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12화
12.
“왜요?”
“아직도 추우신가 해서요.”
“전혀요. 하임 씨가 이불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아, 어쩌죠?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잘 순 없는데…… 아니면 제가 내일은 핫팩을 더 가져올게요. 그래도 부족하면 어떻게든 난로를 구해 와 볼게요.”
“집에 핫팩이 그렇게나 많습니까?”
“제가 직접 만든 건데 더 만들면 돼요. 저는 바느질도 잘해서 금방 만들 수 있어요.”
무혁이 픽, 웃었다. 골 때리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하임 씨가 매일 한 시간씩이라도 안아 주면 되겠네요.”
“제, 제가요?”
“마음 같아선 밤새 있어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럼 너무 민폐니까.”
흡사 고백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의 여자는, 이제 달군 팥알과 온도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아니면 제가 삼동이한테 천종 씨랑 밤새 같이…….”
“하임 씨.”
낮고 단호하게 말꼬리를 자른 무혁이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씹, 차라리 얼어 뒤지고 말지. 누구든 간에 사내랑 단둘이 밤새 껴안고 있으라는 발상 자체가 이미 재앙이었다.
염치없이 ‘형아’라고 부르며 달라붙으려 하는 그 징그러운 새끼가 옆에서 체온을 뿜어 대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싸하게 식었다.
“체온도 사람 봐 가며 나눠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
“내가 비록 기억은 없어도 게이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거든.”
“아,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오해하셨다면 죄송해요.”
크게 당황한 하임이 허둥지둥 두 손을 젓자 무혁이 괜찮다는 양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간이 콩알만 한 그녀를 더 건드렸다간 큰 눈망울이 울먹울먹해질 것 같았다. 그 모습도 꽤 구미가 당길 것 같긴 하나, 급하게 구는 것보단 틈을 봐 가며 다가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시작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여기던 찰나 하임이 하품을 쏟아 냈다.
“하임 씨, 졸려요?”
끄덕끄덕.
“아홉 시쯤 됐을 거 같은데 일찍 자는 편인가 봅니다.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났길래.”
“네 시쯤에 일어났어요.”
“상당히 이른 기상이군요.”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아서 일찍 산에 갔다 와야 하거든요.”
그를 보살피려면 평소보다 일거리를 늘려야 하기도 했지만 굳이 그 사실은 전하지 않았다.
“설마 오늘도 출입 금지 구역에 갔다 온 겁니까?”
“…….”
거짓말에도 영 소질이 없는 여자는 침묵으로 시인했다. 무혁은 대체 뭘 믿고 그 위험한 곳에 혼자 다니나 싶어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생긴 건 온몸으로 ‘나 연약해요’라고 외치는 주제에 담력은 어찌 그리 센 건지, 아니면 원래 앞뒤가 없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내가 무슨 일 겪었는지 봐 놓고 또 거길 들어갔다고요? 날 그렇게 만든 나쁜 놈들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아무도 안 마주치게끔 최대한 조심해서 다녔어요.”
“나는 안 조심해서 그 꼴로 생매장당했을까.”
지레 겁을 주자 흠칫 놀란 하임의 목구멍을 타고 침이 넘어갔다.
“하임 씨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그나저나 나도 얼른 산에 데려가 줬으면 하는데, 언제가 좋겠어요?”
“어…… 천종 씨 컨디션만 괜찮으시면 목요일쯤에 갔다 올까요? 대신 새벽이 오기 전에 출발해야 할 거예요.”
“그래요.”
내내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하임의 몸이 그의 가랑이 언저리를 스치길 반복했다. 제 손보다 작은 발끝이 움찔움찔할 때마다 하체에 신경이 쏠렸다. 무혁은 슬슬 아랫도리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작 아무 생각이 없는 하임은 목을 쭉 빼고 창밖을 살피는가 싶더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저는 이제 가 봐야 할 거 같…… 앗.”
하임이 제 품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순간 무혁이 팔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가 살짝 떴다가 다시 주저앉게 된 그녀가 당황한 눈을 끔뻑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
저도 모르게 반응한 무혁은 의문이 가득 떠오른 말간 눈망울을 내려다보다가 힘을 풀었다.
“갑자기 추워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놀랐습니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하임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억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녀가 떠난 후, 무혁은 은근한 자괴감이 섞인 자조를 흘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뒤질 뻔하다가 살아나니 정신이 어떻게 됐나, 씨팔.
순간 전에 없던 풋 페티시라도 생긴 건가 싶어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병아리색 양말을 신은 꼴을 보고 발정하는 스스로가 기어이 미친놈이 된 것 같았다.
‘정신 차려라, 진무혁.’
원래 진돗개, 진짜 또라이 같은 별명으로 불렸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고 이후에 어디 하나 등신이 된 건 확실한 듯했다.
무혁은 역시나 칼을 들고도 칼을 쥔 줄 모르는 자가 무서운 법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치게 뜨거워진 이불 밖으로 핫팩을 툭, 던졌다.
“더 있다간 살까지 익겠어.”
여자가 저를 구워 죽이려는 게 아닌 이상 난로까지 들이게 해선 안 되겠다 싶었다. 그 정도의 간호 열정이면 조만간 제 내장이 순대가 되어 버릴지도.
하.
연달아 기막힌 실소를 흘리던 그는 몸을 움직여 흠뻑 땀을 쏟은 뒤 두 번째 샤워를 마치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 * *
다음 날.
“읏, 흡, 읏챠.”
“…….”
“헤, 이제 됐다. 휴우우―”
“…….”
팔짱을 낀 채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무혁은, 외계인의 괴기스러운 행위를 바라보듯 눈앞의 광경을 관망했다.
하임이 제 머리통보다 좀 더 큰, 불에 달군 돌덩이를 난로 대용이랍시고 갖다 놓았기 때문이다.
말문이 막혀도 아주 기깔나게 막혀 버렸다. 뇌가 잠깐 시스템 오류를 일으키는 듯한 느낌은 덤이었다.
두 사람이 꼭 필요한 생필품이나 집 안에 굴러다니는 자질구레한 용품을 가져다 놓곤 했지만, 달군 돌 같은 건 그가 그려둔 범주엔 없는 것이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저런 구시대적인 발상을 한 걸까. 설마 지금까지 백화점 전자 기기 코너에도 못 가 본 건 아닐 테지.’
아무리 이곳에 전기를 꽂을 수 없다는 점을 참작해도 당혹스러웠다.
동네 마트나 서점에만 가도 조잡한 무선 초소형 히터 하나쯤은 살 수 있는 시대에 이건 말이 안 되지.
아니면 이 여자야말로 정말 저를 어떻게 하려는 건가. 인적이 닿지 않는 폐분교에 숨겨 놓고 뒤룩뒤룩 찌운 다음에 식용 인간 샘플로 팔아 버리려는 속셈일지도.
어제는 팥 주머니, 오늘은 돌덩이. 또 춥다고 했다간 기어이 이곳에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이르렀다.
본인의 행동력에 굉장히 뿌듯해 보이는 하임은 해맑기만 했다. 그녀는 가져온 작은 연장으로 돌의 위치를 세심히 조정하기까지 했다.
“돌은 금방 식지 않으니까 핫팩보다는 좀 더 나을 거예요.”
“…….”
“식은 핫팩 올려놓고 다시 데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구요! 대신 아주 많이 뜨거우니까 절대 맨손으로 만지시면 안 돼요.”
“……그걸 가방에 넣고 온 겁니까?”
“오늘 산에서 약초 따던 중에 발견한 거 있죠? 윗면이 납작하고 평평해서 쓸모가 좋겠더라구요.”
그리 말하며 ‘헤헤―’ 하고 웃는 여자 때문에 무혁은 잠시나마 모든 전의가 꺾여 버렸다. 비록 머리통만 할지라도 돌이라 여자 혼자 들기엔 제법 무거웠을 텐데.
저걸 들고 낑낑거리며 산에서 내려왔을 여자에게 왜 어리석은 짓을 하냐고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삼동이가 저보다 더 바쁘거든요. 여기저기 일손 도우려면 이곳에 들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그거 잘됐군요.”
“네? 왜요?”
“……삼동이가 나 때문에 일거리를 잃어선 안 되니까. 근데 그 보따리는 또 뭐예요?”
“이거는 만화책인데 삼동이가 전해 달라고 했어요. 외출도 못 해서 따분하실 텐데 이거라도 읽고 계세요.”
부담스러우리만치 쏟아지는 호의를 어찌해야 할지. 턱을 매만지던 무혁이 하임이 메고 온 가방을 검지 끝으로 들어 올렸다.
되레 돈을 준다고 해도 안 가질 촌스러운 가방인데, 또 이곳 풍경과 묘하게 어울렸다.
군데군데 묻은 흙 얼룩을 훑던 그의 눈썹이 별안간 위로 추켜 올라갔다.
“임하임 씨.”
“네?”
“여기에 그 돌 넣고 오는 동안 안 뜨거웠어요?”
“천에 둘둘 말아 와서 참을 만했어요.”
“참을 만하긴. 이렇게 구멍이 났는데.”
가방 뒤의 색이 변하다 못해 손바닥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국소적으로 열이 오래 닿으면 천이 그슬리는 것이 당연했다.
‘등이 안 뜨거웠을 리가 없을 텐데.’
무혁은 흐릿하게 웃는 하임이 뒤를 도는 순간 허탈한 탄식을 터트렸다. 옅은 베이지색 조끼 한가운데가 누렇게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