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26화
26화
“수아.”
테즈만은 이튿날부터 그녀를 수녀님이 아닌 수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더는 수녀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는 수아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는 오히려 수아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다른 사용인들이 문제였다. 언제까지 그들 또한 수녀님이라고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테즈만은 고민했다.
결국, 수아라고 부르는 것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과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아닌 다른 특별한 게 그에게 필요했다.
“애칭을 만들까.”
중얼거리는 그의 시선이 정원을 향했다. 특별하게 정원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에 자주 창문 밖으로 정원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제 정원을 걸어 다니는 수아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 지 정원 이곳저곳을 살피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장 데리고 와서 범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그의 입에서 탁한 숨이 터져 나왔다.
“어쩌지. 저렇게 좋아하면 다 해주고 싶으면서도 없애버리고 싶은데.”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오로지 자신이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수아가 좋다면 뭐든 해줄 것을 알기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테즈만의 입에서 웃음소리까지 들리자 르로이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낯선 것이 당연했다.
르로이 만큼이나 테즈만은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웃는 것은 물론, 화내는 모습이라든가 슬퍼하는 모습은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런 그가 웃고 있었다. 정원에 있는 수아를 보며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르로이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흐드러지게 만발한 정원의 꽃들 사이로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색을 뽐내는 꽃들 사이로 수수한 그녀가 르로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활짝 웃으며 걷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던 르로이가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르로이.”
“... 네, 테즈만 님.”
“감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여유로운 얼굴과 달리 그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져 있었다.
“우리 수아가 예쁘다는 걸 알아도 말이야.”
르로이의 눈동자가 엷게 진동했다. 그가 내뱉은 말의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테즈만 님.”
“알아.”
감히 제 주인의 것을 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테즈만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르로이의 충성심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다만 주의는 줘야 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선을 그으라는.
다른 이였다면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을 터였지만 자신이라서 테즈만이 아량을 베풀었다는 걸 르로이는 알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테즈만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르로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시는 신경 쓰이지 않게 하겠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다는 얼굴로 르로이의 시선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테즈만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정원에서 수아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사냥개들을 만난 모양이었다. 무섭게 생긴 외모와 달리 그녀를 향해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걸 보니 테즈만은 진즉에 사냥개들을 교육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교육했다. 그녀가 입은 옷가지를 냄새 맡게 하고는 이를 드러내지 않도록. 워낙 똑똑한 개들이라 그런지, 제 주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눈치로 아는 모양인 듯했다. 칵트에게도 안 부리는 애교를 수아에게 부리고 있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 충성심 높은 르로이까지 흔드는 여자인데, 한낱 짐승 따위가 견딜 수 있을까.
테즈만이 짧게 혀를 찼다. 수녀복을 입고 있을 때도 어렴풋이 감이 왔지만,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수아를 보자니 더욱 불안감이 커졌다. 그녀가 제게 매력적인 존재인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니.
차라리 수녀복을 입힐 걸 그랬나. 꽁꽁 싸매놓고 자신만 봐야 할까. 수아가 정원을 나갈 때는 카포들과 솔저들을 멀리 치워놔야 하나.
수아를 알고 난 뒤부터 제게는 없을 거로 생각했던 감정들을 하나둘 깨우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어떨 때는 지독한 소유욕에 들끓기도, 질투심에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싫지는 않았다. 그녀로 인해 생긴 감정들이니까.
똑,똑. 그의 서재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달리 작은 노크 소리였다. 쏟아지는 생각들에 빠져있던 테즈만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정원 구경을 끝낸 모양이었다. 빼꼼 열리는 문틈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테즈만과 르로이의 시선이 동시에 수아에게 향했다.
“아, 미안해요. 일하는데…. 방해했어요?”
두 남자를 보며 민망한 듯 웃는 그녀를 향해 테즈만이 손을 뻗었다.
“수아.”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리로 오라는 소리임을 눈치챈 수아가 발걸음을 옮겼다. 제게 다가온 수아를 끌어안으며 테즈만이 물었다.
“정원은 어땠나요.”
“너무 예쁘던데요? 놀랐어요. 이렇게 멋진 곳이 있나 싶어서... 아, 칵트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어요.”
그가 수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말했다.
“수아가 원한다면 정원을 밀어내고 새로 다시 만들어도 좋아요.”
수아가 질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참, 다들 여기서 계속 일 하실 거죠? 저 맥피랑 같이 파이 만들기로 했는데.”
맥피는 테즈만의 저택을 관리하는 가정부였다. 요리를 만드는 쉐프는 따로 있었지만, 디저트 종류는 맥피가 만들곤 했다.
매일 수도원에서 짜인 일과대로 하루를 보내던 수아는 저택에 와서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적응되지 않는 듯했다. 그런 수아를 향해 테즈만이 제안한 것이었다.
정원을 꾸민다든가, 맥피와 함께 베이킹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수녀만 생각하느라 다른 걸 배워볼 생각이 없던 수아에게는 좋은 제안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맥피와 처음 베이킹을 하는 날이었다.
“맛없을 수도 있는데... 기다려요! 파이는 따끈해야 맛있다니까 같이 먹어요.”
“수아가 처음 만든 파이를 나누어 먹으라는 소리인가?”
테즈만의 물음에 수아가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안 돼요?”
“될 리가 없지.”
수아의 목덜미로 고개를 내린 그가 잇새로 그녀의 살을 가볍게 물었다.
“아.”
“처음은 날 위해 만들어야죠.”
독점욕이 섞인 그의 말에 수아는 순순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짓던 그는 수아가 서재를 나가자마자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칵트.”
“네, 테즈만님.”
테즈만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정원을 훑던 그의 눈에 정원 구석에 있는 온실이 들어왔다. 예전에 미켈레가 양귀비를 키우기 위해 만들었던 온실이었지만 저택의 소유자가 테즈만이 된 지금, 온실은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테즈만은 단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고.
미켈레가 꽤 거금을 들여서 만든 온실이어서 그런지 외관상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기르던 양귀비도 이젠 없어진 지 오래였고. 조금만 손 보면 수아가 좋아할 듯싶었다.
가만히 온실을 응시하던 테즈만이 입을 뗐다.
“온실을 고쳐야겠는데.”
수아가 수녀가 되기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수녀를 포기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종교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바꿀까요?”
“꽃이 가득한 성당으로.”
그녀만을 위한 성당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온전히 그녀만을 위한 성당을.
“수아가 기도를 좋아해서.”
기도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고. 제가 만든 성당에서 기도를 하는 수아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그런 테즈만의 모습을 지켜보는 칵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어릴 때부터 테즈만의 옆을 지킨 칵트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최대한 빨리 끝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칵트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끝에 달콤한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파이를 굽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 열심히 만든 파이를 가져올 수아를 떠올리며 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삭막했던 저택에 온기가 감돌았다. 달콤하고도 따스한 온기가. 그리고 그 모든 온기가 수아 때문에 시작되었음을, 세 남자 모두 동의하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