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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화


15화 차에서 내린 르로이의 시선이 성당으로 향했다. 테즈만의 지시로 매일 아침 오는 성당이었다. 르로이가 제 뒤에 선 남자들한테 눈짓했다. 그러자 박스를 든 채 서 있던 남자들이 조용히 성당 앞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먹을 빵과 우유를 잔뜩 든 상자를 성당 앞에 내려놓는 남자들을 보며 르로이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제 주인이 하는 행동에 의문을 다는 일도 없었다. 항상 시키는 대로, 테즈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제 본분이었다. 그런데 궁금해졌다. 대체 저 수녀는 어떤 여자길래 테즈만이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하는지. 시간을 들여 지켜본 결과 특별한 것은 없었다. 매일 새벽녘에 성당에 나가서 기도하고는 청소를 했다. 아침 시간에는 성당 앞 수도원 식당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점심과 저녁에는 미사 준비를 도왔다. 밤늦은 시간, 성당 문을 닫기 전 기도를 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게 끝인 일상. 매일 똑같고 반복적인 하루를 보내는 수아였다. 테즈만이나 르로이와는 전혀 달랐다. 매일, 하루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들과 달리 수아는 무척이나 평온하고 지루한 매일이었다. 그래서 제 주인이 끌렸을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던 수아의 모습이 르로이의 뇌리에 스쳤다. 조금 전 운 듯한 붉은 눈가를 가볍게 접던 모습이, 아이들 앞에서는 경계심 많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활짝 웃던 그 모습도. “아.” 동요라고 없던 르로이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왜 제 주인이 고작 동양인 수녀에게 미쳤는지를. 고작 동양인 수녀가 아니었다. 수아, 그녀라서 그런 것임을. 르로이가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만 내려 시간을 확인한 그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곧 있으면 수아가 성당 앞에 나타날 시간이었다. 수도원과 성당으로 이어진 돌길을 응시하는 르로이의 표정이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한참을 말없이 돌길을 노려보던 르로이의 눈매가 유해졌다. 수도원 문에서 새하얀 수녀복을 입은 수아가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 한 톨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 바짝 쓴 베일까지 새하얀 색이었다. 르로이의 시선이 분주하게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관찰하듯 달라붙는 시선을 느끼지도 못한 것인지 이내 성당 앞에 선 수아는 문 앞에 쌓여있는 상자를 보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휙, 휙 주위를 훑던 수아의 두 눈이 르로이를 발견하고는 반갑다는 듯 크게 떠졌다. 조용히 손을 흔드는 그녀를 응시하던 르로이의 손이 멈칫했다. 왜, 왜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려고 했을까. 가만히 제 손을 응시하는 르로이의 눈매가 싸늘했다. “르로이.” 지금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온 것인지 르로이의 앞에 수아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녀님.” 감정 하나 담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오늘도 감사해요.” “감사 인사는 제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 테즈만 님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니까요.” 딱딱하게 내뱉는 르로이의 말에도 수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불도저 같은 테즈만 화법에 익숙해진 것인지 르로이 정도는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가져다주셨으니까요. 그럼, 오늘도 은총이 가득한 하루 보내시길.” 수아가 가볍게 목례했다. 르로이에게 인사를 끝낸 수아가 다시금 성당으로 향했다. 아직은 아이들이 자고 있기에 성당 문을 조심히 열어야 했다. 조용히 이 모습을 지켜보던 르로이의 옆으로 남자 하나가 다가섰다. “가실 겁니까?” 평소와 달리 르로이의 답이 늦었다. “아니. 조금 더 있다가.” 테즈만에게 보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단순히 잘 지내고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르로이의 시선은 좀처럼 수아가 사라진 성당 문에서 떼질 못했다. “오늘도 아이들을 위해 빵과 우유를 가져오셨군요.” 기민한 편이었다. 그런데 빈첸시오 신부가 제 옆에 설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성당 문을 응시하던 르로이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떼어졌다. “안녕하세요, 빈첸시오 신부님.” “내일이면 아이들이 돌아간다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말없이 르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성당이 쓸쓸해지겠습니다. 수-아도 한국으로 돌아가니 말이죠.” 돌아가? “지금 수녀님께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까?”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던 르로이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모르셨습니까?” “언제 말입니까?” “보육원 아이들이 돌아가면 알아볼 거라고 했으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초조한 목소리로 르로이가 물었다.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글쎄요.” 빈첸시오 신부가 뜻을 모를 얼굴로 성당 문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모르지만, 더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수-아의 선택이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르로이와 시선을 맞춘 빈첸시오 신부가 말을 이었다. “그분께 잘 전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 그분이 누구인지는 르로이가 더 잘 알았다. 빈첸시오 신부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다른 성당도 아닌 이 작은 성당에 그 유명한 파바드 패밀리의 테즈만이 기부금을 낸다고 했을 때부터. “그럼, 오늘도 신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성당으로 향하는 빈첸시오 신부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르로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휙, 돌아선 르로이가 차 쪽으로 걸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차에 올라타며 르로이가 목소리를 냈다. “저택으로 간다.” 저택. 테즈만의 저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팅.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여는 소리가 어둑한 길바닥에 울려 퍼졌다. 입에 물고 있는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마테오가 말했다. “이왕 날리는 거 다 날려버리지.” 천푸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테즈만이 골든 트라이앵글의 공장 하나를 날려버리자 작정한 듯 파바드 패밀리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잠자코 있던 미켈레는 결국 마테오와 테즈만에게 직접 확인할 것을 지시했고. 매일 수아를 보려던 테즈만의 계획은 보기 좋게 물 건너갔다. 당연히 그 때문에 테즈만은 무척이나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럴 걸 그랬나.” 작게 실소하는 테즈만의 잘빠진 눈매가 서늘했다. “그랬다면 이런 귀찮은 일 따위는 안 했을 텐데 말이야.” 순식간에 그의 손에 들려있던 리볼버의 총구가 어딘가로 향했다. 탕. 정확하게 미간 사이를 맞은 사내 하나가 주춤거리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별것 아닌 양 죽은 사내를 지나치는 두 남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태연했다. “그래서.” 마테오가 손에 든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제게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내의 머리를 쥐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았다. 콰직,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입에 문 시가를 다시금 손으로 옮겨간 마테오가 말을 이었다. “요즘 연애는 어때.” 연애라는 말에 테즈만이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얼굴에 드러냈다. “언제부터 내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지?” “서운한데, 테즈만.” 깊게 시가를 한 모금 빤 마테오가 공기 중으로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그래도 명색에 하나뿐인 동생인데. 형이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하지 않나?” 마테오의 말에 테즈만이 헛웃음을 입가에 띠며 말했다. “형, 머리에 구멍 나기 전에 쓰레기나 치워.” 테즈만의 형 소리가 이토록 소름이 끼칠 줄이야. 마테오가 소름 끼친다는 듯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이 없어야 했다. 미친 듯이 몰려드는 천푸 쪽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몸 좀 풀어보자고 카포들이나 솔저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잠시나마 후회했지만, 이윽고 상관없다는 듯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맨몸으로 뒷세계에서 굴렀던 테즈만과 그에 못지않게 그런 놈들만 상대한 마테오. 마치 굶주린 사냥개의 목줄을 푼 격이었다. 거친 타격음과 드문드문 들리는 총성, 그리고 남자들의 신음이 한데 뒤섞였다. 한바탕 소탕을 완료한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느른한 표정으로 피 묻은 리볼버를 응시하는 테즈만을 보며 마테오가 시가를 꺼냈다. 티링, 틱. 지포 라이터의 여닫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타이밍이 좋네.” 수십 개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며 다가오는 것을 본 마테오가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멈춰 선 차들 사이로 칵트와 마테오의 비서인 조반니가 보였다.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칵트 쪽으로 돌아서는 테즈만의 등 뒤로 마테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녀와 마피아라.” 시가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여 삼키며 마테오가 말을 이었다. “벌써 궁금하네.” 테즈만이 리볼버를 재킷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궁금하다 라는 말에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고 있는 테즈만이 고개만 돌려 마테오를 응시했다. “신경 꺼.”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테즈만이 차 앞에 다가서자 기다리던 칵트가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피곤한데다가 수아를 보지 못한 탓에 예민함이 극으로 달했다. 이 상태에서 마테오와 시답지 않은 농담 따위 주고받을 시간은 없었다. 달칵. 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고개를 젖히며 뒷좌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피곤함에 눈을 감았을 뿐인데도 수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 정도면 정말 미친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 수아를 보러 갈까 하다 지금 제 몰골이 말이 아님을 생각한 그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피라면 질겁할 그녀를 놀라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테즈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내일은 수아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수아를 떠올리며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새벽부터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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