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46화
46.
“…….”
이틀 동안 긴 잠을 잔 하임이 깨어났을 땐 마을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집 안이 묘하게 분주한 동시에 나무를 켜는 소리와 못을 박는 둔탁한 울림이 간간이 이어졌다.
기름과 새 목재가 섞인 낯선 냄새까지 풍기자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
부엌 쪽 기둥을 받치고 있던 들보가 교체되어 있었고, 오래 삐걱대던 마루 한쪽은 말끔하게 손을 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임은 작업복 차림의 남자 셋이 각자 맡은 곳을 오가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말을 아끼는 태도와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이 눈에 띄었다. 이 와중에 무혁이 보이지 않아 그녀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아, 깨셨습니까?”
마루 끝에서 고개를 든 남자가 짧은 인사를 건넸다. 박경조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이내 나머지 두 남자도 짤막하게 통성명을 해 왔다.
창가 쪽에서는 이바울이라는 남자가 못을 정리하고 있었고, 뒤뜰로 통하는 문 근처에서는 송정환이라는 남자가 벽면을 점검하고 있었다.
하임은 집이 수리되는 광경보다 이들이 풍기는 기묘한 안정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하임아, 괜찮아?”
언제 왔는지 삼동이가 약초가 든 소쿠리를 들고 나타났다.
“하임이 몸보신해야 해. 삼동이가 몸에 좋은 거 만들어 줄게.”
하임이 그의 팔꿈치를 살짝 잡아끌며 속삭이듯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천종이 형아 친구들이래.”
“…….”
“놀러 왔는데 잘 곳이 없어서 우리 집에서 자기로 했어.”
삼동이는 어딘가 들뜬 얼굴로 가방을 뒤지더니 반짝이는 신형 게임기를 꺼내 보았다.
“이것 좀 봐. 형아들이 삼동이한테 선물해 준 거야.”
착한 형아들이라며 낯선 이들을 추켜세우는 그를 보며 하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집을 울리는 소리들은 분주했지만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급함도 떠들썩함도 없었다.
“……천종 씨는 어디 가셨어?”
“천종이 형아는 아까 마을 밖에 다녀온다고 했어.”
“설마 혼자 가신 거야? 이 환한 대낮에?”
“몰라. 형아가 이제 안 숨어 지내도 된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도 아까 외출하셨어. 잠깐 쉬고 있어 봐.”
삼동이는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하임의 안색을 살피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제 집이 무척 낯설다고 느끼며 마당을 어색하게 배회했다. 그러다 경조와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저기, 천종 씨는 언제 돌아오나요?”
“예? 누구요? 큭. 아, 죄송합니다.”
뭐가 웃긴지 남자는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갈무리하며 입가를 매만졌다. 그는 순수하리만치 진지한 하임의 얼굴을 잠시 빤히 보다가 다른 동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바울아. 천종이 형님은 언제 돌아오신다냐?”
“해지기 전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아, 네에.”
머쓱한 미소로 받아친 하임이 등을 돌렸다. 아, 내가 다른 이름으로 불러서 웃은 거구나. 그러고 보니 그의 기억이 꽤 돌아온 듯도 한데, 저는 여전히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날이 추운데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저희끼리면 충분합니다.”
“그럼 따듯한 차라도 타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캡, 아니 형님이 저희를 가만두시지 않을 겁니다.”
“아…….”
그녀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멍이 든 목을 매만지며 집 안으로 향했다. 삼동이가 만들어 준 죽과 약수를 비우고 나니 어느새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하임아, 졸리면 좀 더 자. 몸이 놀라서 그런 거야.”
평소에는 이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하임이지만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녀는 무혁의 방에서 그의 귀가를 기다리다가 저도 모르게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다 제 이마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눈꺼풀을 반쯤 열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시야 사이로 장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깼어요?”
가슴을 뛰게 만드는 시니컬한 어조에 하임의 정신이 한층 또렷해졌다.
“천종 씨이…….”
“…….”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뭔가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었다. 하임은 무거운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 옅게 웃었다.
“천종 씨 친구분들은요?”
“좀 전에 갔습니다.”
“근데 갑자기 여기엔 왜 오신 거예요? 여기는 놀 만한 곳도 아닌데.”
“할 일이 있어서 부른 겁니다.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는 늘 그랬듯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내심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천종 씨를 형이라고 부르던데, 동갑은 아닌가 봐요.”
“나보다 두세 살쯤 어리긴 하지.”
“그렇구나.”
확신의 찬 어투에 그녀는 어쩌면 그의 기억이 전부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 내겐 말해 주지 않는 걸까. 아직도 비밀이 많은 걸까?
혹시 집을 고쳐 주고 나면 그땐 정말 이 마을을 떠나는 게 아닐까, 우울한 상상에 빠져 있던 중 그의 잇새로 덤덤하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앞으론 무혁 씨라고 불러요.”
“……네?”
“진무혁입니다. 내 진짜 이름.”
하임이 별안간 숨을 멈췄다. 그저 이름 하나를 알려 줬을 뿐인데 심장이 시끄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혁. 진무혁.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이름이구나. 주인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녀는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수줍게 입술을 깨물었다.
“……네, 무혁 씨.”
돌연 기쁜 소식이라도 접한 것처럼 어렴풋하게 웃자 무혁의 눈길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그 새끼들이 무슨 말 했어요.”
“…….”
“어떻게 무섭게 했는지 말해 봐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하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녀는 문득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저, 장 씨 아저씨 말이에요. 아저씨가 이사 가던 당일에 어딘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셨는데, 혹시, 어, 그러니까…….”
“내가 한 거 맞아요.”
무혁이 머뭇거리는 하임에게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 새끼들이 장 씨 때문에 나에 대해 눈치챈 거 같아?”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끼들이 뭐 물어봤어.”
“……무혁 씨 사진 보여 주면서 아냐고 물어봤어요.”
“그래서. 모른다고 시치미 떼면 그놈들이 속을 줄 알았어?”
화내는 기색 없이 고고한 말투였지만, 하임은 어쩐지 그가 많이 화가 나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지만, 만에 하나 나 가지고 협박하는 새끼들 있으면 그냥 순순히 협조해요. 어차피 내 손에 다 죽게 될 테니까.”
“……장 씨 아저씨한테 어떻게 한 거예요?”
“자꾸 듣기 싫은 소리를 지껄이길래 혀를 잘랐지.”
하임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저 무서운 농담을 하는 거겠거니, 싶다가도 진지하기만 한 눈빛과 그날 장 씨의 상태를 상기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 거짓말.”
어색하게 웃으며 애써 부인하려는 반응에 무혁이 고개를 여상히 기울였다.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인데 자르지 못할 이유가 있나. 그 정도도 많이 봐준 건데.”
“…….”
“왜. 내가 이런 놈이라 무서워요? 상종하기 싫어졌어?”
“저, 정말이에요……? 그럼 날 끌고 간 그 남자들은…….”
“한 명은 무덤행 확정. 다른 한 명은 운이 좋으면 평생 불구로라도 살겠지.”
불현듯 흐릿한 정신으로 목격했던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분명 남자의 뒤통수에 칼이…….’
하임은 순간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잊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방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팽팽해진 느낌이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끊어질 것 같았다.
무혁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분노도 죄책감도 스스로를 변명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그저 결론이 난 사실을 전하는 사람처럼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그녀를 더 옥죄었다.
‘무서워.’
눈앞의 남자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 공포는 단순히 잔혹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과연 자신을 어떤 얼굴로 바라볼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컸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보다, 여기서 눈을 피하면 다신 이 남자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음? 더는 상종하기 싫냐고 묻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