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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화


27화 테즈만의 저택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테즈만은 아침 일찍부터 서재에서 일하고 있었다. 혼자 침실에 남아있던 수아는 방에 붙어있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커다란 드레스룸, 벽 한쪽에는 테즈만이 입는 슈트가 주르륵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수아의 옷들이 가득했다. 물론, 수아가 산 것은 아니었다. 수녀복을 놓고 오는 바람에 마땅히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테즈만은 그녀를 위해 속옷부터 원피스까지, 옷을 잔뜩 주문했다. 처음으로 옷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옷이 생긴 수아는 매일 옷을 입을 때마다 고민했다. 오늘은 무난하게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지만. 드레스룸 가장 밑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수아가 가져온 짐이 들어가 있는 서랍이었다. 거기서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든 수아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네스 수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수십 번이나 휴대폰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던 수아였다. 누군가는 그녀를 보며 답답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해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차마 전화를 걸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아네스 수녀에게 메시지는 보냈다.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기다려 달라고. 정리되면 전화하겠다고 했다. 이미 정리가 됐음에도 수아가 망설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아네스 수녀의 입에서 원망 섞인 말을 듣기가 무서웠다. 아네스 수녀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으면서, 종신서원을 앞두고 수녀를 포기한 것도 모자라서 남자랑 살고 있다니. 사실을 알게 된 아네스 수녀가 실망을 안 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며 질책할 수도 있을 터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실망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을 했을 터였지만 수아에게 아네스 수녀는 소중한 존재였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아네스 수녀가 자신을 등지는 것만큼 마음 아픈 것은 없을 테니까.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하던 수아를 찾아낸 것은 테즈만이었다. “수아.” 드레스룸 구석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는 테즈만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목소리에 놀란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하고 있는 중 아니었어요?” 일보다 그녀가 중요했다. 수아의 안색을 살피던 그의 시선이 이내 그녀가 손에 쥔 휴대폰으로 향했다. “여기서 뭐 해요, 수아.” “아... 그게.” 수아가 머뭇거리자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아 든 채 테즈만이 침실로 나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제 품에 있는 수아를 보며 물었다. “말해봐요. 뭘 하려고 했는지.” 뭔가 오해를 하는 듯 그의 눈매가 날이 서 있었다. “... 한국에 전화를 하려고 했어요.” 한국? 왜? 설마 한국으로 다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나? 나 몰래? 산발적인 물음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자신은 수아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춰주려고 하고 있는데 그녀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던 순간이었다. “아네스... 수녀님께 말을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 아네스 수녀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아네스 수녀?” “네.” 수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저... 고아거든요. 전봇대 앞에 버려진 것을 수녀님이 주워 오셨대요. 그때부터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그곳에서 절 가장 예뻐하시던 분이 아네스 수녀님이세요.” 이미 뒷조사로 그녀의 신상은 모두 알고 있는 테즈만이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수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탈리아에 오게 된 이유도 아네스 수녀님 때문이에요. 종신 서원식 전에 이것저것 경험해 보라고 돈도 주시면서 보내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성당에서 나온 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요. 분명 제가 수도회에서 퇴회한 것도 알고 계실 텐데...” 태연한 얼굴과는 다르게 수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엄청 실망하셨을 거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아네스 수녀님 같은 수녀님이 된다고 했거든요. 차라리 말이라도 하지 말걸…. 고작 떨어진 지 몇 개월 만에… 이렇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듣고 있는 테즈만에게도 마음의 짐이 될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굳게 닫힌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뗐다. “나 또한 수아의 마음을 너무 잘 알겠는데. 수아를 그토록 오랫동안 보아왔던 수녀님이라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수아가 무슨 선택을 하든 원망이나 실망보다는 지지를 보낼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수아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테즈만의 말이 맞았다. 테즈만과의 첫 만남을 아네스 수녀에게 설명했을 때도 그녀는 수아의 탓을 하지 않았다. 악몽을 꾸었다며,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수아의 잘못은 없다며 다독였다. 수아가 환속을 했다는 사실에도 실망을 할 순 있어도 그녀에게 모질게 말할 아네스 수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지해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진지하고 솔직하게 아네스 수녀에게 털어놓고 싶었으니까. 휴대폰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전화해서 말씀드릴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서는 테즈만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테즈만.” “말로만 하지 말고, 입이라도 맞춰줘요.” 볼을 내미는 그를 향해 머뭇거리던 수아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부끄러웠던 것인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 만 가볼게요! 저 맥피랑 베이킹 하러 가야 해요.” 자신을 홀로 침대에 놔둔 채, 침실을 쏙 나가버리는 수아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혀를 찼다. “알려나 모르겠네.” 그녀와 같이 밤을 보낸 이후, 매일 욕실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홀로 달래는 것을. 첫날 밤이 꽤 버거웠는지 수아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힘들어 보였다. 그게 더 죽을 맛이었다. 수아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탁한 숨이 그의 입속에서 터져 나왔다. “수아.” 욕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한동안 허공에서 떠돌았다. *** 채도가 옅은 금안이 번뜩거렸다. 마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조반니.” 산만 한 덩치로 조반니가 그에게 걸어왔다. “네, 마테오 님.” “테즈만이 저택에 아주 소중한 걸 꽁꽁 숨겨 놨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 조반니가 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카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테즈만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마테오와 달리 테즈만은 단 한 번도 옆에 여자가 없었기에 다들 더욱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마테오도 신기하긴 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유명한 파바드가의 뱀인 테즈만이 옆에 여자를 두다니. 그래서 더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누군지 알아봤나?” “네. 그... 마테오 님도 아시는 분입니다.” “내가 안다고?” “네.” “설마, 그 동양인 수녀인가?” 그의 물음에 조반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인 수녀라니. 설마 했다. 마테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성당에 다닌다고 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정말로 테즈만이 그 여자한테 진심이라는 말이야?” 그저 흥미인 줄만 알았다. 그의 생모도 동양인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으니. 그런데 저택에 데려와서 꼭꼭 숨겨둘 정도면 테즈만이 꽤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여자가 정원에 나올 때는 카포들도 얼씬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은근히 질투가 많네. 테즈만이.” 이 사실을 제 어미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마테오가 벌써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나저나 귀찮게 됐는데. 보스와 어머니는 어떻게 설득하려는 건지.” “테즈만 님이 설득하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테오가 작게 실소했다. 맞는 말이었다. 늘 제멋대로였던 그였다. 선포라면 모를까, 설득이라니. 당치도 않는 말이었다. 아마도 자기가 선택했다는 이유로 집안의 의견 따위는 묵살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온 집안이 뒤집힐지도 모르는데 정작 당사자는 태평한 듯했다. 그러니 더 궁금해졌다. 여자라면 벌레 보듯 하던 테즈만을 어떻게 굴복시킨 것인지. “얼마나 대단하신 수녀님이시기에.” 그리고 제가 건드린다면 테즈만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구경이나 가볼까.” 의자에서 일어난 마테오가 재킷을 집어 들었다. 단추까지 단정하게 잠그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입매가 비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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