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3화
13.
본인 옷까지 홀라당 태워 먹을 뻔한 미련함에 속이 묘하게 요동쳤다. 이 정도면 짜증이 앞서야 정상일 감정이 이상하게도 한 박자 비틀려 튀었다.
심장 어딘가가 짤깍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찝찝하고 역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혁은 이러한 심경을 하임에게 쏟아 내지 않기 위해 심기를 가라앉혔다. 그러다 어디가 불편한지 드문드문 몸을 움츠리는 그녀를 보고 조용히 움직였다.
“내가 봐 줄 테니까 잠깐 앉아 봐요.”
“괜찮…….”
“어서. 난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합니다.”
점잖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당황한 하임이 도시락을 내려놓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움직임이 좀 불편해 보이는데. 등에 화상 입은 거 아닙니까?”
“…….”
“어디 봐 봐요. 얼마나 데었나 확인해 보게.”
옷을 홀라당 벗으라는 말로 들렸는지 그녀가 토끼 눈을 뜨며 두 손을 저었다.
“괘, 괜찮아요. 별로 안 다쳤어요……!”
“옷이 이렇게 그을렸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저, 정말로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냥 나중에 약만 좀 바르면 돼요.”
“나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한다고 했는데. 여러 번 말하게 할 겁니까?”
“…….”
“아무래도 난 이만 떠나는 게 좋겠군요. 민폐 끼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하임 씨한테 못 할 짓을 하네요.”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협박하는 건지.
고작 시골 처녀 하나 붙잡아 두겠다고 이런 궁색한 협박까지 꺼내 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혁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제 눈치를 살피는 하임을 두고 약통을 가져왔다.
“뒤돌아 봐요. 확인만 해 보게.”
“……말 들으면 안 떠나실 거예요?”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맥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초연해야 할 감정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부상하는 걸 느꼈다.
쫓아내도 할 말이 없는 판에, 되레 매달리듯 묻는 여자는 저를 쓰레기로 만들 작정인 모양이다. 지금도 아니라고 부인은 못 하겠다만.
“안에 내의 입었을 테니까 조끼랑 저고리만 벗어 봐요.”
“…….”
머뭇거리던 하임은 한층 누그러든 음성에 꼼지락거리며 옷가지를 하나씩 벗었다. 저고리 상태는 온전했으나 무혁은 충분하지 않다는 양 입을 열었다.
“등이 따갑고 욱신거리진 않아요?”
“조금요…….”
“옷 반만 들출 테니까 놀라지 말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린 몸이 뻣뻣하게 굳었으나 그는 기어이 내의를 브래지어 훅 아래까지 들치고는 맨살을 확인했다.
1도 정도의 경미한 화상이었다. 등 아래쪽에 손상된 피부 표면층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빨리 처치한다면 물집이 올라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손이 자동으로 연고를 집어 들었다.
총탄이 스치고 칼날이 비켜 가는 게 일상인 무혁에겐 다친 축에도 못 끼는 수준이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순 없었다.
“약 발라야 할 거 같으니까 잠깐 옷 잡고 있어요.”
하임은 다소곳이 모은 무릎 위에 고개를 깊이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돌을 불에 달구면 온도가 몇백 도까지 올라가는 줄 압니까? 위험하게 그걸 왜 등에 메고 와.”
“저, 저는 돌도 여러 번 데워 봐서 익숙해요. 그리 오래 달구지도 않았고 한 김 식혀서 가져온…….”
“제대로 잡아요. 옷 내려가잖아.”
두 팔을 앞으로 뻗은 무혁이 다시 옷자락을 쥐여 주자 뒤에서 안은 듯한 꼴이 되었다.
흐읍. 긴장 어린 숨을 삼킨 하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저 상처를 확인하는 것뿐인데도 외간 남자에게 맨 등을 내보인 건 처음이라 심장이 콩콩 뛰었다.
별것도 아닌 상처에 저를 걱정해 주니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은근슬쩍 짧아지는 말투는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 같아 오히려 좋기도 했다.
약을 발라 주는 무혁의 손끝이 피부를 훑자 통증과 별개로 약간 간지러웠다. 저도 모르게 옴찔옴찔 움직이는 사이 금세 치료가 끝났다.
“어, 음, 감사합니다…….”
하임이 어색하게 돌아보는 순간, 무혁은 시선 하나만으로 그녀의 호흡을 붙잡아 놓듯 조용히 응시했다.
피하기도, 끝까지 바라보기도 애매한 공기가 짧게 흘렀다.
“식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그만 가 봐요.”
나직한 축객령에 하임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갔다. 그가 배려해 주는 거라는 걸 알지만 약간은 내쫓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도시락 통도 깨끗하게 씻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내 말 듣고 있어요?”
이렇다 할 대꾸가 없는 그녀를 굽어보던 무혁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어서 곱게 보내 주려는데 이 반응은 뭔지.
“어디 또 불편한 곳 있습니까?”
내심 그와 조금 더 있고 싶었던 하임은 그럴듯한 핑계를 고민했다. 대놓고 더 같이 있고 싶다고 하는 건 쑥스럽고, 밥을 같이 먹고 싶다고 하기엔 양이 부족할 것 같았다.
“하임 씨?”
“저 여기도 아픈 것 같아요……!”
무혁이 한 번 더 축객령을 내리기 전에 그녀가 다소 충동적으로 외쳤다.
“어디가 아픈데.”
“여, 여기 발이요.”
하임이 허공에서 대롱거리던 발을 가리키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돌을 발등에 떨어트렸다고 할까? 아니지, 그럼 그만한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멀쩡하잖아.
“발도 다쳤어요?”
“조금요. 엄지발가락을 찧은 거 같기도 한데…….”
‘같기도 한데’는 무슨 말인지. 무혁이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큰 덩치를 굽혀 앉았다.
“양말 좀 벗길게요.”
자그마한 발을 발바닥에서부터 지그시 쥔 그가 연한 풀색 양말을 벗기고는 유심히 살폈다.
“육안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는데. 발톱 쪽이 아픕니까?”
긴장한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은 하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그의 손에 맨발이 잡히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하얗고 보드라운 발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무혁이 엄지발가락 끝을 약하게 훑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아픈 거면 내성 발톱 때문인 거 같은데.”
“아…….”
“그리 심하진 않으니 발톱만 주의해서 깎으면 될 것 같군요.”
하임은 더 있다간 얼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발을 쏙, 뺐다. 어울리지도 않는 객기를 부리는 건 안 하는 게 나을 성싶었다.
“그, 그럴게요. 살펴봐 주셔서 감사해요.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하임이 돌아갈 채비를 하는 사이, 무혁은 갑자기 허전해진 제 손끝을 말아 쥐다가 이내 팍 인상을 쓴 채로 제 하체를 내려다봤다.
‘씹, 이게 뭔…….’
불룩 튀어나온 앞섶을 확인한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로 어디 한군데가 병신이 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없던 페티시가 생길 수가 있나.
도돌도돌 움직이며 가방을 챙기는 발에 시선이 갈수록 별안간 하체가 뻐근해졌다.
‘그냥 여기서 뒤져 버릴까.’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무혁이 진지하게 고민하며 입안을 짓씹었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웃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고작 산골 처녀 하나에 이 지경이 나다니, 자존심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아니면 음식에 이상한 미약이라도 들어 있는 게 아닌지, 애꿎은 도시락을 살벌하게 노려보던 무혁은 하임이 돌아보기 무섭게 시선을 거뒀다.
“저는 이제 가 볼게요.”
“그래요.”
“이따 저녁에는 더 맛있는 거 가져올 테니까…….”
“아니요, 하임 씨. 올 필요 없어요.”
“…….”
“하는 게 없어서인지 배가 별로 안 고프군요. 밥은 이따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상처받은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트린 하임이 들릴 듯 말 듯 ‘네, 그러세요.’라고 대꾸했다. 자신이 그를 귀찮게 한 건가 싶어 괜한 객기를 부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저를 흘긋거리는 눈길을 모른 척한 무혁은 문을 연 채 한 걸음 비켜섰다. 순수한 매너라 받아들이기엔 그녀는 잔뜩 움츠러든 상태였다.
왜 자꾸 내가 갔으면 하시는 거지, 내가 그새 싫어지신 걸까.
앞으론 무혁 앞에선 행동거지를 더 조심하고 아픈 내색도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럼 내일 뵈어요, 천종 씨.”
“잘 가요.”
단정하고 깔끔한 인사에 하임이 흐릿하게 웃으며 그곳을 떠났다.
무혁은 창밖으로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하체를 사납게 내려다봤다. 더 있다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멋대로 제 아래에 깔아 눕혔을지도.
그는 하임이 두고 간 만화책마저 구석에 내팽개친 채 펜과 노트를 꺼냈다.
어쩌면 하루라도 더 빨리 이 요사스러운 마을을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