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193화
1황녀궁에서 시녀를 뽑는다는 공고가 여러 곳에 뿌려지자 사교계 전체가 깜짝 놀랐다.
고귀한 이를 모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신분과 충성심이었으며, 전통과 인연 또한 중요했다. 어지간한 수준의 귀족 가문만 되어도 집사나 하녀장, 측근 하녀 같은 상급 고용인은 모두 대대로 가문을 모셔 온 집안 출신으로, 이들은 귀족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전통 있는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형성하고 있다.
하물며 지고한 황녀의 시녀라면 어떻겠는가? 대개는 모친이 충직하고 믿음직하며 인연 깊은 시녀를 한두 명 물려 준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놀이 상대가 될 정도로 인연 깊은 가문의 소녀가 시녀로 곁에 남는다.
그런데 공개 선발이라니? 올리비아가 아무리 특수한 경우라도 이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곁에 둔 믿을 만한 귀부인이 없다면, 추천을 받아 사람을 고르는 게 당연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연이 길지 않은 가문에서 시녀를 들이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수녀원과 여학교에 추천 요청서를 보내고 공보에 이 사실을 싣는 것은 비정상이다.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누구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황녀의 시녀로 들이겠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선발 숫자가 세자릿수에 달할 거라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었지만, 이건 신분 문제에 비하면 논란도 되지 못했다.
“수녀원이라니? 여학교라니? 게다가 이 공보는 주로 관리들이 읽는 것이 아닌가?”
수녀원에 들어간 귀족 여자라면, 주로 정략결혼용으로도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이거나 갈 곳 없는 몰락 귀족가의 여자들이다. 그나마도 귀족만 고려했을 때 그런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내 사촌누이가 수녀원에 있는데, 1황녀궁에서 따로 이야기도 있었다고 하오. 나이를 상관치 않으니 글과 셈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과부와 노파까지 시녀로 삼으실 셈인가? 자선 활동을 참으로 이상하게 하시는군!”
“그보다는 여학교가 더 큰 문제가 아니오?”
수녀원에서 시녀를 추천하라는 것은 그래도 귀한 혈통의 소녀들 중 불행한 이를 거두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여학교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여학교에 다니는 것은 대개 몰락 귀족이나 중산층의 딸이었다. 물려줄 것이 없고, 가정교사를 들여 교양과 품위를 가르칠 수 없으니 이처럼 학교를 만들어 교육하는 것이다.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신분이 낮다고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감히 황궁의 시녀가 될 신분은 되지 못한다. 설령 출세한다고 해도 궁내부 여관이 아니라면, 측근 하녀 정도가 한계일 터였다.
“쯧쯧,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역시 황궁 밖에서 자라서 그런지, 아무하고나 쉽게 어울리신단 말이지.”
보수적인 자들 중에는 그렇게 흠잡는 자도 있었으나 좋게 보는 자도 많았다.
“천만의 말씀. 황녀 전하께서 왜 시녀를 많이 뽑으시는지 이유도 듣지 못한 모양이군.”
“이유가 뭔데?”
“황제 폐하께서 황녀 전하께 두루 탄원을 들어주라고 명하지 않으셨소? 하지만 탄원자를 무슨 백작 부인이니, 후작 영애이니 하는 분들이 다 만나 주실 수는 없는 것 아니오?”
“그런 거면 그냥 시종이나 관리들을 시키면 될 일이 아닌가?”
“황녀 전하의 시녀와 그냥 시종들이 같겠소? 탄원하는 백성의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으시되, 다른 귀부인들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하신 게 틀림없소.”
이런 답은 페르디난트 체펠린 백작이 만들어 퍼뜨린 것이었으며, 사교계를 손쉽게 납득시켰다.
그냥 공정조세청의 관리가 하면 될 일 아니냐는 질문은 적어도 사교계에서는 크게 들리지 않았다. 도른탈이 순순히 협조할 리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도 했지만, 그런 이야기로 서로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 소식은 2황녀궁으로도 전해졌다.
로엘라의 시녀들은 모두 어이없어했다. 그녀들의 명예와 직접 연관 있는 이야기인 만큼, 여태까지 올리비아가 해 온 그 어떤 일보다도 이에 흥분했다.
“아무리 어울리는 사람을 고르지 않는다 해도, 이건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요? 그분은 황족의 시녀를 뭐로 여기시는 건가요, 대체?”
헤르미네가 분통을 터뜨렸다. 앙할트 백작 부인도 빨개진 얼굴로 쌕쌕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핑계는 그럴듯하긴 했어요. 황녀님의 시녀가 직접 탄원을 들어주면 백성들도 우대받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겠지요.”
“귀인들이 곁에 두는 사람을 신중하게 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짓이에요. 그 황녀님은 고작해야 공인이니 상인이니 하는 자들에게 아첨이라도 할 작정인 거예요!”
카롤리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행정부에서 공정조세청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있었고, 올리비아의 타개책이 훌륭하다고 내심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 처사를 통해서 그녀는 도시민들과 가난한 숙녀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샀다.
별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느냐고, 이 자리의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분명히 유능한 지략가도 있을 것이고, 은밀한 음모에 적합한 이도 있으리라. 소피아만 해도 여학교 출신이었다.
하지만 카롤리네의 사고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문을 쾅 열며 나타난 로엘라가 생각을 끊어 놓지 않아도 그랬으리라.
로엘라가 내뱉듯이 말했다.
“귀인들이 곁에 두는 사람을 신중하게 택하는 이유가 뭔지 나도 궁금한데?”
“아, 황녀님.”
시녀들이 황급히 일어나 공손히 그녀에게 절했다. 로엘라의 얼굴에 악귀 같은 분노가 번졌다.
그녀는 성큼성큼 헤르미네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말해 봐. 그 이유가 뭔지. 충성심? 품위? 신분?”
짜악!
다음 순간 로엘라가 손바닥을 휘둘러 헤르미네의 따귀를 갈겼다. 헤르미네가 휘청할 만큼 거센 일격이었다.
“말해 봐! 그 이유가 대체 뭔지!”
로엘라가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헤르미네의 머리채를 잡으려 들었다. 시녀 둘이 얼른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로엘라는 연이어 그녀들을 걷어차고 뺨을 갈겼다.
“내 몸에 손대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릴 거야!”
“황녀님!”
겁에 질린 여자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로엘라가 바닥에 두 무릎을 다 꿇은 헤르미네의 머리채를 다시 잡아 흔들었다.
“말해 보라고! 너희가 충성심이 있어?! 너희가 날 위해서 뭘 했는데!”
“황녀님, 제발, 죄송합니다. 제발,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몰라도 죄송합니… 꺅!”
“몰라? 진짜 몰라?”
로엘라가 헤르미네를 바닥에 팽개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헐떡거리며 소리 질렀다.
“내 거실을 이렇게 해놓고도 모른다고?!”
“내일 옮겨가실 거니까요.”
카롤리네가 혼자 침착하게 대답했다. 로엘라는 당당한 그녀의 따귀를 때리지는 못하고 분노에 찬 얼굴로 외쳤다.
“여기가 내 거실이야! 내 궁이고! 나는 옮겨가겠다고 결정한 적이 없어!”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황녀님. 결혼식 준비에도 슈바벤 공작저에 머무르시는 게 나을 거고요.”
“난 안 가! 안 가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리고!”
결혼도 안 할 거라는 말을 외치지는 못한 채 로엘라가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솟았다.
슈바벤 공작저로 거처를 옮기라는 말을 들은 게 보름 전이었다.
한 달 전이었다면 그녀는 기뻐하며 궁을 떠났을 것이다. 설령 결혼식 때까지 본관이 아니라 별관에 머무르라는 말을 들었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에제키엘은 근위대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를 댔으나, 그것보다는 자신을 강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걸 로엘라는 깨닫고 말았다.
에제키엘이 거처를 옮기라고 말한 건 그녀가 이렇게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은 거의 본능 수준의 것이었다.
그녀는 유폐되러 가는 것이다.
그녀는 생존해 있는 것만으로도 쓸모를 다할 수 있다. 그녀의 중요성은 그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아니라 네 혈통이.”
올리비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아 버리고 만다.
싫다는 거부의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말해도 이사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가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녀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당연히 가는 것으로 전제하고 행동한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로엘라는 처절하게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것도 없다. 이사라는 이유로 하지 말라고 해도 물건을 전부 실어낼 수 있다면, 그저 에제키엘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똑같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