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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화


29. “…….” 무혁이 알고 있다는 것에 내심 놀랐는지 봉주의 눈매가 묘하게 가늘어졌다. “나라님이 개입했을 만큼 대단한 업적이라도 남기셨나. 그렇다 해도 영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곧 뒤질 놈들이 혀가 긴 법이지.”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시던가.” 두 남자 사이에 살벌한 스파크가 튀었다.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손해라도 보는 것처럼, 각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냉담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 다시 무기를 겨뤄도 이상할 게 없던 순간, 저 멀리서부터 오도도도― 다급한 발걸음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에 무혁은 조용히 턱을 굳혔다. “할아버지!” 외투도 제대로 껴입지 못하고 달려온 하임은 함께 있는 두 남자를 보고 사색이 되었다. “헉. 처, 천종 씨…….” “왔어요?” “이,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인 건지…….” “그러게요. 우연히 하임 씨 조부님을 마주쳐서 인사 중이었습니다.” 순식간에 가면을 뒤집어쓴 무혁이 입꼬리를 너그럽게 올리자 봉주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마치 썩은 도라지를 씹다 뱉은 사람처럼 미간이 일그러졌다. 무혁은 관자놀이를 실룩이다 못해 이를 지그시 악무는 노인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손녀 앞에서 살기를 억지로 억누르려는 듯한 기묘한 표정이었다. 저나 눈앞의 노인이나, 내숭 떠는 게 하등 다를 바가 없어서 우스웠다. 당황한 하임은 안절부절못하며 봉주의 옷깃을 잡았다. “하, 할아버지, 그게 있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녀가 주절주절 뭐라 설명했으나 봉주의 눈길은 여전히 무혁을 향해 있었다. 무혁은 빙긋, 미소를 짓는 것으로 그의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하임 씨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생매장을 당한 채로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만.” “……지금, 생매장이라 했냐.” “그렇습니다.” 봉주를 둘러싼 기운이 혹한기처럼 싸늘해졌다. 위험하고 남달랐던 손녀의 기행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듯한 눈치였다. “하임아.” “……응, 할아버지.” “그러니께, 네가 지금 땅속에서 죽어 가던 이놈을 꺼냈다, 이 말이여?” “…….” “시방, 대체 어디서. 어떻게. 왜.” 모든 게 들킬 위기에 처한 하임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무혁과 봉주를 번갈아 보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할아버지이,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라아…….” 하임은 울기 직전인 얼굴로 봉주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무혁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걸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노인은 예상과 달리 하임을 꾸짖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용건이 끝났다는 양 돌아섰다. [니도 따라와라. 우리 하임이 더는 이런 음침한 곳 드나들게 하지 말고.] […….] [살고 싶으면 따라와라, 이 말이여.] 넌지시 던져진 말에 무혁은 순순히 따랐다. 노인은 흔쾌히 방이라도 내어 줄 것처럼 얘기했으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진 알 수 없었다. 무혁은 봉주가 저를 데려가는 이유가 호의나 배려 따위일 리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감시든 시험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간에 목적이 있을 터였다. 어차피 폐분교에서의 은신 생활이 슬슬 지겹던 차인 데다가, 임봉주라는 노인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엔 지나치게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하임은 또 어떻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무혁은 일이 꽤 재밌게 흘러간다는 생각에 턱을 매만졌다. * * * 폐분교에서 하임의 집으로 임시 거처를 옮긴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무혁은 이곳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뜨끈한 온돌방과 온수, 전기 여부를 떠나 이곳은 제가 가장 궁금해하던 두 사람의 집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삼동이가 공범이라는 이유로 봉주에게 뒤통수를 처맞고, 얼떨결에 다 함께 식사하는 와중에도 무혁은 덤덤했다. 봉주는 그 태도가 더 아니꼽다는 양 매서운 눈빛을 쏘았으나 단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주방 바로 옆방에서 지내도 된다는, 봉주의 암묵적인 허락이 떨어지자 하임은 서둘러 방을 정리해 주었다. 선반에 약이 수북한 걸 보아 노인이 아팠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할아버지가 원래 남한테 방을 내어 주는 분이 아닌데, 역시 천종 씨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보셨나 봐요.” “…….” 무혁은 목소리를 낮춘 채 조잘거리는 그녀를 향해 옅게 웃었다. 노인네가 저를 본인의 방법으로 처리하기 위해 데려왔을 거라고 말해 주기엔 너무나도 해맑고 무해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많이 추우셨죠? 제가 바닥 따듯하게 데워 드릴게요.” “설마 아직도 아궁이 떼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신형 LPG 가스보일러로 바꾼 지 5년이나 됐는걸요. 아직 아궁이가 있긴 하지만 이젠 안 써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무혁은 저를 집으로 들이고 나서 유독 들뜬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관망했다. 집이 낯설 무혁에게 이것저것 알려 준 하임은 봉주의 눈치를 보느라 머지않아 물러났고, 그는 혼자 방 안에 있게 되었다. 침대는 없지만 푹신한 이불 위에 누우니 등에 땀이 맺힐 정도로 뜨끈했다. 긴 다리를 꼰 채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운 그는, 방에 굴러다니던 공을 위로 던졌다가 받아 내길 반복했다. 이 집에서도 제약이 있긴 할 테지만 별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모두 잠에 빠졌는지 사위가 고요해졌다. 무혁은 좀 더 수월한 방안을 궁리하며 머리를 굴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자 찬기가 얼굴을 때렸다. 그는 마당과 집 주변을 무심히 눈으로 훑으며 외부를 파악했다. 그러다 곧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급할 것 하나 없는 느긋한 움직임은 하임과 거리가 멀었다. 숨을 죽인 무혁은 감각으로 감지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노인은 어둠 속에서도 그를 날카롭게 주시했다. 무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 연세에 시력도 좋으신가 봅니다.” “왜 이 야밤에 남의 집을 음침하게 재고 지랄이여.” 무혁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노인을 마주 봤다. 달빛 아래 드러난 눈매가 느슨하게 웃고 있었지만, 몸은 조금도 풀려 있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습관입니다만. 아시다시피.” 봉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짧은 틈에 두 남자가 서로를 한 번 더 훑었다. 말보다 시선이 더 정확하다는 듯, 둘 사이에 당겨진 기류는 느슨해질 틈 없이 팽팽하기만 했다. “하임 씨 집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폐가 같기는 하다만, 그래도 지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인사는 해야겠군요.” “시방, 내가 언젠가 그 싸가지 없는 주댕이부터 찢어 놓을 껴.” “왜 저를 데려오셨습니까?” “…….” “신분도 소속도 모르는 저를 일부러 집에 들이신 거면, 뭐라도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다른 건 몰라도, 니놈이 행여나 우리 하임이한테 조금이라도 해코지헜다간 알아서 혀. 생매장보다 더 아름다운 꼴 보게 해 줄 테니께.” “지금 영감님 손녀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애먼 사람을 잡으시는 겁니까?” “시방, 뭐라고 지껄이는 거여.” “조만간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할 겁니다.” “은혜도 모르는 잡것이 아주 제대로 지랄 나셨구먼.” “소싯적에 꽤나 몸 좀 쓰신 모양인데. 어디 소속이셨습니까?” 대꾸하지 않은 봉주는 더는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는 양 돌아섰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내 손녀 조금이라도 다치게 했다간 니놈 몸뚱어리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그런 줄 알어. 괜한 짓은 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때 되면 알아서 썩 껴져라잉.” 무혁은 살벌한 경고를 끝으로 멀어지는 봉주의 뒷모습을 서늘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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