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화
1화
음습한 공기가 폐부에 달라붙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수아가 수녀복의 옷깃을 여몄다.
이질적인 풍경들이었다. 아스팔트도 아닌 벽돌로 빈틈없이 메꾼 길과 돌을 깎아 만든, 한눈에 봐도 연식이 있어 보이는 집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집들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성당은 수아가 머무는 곳이었다.
“수아야.”
수아는 한없이 다정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던 아네스 수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봇대 아래에 버려져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왔을 때부터 그녀를 키워주다시피 한 수녀였다.
보육원 아이들이 하나둘 자신만의 꿈이 생기기 시작할 때도 수아는 고집스럽게 수녀님만 생각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를 친엄마처럼 돌봐주던 아네스 수녀 때문이었다. 아플 때도, 기쁠 때도 언제나 그녀 옆에 있어 주던 수녀님. 자연스럽게 수아에게 아네스 수녀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언젠가 자신도 커서는 아네스 수녀님 같은 수녀가 되고 싶다며.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수녀가 되는 것이 운명이고 순리인 것처럼 수아는 자연스럽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도원에 들어갔다. 청원기와 수련기를 거치고 유기 서원기의 끝자락에 있을 때쯤, 당연하게 종신 서원식을 신청하려는 그녀를 막아 세운 것은 아네스 수녀였다.
“종신 서원식을 하기 전에 봉사활동 겸 다녀오는 건 어떻겠니? 나는 네가 더 많은 걸 느끼고 돌아와서 선택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아네스 수녀는 수아에게 쌈짓돈과 함께 주소를 내밀었다. 자신이 종신 서원식을 끝낸 후 잠시 있던 곳이라고 했다. 수아가 마다할 리가 없었다. 아네스 수녀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했으니 더욱 그랬다. 어차피 수녀가 될 몸이었으니 종신 서원식을 뒤로 미룬다 한들 수아에게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네스 수녀님의 말대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 바로 종신 서원식을 하고 정식 수녀가 되면 그만이었다.
“...봉사활동 장소가 이탈리아의 작은 성당일 줄은 몰랐지만.”
벌써 수아가 이곳에 온 지도 3개월이 넘었다. 1년을 있기로 했으니 앞으로 9개월을 더 있어야 했다. 다행히도 이탈리아어는 그녀가 어릴 때, 아네스 수녀의 제안으로 배워놔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 낯선 곳에서 홀로 이방인이라는 고독함이 몰려올 때면 우울감에 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같이 비가 오고 날씨가 우울한 날엔 더욱 그랬다.
수아가 발길을 돌려 성당 안으로 향했다. 봄이 왔음에도 며칠 내내 비가 온 탓인지 텅 빈 성당 안은 눅눅한 냉기가 흘렀다. 성당 내부를 차분하게 훑은 그녀가 발걸음을 움직였다.
눈썹까지 새하얀 늙은 신부님 한 명과 그를 보좌하는 또 다른 신부 한 명. 신부가 고작 두 명뿐인 작은 성당엔 수아가 할 일은 많았다. 매일 저녁 9시, 성당 문을 잠그는 일도 성당에 온 뒤로는 그녀의 몫이었다.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성당 문을 잠그는 일은 수아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낡았음에도 고풍스러운 중앙 제대 위의 십자가를 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할 수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가장 앞쪽 의자에 앉아서는 가지런히 손을 모은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형용할 수 없는 엄숙함이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깊은 물 속에 혼자 가라앉은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수아가 기도에 집중하려던 때였다.
끼이익.
낡고 둔탁한 성당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3개월 동안 이 시간에 성당 문을 연 사람은 없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성당이 문을 닫을….”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이탈리어가 툭, 끊겼다.
“빌어먹을. 그 유명한 파바드 가의 뱀이 직접 올 줄이야.”
껄렁한 자세로 욕설을 내뱉는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깊게 눌러 쓴 베레모 때문인 것 같았다.
“설마 여기까지 오지는 않겠지.”
이탈리아어로 중얼거리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베레모 아래로 보이는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가 거뭇했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수아가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그러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남자가 길쭉한 타원형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탁. 허공에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남자의 손에 들린 물건에서 날카롭고 뾰족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영화에서 보던 맥가이버 칼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남자가 손에서 맥가이버 칼을 휙, 휙 돌렸다.
“수녀가 동양인 계집이라니. 뭐, 상관없어. 날 본 이상 죽어줘야겠어.”
충격에 이성을 잃어버렸던 뇌가 경고등을 켰다. 어서 빨리 도망가라고. 수아가 몸을 돌렸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그녀의 발걸음을 채찍질했다.
“아윽.”
얼마 못 가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남자의 억척스러운 손이 머리를 감싼 새하얀 수녀 베일을 움켜잡았다.
“어딜 도망가!”
수아가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께름칙하게 히죽거렸다.
“이거…. 자세히 보니 바로 죽이긴 아깝네?”
내팽개치면서 말려 올라간 수녀복 아래로 그녀의 새하얀 두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음침한 눈으로 수아의 다리를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죽기 전에 나랑 놀아볼래?”
“듣기로는 동양인은 구멍도 작다면서? 창년들처럼 늘어나서 벌렁대는 구멍도 아니고 얼마나 쫄깃하겠어.”
발가벗기듯 몸을 훑던 남자의 시선이 이윽고 수아의 얼굴에 닿았다.
“수녀가 화장도 하나? 이거 말만 수녀지, 뒤에서는 신부들한테 다리 벌리는 거 아니야?”
수아가 어릴 때부터 자주 듣던 오해 중 하나였다. 유독 하얀 얼굴에 붉은 눈매와 새빨간 입술 덕에 화장을 한 거 아니냐는. 이런 얼굴로 태어나서 오해를 받은 것에 대한 원망은 어릴 때, 일찌감치 끝냈었다. 그런데 이 오해가 단지 자신을 향한 모욕이 아니라 신부님까지 모욕당하게 할 줄이야. 수아는 다시금 제 얼굴을 원망했다.
남자가 허겁지겁 바지를 내렸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수아를 향해 다가갔다. 덩달아 내려간 드로즈 위로 썩은 고구마같이 생긴 남자의 성기가 드러났다. 흥분을 한 남자의 성기 윗부분이 액으로 번들번들하기까지 했다.
“우선 빨아봐.”
“싫, 싫어...”
그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발을 휘젓던 때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머리가 순식간에 그녀의 두 눈에서 치워졌다.
“커어억...”
마치 신께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도와주신 것처럼 경련하듯 몸을 떠는 남자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십자가가 박혀있었다.
고통스러움에 몸을 비트는 남자를 보자니 살갗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신께서 죄지은 자를 벌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방법이었다. 때마침 남자의 관자놀이에 박혀있는 십자가 위로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올려졌다.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한눈에 티가 났다. 길고 잘빠진, 남성적인 손이.
“수녀님께서 더러운 걸 봤네.”
바닥까지 내려앉은 저음에 덜덜 떨던 그녀가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콰직!
한순간이었다.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남자의 머리를 잡더니 그대로 십자가가 박힌 쪽을 바닥으로 내리쳤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경련하던 남자의 몸이 단번에 축 늘어졌다.
“급해서 십자가 좀 썼는데.”
십자가가 어딘가 익숙하다 했다. 남자의 머리에 박힌, 철로 만든 십자가는 성당 문 앞쪽에 놓인 성수대 장식이었다.
“사용한 값은 제대로 쳐 드릴게요, 수녀님.”
그제야 수아는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을 제대로 확인했다.
온통 검었다. 검은색 슈트를 입은 그는 셔츠 또한 검은색이었다. 원래는 갈색일 듯한 머리카락도 젖어서 그런지 검게 보였다. 검은색 투성이인 것 중에서 하나만 유독 밝았다. 그의 새하얀 얼굴과 함께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였다. 금색의 눈동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호랑이와 비슷했다.
“많이 놀랐나 봐.”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벌여놓고는 걱정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그를 보며 수아는 떠올렸다. 성경에서 선악과를 내밀던 뱀이 살아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고. 차갑고 잔인하면서도 유혹적이고 교활한. 느른하게 올라가는 그의 입술 끝을 보자니 더욱 그랬다.
“전, 전... 괜찮으니….”
구해줬다고 한들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경찰을 부르고 어서 가달라는 말을 하려던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그, 그러니까….”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며 말을 더듬는 수아를 관망하던 그가 입을 뗐다.
“잘 우네. 예쁘게.”
이토록 애처로운 수녀님이라니. 왜 쓰레기 같은 새끼가 다급한 순간에 욕정 했는지 알만했다.
“주제도 모르는 새끼가.”
동양인의 피부가 이토록 새하얄 수가 있을까. 붉어진 눈가가 마치 토끼 같았다. 게다가 뭘 바른 것 같지도 않은 붉은색 입술은 그의 시선을 잡아 이끌었다. 청빈한 수녀님치고는 그녀의 얼굴은 제 욕정도 들끓게 했다.
“우리 수녀님을 놀라게 해드렸나 봐.”
우리 수녀님이라니. 멈칫하며 수아가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히끅,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우리 수녀님은,”
“히끅.”
“이름이 뭐예요.”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