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36화
36.
“뭐야.”
무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반격은커녕 몸을 쓰는 기본적인 요령조차 없었다. 말끔한 몸과 도주 동선조차 계산되지 않은 움직임을 보자 허탈감이 올라왔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 온 병신일까.”
음산한 중얼거림 뒤로 바닥에 눌린 남자가 급히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조, 조또 마떼! 마떼, 마떼요!”
“…….”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일본어에 무혁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손에 힘을 더 실자 남자의 떨림이 손끝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보, 부코와 칸코쿠진! 칸코쿠진데스!”
“개새끼가 씨발, 대놓고 사람을 농락하네.”
무혁의 입술이 매섭게 비틀렸다. 일본어로 본인은 한국인이라 외치는 이 또라이 새끼는 뭘까.
“너 뭐야.”
무혁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옆 마을에 신세를 지고 있다던, 기억상실증 걸린 쪽바리 놈을 이곳에서 맞닥트린 게 새삼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섬뜩한 시선이 꽂히자 상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다급히 외쳤다.
“보, 보쿠와…… 하루타! 하루타데스!”
“대가리 망가졌다던 씹새가 여긴 어쩐 일일까.”
“…….”
“씨발, 죽여 줄 사람 필요해서 찾아왔어? 쪽바리 새끼 하나 도살하는 건 일도 아니지.”
“보, 보쿠 카, 칸코쿠진…….”
“칸코쿠진은 나. 너는 니혼진.”
벌벌 떨던 하루타가 별안간 불안하고 흐릿한 멜로디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 우른도 돈나쪼 베키루 따라 이밴리. 애로은 쏨 하나 세드레 코얀…….”
“…….”
“우리카 아므리 자키네 따니라 우겨도 도또는 우리딴…….”
“…….”
“켠사푸또 우른쿠 우르늡 도또…… 억.”
무혁이 듣기 싫은 소음을 치워 내듯 그의 목을 살포시 비틀었다.
“도, 도또는 칸코쿠……! 크억!”
사색이 된 하루타가 독립운동 열사처럼 외치더니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렸다. 이내 무혁은 얼마 안 가 정신을 잃은 그를 질질 끌고 퀴퀴한 지하실에 발을 들였다.
* * *
“보, 보쿠와 하루타…… 하루타이므니다…….”
단단히 포박당한 하루타는 눈물 콧물을 다 빼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무혁은 그가 눈을 감을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목덜미 아래, 갈비뼈 사이, 허벅지 안쪽. 치명적이지 않되 통증만 또렷이 남는 급소를 정확히 찔러 댔다.
“으악……!”
그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마다 하루타의 의식은 억지로 끌려 올라왔다. 기절은커녕 눈 감을 수조차 없는 잔혹한 방식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무혁은 몸을 웅크리며 갈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싸늘히 말했다.
“좆까, 씨발. 하루타고 뭐고, 고자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하루타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이러한 반응을 보아 한국말 실력은 좆 같아도 알아듣는 건 큰 무리가 없는 듯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심문 끝에, 무혁은 하루타의 입에서 떨어진 파편들을 차분히 맞춰 나갔다.
재일교포 3세. 본명은 따로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본인이 기억하는 이름은 하루타라는 것뿐. 과거 살해당할 뻔한 적이 있으며, 기적처럼 살아남았다는 사실만 또렷했다. 대신 그 전후의 기억은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누가, 왜, 어떤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조차.
그러다 최근에 아무런 계기 없이 끊어진 필름처럼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 정확한 맥락은 없었지만, 요약하자면 이 폐분교의 잔상이 유독 오래 남아서 찾아왔단다.
점점 기억이 돌아오는 신호 같다고 했고, 과거를 알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 이유 없이 끌려온 것에 가까웠다.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충동에 떠밀려, 홀린 듯 기억의 잔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온 것이었다.
무혁은 완벽한 무표정으로 그 진술을 들었다. 어디 하나 나사가 빠져 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스스로에게 확신하지 못할지언정, 적어도 지금 내뱉는 말을 꾸며내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I, C, C. I, I, D, C……?”
하루타는 스스로 답을 찾듯 혼란스러운 얼굴로 계속 중얼거렸다. 잠시 후, 무혁은 그가 무심코 흘린 알파벳 몇 글자를 듣자마자 멈칫했다.
“방금…… I.D.C라고 했나?”
무혁의 안색이 흉흉하리만치 싸늘해졌다.
“I.D.C라면, 설마 ‘통합 방산 평의회’를 말하는 건가.”
긴장한 하루타의 목울대가 느리게 넘어갔다. 무혁은 그를 투시라도 할 것처럼 침잠한 눈빛을 쏘며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했다.
통합 방산 평의회(I.D.C; Intergrated Defense Council).
정식 명칭으로 불리든 약자로 불리든,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드문 조직이었다.
전쟁과 대량 살상 무기의 개발·운용·유통을 조율하는 그림자 기관. 특정 국가에 소속돼 있지도, 대표 국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표면에 드러난 기록은 거의 전무했고, 국제 분쟁의 흐름 뒤편에서 결과만 남기고 사라지는 쪽에 가까웠다.
전장이 기이하게 정리되거나, 말도 안 되는 전력 차가 하루아침에 뒤집힐 때마다 어김없이 그 이름이 소문처럼 떠돌았다가 지워졌다.
NEXA 또한 과거 몇 차례 그 실체를 파헤치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정보선 하나를 물었다 싶으면 곧바로 끊겼고, 추적망을 좁힐수록 내부에서 누군가 먼저 손을 쓴 흔적만 남았다. 접촉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우연을 가장한 선택을 ‘당하는’ 쪽만이 그 문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는 분명했다.
I.D.C와 손을 잡은 국가는 예외 없이 전투력의 판도가 달라졌다. 병력 추가로도 장비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전투력 상승. 대신 늘 따라붙는 말이 있었다. 그 대가에 대한 속설이었다.
무혁이 그간 주워들은 정보의 출처는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지만, 방향만큼은 하나로 수렴했다. 신무기 개발. 그리고 그를 위한 실험체 제공.
아직 이름도 형상도 없는 미지의 무기. 기존의 전술 이론이나 물리 법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성능을 끌어내기 위해 인간 자체를 매개로 삼는다고 했다.
총이나 미사일처럼 형태를 갖춘 무기가 아니라, 조건이 충족되면 발동되는 ‘상태’에 가까운 것. 특정 상황에서만 작동하거나 특정 대상에게만 반응하며,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운 결과만을 남기는 개념적 병기. 그래서 실험 대상은 장비가 아니라 사람이었고, 데이터는 숫자가 아니라 살아남았느냐 혹은 죽었느냐로 구분됐다.
성공 사례는 극소수였고, 실패 사례는 아예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실패한 인간은 이름도 사인도 남기지 않은 채 정리되는 것이다.
살아남은 경우에도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기억의 공백, 감각의 왜곡, 특정 장소나 자극에 대한 집요한 반응. 마치 몸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장치가 남아 있는 것처럼.
그래서 기록이 없었다. 남길 수 없었고, 남기지 않았다. 보고서는 숫자 대신 ‘폐기’, ‘보류’, ‘전환’ 같은 단어로 끝났고, 프로젝트명은 일정 주기를 두고 갈아치워졌다. 누군가 파고들기 전에 스스로 지워지는 구조였다.
무혁은 그 모든 게 I.D.C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무기를 만든다기보다 무기가 될 수 있는 인간을 선별하는 것. 전장을 바꾸는 건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견딜 수 있는 생존자였다.
무혁의 시선이 다시 하루타에게로 향했다. 만약 눈앞의 상대가 I.D.C와 관련이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기억을 잃은 것조차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
그는 불현듯 하임을 떠올렸다.
과도할 만큼 예민한 청각. 단순한 체질이나 예민함으로 치부하기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소리를 ‘듣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공기 자체의 떨림을 감지하는 것처럼 반응했었지.
또한 임봉주와 베일에 싸인 그의 과거.
무혁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서서히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우연이라기엔 겹치는 선들이 너무 많았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도 있으나 아예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임이 그 선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무혁의 신경을 조여 왔다. 그는 본능을 거슬러 올라오는 위화감에 하루타의 턱을 쥐었다. 여차하면 으스러트릴 것만 같은 기세에 하루타가 소변이라도 지릴 것처럼 달달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