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194화
“하아, 하아…. 흐윽, 으흐흑.”
발광하던 로엘라는 마침내 지쳐서 주저앉았다가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쥐어뜯기고 얻어맞아 엉망이 된 시녀들은 그녀를 위로하러 다가서지 못했다.
측근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각자 자신의 주인을 모시고 나갔다. 마르타도 그제야 로엘라에게 다가갔다.
“흐으윽, 어흑.”
로엘라가 울면서 팔을 벌렸다. 마르타는 그녀를 안아 주며 속삭였다.
“불쌍한 황녀님.”
가감 없는 진심이었음에도, 마음이 무겁다.
마르타가 두 번째 명령을 받은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은밀히 그녀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2황녀가 외부 활동을 포기하지 않도록 잘 이끄십시오. 자선 활동이든, 정치적 활동이든, 사교계 활동이든 상관없습니다. 부인은 이미 2황녀에게 어머니의 시녀 같은 위치를 차지했으니 어렵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머니의 시녀라고 돌려 표현했으나 사실상 그게 유모 같은 존재라는 의미임을 마르타는 잘 알아들었다. 그리고 진짜로 로엘라가 그 정도로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죄책감이 들었다. 로엘라의 신뢰와 총애를 받게 된 것은 진심으로 그녀를 연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마치 일부러 마음의 틈을 파고들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 해야 할 말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그 편지가 아니었어도 그녀는 로엘라에게 황녀로서 활동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대로 두면 한 번도 피어 보지 못할 삶이 너무 안타까워서.
하지만 그 편지를 받은 후이니, 이제 모든 말이 계교가 되고 만다.
“기운을 내세요. 거처를 옮긴다고 해서 황녀님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걸요.”
“에제키엘은 내게 아무런 기대도 없어서 그런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로엘라가 호소했다. 마르타는 마음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전부터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슈바벤 공작님과는 상관없어요. 황녀님은 공작님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나, 나는….”
“어머님이 왜 황녀님을 낳으셨든, 선대 공작님이 무슨 계획을 갖고 계셨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황녀님의 권리는 황녀님의 것이에요. 공작님과 결혼하더라도, 황녀님의 자리는 찾으셔야죠.”
로엘라의 눈이 흔들렸다. 마르타는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말했다.
“공작님을 사랑하신다면 더욱 그래요. 오로지 사랑에만 매달리는 여자는 우스워져요. 공작님 같은 분에게는 더욱 그래요. 그분은 절대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열정을 불태우는 남자가 아니에요.”
“으, 응….”
로엘라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에제키엘은 사냥꾼이고, 사람을 우습게 보았으며, 여자는 더욱 그랬다. 그리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여자는 그것만으로도 우스웠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자신도 어머니가 어리석고 하잘것없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나마 조소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 자리를 찾으세요. 공작님에게 황녀님이 황위 계승권 때문에 쓸모 있는 거라면, 진짜 황녀가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지 알려 주세요. 연인이 아니라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세요.”
“하, 하지만 나는, 올리비아에게는, 도저히… 못 이겨. 걔한테, 걔한테는 못 이긴다고.”
그녀가 울먹거렸다. 분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올리비아와 마주 서서 그녀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모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오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는 걸 알았다.
“이기실 필요 없어요. 전 이기라고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마르타가 다정하게 로엘라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1황녀와 싸우지 마세요. 그런 문제는 공작님에게 맡겨 두시고, 황녀님은 황녀님의 자리를 찾으세요. 자선 활동, 사교 활동, 여러 가지가 있어요. 친구를 사귀세요. 작은 모임을 만드세요. 품위 있고 관대하며 우아한 숙녀가 누구인가 할 때 첫 번째로 꼽히는 사람이 되어 주세요. 그러면 1황녀도, 공작님도, 황녀님을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내, 내가…?”
“하실 수 있어요.”
마르타는 그렇게 말하고 로엘라의 머리를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불쌍한 분.”
그녀는 진심으로 로엘라가 올리비아와 싸우지 않기를 바랐다. 이길 수 없다는 건 두 번째 문제다. 로엘라의 소망은 올리비아의 야망과는 배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진심이면서도, 편지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것까지 합쳐져 그녀는 로엘라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누구의 사랑도 받고 있지 못하다.
로엘라가 그녀에게 매달려 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
황궁 본궁에 있는 황금의 홀에 오랜만에 불이 밝혀졌다. 사방의 벽에 발린 얇은 금박이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여 사방이 온통 적금빛으로 물들었다.
이 홀은 황제가 직접 거행하지만 그랜드 홀에서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예식을 치르는 데 주로 쓰이던 장소였다. 알브레히트 황제가 유폐된 이후로는 쓰인 적이 없었다.
오늘 테오도르의 근위대장 서임식이 여기서 열린 것은 조금이라도 권위를 더해 주려는 알브레히트 황제의 배려였다. 테오도르 자신은 이런 요식 행위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근위대 전체의 통합을 위해서도, 거듭된 불명예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근위 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에 루트가르트 백작 테오도르를 근위대장으로 임명하니,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란다.”
황제가 쓴 서임장의 문구는 통상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이는 테오도르의 충성심이 황제 자신이 아니라 올리비아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기껍게 여겼기 때문이다.
“저의 검과 충성이 향하는 바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오도르도 그렇게 서약했다.
황제가 예검을 뽑아 테오도르의 양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그것을 그에게 하사했다. 테오도르는 두 손으로 검을 공손히 받아 들었다.
“비아를 잘 부탁하네.”
황제가 개인으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테오도르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이를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가 웃으며 테오도르의 어깨를 두 번 손으로 두드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과 연회를 준비해 두었으니 모두 즐기도록.”
척.
대답 대신 군례를 올리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황제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 자리를 먼저 떠났다.
테오도르는 황제가 홀에서 나가고 나서야 천천히 검을 들고 일어서서 뒤돌아보았다. 비로소 기사들이 열광적인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
“축하드립니다!”
냉정한 마르틴의 눈에는 희극적인 광경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저희들이 언제 테오도르를 열렬히 지지하기라도 했다는 듯하지 않은가. 뭐, 이걸로 근위대의 불명예가 전부 해결된 것 같은 분위기이긴 했다.
‘그런다고 자기들의 불충과 불명예가 해결된 것도 아닐 텐데.’
부끄럼도 모르고 끝까지 바이덴의 편을 드는 것보다는 낫긴 했다.
테오도르가 검을 높이 들자 열광적인 환호가 뚝 그쳤다.
“제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록 내가 황제 폐하로부터 근위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기는 했으나 이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야. 근위대의 검과 방패는 누구의 것인가?”
침묵이 홀에 내려앉았다.
“경들의 충성은 지금까지 누구의 것이었나? 경들은 서약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나?”
테오도르는 딱히 책망하는 것도 아닌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명예는 본디 피로 씻는 것이다. 그렇기에 명예를 잃은 자는 결투를 하고, 전장에 나선다. 나는 경들이 그것을 확실히 알았으면 한다. 방패를 들 때 동료를 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창칼을 겨눌 때는 근위 기사로서 누구에게 서약했는지 확실히 기억하기를 바란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는 절그럭거리는 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싱긋 웃으며 검을 칼집에 꽂고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이끄는 근위대는 그렇게 될 것이니, 잘 따라오도록 해.”
“예!!!”
하나로 합쳐진 고함이 우렁차게 홀을 울렸다.
“그럼 연회장으로 가도록 하지. 절도를 잃지는 말도록.”
“예!”
이번에는 비로소 다시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금의 홀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열을 지어 이동했다. 테오도르는 예검의 칼집을 허리띠에 걸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르틴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취임사를 생각해 두셨습니까?”
“무슨 취임사씩이나.”
“경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분이 아닌데.”
테오도르가 흘끗 그를 쳐다보았다. 해야 할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 입이 왜 있겠는가?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성정은 아니었다.
안덱스 백작 부인이 기사들이 이동하는 것과 반대쪽 문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시종 세 명이 각자 큼직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