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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화


14. 저녁상을 다 차린 하임은 외출한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마당을 서성거렸다. 하루 종일 머리가 뒤죽박죽이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괜히 돌멩이를 신발코로 툭툭 쳐 보고 마당을 맴돌다가 쪼그려 앉았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가까워지는 기척에 벌떡 일어나 옷을 툴툴, 털었다. 머지않아 작은 알갱이들이 투두두둑―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임봉주 영감이 마당에 들어섰다. “워매, 쓰벌. 온 동네 멧돼지들이 파티하러 오겠구먼.” 핫팩이 터졌는지 그의 발치에 팥알이 잔뜩 굴러다녔다. 얼른 빗자루를 챙긴 하임이 그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내가 치울 테니까 얼른 들어가셔.” “에구, 우리 강아지가 웬일이여? 요즘 허구한 날 집 없는 나그네처럼 싸돌아댕기더니, 오늘은 일찍 온 겨?” 하임이 멋쩍게 웃자 봉주가 주름진 손으로 빗자루를 가져갔다. 그가 쏟아진 팥알을 쓸어 모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는 거여. 밤새 콧물 빼지 말구 얼른 들어가.” “내가 팥 주머니 새로 만들었는데 못 보셨어? 헌 거는 그냥 버리시라니까.” “몰러. 팥을 포대째 사서 밤마다 그리 볶아 대더니, 담날 보면 없길래 다 우리 강아지 뱃속으로 들어간 줄 알았지.” “…….” 할 말이 없어진 하임이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내가 핫팩을 몇 개 만들었더라? 할아버지의 몫을 남겨 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하, 내가 꺼내 놓는다는 걸 깜박했나 봐.” “시방, 아니면 이 할아비 몰래 어디 서방이라도 숨겨 놓은 겨?” 툭, 건너온 질문에 하임의 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양 어색하게 웃었다. “응? 서방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할아버지?” “늙은이 기분 탓인가, 요새 자꾸 살림이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 같아서 말이여. 이러다 곧 집 뼈대만 남겄어.” “에이…… 그건 내가 정리를 자주 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하하, 서방은 무슨.” “아이구, 그런 거여? 역시 우리 강아지는 참 효녀여, 효녀.” 귀신 같은 할아버지의 촉에 하임은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기분이었다. 그가 뭔가 눈치를 챘나 싶어 몰래 안색을 살폈으나 그냥 평소처럼 시답잖은 농담이었다. 정리를 끝내고 집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오래된 TV를 켜 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요새 한창 인기가 많다는 첩보물 드라마가 방영되자 하임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그의 손이 즉각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쓰벌, 뭔 또 장난감 총으로 폼을 잡고 지랄이여, 지랄이.” 막 남자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순간에 채널이 넘어갔다.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은 하임은 얼마 전까진 관심 없던 장르가 내심 궁금해졌다. 한편으론 저 배우보다 현실 요원이 훨씬 더 잘 생겼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종 씨는 배 안 고프시려나? 도시락 하나로 두 끼를 해결하기엔 부족할 텐데…….’ 외간 남자를 걱정하며 그릇을 비우는데 먼저 식사를 끝낸 봉주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내일부턴 이 할아비가 밥 차릴 테니까 우리 강아지는 주방에 발도 들이지 말어.” “괜찮아, 할아버지. 나 요리하는 거 별로 안 힘들어.” “늙은이 몫까지 산 타느라 고생하는디 안 힘들긴.” “정말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그냥 푹 쉬기만 하셔. 난 할아버지가 아픈 게 더 속상해.” “걱정 말어. 우리 효녀 덕에 최소 5년 치 액운은 다 쫓아서 그동안은 저세상 갈 일 없으니께.” “응?” “요즘 매일매일이 동지(冬至)잖여. 팥죽을 이 정도 처먹었으면 저승사자도 질려서 안 데리러 올 껴.” “…….” “워메, 내가 요새 똥을 싸는 건지 팥을 싸는 건지.” “…….” “잠깐 눈이 침침하다 싶으면 세상이 온통 보라색으로 보이질 않나…… 하여튼 그려.” 할아버지의 넋두리가 이어지는 동안 하임이 조용히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앞으론 팥을 그만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팥 주머니를 부지런히 만들어 두길 잘했다 싶었다. * * * 다음 날. 하임은 어둑한 야밤에 몰래 방을 나섰다. 밤공기가 한기와 함께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오늘은 귀마개를 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깨지 않도록 슬금슬금 집을 나온 하임은 청각을 곤두세우며 뒷산 방향으로 나아갔다. 숲의 어귀,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소나무 군락 아래에서 그녀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입술을 모아 아주 작은 ‘삐이—’ 소리를 냈다. 고요함 속에서 퍼지는 긴꼬리딱새 소리였다. 잠시 뒤, 반대편 덤불 쪽 어둑한 형체 두 개가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삼동이와 무혁이었고, 그 둘도 검은 옷으로 단단히 채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무혁은 모자로 얼굴 절반을 가린 채 하임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달빛 아래서도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손전등은 웬만해선 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삼동이가 어깨에 걸친 작은 배낭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하임이 괜찮아?” “응, 어두워도 길 잘 아니까 걱정하지 마.” 하임은 먼저 앞장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손전등 하나 켜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녀는 이 어둠에 익숙한 사람처럼 정확한 보폭으로 발을 옮겼다. 오솔길이 더 외지고 험해질수록 공기도 더 차갑고 거칠어졌다. 그녀는 부디 별 탈 없기를 마음속으로 여러 번 기도했다. ‘천종 씨는 벌써 산을 타도 괜찮은 건가.’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본 하임은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무혁이 너무나도 가볍게 산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연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이 여유작작하기만 했다. 다리를 다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불편한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대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곤두선 호기심을 누르며 부지런히 산 중턱으로 향했다. 늙은 낙엽을 짓밟으며 깊은 산세를 향해 나아갔다. “잠시만요.” 갑자기 하임이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자 뒤따르던 무혁과 삼동이도 자연스레 멈춰 섰다. 하임이 두 눈을 감으며 청각을 곤두세우는 동안, 무혁은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가도 될 것 같아요.” 무혁은 장비 하나 없는 맨몸으로 대체 무엇을 감지한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가 뭔가를 느끼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으니까. “삼동아, 넌 여기서 망을 봐 줘.” “알았어.” 막 고개를 넘은 찰나, 이러한 역할 구분이 익숙한 듯 삼동이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알록달록하고 작은 플라스틱이었는데 곧 하임의 주머니에서도 같은 것이 나왔다. 그게 시중에 판매되는 장난감 무전기라는 걸 깨닫는 순간, 병맛 같은 상황에 무혁은 실로 어이가 없어졌다. 씨발, 어린애들이 하는 유치한 요원 놀이도 아니고. 장난하나.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보던 그가 삼동이의 것을 말없이 가져와 살폈다. 고양이 귀가 달려 있었고 버튼은 발바닥 모양이었다. “…….” 생김새는 처참하나 자세히 보니 FRC(Free Radio Communication) 주파수를 사용하는 저출력 무전기였다. 아예 쓸모가 없진 않을 듯했다. 통신 거리는 개활지 기준으로 잘하면 3km까지, 산에선 1-2km 정도 송수신이 가능할 터였다. 나쁘지 않았다. 무혁이 반신반의하는 심경으로 삼동이의 것을 돌려주었다. 멀쩡한 핸드폰을 두고 요원 놀이에 심취한 듯한 두 사람의 대화는 기가 찰 정도로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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