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화
2화
남자의 머리에 박힌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셨다. 신성한 성당에 피라니. 자신은 까무룩 정신을 잃어도 모자랄 판인데 앞에 선 남자는 태연하게 시선을 맞춘 채 이름이 뭐냐고 물을 뿐이었다.
“히끅.”
다시금 수아의 입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오자 남자의 미간에 엷게 금이 갔다.
“말을 못 하나.”
아까 이탈리아어를 하는 걸 들었으니 말을 못 하진 않을 테고 역시 딸꾹질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가 손을 들어 가죽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의 손에서 떨어져나온 검은색 가죽 장갑이 바닥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감춰져 있던 손은 남자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깨끗하고 예뻤다. 그렇다고 여자 손이라고 하기에는 크기나 두께가 남달랐다. 그 예쁜 손으로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자 몸이 작게 떨렸다.
가만히 수아를 응시하던 그가 손을 뻗었다. 힘을 주면 으스러질 것 같은 목덜미를 지나 가볍게 그녀의 턱을 잡고는 제게 고정했다. 겁에 질린 건지 눈물이 고인 붉은 눈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뗐다.
“테즈만. 내 이름이야.”
그다음 그의 행동은 충동적이었다. 엷게 떨리는 입술이 추워 보여서 데워주고 싶었다. 물고 빨고 핥고 그렇게 해서 따뜻하게 데워진다면 저 가녀린 입술이 그만 떨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마친 그가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슬쩍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벌린 다음 혀를 밀어 넣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그가 무차별하게 혀를 놀렸다. 거칠게 입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었다. 수아가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는 그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벽처럼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으읍...”
감히 신 앞에서 이 무슨 배덕한 모습이란 말인가. 사람이 죽고 피를 보인 것도 모자라서 평생 신을 섬기겠다던 그녀는 입술을 빼앗기며 헐떡이고 있었다.
정작 그는 태연한 얼굴로 눈을 뜬 채, 수아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눈가 아래로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던 그가 물고 있던 수아의 입술을 놓고는 혀를 내밀었다. 미미한 바다의 맛이 그의 혀끝에 닿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녀님.”
가느다란 숨을 힘겹게 내쉬는 수아의 얼굴은 정신을 잃기 전의 표정과 일치했다. 이윽고 천천히 감기는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며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자.”
***
꿈에서 누군가 등을 토닥인 것 같았다. 그 손길이 마치 그녀가 어릴 적 잠들 때마다 등을 토닥이던 아네스 수녀의 손인 것 같아서 수아는 속절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수-아.”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더 깊게 잠들고 싶었다.
“수-아. 일어나 보세요.”
수-아. 이렇게 부르는 건 단 한 사람이었다. 빈첸시오 신부. 지금 그녀가 있는 성당을 맡은 가장 늙은 신부였다. 착하지만 고지식한 신부는 수아가 아직 종신 서원식을 하지 않은 정식 수녀가 아니었기에 수-아라고 칭했다.
“수-아?”
빈첸시오 신부가 다시 한번 수아를 부르자 그녀의 눈이 번적 뜨였다.
“아...!”
놀란 얼굴로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는 그녀를 보며 빈첸시오 신부가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열이 나는 걸 보니 몸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방에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그러고 보니 얼굴에 열감이 느껴졌다. 몸속 깊은 곳까지 한기가 느껴지고 으슬으슬했다.
“죄송합니다, 신부님. 제가 깜빡하고 잠이 들어...”
수아의 눈동자에 중앙 제대 위로 보이는 십자가가 비쳤다. 십자가를 보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었다. 관자놀이에 십자가가 박힌 채. 그리고 살인을 한 남자는 그녀에게.
“우웁.”
토기가 느껴지는 듯 수아가 헛구역질하자 빈첸시오 신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수- 아. 괜찮은 겁니까? 지금 당장 병원에 가겠습니까?”
“괜, 괜찮습니다….”
입을 틀어막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빈첸시오 신부가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군요. 요한 신부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신, 부님... 그게...”
성당에서 누군가 죽었다고 말을 해야 했는데 수아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깨끗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당 바닥을 적신 피도, 시체도, 그리고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던 남자도. 아무것도 없었다. 멍하니 굳어진 채, 성당 안을 훑던 수아가 입을 뗐다.
“... 빈첸시오 신부님.”
“네, 수-아. 괜찮은 건가요? 많이 아픈….”
“무슨 일 없었나요? 혹시 오셨더니 성당 안이….”
이미 경찰이 왔다 간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듯 말을 쏟아내는 수아를 향해 빈첸시오 신부는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성당에 들어오자마자 깨끗하게 청소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얼마나 닦았는지 바닥이 별처럼 반짝이더군요.”
깨끗하다고?
“그러던 중 수-아가 잠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밤새 청소하고 여기서 깜빡 잠든 것 같은데, 아픈 걸 보니 걱정이군요. 어서 병원을 다녀오도록 하세요.”
수아는 혼란스러웠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지막에 자신을 내려보던 그의 얼굴까지도.
갑작스럽게 떠오른 그의 얼굴을 지우려는 듯 수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옷차림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성당 안도 깨끗했다. 지난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은 끔찍한 꿈일 뿐이다.
그래, 꿈.
“전 괜찮습니다, 신부님. 잠깐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래요. 성당 일은 내게 맡기고 쉬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수아가 빈첸시오 신부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몸이 아파서인지 아니면 꿈 때문인지 오한이 자꾸만 들었다. 방에 올라가서 약을 먹고 한숨 푹 잘 생각이었다. 그런다면 그녀의 정신을 잠식한 혼란하고 불안한 감정들도 잠재워지리라 생각했다.
천천히 성당 밖으로 발을 내딛던 그녀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철제를 조각해 만든 성수대였다. 수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성수대 옆을 장식한 십자가들 사이로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딱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떼어낸 것처럼.
온몸의 모든 감각이 깨어난 듯 그녀의 살결 위로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녀의 등 뒤로 빈첸시오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성수대 십자가 조각 하나가 떨어져 없어졌더군요.”
멀쩡하던 손바닥만 한 십자가 장식이 갑자기 없어질 리가 없었다. 수아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성당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빈첸시오 신부가 눈가를 부드럽게 휘어 보였다.
“요한 신부가 수리를 요청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제야 생생해졌다. 꿈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도, 오늘따라 부푼 듯한 그녀의 입술이 홧홧한 것도. 수아의 시선이 천천히 중앙 제대 위로 보이는 십자가로 향했다. 배덕함이 섞인 죄의식이 가슴을 짓눌렀다.
“... 네.”
수아가 도망치듯 성당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향하면서도 그녀는 부인하듯 중얼거렸다.
“아니야... 우연이야. 성수대 십자가 장식은...”
당장 되돌아가서 빈첸시오 신부님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지난밤, 갑작스럽게 성당을 들이닥친 사내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하려다가 성수대 장식인 십자가에 머리를 찍혀 죽었다고. 그리고 사내를 죽인 남자에게 입술을 내어줬다고.
남자에게 입술을 내어준 것만으로도 그녀의 정결은 쩍쩍 금이 갔다. 청빈, 정결, 순명. 제 모든 것을 신께 바치리라고 그녀가 수백 번이고 다짐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수아의 두 다리가 우뚝 멈추어 섰다.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빈첸시오 신부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다가는 더는 수녀의 길을 걷지 못할 수도 있었다. 오직 수녀만 꿈꿔온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대로 자신만 조용히 입을 다물면 될 것이었다.
꿈, 꿈이었다. 빈센치오 신부님 말대로 청소하다가 피곤해서 잠깐 잠들었는데, 악몽을 꾸고 깬 것뿐이었다.
저절로 손이 모였다. 간절하게 두 손을 깍지를 낀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부디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절규 같은 그녀의 기도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