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0화
10.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산에 다녀서 씩씩하거든요. 삼동이만큼은 못 해도 삽질 정도는 거뜬하게 하고요……!”
“…….”
“그리고 산짐승 사체도 자주 보다 보니 기절할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어요.”
하임은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조잘거렸다.
“그랬던 거군요.”
그는 어색하게 웃는 하임을 무심히 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원래 무서우신 분인가……?’
왜 사람을 저렇게 뚫을 것처럼 보는 거지.
긴장의 연속인 데에는 우습게도 저 조각 같은 외모도 한몫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자꾸만 심장 어딘가가 자르르 떨리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 삼동이라도 말을 걸면 좋을 텐데. 자신만큼이나 그가 깨어나길 바랐던 삼동이인데 왜 저러는 걸까.
무혁은 별이 박힌 듯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더 물었다간 여자는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한 표정이었다.
“……나중에 이 은혜는 보답하도록 하죠.”
“보답 안 하셔도 돼요. 무사히 깨어나셨으니 됐어요.”
하임이 두 손을 저었다.
“아, 참. 출출하시죠? 우선 죽부터 드세요.”
삼동이는 그녀가 돌아서는 찰나에 무혁과 눈이 마주쳤고, 무언의 경고에 꽁지를 내리듯 풀 죽은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무혁은 하임이 가져온 닭죽을 깨끗하게 비웠다. 허기가 지기도 했거니와 그녀의 요리 솜씨가 어린 나이에 비해 뛰어나기도 했다. 그는 하임이 조부와 단둘이 산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가깝다고 했죠.”
“네, 우리 집이랑 삼동이네가 마을 맨 끝에 있거든요. 여기서 걸어서 15분 정도밖에 안 걸려요.”
“그럼 주로 이 뒷산에서 약초를 캐겠군요.”
끄덕끄덕.
“날 발견한 곳도 그곳인가?”
“아, 거기는 좀 더 북쪽이에요. 고개를 넘어야 하거든요.”
“날 그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어요?”
“…….”
“밤에 사람 없을 때 몰래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위험합니까?”
“길이 없는 험한 곳이라 낮에 오르기도 힘드실 거예요. 더군다나 다리도 다치셨는데…….”
무혁은 이 말을 들었으면 동료들이 배를 잡고 웃었을 거라 생각했다. 한쪽 다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사막도 건너 봤건만.
늘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그에게 이 정도 산은 그저 뒷동산에 불과했다.
“그쪽이 잘 보살펴 준 덕에 괜찮을 것 같군요. 당장 오늘 밤에 데려가 달라는 말은 아니고.”
하임이가 조용히 볼을 붉히는 사이, 어느새 돌아온 삼동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삼동이가 더 열심히 형아 간호했는데…… 매일 구석구석 씻기는 것도 잘했는데…….”
무혁이 말없이 등을 토닥이자 삼동이가 귀신의 손이라도 닿은 것처럼 흠칫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때, 하임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근데 이름이 기억 안 나시면 저희가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아.”
무혁이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지금껏 쓴 적 없는 가명을 지으면 될 일이었다.
“편한 대로 불러요.”
“저는, 음…….”
대강 고르면 되건만 여자는 입술을 앙다문 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삼동이가 지어 줄래.”
옆에서 불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혁이 흘긋 보자 삼동이가 자신 있게 외쳤다.
“형아는 삼동이 형아니까 삼돌이. 삼돌이 형아 해.”
“삼동아, 이분한텐 안 어울리는 이름이야. 그리고 삼돌이는 3년 전에 무지개다리 건넌 말숙 할머니네 개 이름이잖아.”
“아, 맞다.”
삼동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새끼가 나한테 개 이름을 붙여? 무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삼동이 녀석이 은근하게 제게 엿을 먹이려나 가늠하는 중이었다. 이내 한층 조심스러워진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저, 아니면…… 천종 씨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천종?”
“실은 제가 그때 찾고 있던 산삼이 천종산삼이거든요.”
“천종산삼?”
“하늘이 내린 산삼이라고 불리는, 가장 귀한 산삼이에요.”
“…….”
하임은 행여나 무혁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 정성스레 설명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그는 딱히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싫으시면 다른 이름으로 고민해 볼게요.”
여든 먹은 노친네도 아니고 천종이라……. 무혁은 기분이 조금 구렸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든가.”
“그러니까, 음, 저는 귀, 귀하다는 의미로 지어 본 거예요.”
심드렁한 반응에 하임이 복숭아 빛으로 물든 얼굴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분이시니까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잇는 그녀는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 보였다.
무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잠깐이나마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투명해도 저리 투명할 수가 있나.
순수하다 못해 순결해 보이는 여자는 살면서 나쁜 일을 한 번도 저질러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새벽의 이슬 같기도.
‘재밌네.’
관객의 반응이 훌륭해서일까, 무혁은 구역질 나던 낯간지러운 연기가 갑자기 재밌어졌다. 그렇다면 더 뻔뻔해져 볼까나.
“그럼 지금부터 천종 씨라고 불러요.”
하임은 부끄러운 와중에 배시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머지않아 그녀의 표정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놀란 듯 동공이 커졌다.
그 변화를 포착한 무혁이 조용히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내 저 멀리서부터 와다다다―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느껴졌다.
몇 초 뒤.
“삼동이 형아―!”
“형아― 삼동이 형아― 우리랑 놀자아―!”
삼동이가 이곳으로 향하는 걸 목격했는지, 앳된 목소리에 그를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스며 있었다.
“삼동아, 얼른 나가. 후문 쪽에서 냉이 캔 척해야 해.”
“알았어.”
하임이 서둘러 눈짓하자 삼동이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동네에 아이들이 있나 보군요.”
“네, 딱 두 명 있는데 그 아이들이 삼동이를 무척 잘 따르거든요. 가끔 삼동이가 운동장에서 놀아 주고 그래요.”
“그렇군요.”
“그 형제는 겁이 없어서 가끔 이 건물 안도 돌아다닐 때가 있어요. 어쩌다 1층만 짧게 들락날락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삼동이한테 잘 지켜보라고 할게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무혁은 속으로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저는 오랜 훈련과 경험 끝에 일반인보다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래야만 위기에 대처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타인의 기척은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채곤 했다. 그런데.
‘뭘까. 아까 그 표정 변화는.’
마치 저보다 더 빨리 기척을 알아챈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골에 처박혀 사는 민간인이 그 정도로 감각이 뛰어날 리가.
무혁은 그저 우연이라 단정 지으면서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 *
삼동이는 형제와 놀아 주다가 이장님에게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하여 오늘 저녁엔 하임이 혼자 무혁을 챙겨야 했다.
할아버지에겐 일손을 도우러 간다고 둘러댄 참이었다. 그녀는 도시락 통이 담긴 보따리에 따끈따끈한 핫팩을 여러 개 넣었다. 이렇게 하면 음식과 핫팩이 서로를 보온해 줄 터였다.
해가 지기 시작한 무렵에 집을 나선 하임은 부지런히 분교로 향했다. 가는 동안 귀를 열고서 주변을 살폈으나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혁은 창고 한편에서 기다란 근육질 육체를 뽐내며 찌뿌둥한 몸을 풀고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채로 땀을 내는 모습에 하임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무혁이 옷을 입을 때까지 문가에서 기다리던 그녀는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살뜰히 말을 걸었다.
“계속 죽만 드셔서 질리실 것 같아서 다른 걸 가져와 봤어요.”
그녀가 꽤 가짓수가 많은 도시락을 펼쳤다. 시골답게 대부분이 나물 반찬이었고, 볶은 소고기도 있었다.
“고기는 식으면 질겨지니까 얼른 드세요.”
“그쪽은요.”
“저는 먹고 왔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저를 순순히 받아 든 무혁이 식사를 시작했다. 곤드레밥과 반찬을 한입씩 맛보다가 제법 먹을 만하다고 생각하며 텀블러에 담긴 배추 된장국을 한술 떴다.
제 반응이 궁금한지 옆에서 북방 하늘다람쥐 한 마리가 깔짝깔짝 훔쳐보길 반복했다. 어찌나 어리숙한지 모른 척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보다 못한 무혁이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늘어트리며 오랜만에 연기 톤을 내뱉었다.
“맛있네요, 하임 씨.”
그럼에도 말투 자체는 뚝뚝했으나 하임은 하등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충분했는지 그녀가 찹쌀떡 같은 볼을 부풀리며 수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