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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화


33. “……아저씨, 어디 아프세요?” “가! 어여 가다고! 돈 피요 어뜨니까 데발 가!” 평소와 확연히 다른 장 씨가 어디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내 그가 떨리는 손으로 본인 몸을 더듬더니 꾸깃꾸깃하게 접힌 종이를 던지듯 건넸다. “이데 돈 다 가파떠!” 무슨 소리인가 싶어 확인하니, 삐뚤빼뚤한 자필로 적은 ‘채무 완제 확인서’였다.   임하임이 장기덕에게 진 모든 금전 채무는 본 일자 부로 전액 변제되었음을 확인함.   날짜와 함께 찍힌 빨간 도장이 선명했다. “이게 무슨…….” 하임이 고개를 들자 장 씨는 여전히 그녀와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한 발만 더 다가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계산 잘못하셨어요. 이자까지 합하면 아직 천만 원 가까이 남아 있잖아요.” “다, 다 가파떠. 딘따로 다 가파떠.” “…….” “데, 데발 그러타고 해더…….”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흔들렸다. 돈을 받지 못해 표독스럽게 날을 세우던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아저씨, 진짜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나중에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시려고요?” “아, 아무 일도 어떠. 그냥 이다 가는 거야.” “…….” “바쁘니까 돔 가! 볼일 어뜨니 이덴 다딘 보디 말다고. 데발! 플리드!” 처절한 애원과도 같은 축객령에 하임은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너무나 이상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쾅―! 장 씨는 마주치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창고 문을 닫아 버렸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그녀는 찝찝한 기분으로 종이를 바라보다가 멍한 얼굴로 그 집을 벗어났다. * * * 기껏 고기를 잔뜩 사 갔지만 하임은 얼마 먹지 못했다. 겨우 몇 점 집어 먹었는데도 그마저도 소화가 잘되지 않았다. 결국 이부자리를 벗어난 그녀는 속을 가라앉힐 겸 혼자 산책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대체 장 씨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말 이대로 마무리 지어도 되는 건가? 어수선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따라붙었다. 하임이 돌아보기도 전에 옆으로 다가온 무혁이 그녀와 속도를 맞춰 걸었다. “어? 천종 씨, 왜 나오셨어요?” “겁 없는 아가씨가 이 시간에 나가길래.” “…….” 하임의 집에서 지낸 후부터 두 사람은 오히려 대화조차 편히 하지 못했다. 봉주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있거니와, 무혁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늘었기 때문이다. 하임은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젠 동네 지리도 얼추 꿰고 있기에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게끔 알아서 주의하고 다니는 듯했다. “속은 괜찮아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투에 하임이 흐릿하게 웃었다. “먹지도 못할 걸 뭐 하러 그리 무겁게 사 와. 걸신들린 삼동이만 신났지.” 무혁은 비교적 얇은 그녀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다가 낮게 혀를 찼다. 그는 나올 때 챙긴 팥 주머니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는 반대편 손을 잡았다. 사뭇 연인 같은 스킨십에 하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맞잡은 손을 본인의 외투 주머니에 욱여넣고선 사람들 몰래 다니던 뒷길로 향했다. 그의 주머니에도 뜨끈한 핫 팩이 들어 있었다. “어, 어디 가시게요?” “우리 아지트.” “네?”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곳.” * * * 폐분교 창고는 낡고 굵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잠금을 풀고 들어서는 순간, 하임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창고 내부는 전보다 뭔가 더 갖춰지고 정리도 잘 되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져다 둔 거지?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에는 히터가 연결되어 있었고, 침구도 전보다 더 쾌적해 보였다. 그가 여전히 이곳을 왕래한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예 이렇게 각 잡고 쓰고 있는 줄은 몰랐던 터였다. “어? 이건 삼동이가 얼마 전에 새로 산 침구인데?” “맞아요.” 무혁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겁도 없이 스파이 짓을 한 괘씸한 녀석이었지만, 눈치는 있는지 알아서 바친 물품이 여러 개였다. 그는 히터부터 켠 후에 간이침대에 열기가 닿도록 가까이 두었다. “앉아요. 알다시피 불은 못 켜지만 전처럼 춥지는 않을 겁니다.” 창문에 암막 커튼을 달면 좋겠지만 외부에 쉽게 노출될 만한 것들은 하지 않았다. 하임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별 볼 일 없는 창고를 새삼스럽다는 양 둘러보았다. “집에서 소화제라도 챙겨 올 걸 그랬나.” “괜찮아요. 소화제 먹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가 제 집처럼 ‘집’이라 부르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왜 오늘 기분이 종일 안 좋았어요?” “…….” “여전히 나한테 고민 같은 건 공유하기 싫어?” 담담히 건네는 질문에 하임이 해명이라도 하듯 손사래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고민도 이제 다 해결됐는걸요.” “해결됐는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는 듯 무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망설이다가 이내 흘리듯 말했다. “아, 그게…… 사실은 빚이 있었는데 이제 갚을 필요가 없게 됐거든요.” “그거 잘됐네.” “틈틈이 갚기는 했는데 전액을 갚은 건 아니었어요. 금액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채권자가 채무 완제 확인서를 주면서 오늘부로 채무는 전액 변제되었다고 하셨어요. 되게 이상하죠?” “…….” “매번 이자를 1원 단위까지 꼬박꼬박 챙기던 분이 이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제 주위엔 대신 빚 갚아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며칠 전에 마주쳤을 때만 해도 독촉도 모자라 무서운 협박…….” 너무 미주알고주알 고하는 게 아닌가 싶어 하임이 멈칫했다. 무혁은 이미 다 아는 얘기라는 양, 무감한 표정으로 경청 중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층 더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어, 어……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어쩌면 그가 대신 빚을 갚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았다가, 몇 초 만에 땅으로 꺼졌다. 할아버지도 몰랐던 채무를 그가 어떻게 알 것이며, 기억을 잃은 그가 무슨 수로 제 돈을 갚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털어 낸 하임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과정이 너무 찜찜해서 끝난 거 같지가 않아요. 금액이 아직 많이 남은 것도 신경 쓰이고요. 그래도 돈을 계속 보내야 할 거 같은데 이미 계좌도 해지하신 거 같고…….” “채무 완제라면서.” “말이 그렇지, 실은 다 못 갚았다니까요?” “채무 완제는 말 그대로 다 갚았단 뜻인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의심을 할까.” 무혁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빤히 응시했다. “다 갚은 게 싫어?” 양심과 책임감 부분에서 여전히 변제 의무를 느끼는 그녀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왜. 설마 그 빚쟁이랑 더는 볼 일 없어진 게 아쉽기라도 해요? 실은 너도 내심 끌렸어?” “네에? 그럴 리가요……!” “근데 뭐가 불만이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 하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치 장 씨 아저씨가 제게 어떻게 했는지까지 모조리 아는 눈치였다. 무혁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하임 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기울였다. 놀라며 상체를 뒤로 물린 그녀의 등이 이불에 닿았다. “저, 저기…….” “뭐가 불만이냐니까.” 천천히 하임의 위로 올라탄 무혁이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멈췄다. “음? 그 노총각 새끼한테 저당 잡힌 김에 평생 잡혀 주고 싶었어?” “그, 그걸 어떻게…….” “아. 실은 잡혀 주고 싶었다? 집에서 개처럼 기다리는 날 두고?” “아니, 제 말은…… 흡.” 하임의 말이 뚝, 끊겼다. 목덜미를 단단히 감싼 무혁이 입술을 거칠게 문대며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훅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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