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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화


4화 수녀가 아니더라도라니. “그게, 무슨 뜻...” 뚝. 중요한 말을 남겨두고 그대로 통화가 끊겼다. 다시 통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확인한 수아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부터 휴대폰 사용을 자제해왔던 터였다. 그 때문인지 통화 말고는 쓸 일이 없었고 충전 또한 이삼일에 한 번씩 하곤 했다. 하필이면 딱 오늘, 배터리가 다 될 줄이야. 진즉에 충전을 해놓을 걸 하며 충전기를 찾는 수아의 얼굴이 체념으로 물들었다. 아네스 수녀님의 말대로 모든 것이 그저 꿈이기를. 잔상처럼 남아있는 장면들을 애써 지워냈다. 마치 자신에게 세뇌를 거는 것처럼 수아는 한참을 되뇌었다. “그래, 정말로 악몽일 거야.”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빈첸시오 신부님이 오늘따라 더욱 고마웠다. 만약 이 정신으로 일하게 된다면 두 손에 십자가 대신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을 테니까. 애써 잠재운 생각들이 꿈틀대며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려고 하자 수아는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빈첸시오 신부는 다음 날도 수아에게 휴식을 권유했다. 지난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당 일을 계속해온 수아가 드디어 병이 난 것이라며. 강경한 빈첸시오 신부의 반응에 수아는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더 쉬어야 했다. 잠재운 기억이 간간이 떠오를 때면 이미 외우다시피 한 성경책을 쭉 읽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기도 전에 수아는 일찍 방을 나섰다. 이슬이 맺힌 돌길 사이로 새벽녘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수아가 수녀복 앞섬을 바짝 여미었다. 고작 이틀 동안 성당에 오지 않았을 뿐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길이 낯설었다. 애써 발길을 재촉하며 성당 앞에 도착한 수아의 시야에 성수대가 들어왔다. 빈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딱 한 자리, 십자가가 비워졌던 곳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수아가 손가락으로 새로 박힌 십자가를 쓸었다. 다듬어진 차가운 철붙이가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하...” 악몽이라고 무시했던, 애써 잠재웠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려고 하자 수아는 도망치듯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들자마자 정면으로 중앙 제대 위, 십자가가 보였다. 고작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애써 고개를 돌리며 항상 앉던 맨 앞자리 의자로 향했다. 합장한 두 손을 힘껏 깍지 끼어 잡고는 눈을 감았다, 신께서 모두 알고 계시리라. 차마 말하지 못하고 숨긴 죄들을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고해성사라고 해도 될 만큼 간절한 기도였다. 한참을 기도에 집중하던 수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 성호를 그으며 다시금 두 손을 모으려던 때였다. “또 기도하려고?” 낯선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수아의 고개가 들렸다. 수아가 앉은 긴 의자의 끄트머리에 그가 걸터앉아있었다. “안녕, 수녀님.” 테즈만. 그가. 사내의 머리에 십자가를 박아넣고 제 입술을 탐한 남자. 악몽이라고 애써 치부했던 사실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덜컹-.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수아가 몸을 떨며 그를 응시했다. 수아의 겁에 질린 모습을 보자 그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휘었다. “자주 놀라네요.” “다, 당신...” “음, 이름은 말해줬던 거 같은데.” 수아와는 다르게 그는 여유로웠다.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올리며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테즈만. 불러 봐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의 고개가 못마땅하다는 듯 비스듬히 기울여졌다. “그럼, 뭐가 중요할까.” “... 악몽이 아니었어요? 정말 내 앞에서 사람이 죽었어요? 정말로...” 보기 좋게 올라간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이 툭 터졌다. “아. 친절도 하셔라.” 악몽이라니. 테즈만에게는 무척 서운한 소리였다. “지금 수녀님의 다리 사이를 벌리려고 한 개새끼를 사람이라고 칭한 거예요?” 하얀 얼굴이 더 사색이 됐다. 그럼에도 눈가와 입술은 불그스름했다. 천천히 공들여서 다가가려고 했건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틈만 나면 생각이 났다. 저 붉은 눈가가. “아니면 성당에서 개처럼 박히는 것을 원했는데 내가 방해한 건가.” 개는 그였다. 이틀 동안 보이지 않던 그녀가 드디어 성당 앞에 나타났다는 칵트의 말에 당장 달려온 꼴이라니. “무슨…. 말을.” 꼭 장미꽃을 짓이겨 발라놓은 듯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커다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 그가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실수였다. 천박한 말이 아닌 다정하게, 경계하지 않도록 다가가려고 했건만. 천성은 숨겨지질 않았다. “수녀님.” 본능적으로 수아를 향해 가까이 다가서려는 그를 향해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외치는 수아를 보자니 하복부로 피가 몰렸다. 제게 이런 변태적인 성욕이 있을 줄이야. 끓어오르는 흥분감을 억누르며 그가 최대한 다정한 척 목소리를 냈다. “수녀님을 구해준 사람대접치고는 너무 하시네요.” “... 구해주다뇨.” “내가 수녀님을 구해드렸잖아요.” 천천히, 한 발짝씩 움직였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수녀님은그대로 그 새, 사람한테 범해졌겠지.” 멈칫하며 뒤로 주춤하던 수아의 발이 멈추어 섰다. “신성한 성당에서 수녀님을 범하려는 남자를 보니 화가 나서 그만. 내가 못 참았어요.” 어느새 수아의 앞에 선 그가 고개를 숙여서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뱀처럼 교활한 말로 속삭였다. 수아가 안심할 수 있다면 테즈만은 아픈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어리숙한척하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칵트는 물론 르로이와 드한까지 낯빛이 창백해질 게 분명했지만 상관없었다. 테즈만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토끼 같은 동양인밖에 보이질 않았으니까. “수녀님이 정신을 잃으셨길래 의자에 눕히고는 밤새 성당 안을 치워놨는데.” 성당을 깨끗하게 치워놓은 것이 그였다니. 동요하듯 수아의 눈동자가 작게 진동했다. “이래도 내 잘못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뻐끔 벌어졌던 수아의 입술이 닫혔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테즈만이 오지 않았다면 수아는 그대로 성당에서 그 사내에게 범해졌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만 깜빡이던 수아가 물었다. “... 그 남자는 어떻게 됐나요? 설마 정말로 죽은 건… 수아의 물음에 그는 잠시 고민했다. 활활 태워서는 곱게 갈아 포도밭 거름으로 줬다고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을지. “안 죽었어요.” 당연히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꽤 위험한 범죄자여서 경찰들이 감옥으로 바로 집어넣는다고 하더군요.” 수아가 안도하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범죄자였다니. 감옥으로 바로 들어간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적어도 수아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다시 마주치지 않을 테니까. “... 제가 예민했어요. 많이 놀라서... 먼저, 구해주신 거 감사해요.” “별말씀을.” 시선을 들어 올려서는 슬쩍 테즈만을 보고는 수아가 입을 뗐다. “저기, 그런데….” “테즈만.” “네?” “테즈만이라고 불러요. 그게 조금 더,” 흥분되니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꾹 삼키며 그가 태연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친근해 보이잖아. 난 수녀님이랑 아주 많이, 친해지고 싶거든요.” 친해진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렸지만, 수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또한 위험한 남자임은 틀림없으니 더는 엮이지 않아야 했다. 조금 맞춰주다가 보낼 생각으로 수아가 대답했다. “아, 알겠어요. 테...즈만.” “그래서 수녀님.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하는 수아가 그저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그가 목소리를 냈다. “이름. 이름 말이에요.” “... 수아.” “수아?” “네. 수아예요. 한수아.”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수아의 이름을 되뇌었다. 낯설지 않았다. 입에 계속 감겼다. 끝없이 부를 수 있을 만큼. “수아, 예쁜 이름이네요, 수녀님.” 황금색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나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나,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면역이 없었다. 온몸이 바짝 긴장했고 뱃속은 간질거렸다. “자꾸 절 수녀님이라고 부르시는데 전 아직 정식 수녀가...” “그래, 수녀님.” 수아의 말을 딱 자르며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때 쓴 십자가의 값을 치른다고 했는데.” “괜찮아요. 다시 고치기도 했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럼.” 수아의 속마음을 읽은 양 테즈만이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등을 응시하던 수아는 이어지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물어보려던 게 또 하나 있었는데.” 슬쩍 고개를 돌리는 그의 입가가 위험하게 휘었다. “입술은 괜찮은 것 같네. 지난번에 내가 힘 조절을 못 한 거 같아서.” 그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는 수아의 얼굴을 보며 그가 속삭이듯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또 봐요.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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