주는 투덜거리면서도 삼동이가 좋아하는 초코파이 한 박스를 툭, 던졌다. “상자는 먹지 말어.” “우와, 내가 좋아하는 찰떡 초코파이다.” 하임은 여전한 것 같다가도 어딘가 변화가 생긴 듯 위화감이 느껴지는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새 운동을 비롯해 특정 훈련을 받는다고 했으나 자세히는 듣지 못한 터였다. 최근엔 부쩍 만화책을 멀리하는 데다가 기초 호신술 교본 같은 걸 읽기도 했다. “이것도 어여 먹어.” 하임은 봉주가 내민 산삼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할아버지, 산 타셨어?” “아니여. 아는 놈한테 얻어 온 거여.” “할아버지,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나 다 나았어.” “낫긴 뭘 나아. 아직 한참 더 남았구먼.” 먼 거리의 소리는 거의 못 들어도 가까운 거리는 전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겹치는 소리를 구분하거나 방향 감각이 되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테지만 그래도 회복이 되고 있는 건 확실했다.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시니까 그러지.” “알면 어여 먹기나 혀. 입 꽉 다물고, 기운 퍼지게 꼭꼭 씹어.” 하임은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들린 작은 삼을 입에 넣었다. 입을 열고 씹으면 기운이 빠져나간다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들은지라 숨도 아끼며 이로 천천히 씹었다. 혀끝이 저릿해질 만큼 짙은 쓴맛에 얼굴을 찌푸릴 법도 했지만, 하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억지로 씹어 삼켰다. “얼른 기운 차리되 너무 낫지는 말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할아버지?” “예전만큼 들리진 않았으면 한다는 뜻이여.” “…….” “이 할아비는 평생 우리 강아지만 보고 살아왔는디. 아파도 내가 아파야지.” “그런 말이 어딨어…… 내가 할아버지 몫까지 다 아플 거야.” “예끼. 재수 없는 소리 말어.” 봉주는 주름진 손으로 하임의 뺨을 서툴게 쓰다듬었다. 봉주는 그녀가 저녁밥을 싹싹 비우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돌아갔다. “삼동아, 넌 안 가?” “형아가 밤에 하임이 잘 지켜 주라고 했어.” “어차피 문 바깥에서도 요원분이 지켜 주고 계시잖아. 피곤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 “안 갈 거야. 형아도 형아 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 언제 오는데?” “몰라. 형아 요즘 일 많아서 바쁘대.” 하임은 약을 입에 털어 넣는 척만 하고는 몰래 등 뒤로 숨겼다. 슬슬 잘 시간이 되자 그녀는 평소처럼 졸린 척 가짜 하품을 쏟아 내며 침대에 누웠다. “나 그럼 이만 잘게.” “응. 하임이 잘 자. 내 꿈 꿔.” 하임은 속으로 오늘은 기필코 무혁의 얼굴을 보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주먹 속에 약을 감췄다. * * * 이중성과 신철민을 포함한 핵심 인물들에 대한 심문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총상을 입은 이중성은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신철민은 노골적으로 심신 미약을 가장하며 질문을 넘겼다.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답을 할 때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결국 심문의 수위가 점점 올라갔다. 약물을 써서 반응을 끌어내고, 심리를 흔들어 틈을 벌리는 작업이 반복됐다. ‘지겨운 개새끼들.’ 원래라면 무혁은 이런 판에서 나름의 흥미를 느끼는 쪽이었다. 상대를 무너뜨릴 만한, 혹은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찾아내는 일에 익숙했고, 그걸 즐길 줄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시간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쓸모없이 질질 끄는 놈들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하임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못 봤다는 사실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심문실을 나서는 순간엔 안 그래도 더럽던 기분이 시궁창에 처박히는 듯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무혁은 병원으로 향하며 삼동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아? 오늘은 더 늦게 전화했네? “보고해.” 건조한 한마디에 삼동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하임이는 아침에 죽이랑 반찬, 점심엔 미역국, 저녁은 할아버지가 가져오신 거랑 같이 먹었어. 영화도 보고 잠깐 뉴스도 보다가 재미없는지 금방 껐어. 오후에는 창가에서 30분 동안 조용히 바깥만 쳐다보다가 낮잠도 잤어. 조금 심심해 보여서 내가 책도 읽어 줬어. 저녁 먹고 샤워도 했어. 삼동이는 ‘특이 사항 무’ 하나로 끝날 보고를 길게 늘리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주제였다면 핀잔을 주었겠지만, 하임에 관한 보고인 만큼 무혁도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근데, 형아. 하임이 좀 하얘진 거 같지 않아? 소진 누나가 피부 좋아지라고 매일 팩도 붙여 줘. 매일매일 산 탔으면 늙어서 ‘초코하임’ 됐을 텐데 지금은 ‘화이트하임’ 되어 가고 있어. 과자에 비유하는 게 제법 찰떡이라 무혁이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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