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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화


3화 타원형으로 다듬어진 정원수들 가운데로 작은 분수가 있었다. 세심하게 조각해서 만든 분수는 예술작품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였으며 주위로 잘 가꿔진 꽃들은 누군가가 꽤 오래 공들여 가꾼 티가 났다. 그 뒤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대저택. 그 대저택 안에서 정원을 바라보던 금색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칵트.” 마치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던 충직한 개처럼 칵트가 입을 뗐다. “루마니아 쪽은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오늘 아침 부로 포도밭 거름이 되었겠군요.” 감히 제 주인의 신경을 건드렸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는 듯, 차분하게 내뱉는 칵트의 말에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거 말고.” 아래로 향해 있던 칵트의 시선이 천천히 정원을 보고 있는 그에게로 향했다. 제 주인의 심기를 살피려는 듯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칵트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성당은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정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가 몸을 돌렸다. 그가 어릴 때부터 지켜본 칵트였지만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위압감이 서린 눈빛과 마주할 때면 숨이 턱하고 막히는 듯했다. 테즈만 폰 파바드. 옛날에는 마피아로 이름이 자자했지만, 지금은 자선사업과 정치를 시작하면서 단 한 번에 명망 높은 집안으로 뒤바뀐 파바드 패밀리의 보스인 미켈레의 아들. “잘 자던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칵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녀님 말이야.” 수녀. 그러자 칵트는 지난 밤, 테즈만을 찾으러 간 성당에서 본 동양인 수녀를 떠올렸다. “동양인이던데.” 칵트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테즈만이 누군가를 그렇게 소중하게 안고 있는 모습은. 칵트가 왔음에도 그는 동양인 수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성당 청소가 끝날 때까지 품에서 수녀를 내려놓지 않았다. 성당 유리에 붙여진 스테인글라스를 통해 빛이 영롱하게 퍼질 때쯤 그는 수녀를 조심스럽게 의자에 눕혔다. 그것도 아쉽다는 듯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가 자리를 뜬 것은 빈첸시오 신부가 성당에 들어서기 한 시간 전이었다. 냉혹하고 잔인하면 잔인했지, 누군가에게 따스한 온정을 내비친 적 없던 제 주인의 다른 모습에 칵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데리고 올까요?” 주어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오랫동안 자신을 보필해온 눈치 빠른 칵트가 내뱉은 말의 뜻이 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겁에 질린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 맑은 눈동자에 온전히 자신만 담긴 게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자신도 눈치 못 챈 변태적인 성향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시금 그 수녀를 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그가 느긋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잘 놀라는 것 같아서.” 붉은 눈가 아래로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눈물을 핥은 것은 그저 충동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겁에 질린 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를 떠올리자 하복부에 피가 바짝 몰렸다.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부푼 페니스가 뻐근했다. 수많은 여자가 옷을 벗고 그를 유혹했어도 서지 않았던 페니스였다. 여자라면 역겹기까지 하던 그가 동양인 수녀에게 욕정하고 있었다. “피는 못 속이나 봐. 개처럼 발정하는 거 보니.” 그는 전형적인 코카소이드였다. 새하얀 피부. 짙은 갈색이라고 하기에는 오묘한 머리카락, 그리고 영롱한 금색의 눈동자는 호박 원석을 박아 넣은 것 같았다. 아버지인 미켈레를 빼닮은 탓에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피에도 흘렀다. 동양인의 피가. “그러니까.”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 테즈만이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을 지워냈다. “천천히 공을 들일 생각인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 치기에는 비현실적이었지만 칵트는 조용히 제 주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칵트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다시금 정원으로 향한 시선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모든 것의 우위에 있는 그였다. 가지려면 가질 수 있었고, 원한다면 다 그의 손에 들어왔다. 작은 호기심과 흥미. 이 정도면 이유는 충분했다. 매시간 불쑥 떠오르는 그 붉은 눈가를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면. 한편, 테즈만의 집무실에서 나온 칵트의 눈은 흥분감에 젖어 있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미켈레의 두 아들, 장남인 마테오와 테즈만은 서로 앙숙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유일하게 공통점이 있다면 여자를 질색한다는 점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인 미켈레의 문란한 사생활을 지켜봐서 그런 건지, 마테오는 지극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자와 몸을 섞었다. 그나마 마테오는 테즈만보다 나은 편이었다. 테즈만은 여자라면 아예 공기 취급을 해댔다. 테즈만이 어릴 때부터 그를 지켜보았던 칵트에게는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그래서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깨우치기를 누구보다 원했기에. 그런데 하필 상대가 수녀님이었다. 게다가 그의 생모와 같은 동양인. 들뜬 눈가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의 생모가 끝이 어떠했는지 잘 알기에 마음이 더 복잡했다. 유일하게 파바드 패밀리에서 신을 믿는 칵트였다. 칵트가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는 중얼댔다. “부디 신께서 굽어살피시기를.” *** 사람이 죽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음에도 입을 닫았다. 쥐어뜯듯 치마를 움켜쥔 수아가 고개를 떨궜다. 경찰에 알리려고 해도 증거가 없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하기에는 성당 안은 깨끗했고 없어진 것은 성수대를 장식한 십자가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악몽이라고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었으며 생생했다. 바짝 마른 입술에 본능적으로 혀를 내밀어 적시려던 수아는 그와 입을 맞춘 것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빼앗기는 듯한 키스였다. 입안을 샅샅이 훑는 그의 움직임의 머릿속에 그린 십자가마저 흐릿하게 번질 정도였다. 얼마나 저속하고 타락한 모습인지, 지금까지 수녀를 꿈꿔왔다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하...” 악몽이라고 믿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아직도 그의 입술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끝없는 죄의식이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에 무의식적으로 수아가 손을 뻗었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잡을 게 필요했다. 휴대폰을 켠 그녀는 연락처 목록을 살폈다. 수아의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고작 3개였다. 하나는 빈첸시오 신부의 번호였고 하나는 그녀가 있었던 보육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네스 수녀의 번호였다. 액정 위에서 망설이던 엄지가 이윽고 꾹, 하며 아네스 수녀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괜히 숨이 막혔다. - ... 수아?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네스 수녀의 목소리에 감정이 울컥했다. “수녀님...” - 그래, 수아야. 목소리가 왜 그러니. 무슨 일 있니?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죄악감이 턱까지 차올랐다. “제가 수녀님께 고백할 것이 있어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심각성을 인지한 아네스 수녀가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 그래, 수아야. 괜찮단다. 괜찮아. 천천히 말해보렴. 차마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수아를 아네스 수녀는 조용히 다독일 뿐이었다. 끊어질 듯 가녀린 심호흡을 몇 번 하는가 싶더니 수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아는 지난 밤 보았던, 당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아네스 수녀는 말없이 묵묵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수아가 이토록 떨면서 하려는 말이 뭔지 짐작이라도 한 듯 태연했다. “빈첸시오 신부님께... 말을 하지 못했어요. 분명 제 앞에서 사람이 죽고... 제가 더러워졌다는 것을요.” 입 밖으로 죄를 내뱉자마자 몸이 떨렸다. 두려움과 죄책감이 동시에 몸을 잠식했다. “수, 수녀님... 저는 정말...!” - 수아야. 차분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횡설수설하던 수아의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 수아야, 네 잘못이 아니란다. 어쩌면 이 말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어쩌면 악몽을 꾼 것일 수도 있단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 게 말이 될 수가 있니? 새벽녘에 시체를 치우고 성당을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악몽을 꿨을 수도 있다. 우연히 성수대의 십자가 장식이 없어진 것일 수도 있었고. 몇 주 뒤에 누군가 찾아와 불쑥 성수대의 십자가 장식을 내밀 수도 있었다. 떨어진 것을 주웠다며. 하지만 수아에게는 확실히 남아 있었다. 입술 위로 포개지던 뭉클한 것의 느낌이. “... 악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해요.” 확인하기라도 하듯 묻는 수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했다. - 정말로 악몽일 수도 있단다. 정말 생생한 꿈을 꿀 수도 있고 말이야.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걸? 그래, 악몽. 차라리 악몽인 게 좋았다. 아네스 수녀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래서 수녀가 되기를 바랐다. 다른 꿈을 찾을 생각도 없이. 그래서 더 간절했다. 그저 꿈이기를. - 수아야. 너무 걱정하지 말렴. 혹여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말했던 것처럼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알겠지? “... 네. 수녀님.” -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렴. 그리고 수아야. 아네스 수녀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네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으면 해. 꼭 수녀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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