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221화
그 순간 시야가 확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그런 것 같다. 테오도르는 확신하지 못한 채 눈을 깜박거렸다. 진짜로 빛 때문에 시각이 점멸한 거라면 잔상이 눈 안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감각이 전혀 없었다.
기묘하게 생경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황녀궁 전체가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고요한 느낌이 든다. 영혼의 어딘가가 베인 듯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무심히 손안에 쥐고 있던 보석함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좁혔다. 안감에 묻었던 핏자국이 없다.
“…….”
자신이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분명히 묻었는데. 그 순간 얼룩을 지울 수 있을지 걱정까지 했는데 말이다.
침에 찔린 손끝은 여전히 따끔거렸고 지문을 따라 붉은 액체가 조금 번져 있었다.
“쯧.”
자신의 부주의함에 혀를 차며 그는 보석함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닦았다. 따로 지혈할 만큼 큰 상처도 아니라 피는 이미 멎었다.
그는 손을 씻은 다음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서랍장 쪽으로 가서 외상용 연고를 꺼내 조금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유난스러운 처치 같지만, 염증이라도 생기면 검을 쥐는 데 지장이 생기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까지 화농이 생기지 않는다면 별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석함 쪽으로 돌아와 그것을 한 번 더 살폈다. 역시 핏자국은 흔적도 없었고, 버튼도 전부 가지런히 올라와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버튼도 몇 개 눌려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착각이었던가? 엄중한 실험이라고 생각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며 만지던 게 아니라서 자신이 없었다.
피가 묻었다는 것도, 버튼이 눌려 있었다는 것도 자신의 착각이리라. 그게 합리적이다. 테오도르는 신비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보석함을 맨손으로 다시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는 장갑을 다시 끼고 옷장 서랍에서 크라바트를 가져와 그것으로 보석함을 감싸 포장이라도 하듯이 둘둘 말았다.
그리고 커프스나 브로치 같은 것을 보관하는 열쇠 달린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넣고 잠갔다. 내일 당장 공구를 가져다가 손수 자물쇠를 하나 더 설치하기로 했다. 남에게 시키면 여기에 뭔가 귀한 것을 넣어두었다는 신호가 될지도 모르니까.
올리비아는 그에게 이것을 가지고 있으라고만 했으니, 그녀가 필요로 할 때까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보관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돌덩이처럼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가슴 밑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
슈바벤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에제키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안색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고, 틀어쥔 주먹 안에서 손톱에 긁힌 손바닥에 핏방울이 맺혔다.
강제로라도 왕관의 경매를 막았어야 했나? 호헨슈타인 후작가에 그 자리에서 압력을 가했어야 했나? 아니면, 역시 자신이 낙찰받았어야 했나?
하지만 호헨슈타인 후작 대부인이 처음 입찰 패드를 들면서 1억을 부르는 순간, 그래 봤자 소용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경쟁자가 되어도 끝까지 왕관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파가 헛된 욕심이 남아서.’
후작 대부인이 젊었을 때 황실의 위상은 드높았다. 그녀와 동세대인 에제키엘의 조부는 실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조심스럽게 선선대 황제의 비위를 맞추었어야 했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왕관을 탐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거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권력자는 우스워 보여서는 안 된다. 그가 낙찰받는 순간 다른 자들이 모두 빠져 주는 그림이 되어야 비로소 왕관의 함의를 비웃을 수 있다. 호헨슈타인과 기를 쓰고 경쟁하는 상황이 되면 슈바벤이 호헨슈타인과 동급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진짜 레갈리아가 되지도 못한 어린이용 왕관 따위에 집착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으드득.
에제키엘은 이를 갈았다. 올리비아가 자선 바자회를 할 테니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러 왔을 때는 이것을 아주 사소한 문제로 여겼다. 자신을 만나려는 핑계라고 생각해서 귀엽다고까지 생각했고.
황궁의 가장 커다란 홀에 그녀가 만들어 낸 정치적 구도를 그가 어떻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평화롭게 압박하여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올리비아는 스스로 증명해 냈다.
“에제키엘.”
함께 타고 있는 로엘라가 불렀지만, 그는 그 부름을 무시했다. 지금 그녀를 달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침내 저택 앞에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휙 뛰어내리면서 에제키엘은 명령했다.
“헬무트와 만프레드 경을 불러. 아주 중요한 용건이라고 해.”
마차를 열어준 집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지만, 에제키엘이 명령하는 데 거역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에스코트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의 손을 잡고 내린 로엘라가 다시 그를 불렀다.
“에제키엘.”
“돌아가서 자. 많이 늦었다.”
에제키엘은 냉담하게 말하고 일단 얼굴과 손발을 씻기 위해 자기 침실 쪽으로 향했다. 헬무트와 만프레드 경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전에 씻고 컨디션도 좀 회복해 둬야 한다.
로엘라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에제키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상처받을 것 없어. 너나 나나, 저 왕관과 다를 게 무엇이겠니?”
올리비아의 말이 마치 가슴을 찌른 것 같았다. 로엘라는 그걸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게 왜 문제란 말인가? 그 루비 왕관이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갈망하던 것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그녀 자신이 슈바벤이 갈망하던 왕관이라면 그보다 기쁠 일은 없다.
그런데도 분하고, 억울하고, 서운했다. 그녀나 올리비아나 똑같이 왕관이라면, 에제키엘은 올리비아를 택할 것이다.
그가 그러지 못한 것은 올리비아가 자신과 다르게 왕관이 아니라 왕관을 쓴 황녀이기 때문이다. 로엘라는 정확한 문장으로 제 깨달음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에제키엘이 돌아봐 주기를 바랐다. 그가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제게 보냈던 차가운 시선도, 정부들도, 올리비아도, 자신을 저택의 별관에 처박은 것도, 오랫동안 깨닫지도 못한 채 마음속에 쌓아온 응어리들도.
자신이 무리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로엘라 자신의 정당한 몫이었을 터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으니, 그도 제게 사랑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에제키엘, 에제키엘.”
숨이 막혔다. 그를 뒤따라 가면서 이름을 부른다. 에제키엘이 짜증스럽게 여기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 번 눈이 뜨이자 모든 게 너무 잘 보여서 고통스러웠다.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은 사랑하는 이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로엘라는 에제키엘의 거실 앞까지 따라갔다. 특별히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그 루비 왕관을 갖고 싶어 했었는데, 혹시 잊어버렸느냐고. 부황은 어째서 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이냐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그래도 견딜 만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를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왜 자신은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걸까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혔다.
에제키엘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냉담하게 대꾸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에제키엘, 내가….”
“지금은 널 상대해 줄 시간이 없어. 올리비아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고.”
그렇게 내뱉은 에제키엘이 문득 로엘라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느른한 시선으로 훑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로엘라는 금세 깨닫고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비록 그녀와 올리비아는 이복이었지만 자매는 자매였다. 얼핏 봐서는 잘 모르지만, 닮은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온몸에서 열과 동시에 두려움이 치받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에제키엘의 손길을 거부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기대한 적은 결코 없었다.
로엘라는 뒷걸음질 쳤다. 에제키엘이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한기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넌 항상 나를 원하잖아. 잠깐 정도라면 상대해 줄 수 있어.”
“…….”
속삭임과 함께 그의 손가락이 로엘라의 목깃에 얹혔다. 그녀는 두어 걸음을 더 물러나 에제키엘의 손에서 피하고는, 이내 뒤돌아서서 뛰듯이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