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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화


11. 마치 ‘헤―’ 하고 웃는 듯, 눈이 반달 모양으로 사르르 접히는 모양새가 꽤 귀엽긴 했다. 입꼬리 옆 보조개가 워낙 또렷한 것도 한몫하는 듯했다. 딱히 먹는 것에 감흥이 없는 무혁에겐 음식은 그저 몸을 굴리기 위한 연료일 뿐이었다. 식사는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이자 생존 습관이었고, 음식은 연료, 식사는 보급,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대놓고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임에게 그가 일부러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먹었어요. 뜨끈한 국을 먹으니까 속이 풀리는 거 같군요.” “내일은 더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저는 김치찌개도 자신 있거든요. 미역국이랑 순두부찌개도 엄청 잘 끓여요.” 수줍게 자신감을 드러내는 그녀는 의외로 상대하는 재미가 있었다. 찌개 플러팅은 처음 받아 본 무혁이 피식 웃었다.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할 필요는 없고. 이미 충분해요.” 깔끔하게 비운 도시락 통을 직접 정리한 그는 삼동이가 두고 간 옷을 챙겼다. 다른 사내와 속옷까지 공유하는 게 찝찝하긴 하나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무혁이 지내는 2층에는 허름한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이 하나 있었는데, 다행히 펌프가 살아 있어 지하수를 쓸 수 있었다. 비록 뼈가 시릴 정도의 찬물만 졸졸졸 나오는 수준이었으나 그에겐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가 정신을 잃은 동안엔 직접 끓여 온 물과 섞어 씻겨 준 모양이었다. 이제 움직이기에 무리가 없는 무혁은 땀을 씻어 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물이 많이 찬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얼음 바다 수영을 아침 체조처럼 해치우는 NEXA 요원들이 들으면 폭소를 터트렸을 것이다. 괜찮으니 망을 봐 달라고 부탁하자 하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은 귀끝을 붉힌 채 등을 돌리고 서는 모습에 비웃음을 삼키며 옷을 전부 탈의했다. 며칠 만의 샤워에 세포 하나하나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얇은 물줄기에 인내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은 무혁이 수건을 머리에 얹었다. 화장실을 나서자 하임이 그를 걱정스레 살피며 뒤쫓아 왔다. 제게서 눈을 못 떼고, 어디를 가든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이 주인만 바라보는 강아지 같았다. “천종 씨, 얼른 이불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 몸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가 본인보다 큰 양모 이불을 낑낑거리며 펼쳐 들었다. 언제 넣어 둔 건지 이불 속에는 팥 주머니 열 개가 구역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데워 놨으니까 따듯할 거예요, 얼른요.” 무혁은 제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채근하는 하임을 보며 신선한 흥미를 느꼈다. 마치 누군가를 속이기에 있어서 완벽한 배우가 된 기분이랄까. 뭐, 기침 흉내만 내도 낚일 만큼 쉬운 상대라 스릴은 없다만. 젖은 머리를 털던 수건을 내려놓은 그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가 어린애를 씻긴 부모라도 되는 양 이불을 턱 아래에 빙 둘러 주었다. 이 나이 처먹고 이런 취급은 좀 굴욕이긴 하나, 그렇다고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무혁은 삐져나온 팥 주머니까지 이불 속에 꼼꼼히 욱여넣는 하임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춥네요. 물이 얼음장 같아서 그런가.” “그러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겨우 열 내렸는데 또 아프시면 안 돼요.” “하임 씨 안고 있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 같은데.” “…….” “이불 안으로 들어올래요?” 놀라다 못해 얼어 버린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표적을 포착한 맹수 같으면서도 심히 유혹적이었다. 그는 은은하고 색정적인 미소로 빠져나갈 구멍마저 봉했다. “나 좀 안아 줘요. 너무 추워서 오한 오기 직전이니까.” 한순간 말문이 막힌 하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무혁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오, 오한이요? 어, 어떡하지? 그럼 큰일인데…….”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와중, 몸은 이미 제멋대로 이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다 스스로 그 사실을 자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제가 음, 들어가면 더 따듯해지긴 하겠죠? 그러니까, 이건 그저 체온을 나눠 주는 거고 천종 씨가 또 아프기라도 하면 저도 곤란하니까, 그래서…….” 머리로는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몸은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갔다.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끝이 흐려지며, 작은 손은 이불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요란한 움직임을 지켜보던 무혁이 픽, 웃으며 이불을 열었다. “얼른 들어와 봐요.” 쭈뼛거리며 다가간 하임이 일정 거리 이상은 움직이지 못하자 그가 그녀를 당겼다. 이윽고 두 몸이 빈틈없이 맞붙으며 그녀의 몸이 이불 속에 푹, 파묻혔다. “아궁이에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따듯해.” “……제가 원래 몸에 열이 많은 편이거든요.” “아, 난방비를 몸으로 충당하는 체질. 이 정도면 장작 대신 하임 씨를 때워도 되겠군요.” 무혁은 제 품 안에 갇혀서 눈알을 도르르 굴리는 하임을 내려다보다가 긴 한숨으로 몸을 이완시켰다. “근데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런 생활 한복을 입습니까? 아무리 시골이라도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패션인 거 같은데, 무슨 민속촌 체험하러 온 기분이군요.” 천종 씨 본다고 신경 써서 입고 왔는데 이상한가? 하임은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음, 이게 보기보다 실용성도 좋고 활동하기 편하거든요. 도시 사람들이 보기엔 많이 이상한가요?” “딱히 이상하진 않고, 귀엽고 새롭네요. 동화에 나오는 예쁜 산골 소녀 같기도 하고.” 귀엽고 예쁘단 말에 쑥스러워진 하임은 어느새 양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흠, 안 이상하다니 다행이에요. 손님 계실 때는 예의상 깔 맞춤으로 입곤 하거든요…….” “깔 맞춤?”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무혁이 하임의 옷차림을 다시 한번 슥, 짧게 훑었다. 은은한 컬러의 저고리 위에 톤이 맞는 머플러, 조끼, 바지. 이 3종 세트를 같은 색으로 맞추는 것이 그녀가 말한 깔 맞춤인 모양이었다. 아, 촌구석에선 예의를 이런 식으로 갖추는군. ‘상당히 신박하네.’ 몸매라곤 드러나지 않는 넉넉한 품, 투박하기 그지없는 거적때기로 잘도 차려입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인형에 옷을 입혀 놓은 듯한 모양새가 제법 깜찍했고, 촌스러운 순박함의 조화가 의외의 매력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묘하게 코믹하다니까.’ 활짝 벌린 그의 다리 사이에 들어온 하임은 무릎을 공손히 굽혀 모은 채 앉아 있었다. 무혁은 민망한지 연신 팥 주머니를 조몰락거리는 그녀를 슬쩍 더 힘주어 안았다. “…….” 옷 너머로 느껴지는 살성이나 맨살끼리 스치는 촉감이 무척 보드라웠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그의 입이 다물렸다. 팥 주머니를 손안에서 가지고 놀듯 여자를 주물럭거리고 싶다는 충동이 피어올랐다. 이런 저열한 속내를 알 리 없는 하임은 살짝 식은 천 주머니를 그의 옷 위에 살살 문질렀다. “천종 씨 피부가 너무 차가운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따듯하죠?” “……그러네요.” “팥을 데우고 난 직후엔 무척 뜨거워서 잘못하면 화상 입을 수 있거든요. 이 정도가 옷 안에 품고 있기에 딱 좋아요.” 여자는 오직 제가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양 그 어떠한 사심이 담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눈빛에 담긴 부끄러움과 호기심은 숨기지도 못하면서. 뭐라도 호응이 있어야 제가 자연스레 넘어가는 척 꼬드길 테지만, 그런 면에선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이래서야 유혹은커녕 밑밥도 안 먹히겠는데. 눈앞에서 대놓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정작 행동은 고지식하게 구는 타입이었다. 어쩌면 마을에 대한 정보를 떠보거나 은근슬쩍 신세를 지려는 계획이 삐걱거릴 수 있었다. 호구처럼 착한 건 맞는데, 의외로 쉽사리 휘두를 만한 구석은 없어 보인달까. 조금 성가셔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치자 무혁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다정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특유의 냉담한 기색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머리를 굴리며 계산하던 그는 하임이 저를 올려다보자 순식간에 눈빛을 누그러트리며 가면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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