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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4화


44. 보고 싶었던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을 무릎 꿇린 무혁이 뒤에서 끈으로 남자의 목을 있는 힘껏 조르고 있었다. 하임은 남자들 못지않게, 아니 더 무감한 표정의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를 부르고 싶은데 여전히 목이 졸리고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눈에 담는 그녀의 시야가 서서히 흐려졌다. 하임은 머지않아 제게 다가오는 무혁의 그림자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 * * “끅, 커억…….” 무혁은 제 아래에서 발버둥 치는 남자의 목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였다. 와이어는 이미 살을 파고들었고, 숨이 막힌 남자의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손끝에 전해지는 떨림과 맥박의 난조를 느끼면서도 무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분노가 끓어오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고, 감정이 아니라 판단만 남은 눈빛은 상대를 더욱 압도했다. 사람을 죽일지 말지를 고민하는 단계조차 지난 상태라는 걸 직감하게 했다. 남자의 몸부림이 점점 힘을 잃어 갈 즈음, 무혁이 아주 잠깐 힘을 풀었다. 그러자 허공을 긁듯 들이마신 숨이 남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헉, 허억……!” 살았다는 안도감이 얼굴에 번지기도 전, 무혁의 손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거칠게 뒤로 젖혀진 목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졌다. “니들 윗대가리 불러.” 낮고 건조한 음성이 동굴 안에 떨어졌다. 남자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 턱을 떨며 신음만 흘렸다. 뚝. 이윽고 남자의 팔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였다. 고통에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다리가 꺾였고, 관절이 부러지는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무혁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그저 방해물을 치우는 과정일 뿐이라는 양, 초연하고 주저함이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채로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의 울부짖음을 배경음처럼 흘려보내며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통수에 칼이 박힌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간 그의 시선은 오직 하임을 향해 있었다. “…….” 무릎을 굽힌 무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임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의식이 없는 몸은 지나치게 가벼웠고 숨결은 불안정했다. 가만히 그녀를 살피는 무혁의 표정은 분노도 안도도 아닌,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계산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정리뿐이었다. 무혁은 하임을 안은 채 동굴 입구로 몸을 틀었다. 지이이잉― 곧 남자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사지가 모조리 뒤틀린 주인은 전화를 받지 못했다. “끄헉, 헉.” 전화가 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무혁은 주인 대신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말없이 귀에 갖다 댔다. “…….” -……. 이쪽에서 아무 응답이 없자 상대 또한 말이 없었다. 무혁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제 눈앞에 있다는 양 입매를 사납게 비틀었다. “씨발, 개새끼들이. 좆 달고 다니는 거 쪽팔리게 툭 밀면 쓰러질 여자를 건드려.” -……. “따까리들 시체는 알아서 거두시고. 조만간 너도 내가 찾아갈 테니 그렇게 알아.” 무혁은 잠자코 제 말을 듣기만 하는 상대를 향해 대놓고 비웃음을 날렸다. “나는 네 숨 고르는 타이밍만 들어도 알아. 이중성, 이 씹새끼야.” 뚝. 무혁이 핸드폰을 남자의 몸 위로 던졌다. 하임이 위협을 당한 이상,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 하루빨리 여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이내 그는 남자를 살피며 정체를 유추할 수 있을 만한 걸 찾아냈다. 피부를 더듬어 보니 한쪽 귀 뒤에 쌀알만 한 캡슐이 이식되어 있었다. 무혁은 날카로운 단도로 살을 째고는 피 묻은 캡슐을 꺼냈다. 아주 작게 새겨진 약호와 숫자 코드. “…….” 북한 측 청명국의 내부 약호였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외투를 벗어 하임을 감쌌다. 시퍼런 손자국이 난 목둘레를 약하게 어루만지자 그녀의 숨결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떨리더니 빛을 더듬듯 게슴츠레 열렸다. 그녀는 한동안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를 인식하려 애쓰는 듯 숨이 들쭉날쭉해졌다. 그러다 시선이 멈췄다.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알아본 순간이었다. “…….” 입을 열었으나 목이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쌓여 있던 공포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손끝이 떨리고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하자, 하임은 그제야 눈물을 터트렸다. 억눌러 둔 울음이 터지며 짧고 거친 숨 사이로 끊어졌다. “흑…….” 무혁은 말없이 하임을 단단히 고쳐 안았다. 떨림이 겨우 가라앉을 때까지 놓지 않고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이마가 가슴에 닿으며 축축한 숨이 옷자락을 적셨다. “흐으윽.” “집에 가자.” 무혁의 낮은 한마디가 닻처럼 내려앉았다. 그의 목에 매달린 하임은 안도와 설움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네 숨 고르는 타이밍만 들어도 알아. 이중성, 이 씹새끼야. 뚝. “…….” 전화가 끊긴 뒤에도 중성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서 멀어진 숨소리가 아직도 귓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손을 떼며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야 말없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를 가리던 머리칼이 뒤로 밀려났지만 얼굴에는 분노나 동요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다져진 결심만이 지나치게 차분한 눈빛 속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중성. 본명은 리충성. 그는 북한의 청명국(靑冥局) 소속이었다. 푸를 청, 어두울 명. 푸르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판을 짜는 어둠의 기관. 국가의 이름을 달고 있되 국가의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다. 문서가 없는 대신 사라진 기록과 끊긴 인맥,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만이 그 흔적을 대신했다. 리충성은 그 조직의 한복판에서 자랐다. 청명국 요원이었던 부모는 작전 중 사망 처리되었고, 그 빈자리는 조직이 메웠다. 보호라는 명목 아래 선택된 양육은 애정과 훈련을 구분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 법과 총을 쥐는 법을 동시에 배웠고, 잠드는 법보다 깨어 있는 법을 먼저 익혔다. 그를 키운 이는 청명국 전(前) 총무감이었다. 실질적으로는 국가의 어둠을 관리하던 인물로, 총무감의 보호와 신뢰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는 중성을 요원으로 키웠고 동시에 인간으로 대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그 노인은 아버지였으며 때로는 할아버지였다. 제가 자란 총무감의 집은 늘 조용했다. 웃음소리 대신 보고서가 오갔고, 축하 대신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일말의 온기가 존재했다. 중성은 그 온기를 사랑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날 밤, 집이 습격당했을 때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외출 중이었던 중성은 산등성이를 넘어오던 중, 낯선 소리에 본능적으로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창문 너머의 광경을 전부 보게 되었다. 왜 저들이 왔는지, 왜 경고도 협상도 없이 문을 부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작전이라기보다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무장한 요원들이 들이닥치자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저항할 틈조차 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 지긋한 나이에 깔끔한 양복 차림이었던 남자.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는 몇 마디를 던졌다. 협상도 설득도, 감정이 실린 말도 아니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총성이 울리며 총무감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저 하찮은 벌레 한 마리를 밟듯 망설임 없는 사살이었다. 총성이 울린 뒤에도 그 남자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아무렇지 않게 돌아섰다. 그 장면은 중성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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