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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190화


도른탈은 특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무안해하거나 죄송해하지도, 그렇다고 더욱 뻔뻔하게 굴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듯하기까지 한 사무적인 태도로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요즘 행정부에 일이 많아 처리가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경에게는 제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군. 이 일이 늦어질수록 여러 도시에서 온 탄원자들이 생업을 포기한 채 수도에 머무르게 될 텐데도 참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어.” “국사에 있어서 더 중하고 덜 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공정조세청의 일이 가장 급하고 중요하겠으나 행정부에서 처리하고 있는 다른 일들이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이들도 여럿 있지요. 전하께서 관여하신 일이라고 해서 순서를 어기고 먼저 처리해 주는 것이야말로 불공정합니다.” 옳은 말이었기에 반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도른탈의 말이 틀렸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행정 절차에 직접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었지만, 올리비아의 정보망은 이 안에도 닿아 있다. 1황녀궁에서 나오는 모든 명령과 공문에 보완 요청을 하고, 형식상 완벽한 공문이라면 문서함의 맨 밑에 넣으라는 지시를 행정부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접수처에서도 맨 밑에, 그다음 결재자의 문서함에서도 맨 밑에 들어가며 질질 늘어지다가 어디에서 계류되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제일 대단한 것은 그 지시가 누구에게서 내려진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공정조세청은 물적인 외형을 이미 갖추었다. 크로네 별궁 1층 홀의 예술품과 가구를 치우고 가벽을 세워 사무실과 회의실, 접견실을 만들었으니 이제 사람을 채워 넣을 차례다. 황녀궁의 사람들로 운영할 수는 없으니 행정부의 기존 관리들 중에 일부를 차출하거나 파견 보내 달라는 요청을 첫날부터 했으나, 가부 답변조차 오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주위의 조언을 받아들여 퇴직하거나 휴직 중인 관리 명단을 받아 다시 임관해 달라고 초빙하려 했으나, 그 명단을 보내 달라는 요청 또한 행정부 어딘가에서 사라졌다. 제국의 거대한 관료제는 마치 망망대해 같았다. 무엇을 보내든 그 안에서 사라져 버리리라는 것을 올리비아는 빠르게 깨달았다. 소피아를 보내서 기한을 정하려고도 해 봤으나 그녀조차도 하루 종일 여러 관청의 청장들을 만났을 뿐, 언제까지 처리해 주겠노라는 확답을 받지는 못했다. 적의조차 없었다. 지금 도른탈이 자신에게 적의를 표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올리비아는 결국 직접 찾아오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총재실 옆에 붙은 접견실의 상석에 앉자 사환이 재빨리 차를 내왔다. 올리비아는 미소를 지으며 곁에 따라온 자네트에게 가져온 것을 내오라고 신호했다. 자네트가 과자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설탕 꽃을 접시에 얹었다. 지금 밖에서 다른 시종들이 똑같은 설탕 꽃을 사무실마다 돌리고 있을 것이다. 1황녀가 하사하는 오후 간식으로 말이다. “황공합니다. 굳이 이런 것을 챙기시다니.” “모처럼 방문하는 건데 빈손으로 오는 것도 뭐하지 않은가.” 올리비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설탕 꽃 하나를 집어 도른탈의 잔 속에 넣었다. 홍차에 넣은 설탕 꽃이 사르르 녹았다. 도른탈은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이것을 마셔도 될 것인가? 자신이 대놓고 올리비아에게 독차를 대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도 대놓고 독설탕을 제 찻잔에 넣지는 못한다. 알면서도 괜스레 긴장감이 마음속에 스쳤다. 올리비아가 담대하게 기미도 없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서두르자고 하고 싶진 않네. 하지만 사무실을 갖추었는데 빈 채로 놓아두는 것도 민망한 일이 아닌가.” “제가 전하의 고충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행정부도 언제나 일손이 모자란지라 요청을 들어드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도른탈이 남 일처럼 대답했다. 올리비아는 내심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대적으로 나오면 맞대응할 방법이 있으나 절차상 문제, 인력 부족 문제를 들먹이며 시간을 질질 끌면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올리비아 자신이 공문을 들고 각 부서의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결재를 받고 사람을 직접 면접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되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인원 구성이 끝난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정조세청은 재무부와 긴밀히 협력해야만 하는데, 재무부에서 과연 원하는 서류를 제때 내주기는 할지 모르겠다. ‘하나씩 해나가는 수밖에 없긴 하지.’ 올리비아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이번에는 뒤에 선 무어바흐 백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가져온 가방을 열어 서류를 꺼내 도른탈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도른탈이 그것을 열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물었다. 올리비아도 변함없이 차분한 미소를 지은 채로 설명했다. “공정조세청에 임시직을 선발할 생각이야.” “관리 선발 시험은 내년 하반기에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인원을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새로 생긴 부서 인원을 채우려면 관리 수를 늘려야 해서 재정에도 타격이 상당하지만 전하께서 맡으신 일이니 최선을 다해서 예산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건 내년 가을 시험까지 나더러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뜻인가?” “그렇게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파견 관리가 곧 결정될 겁니다.” “곧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이야기하는 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바로 중단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선은 지망자를 받아야겠지요.” 차출과 파견에 관한 공문이 처리되고, 지망자를 받아 1차 명단을 작성하고, 그중 몇 명을 자격 불충분으로 거부하고 형식적인 보완을 요청하고, 모자란 숫자를 채우기 위해 또다시 추가 인원을 선발하리라.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도른탈 자신도 모를 것이다. 올리비아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세 번이나 살면서도 행정부와 연관될 일은 없어서 이런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에제키엘이 순순히 물러난 이유를 알겠다. 그는 로엘라의 지참금으로 조세권을 받아 내지 않더라도 황명을 무력화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관련 논의를 시초부터 없애고 황제도 결국 대귀족의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지는 못하겠지만, 올리비아 자신이 무능하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는 충분하다. 근왕파 귀족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금력은 있었으나 검증된 인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설령 그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정식 관리가 아닌 사람이 한 일이므로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을 공산이 있었다. 따라서 올리비아는 도른탈을 만나러 온 것이다. “물론 행정부에서 잘 처리해 주리라 믿네. 하지만 그전에 공정조세청의 수장으로서, 황명에 따라 탄원자들의 호소를 들어줄 생각이야. 실태를 파악하고 탄원 내용을 정리하는 데도 인력이 필요하니, 임시직에게 그 일을 시키겠다는 걸세.” 도른탈이 곤란하다는 듯 살짝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번에도 적의를 직접 드러내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절차상의 문제라는 듯이. “이건 그 임시직들에게 공문서를 작성할 자격을 부여하겠다는 서류라네.” “쉽게 서명할 수 있는 건 아니로군요. 임시직에게 사실상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주겠다는 뜻 아닙니까? 사환이라면 모를까, 제아무리 1황녀 전하라 해도 이렇게 관리를 멋대로 임명하실 수는 없습니다. 황명을 받아오시지요.” “내 시녀들에게 일을 시키겠다는 것인데도?” 도른탈이 멈칫했다. 올리비아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탓이다. “내 손발이 될 시녀들이 공문서를 작성할 권한이 없다고 하진 않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올리비아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그러면 기존에 보낸 1황녀궁의 공문들이 무효인 줄 알면서도 받았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그러면 문제없겠군. 정확히 말해서.” 올리비아는 서류의 표지를 넘겨서 첫 번째 장의 내용을 보여 주었다. “내 시녀들이 내 명령을 받아 작성한 문서에 법적 효력이 있음을 재확인해 주는 것뿐이니까.” “으음. 황녀궁에 명령 출납실을 만들 작정이십니까?” “그것도 필요하지 않겠나?” “공정조세청을 운영하시려면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도른탈이 잠시 망설이다가 거기에 서명했다. 시녀를 몇 명 늘려서 관청을 압박하려는 모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올리비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황녀가 거느릴 수 있는 시녀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1만 명을 선발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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