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45화
45.
그날 이후 그는 복수를 결심했다. 아무리 슬프고 화가 나도 울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대신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
청명국의 요원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랜 시간 혹독한 훈련을 거친 그는 신분을 위조해 NEXA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당장 복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긴 시간을 인내했다. 그 조직은 무척이나 견고했기에 중심으로 갈수록 진실은 더 멀어지곤 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며 청명국 측에 정보를 흘렸지만, 결정적인 문은 늘 닫혀 있었다. 그동안 중성의 위에는 늘 캡틴 진무혁이 있었다. 진급은 번번이 가로막혔고, 그는 비밀을 파헤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같은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중성은 여러 번 흔들렸다. 임무를 함께하며 동지애를 느끼거나 자신이 정말로 NEXA의 요원인 듯 착각하는 순간도 더러 있었다. 정을 주면 안 되는 이들에게 정을 주게 될 때마다 스스로를 혐오했다.
그러다 마침내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제 식구들에게 총을 쏜 남자의 정체를.
NEXA 초기 시절에 국장을 지냈던 독고일재. 그리고 그가 진무혁의 외조부라는 사실까지.
올해 초에야 연결된 그 한 줄의 정보는, 중성이 십수 년간 붙들고 버텨 온 시간을 하나로 꿰었다. 이제 남은 건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는 일뿐이었다.
마을 하나쯤 쓸어 버려서라도 그 핏줄을 끊어 내겠다는 다짐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숨을 고른 중성의 눈빛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개새끼 목숨이 끈질겨 봤자지.”
중성은 더럽게 목숨줄이 긴 진무혁을 경멸한다는 듯 뇌까렸다.
진무혁은 목줄을 거부한 채 전장을 돌아다니는, 한 마리의 울프독 같았다. 명령을 이해하면서도 따르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한 종류였다. 그는 늘 조직의 통제를 비웃어 왔고, 그 비웃음엔 언제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그런 진무혁은 요원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계산 없이 독기로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계산을 끝낸 인간.
야생에 풀어놓은 맹수처럼 제멋대로 움직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선은 넘지 않았다. 한낱 반항심으로 규율을 어기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 무너뜨려도 되는지를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종류였다.
단체 임무를 할 때도 똑같았다. 겉보기엔 동료애를 갖춘 인간처럼 보였으나, 무혁에게 그것은 상황에 따라 호출되는 반응 값에 가까웠다. 감정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맞춰 배치된 기능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엔 느슨해 보이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엔 누구보다 빠르고 잔인할 정도로 냉정해졌다. 요원으로선 최고의 조건을 갖춘 것이지만, 동시에 한낱 인간으로선 결함에 가까운 성질이었다.
윤리나 명분 따위는 무혁에겐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규칙 위에 서서 필요하면 전부 짓밟을 수 있는 놈. 중성은 그의 등을 보며 수없이 생각했다. 저건 동료가 아니라 재난이라고.
상념에 빠져 있던 중성이 이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울프독 찾았습니다.”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매만졌다. 무혁이 가차 없이 칼을 꽂아 넣은 바로 그곳이었다. 꽤 심각한 치명타를 입는 바람에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울프독은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중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통증이 아니라 오래 묵은 기억이 옆구리를 쑤셨다. 계획은 이미 굴러가기 시작했고, 되돌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입꼬리를 눌렀다. 이번엔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의 차례였다. 울프독이 어디로 달아나든, 끝은 하나뿐이었다.
* * *
무혁은 끝내 정신을 잃은 하임을 고이 집으로 옮겼다.
“……그래서 니를 노리는 새끼들이 기어이 우리 하임이를 건드렸다는 게지.”
자칫 큰 화를 당할 뻔한 손녀를 살피던 봉주는 욕을 퍼붓는 대신 말을 아꼈다.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에서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여.”
“바로 여담 마을을 떠날 계획입니다. 하임 씨를 이곳에 두고 갈 수 없으니 데려가고자 합니다. 안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영감님도 당분간 몸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불찰이니 만회할 기회를 주시죠.”
바늘 하나 끼어들 틈 없는 표정이었다. 설득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는 걸, 굳은 얼굴이 먼저 말해 주고 있었다. 방 안에 흐르는 침묵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니가 하임이를 뭘 어찌 책임진다는 거여. 나는 내 손녀 못 보낸다.”
무혁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이 아이는 여기서 컸고, 내가 지켜 온 아이여. 마을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는 니놈의 전장이지. 내가 그 꼴을 어찌 보라는 거여.”
“이제는 여담 마을도 안전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말하는 겁니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놈들이 이 마을을 노린다면 여기서 끝내면 되는 것이여.”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임이는 이 마을을 떠나면 못 버틸 거여. 세상의 온갖 소리가 이 작은 귀에 들어가면 죽는 거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를 거다, 이 말이여.”
무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반박할 논리는 많았지만, 그 어느 것도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계산과 판단으로 움직이던 머리가 드물게 멈췄다.
“……고통스러워하는 일 없게끔 반드시 지킬 겁니다.”
노인의 예리한 시선이 무혁에게로 돌아왔다.
“당장 이곳을 떠나기 어렵다면, 위협을 먼저 잘라 내든 뭐든 할 겁니다. 할 수 있습니다.”
“…….”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한번 가라앉았다. 봉주는 하임의 이마에 손등을 얹고 체온을 확인한 뒤 천천히 등을 폈다.
* * *
[하루타는 어떻게 된 겁니까. 영감님이 왜 그자를 그렇게까지 망가트려 놓은 건지 궁금합니다만.]
[그놈이 찾으러 온 걸 못 찾게 하기 위해서여.]
[하루타가 찾으러 온 게 뭡니까?]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께 보채지 말어.]
무혁은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 여담 마을을 떠난다는 선택지는 하임의 상태를 고려하여 머릿속에서 조용히 지워졌다.
이내 그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에야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진무혁입니다.”
-…….
“병력 지원이 필요합니다, 실장님.”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야, 진무혁! 이 미친 새끼야!
무혁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상급자, 강종만 실장은 생존을 알리는 거나 마찬가지인 전화에 다짜고짜 역성을 내기 시작했다.
-살아 있었으면 진작 연락해야 할 거 아니야! 이 새끼가 본부를 우습게 알지!
“죽기엔 아직 바쁩니다.”
-이 쳐 죽일 새끼야! 이미 정리까지 다 끝냈는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전화하면 내가 반가워할 거 같아?!
“병력 지원이 필요합니다.”
무혁은 종만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전했다. 곧 상대가 숨을 고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무혁, 너 지금 어디야.
“여담 마을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보고부터 해야 할 거 아니야!
무혁은 간결하게 핵심만 뽑아내어 그간의 상황을 보고했다. 중성에 관한 소식을 전달할 땐 종만도 충격이었는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중성이 청명국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른 놈에게서 청명국 내부 약호와 숫자 코드가 새겨진 피하 이식 마이크로 칩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돌아와야 할 거 아니야, 새끼야.
“지금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정예 병력이나 보내 주시죠.”
-지금 장난해?! 그 촌구석에 지원 보냈다가 얼굴 팔릴 일 있어?!
“좌표와 동선은 제가 공유하겠습니다.”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서라. 우선 본부로 돌아와서 대책 회의부터 하자고.
“제 신부가 이곳에 있어서 두고 갈 수 없습니다.”
-……뭐?
“참, 그리고 I.D.C에 관한 정보 접근 권한이 필요합니다. 곧 서버 접속할 테니 전부 액세스하게 해 주십시오.”
-야, 진무혁!
“이중성은 현재 ‘오태구’라는 가명을 쓰고 있습니다. 실장님도 뒤통수 맞고 싶지 않으면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너 혼자 판 굴릴 생각 마라. 어?!
“그럴 생각 없습니다. 이만 끊습니다.”
뚝.
통화를 종료한 무혁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지나치게 평온한 마을 풍경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