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4화
4.
서늘한 눈빛으로 가라는 뜻을 비치자 여자가 대뜸 본인 옷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왜 이렇게 몸이 따듯하나 싶었더니 정말로 몸에 핫팩을 넣어 둔 모양이었다. 여자는 핫팩과 목에 걸고 있던 우스꽝스러운 보온용 귀마개까지 넘겨주었다.
“이, 이거라도 갖고 계세요. 금방 다시 올게요.”
“내가 분명…….”
무혁은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몰려든 고통에 숨을 몰아쉬었다. 움찔한 여자가 핫팩을 그의 방탄조끼 안에 넣어 주었다.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정신 잃으시면 안 돼요.”
떨리는 목소리에 애써 힘을 주며 애원하듯 내뱉은 여자가 소쿠리를 내버려둔 채 문을 나섰다.
다 쓰러져 가는 투박한 건물은 지붕이 반쯤 무너져 있었고, 거센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틈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혁은 저 머저리 같은 여자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오면 어쩌지 싶어 조금 불안해졌다. 무엇보다 신고라는 걸 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꼬일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가물거리는 정신을 잠시 놓았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던 그는 얼핏 초소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눈꺼풀을 열었다.
누군가가 숨을 죽인 채 이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단 한 명의 기척, 명확하고 규칙적인 발걸음, 숨을 죽이며 거리를 재는 기묘한 정적. 그런 류의 공기는 오랫동안 현장에서 겪어야만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이었다.
“…….”
분명 훈련된 자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무혁인 이런 리듬의 주인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중성.
대체 무슨 이유로 그 타이밍에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확률적으로 높은 가정이 떠올랐으나 무혁은 그 결론을 쉬이 허락하기 어려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중성에게만큼은 쓰고 싶지 않은 단어였기에.
배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긴 요원 생활 중 맞닥트린 생사의 갈림길에서 단련된 감각이자 습관이었다. 그는 기척에 집중하며 조용히 전투력을 끌어올렸다.
저게 누구든 간에 날 공격하려 한다면 전부 다 조져 버릴 것이다.
스윽―
한층 근접한 거리에서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혁의 날카로운 눈빛이 벽 너머를 꿰뚫어 보듯 소리의 근원지를 겨냥했다.
저벅, 저벅.
익숙한 발걸음이 주저 없이 다가오자 무혁의 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아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무혁의 얼굴이 오싹하리만치 싸늘해졌다.
중성은 혼자였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양 아무 말이 없었다.
“……이중성.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
중성은 대꾸 없이 그저 담담히 무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애초에 대답할 생각조차 없는 침묵이었다.
10년. 자그마치 10년 동안 작전에서 제 등 뒤를 맡겼던 얼굴이 오늘따라 지독하게 낯설었다.
무혁은 칼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수십 개의 가능성이 뒤엉켜 날뛰는 머리는 혼란스러웠으나 몸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온몸의 감각이 하나씩 꺼져 가고 있었다. 어찌할 방법은 없었으나 여기서 이대로 드러누우면 정말 끝이라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극렬한 분노와 배신감에 사무친 무혁은 의식이 완전히 끊기지 않도록 정신력을 끌어올렸다.
온갖 고문에 비하면 이깟 독침쯤이야.
그는 뒤져도 이리 허무하게 뒤질 순 없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중성이 움직이려던 찰나, 무혁이 그에게 소쿠리를 집어던졌다.
푸슉―
빗나간 총알이 목재 벽을 뚫고 나갔다. 총알의 궤적을 피한 무혁이 중성에게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팔을 치켜드는 순간엔 어깨가 찢겨 나갈 것만 같았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주먹을 맞고 고꾸라진 상대 또한 온몸이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까 무혁이 난사한 탄환을 정통으로 맞은 팔이 걸레처럼 찢겨 있었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맞부딪치는 순간 무혁의 눈에 살벌한 적의가 번졌다. 그는 칼을 단단히 고쳐 잡으며 오싹하기 그지없은 말투로 뇌까렸다.
“……이중성, 이 갈아 죽일 씹새끼야.”
“…….”
“언제부터였어. 설마 처음부터였나?”
방금 쏜 총알이 마지막 한 방이었던 듯싶었다. 대답 대신 껍데기뿐인 탄창을 내던진 중성이 지옥에서 온 악마 같은 낯짝으로 칼을 꺼내 들었다.
대화 따윈 무의미해졌다. 눈앞의 놈은 더 이상 제 동료가 아니었고, 추억 비슷한 걸 끄집어내 원망하고 호소해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무혁은 턱이 툭, 불거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미친 새끼, 눈깔이 완전히 처돌았네. 씨발.
이런 속내를 숨기고 잘도 그 긴 세월을 속여 왔다 싶었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진 이 산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유혈보다 더 선득하게 실감 났다. 무혁은 여자가 부디 돌아오는 일이 없길 바라며 살기 가득한 눈을 번뜩였다.
* * *
태산같이 거대한 남자가 주저앉는 순간부터 상황이 하임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영화에서나 보던 첩보 요원 같은 행색의 남자는 그녀를 해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고,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뒤늦게 비현실적인 남자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산수화 속 먹빛 바위처럼 거칠고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상이었다. 대번에 시선이 머물게 되는 존재감이랄까.
하임은 순간 산에 깃든 신령이 사람 시늉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사람 얼굴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누가 정성 들여 빚어 놓은 조각 같았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바라보던 하임은 그가 독에 감염되었다는 말에 서둘러 해독 효과가 있는 약초와 버섯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이 심마니라는 걸 알렸으나 남자는 고통스러운 나머지 제 말이 전부 안 들리는 듯했다.
그러다 남자가 대뜸 저를 꽉 끌어안는 순간, 하임은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추고 말았다.
처음 남자의 품에 안겨 본 기분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탄탄하다, 단단하다, 튼튼하다, 이런 1차원적인 감상 뒤로 가슴께를 짓눌러 오는 감각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가까이서 들리는 거친 숨결 하나까지, 안긴 몸을 타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등과 허리를 휘감아 오는 힘이 너무 세서 정신이 멍해졌다. 하임은 긴장과 놀람,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떨림 사이에서 한동안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남자가 제 맨살에 본인의 차디찬 피부를 문지를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일며 솜털이 곤두섰다. 오싹하거나 두려울 때 소름이 돋는 것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뭐가 이리 따듯해.”
“…….”
곧 그의 차가운 체온과 짙은 혈 향에 정신이 돌아왔다. 눈앞의 근사한 남자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의 상황을 봤을 때 나쁜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판단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임은 위기의 남자를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이거라도 갖고 계세요. 금방 다시 올게요.”
저 혼자서 부축하기엔 남자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하임은 산을 타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여담 마을의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그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녀를 도와줄 이가 한 명 있었다.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정신 잃으시면 안 돼요.”
하임은 지체하지 않고 기껏 고생스럽게 딴 약초를 내팽개친 채 산길을 내달렸다. 그녀는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가쁜 숨을 헐떡였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온 하임은 제 집과 가장 가까운 삼동이네 마당으로 쏟아지듯 뛰어 들어갔다.
“삼동아……!”
하임 못지않게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하는 삼동이는 마루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 하임이다.”
산만 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삼동이가 헤벌쭉 웃었다. 하임은 마주 웃어 줄 여유 없이 그의 옷깃을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삼동아, 나 좀 도와줘! 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