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14화
14화
제 음험한 속도 모르는 채, 순진한 소리를 해대는 수아를 보자니 꾹 눌러 놓았던 욕망이 꿈틀댔다.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었는데.”
조금의 틈만 있다면 비집고 나올 욕망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켜버릴 수 있었다.
“아주 제대로 날려 주시네. 우리 수녀님은.”
그러니 알려줘야 했다. 순진하고 또 순진하신 수녀님께.
“난 착하지 않아, 수녀님.”
그저 착하지만 않다는 것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수녀님은 까무러칠걸.”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순진한 눈망울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아를 보자 그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듣고 싶어요?”
부정도, 긍정도 안 하는 수아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좁힌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새하얀 옷을 들쳐 올리고는 개처럼 핥아서 질질 싸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수아가 고개를 뗐다. 슬그머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혀를 미치도록 빨고 싶었지만, 그는 하관에 힘을 주며 참아냈다.
“그, 그 말은...”
생 날것의 단어가 수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단번에 그녀의 사고 회로를 고장 나게 할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놀라면 다음 생각은 어떻게 들으려고.”
너무 놀란 것인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는 수아를 보며 그가 여유롭게 입술 끝을 올렸다.
“그러니까 나 자극하지 말아요, 수녀님.”
까르륵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이들이 성당에서 나온 듯싶었다. 그렇다면 빈첸시오 신부와 르로이도 나왔을 테고. 그럼에도 움직이지 못한 채 얼어붙은 수아와 달리 느긋한 얼굴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봐요, 수녀님.”
테즈만이 움직이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던 르로이와 수트를 입은 사내들이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수아가 고개를 휙 돌려서는 테즈만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심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늦췄다가는 그대로 그에게 삼켜질 테니까. 그럼에도 자꾸만 방심하는 것은 그에게 마음을 놓고 싶은, 제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둔 타락한 감정이었다.
수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토록 간절히 기도를 하고 다짐했건만 그를 만날 때마다 부서졌다. 오늘도 그를 보자마자 두려움이 아닌, 반가움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충분히 타락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는 흔들릴 수 없다. 애써 마음을 다잡은 수아가 손으로 날짜를 셌다.
하나, 둘, 셋.... 다섯. 아이들이 성당에 머무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였고 앞으로 닷새 정도가 남아있었다. 내일 보자는 테즈만의 말을 미루어보면 그는 아이들이 성당에 있는 내내 올 듯했다.
“견딜 수 있어.”
가녀린 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고작 닷새였다. 닷새가 지나면 곧장 빈첸시오 신부에게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할 것이고. 오늘처럼 흔들리지 말고 아이들 핑계로 최대한 아이들과 붙어있을 생각이었다.
그가 제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일부러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불현듯이라도 그의 존재가 떠오르지 않도록. 무던하게 애쓰는 수아를 신께서 불쌍하게 여기셨는지, 내일 보자고 했던 테즈만은 막상 다음 날이 되었을 때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대신 르로이가 테즈만이 시켰다며 아이들을 위한 빵과 우유를 놓고 갔을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의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걸 알기에 더욱 걱정됐다. 설마 그가 다쳐서 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로 수아가 정신을 놓고 있을 때쯤, 아이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며칠 새 수아와 친해진 아이들은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같이 잠을 자면 안 되냐고 물을 정도로 수아를 좋아했다.
“수녀님, 수녀님!”
“수녀님도 드세요!”
르로이가 놓고 간 빵과 우유를 제게 건네는 줄리아와 아이들을 보며 수아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손에 올려진 빵 위로 수아의 시선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수-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빈첸시오 신부가 다가오며 말했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앉으세요. 신부님.”
수도복을 입은 채 조용히 두 손을 무릎 위로 올려놓는 빈첸시오 신부의 손에 주름이 깊었다.
“수-아. 매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힘들죠?”
“아닙니다. 전혀 아니에요.”
수아의 입술이 머뭇거렸다. 빈첸시오 신부도 눈치를 챘을 것이었다. 근래 자신의 모습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저, 신부님...”
아이들이 성당에 있는 것은 내일까지다. 모레에는 보육원으로 돌아갈 테고. 딱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말해보세요, 수-아.”
그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론이었다.
“저…. 한국으로 돌아갈까 해요.”
어렵게 꺼낸 말에 빈첸시오 신부는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빈첸시오 신부에게 말하기 위해 매일 밤 연습했던 말들 속에서도 그녀의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신께 다짐한 정결을 배반했다고. 테즈만에게 흔들리고 또 흔들려서 결국에는 마음마저 내줬다는 것을. 굳게 닫혀있던 수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매일 시험에 들고 있어요. 제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신부님.”
수아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 시험을 이겨낼 수는 없나요?”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몇 번이고 다짐하고 기도하며 마음을 잡아봤음에도 그를 보는 순간 무너져내렸다. 아주 허무하게.
“... 네.”
수아의 대답에 빈첸시오 신부가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하듯 모은 두 손은 꼭 그녀를 위한 것 같았다.
“수-아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매일 시험에 들어요.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겨내기도 하고, 가끔은 못 이겨내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곤 하지요.”
놀란 듯 수아가 빈첸시오 신부를 바라보았다.
“못 이겨낸다고 하니 놀랐습니까?”
“아, 네... 신부님께서는 시험에 드는 일조차 없을 줄 알았어요.”
빈첸시오 신부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있습니다. 오랜 수도 생활로 넘어가는 법을 배워서 그렇지요. 저 또한 매일 기도를 하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마치 수아를 이해한다는 어조였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수-아가 시험에 들어서 실수했다고 한들, 용서를 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됩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똑같은 실수를 너무... 많이 반복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군요.”
“... 네. 이곳에 있으면 그 실수를 계속 반복할 것 같거든요.”
빈첸시오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데보라가 화단을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에 빈첸시오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수-아. 아이들이 보육원에 돌아갈 때까지만 있어 주겠습니까?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제대로 된 배웅을 못 할 것 같아서요.”
확실히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눈만 뜨면 아이들은 그녀와 신부님을 찾곤 했으니까.
“그럼요. 저도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돌아갈 준비를 하려고 했어요.”
“고마워요. 그럼, 나머지 시간 동안 잘 부탁해요. 수-아.”
“네, 신부님.”
생긋 미소를 짓고는 빈첸시오 신부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빈첸시오 신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아가 짧게 숨을 터트렸다.
빈첸시오 신부한테 한국에 돌아간다고 털어놓았고 확인도 받았음에도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무거운 기분이었다.
“... 테즈만한테도 말해야 하나.”
그에게도 자신이 돌아간다고 말을 해야 할까. 만약 말을 한다면 그는 뭐라고 답할까.
또다시 그의 생각으로 물드는 제 머릿속을 보며 수아는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털었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괜히 말했다가 그가 붙잡기라도 한다면, 분명 흔들릴 테니.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보고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줄리아를 향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이틀이었다. 아이들이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다면 짐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무던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기를, 제가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그와 마주치는 일 없기를.
수아가 발걸음을 뗐다. 아이들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