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70화
70.
하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은 마치 처음부터 이곳이 목적지이기라도 한 듯 망설임이 없었고, 그 기척을 느끼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하루타 씨가…….’
저를 일부러 이곳으로 데려온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쳤다. 그녀는 눈물이 고일 틈도 없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블랙폰을 만지작거렸다. 일반 핸드폰과 비슷한데 조작법이 다른 낯선 기기로 어떻게든 무혁에게 연락을 시도해 보려 했다. 그런데.
“신호 잡히는 거 있는지 확인해.”
“……!”
서늘한 목소리에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하임은 반사적으로 블랙폰을 손안에 더 깊이 감쌌다. 뭐라도 하려 했다간 그대로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몸을 더 작게 웅크린 그녀는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곧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따로 신호 잡히는 건 없습니다.”
하임은 그제야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제가 있는 곳으로 돌진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들이 저를 찾으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곧 짧은 적막 뒤에 남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었다.
“적당한 곳을 찾았습니다.”
철문 밖에서 신발 밑창이 모래를 지그시 밟는 소리가 들렸다.
“차량이 붙었으니 곧 잡힐 겁니다. 연구원은 I.D.C 측에 넘길 겁니다.”
하루타가 탄 차라는 걸 눈치챘구나. 하임은 입안이 버석하게 마르는 걸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를 미끼로 쓰면 울프독 잡는 건 시간문제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판을 짜 드리겠습니다. 대신 거래 자체에는 절대 개입하지 마십시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하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미끼. 단어 하나가 귀에 박힌 채 떠나지 않았다. 즉, 저를 이용해 무혁을 끌어낸 뒤 그를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순간 더운 공기가 목 안으로 스며든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울프독만 처리되면 이번 작전 과정과 실험체 확보 시도, 접경 지역 충돌 데이터 전부가 하나의 사례로 정리될 겁니다. 그 자료는 위원님 쪽으로 넘겨드리죠.”
‘어, 어떡하지.’
어떻게든 무혁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으나,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았다. 제가 잡히면 모든 게 끝일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대신 조건은 그대로입니다. I.D.C가 진행하던 감각 증폭 실험의 기록 일부와 관련 프로토콜, 그리고 연구 라인 접촉 권한은 우리 쪽으로 넘겨주십시오. 사건 정리는 울프독 단독 범행으로 처리하면 됩니다. 청명국과 I.D.C가 엮였다는 흔적은 공식 기록에서 전부 빠지는 걸로요.”
남자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울프독 단독 범행으로 정리되면 ‘NEXA’에게도 치명적이니 국정원 내부에서 알아서 움직일 겁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조직도 자연스럽게 폐지 수순을 밟게끔 위원님이 방향만 잡아 주시면 됩니다. 그 정도 일은 굳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처리하실 거라 믿습니다.”
하임은 그가 하는 말을 최대한 기억하려 애썼다. 얼핏 들어도 무심코 흘려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름 모를 기관들에 이어 국정원까지 언급되자 등골을 타고 솜털이 삐죽 섰다. 단순한 범죄나 음모가 아닌 듯했다.
“배소진은 위원님 측에서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사람의 목숨을 마치 처리할 서류 한 장쯤 되는 것처럼 말하는 태도에 하임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블랙폰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시선을 내리니 어두운 화면 위에 짧은 문구 하나가 떠 있었다.
CODE: WOLFDOG
순간 목구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통신이 연결되었지만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데다, 밖에 있는 남자들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
-…….
숨조차 조심스레 삼키며 그대로 굳어 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 가늠하는 듯, 무혁 또한 입을 열지 않아 침묵이 몇 초간 이어졌다. 그때, 철문 밖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곳에서 신호가 한 번 잡혔다가 바로 사라졌습니다.”
“확실해?”
“틀림없습니다.”
하임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졌다. 생각할 틈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빠르게 주변을 훑던 그녀의 시선이 창고 뒤쪽 낡은 철제 창틀로 향했다. 유리는 이미 깨져 있었고,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틈이 남아 있었다.
‘지금밖에 없어.’
하임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거친 철판과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몸 곳곳이 베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밖으로 떨어지자마자 방향도 보지 않고 달렸다.
인도가 없어 잡초와 흙길이 뒤엉킨 빈터였다. 남자들이 조금만 건물을 돌아도 제가 보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돌진하듯 이곳으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흘긋 돌아본 하임의 눈이 커졌다.
“……!”
부아아앙―!
차의 생김새가 익숙했다. 하루타가 탄 차가 이쪽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의 차가 마치 남자들을 우롱하듯 그대로 창고 앞을 미끄러지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낮춘 채 빈터를 가로질렀다. 잡초가 발목에 감기고 돌에 걸려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뒤쫓아 가.”
남자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거친 소음이 이어졌다. 하루타의 차가 관심을 끌어 준 덕분에 들키지 않은 하임은, 시야 저편에 보이는 산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마침 낡은 담장 사이로 좁은 골목이 나타나자 그녀가 방향을 꺾었다. 건물 뒤와 벽 사이사이로 몸을 숨기며 산 쪽으로 나아갔다.
정신이 없었다. 겨우 연결된 블랙폰을 귀에 댈 틈조차 없이 계속 뛰었다.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흔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뒤에서 누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등을 밀어붙였다.
머지않아 산 초입을 지난 하임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하임은 잡목이 엉켜 있는 경사를 거의 기어오르듯 통과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 몸을 숨길 만한 굵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까지 귓가를 때리던 엔진 소음도, 사람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블랙폰을 귀에 갖다 댔다.
“무, 무혁 씨…….”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에 수화기 너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임아.
그 한마디에 눈시울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버티고 있던 것이 무너지자 하임은 입을 열기도 전에 눈물부터 터트렸다.
-다친 곳은.
“흑, 흐윽. 없어요…….”
몸 군데군데가 따갑고 쓰라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무서워……. 보고 싶어요, 흐으윽.”
하임이 솟구치는 눈물과 함께 두서없는 말을 쏟아 냈다.
“언제, 언제 와요……? 빨리 와 주면 안 돼요. 아, 아니야. 오지 마. 오면 무혁 씨가 위험해질 거예요.”
-위험한 건 그 새끼들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저 사람들이 분명…….”
그녀는 까먹기 전에 자신이 엿들었던 대화 내용을 최대한 빠짐없이 전했다. 무혁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는데 그가 말을 끊었다.
-하임아.
“흑, 네?”
-지금 다시 움직여요. 누군가가 따라붙은 거 같으니까.
“……!”
-어떻게든 숨어 있어. 어디에 있든 내가 찾을 테니까 넌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되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네.”
하임은 체력이 거의 바닥 난 상태였지만 비척비척 일어났다. 제가 잡히면 무혁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통신 끊지 말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요. 채널이 연결되어 있는 동안 위치는 나만 확인할 수 있으니 안심하고.
하임은 무혁을 믿고 더 깊은 산속으로 나아갔다. 비록 와 본 적 없는 낯선 산이지만 그래도 산을 타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발끝으로 흙을 더듬으며 걷는데 뒤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크게 지나갔다.
그녀는 길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라는, 어릴 적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한 발 한 발 산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