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222화
40. 권력과 폭력
발덴펠스 장군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 못했다.
애초부터 자신이 안넬리제의 유품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남몰래 수도에 들어왔다. 그런데 신분이 모조리 공개되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입찰할 수 있을 리 없다.
슈바벤이 자신에게 의혹을 품을까 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제국의 해군 사령관이고, 남해 주둔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아무리 슈바벤이라고 해도 그를 바로 숙청할 수는 없다.
그가 비밀을 지키려던 첫 번째 이유는 안넬리제의 가족이 자신을 싫어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녀가 일가 안에서 푸대접받는 존재가 된 것을 보게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문인 글란츠탈 백작가는 선황후가 암살된 뒤에 슈바벤에 격심하게 반발하다가 몰락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가주였을 때 모든 분노는 슈바벤에게 집중되었으나 친척이 가문을 물려받은 지금은 몰락의 시발점이 된 안넬리제를 좋게 여길 리 없다. 유품이 자선 바자회에 나온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러니 조용히 와서 조용히 입찰하여, 조용히 몇 가지 유품을 가지고 돌아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모두 입찰조차 해 보지 못하고 실패했다. 게다가 원치 않았던 정쟁의 회오리에 휘말릴 판이다.
“지원해 주지 못할 거면 내버려두어 주기라도 했으면 하는데 말이지요.”
호위대장으로 따라온 볼프강이 투덜거렸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그런 게 아닙니다, 각하. 제 이야기는 저희 남해군 이야깁니다. 아니, 해적을 잡아라, 항로를 지켜라, 군항도 유지하고 배도 만들어라 하면서, 정작 유지비는 쥐꼬리만큼밖에 안 주지 않습니까? 여기 온 김에 오랜만에 수도 방위군에 있는 친구를 만났는데, 세상에 올해도 대포를 신형으로 갈아치웠답니다. 2년 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무기 사업만큼 중간에서 해 먹기 쉬운 것도 없다. 발덴펠스 장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혼자 오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오가는 길에 도적이라도 만나면 그 연세에 어쩌실 거냐는 말에 할 말이 없어 호위를 데려오긴 했으나 마음이 불편했다.
“수도 방위군이 제일 중요한 건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라는 누가 지키는데 싶습니다. 하긴, 예산 쥔 분들이 지키고 싶은 게 여기 있긴 하겠습니다만.”
“공연한 소리 말게, 볼프강. 여긴 수도야. 당연히 제일 중요한 지역이지.”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중요한 것은 군의 창날이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가 하는 것이지, 지역 자체가 아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볼프강이 물었다.
“손님이신가?”
“예, 볼프강 경. 루트가르트 백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볼프강은 얼른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백작을 마중하러 갔다. 루트가르트 백작 같은 고위 귀족이 시시한 용건으로 방문할 리 없다. 하물며 그는 지금 1황녀파의 거두로서 근위대장이기까지 했다.
문이 열리자 테오도르 루트가르트가 살짝 그에게 묵례했다. 볼프강도 제법 덩치가 크고 몸에 자신 있었지만, 한순간 위압되고 말았다.
“아, 어서 오십시오, 루트가르트 백작님. 마리스펠트 군항 주둔군 소속의 볼프강 콘라트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콘라트 경.”
테오도르는 그렇게 말했지만, 악수를 청하는 대신 몸을 살짝 돌렸다. 볼프강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테오도르가 내준 빈틈으로 큼직한 꾸러미를 든 종자 하나가 쏙 하고 앞질러 들어왔다.
심부름꾼으로서는 너무 예의 없는 짓이다. 볼프강이 반사적으로 사환을 가로막으려는데, 막 인사를 하려고 일어섰던 발덴펠스 장군이 그를 말렸다.
“그만두게, 볼프강. 그쪽 숙녀분이 오늘의 진짜 손님이실 테니.”
사환이 머리에 쓰고 있던 동그란 모자를 벗었다. 모자 속에 숨겨져 있던 길고 검은 머리가 출렁하고 쏟아져 내렸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스카프를 내리자 조그맣고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베이지색 튜닉에 거칠고 짧은 갈색 망토마저도 근사하게 만드는 여자의 모습에 볼프강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테오도르가 마치 그녀의 몸 주위에 성벽을 세우듯 제 몸으로 가렸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제법 괜찮은 변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알아봤군.”
“전하께서 루트가르트 백작을 매우 신뢰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남을 설득하는 일을 맡기실 것 같진 않습니다.”
전하라는 호칭을 듣고 나서야 볼프강은 그녀가 올리비아 황녀임을 깨닫고는 황급히 부복했다.
발덴펠스 장군도 천천히 무릎을 구부려 인사를 올렸다. 올리비아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인사는 됐네. 그보다, 선물을 먼저 보지.”
“…….”
발덴펠스 장군은 그녀가 내려놓은 꾸러미를 보기만 하고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대신 꾸러미의 매듭을 풀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나무로 만든 오래된 편지함이었다. 좋은 목재로 만들었고 조각도 훌륭한 것이지만, 귀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는 물건이다. 발덴펠스 장군이 볼프강에게 말했다.
“자네는 잠깐 나가 있게.”
“하지만 각하.”
“명령일세.”
볼프강은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자 발덴펠스 장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아가 가져온 편지함은 확실히 자신이 손에 넣으려던 안넬리제의 유품이 맞았다.
그녀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나 때문에 입찰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아 대신 시녀에게 낙찰받게 했지. 이걸 사러 왔던 게 맞겠지?”
“…전에 미처 묻지 못했습니다만, 누가 전하께 그런 이야기를 알려드렸습니까?”
“내 양할머니, 뮌하우젠 자작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나.”
“제가 레이디 안넬리제와 한때 편지를 주고받았던 건 사실입니다만, 한때 비슷한 취미를 공유했던 것뿐입니다.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렇게 깊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글란츠탈 백작은 후회했다고 하더군.”
그 말에 발덴펠스 장군은 감정적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죽은 시녀들의 유족끼리 교류가 상당히 있었다고 하더군. 아예 모든 연락을 끊고 은둔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서 서로 위로했었다고 해. 그때 들으셨다더군.”
“저는 딱히….”
“글란츠탈 백작은 장군에게 연락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더군. 장군을 모욕한 적이 있고, 이미 그 시점에서 글란츠탈 백작가와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장군이 상부의 눈 밖에 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네.”
“그건….”
발덴펠스 장군은 길고 싶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란츠탈 백작의 모욕을 그는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자신 같아도 누이가 가난한 데다가 보잘것없는 기사와 친하게 지낸다면 떼어 놓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는 나이도 많았다.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말해도 누가 믿겠는가. 아니, 하다못해 구혼자이기라도 하면 낫지, 구혼자도 아닌 주제에 긴 편지 따위를 몇 년이나 주고받고 있으니 글란츠탈 백작 입장에서는 누이의 혼삿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그렇기에 그가 찾아왔을 때 순순히 사과하고 더 이상은 그녀에게 답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안넬리제의 앞길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올리비아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건 이것까지만 하겠네. 내가 글란츠탈 백작과 아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뮌하우젠 자작 부인이 들었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
“그리고 딱히 그걸 빌미 삼아 장군을 포섭하려는 것도 아니야. 이걸 가져온 건 내가 장군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으니 그 사과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군.”
발덴펠스 장군이 깍지를 낀 채 진지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 안에서 회색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안넬리제에 대한 추억은 그에게는 아무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곳 혼자만의 보물 상자였다. 이제 와 생각건대, 생애 단 한 번이라도 그처럼 깊은 공감과 온후한 정을 품을 상대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해도 좋았으리라.
하지만 그건 발덴펠스 개인의 추억일 뿐이다. 해군 사령관이자 남해의 지배자로서 그는 그런 추억을 건드려 자신을 자극하려는 시도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는 제국의 영광된 군인이었으나 황실에 충성하느냐 하면, 그건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