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191화
황녀궁 앞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리면서 올리비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 틈을 쪼개어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소피아의 얼굴도 썩 밝지 못했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응. 뭐, 딱히 대놓고 날 적대할 만큼 도른탈 경이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올리비아는 침착하게 말했으나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한 도른탈의 사무적인 얼굴이 더욱 신경을 건드렸다. 사실 그녀의 요구를 모조리 무시하라는 지시는 도른탈에게서 나왔을 텐데도 말이다.
“진짜로 독설탕이라도 가져갈 걸 그랬나 하고 잠깐 생각했어.”
거실까지 들어와서야 올리비아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실크 숄을 풀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바이덴처럼 대놓고 적개심을 보이는 것보다 도른탈 같은 자가 더욱 다루기 어렵다. 쳐낼 명분을 만들기가 어렵다.
올리비아의 말이 그냥 해 보는 소리임을 알고 있으므로 소피아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털썩 소파에 앉으며 무어바흐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서류를 소피아에게 줘요.”
무어바흐 백작 부인이 가방에서 도른탈이 서명한 서류를 꺼내 소피아에게 넘겨주었다. 소피아는 서류를 확인하고 올리비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녀를 선발하겠다는 공고를 여러 수녀원과 대학에 보냈습니다.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안나가 입궁하면 관리들과의 연락 창구를 열도록 하고.”
“예.”
아무리 제국 행정부가 슈바벤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관리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근왕파 귀족 가문의 방계이거나 영지 출신으로 후원을 받은 이, 대학 출신으로 사상적으로 공정조세청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의 숫자도 상당하다.
내부에서는 상명하복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고 동조했겠지만, 소속을 이쪽으로 옮기거나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준다면 협력해 주려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매수도 방법이고.’
오늘 올리비아는 이미 미끼를 던졌다. 설탕꽃 자체도 비싼 것이었으나 그걸 담은 봉투에는 은화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급박한 금전 문제가 있는 자라면 관대한 황녀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야. 도른탈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돼.”
시녀를 늘려서 탄원을 듣고 정리하며 할 일을 계획해도, 결국 행정부에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물며 이건 조세 문제다.
올리비아는 군부를 흔드는 데 성공했다. 아직도 군부는 안정되지 못했으며, 그 틈을 타 각지의 황군 사령관과 고위 장교들을 포섭하는 중이다.
하지만 행정부에는 이도 들어가지 않았다. 도른탈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아들러 총사 때처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이간질이 통할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소위 사적 영역인 사교계와 황궁, 귀족 사회에서 올리비아는 상당한 영향력을 얻었다. 덕분에 에제키엘은 그녀를 제 맘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예컨대, 올리비아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정략결혼을 시킨다든가 유폐시킨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적 영역에서 올리비아의 힘은 아직 미미했다. 그녀는 제국 전역의 통치에 관여하기는커녕 특별 관청 하나 제대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도른탈, 아니면 헬무트 슈바벤, 최소 둘 중 하나를 제거해야만 해. 행정부에 빈틈을 만들어 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거나, 황궁 서기관실을 확보해서 황명이 통할 수 있게 하거나.”
올리비아는 소피아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소피아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그녀도 진작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다. 슈바벤도 저들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만큼 철저하게 경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른탈 경보다는 헬무트 경 쪽이 낫긴 합니다. 도른탈 경은 제거한다고 해도 곧바로 람베르트 경이 총재 자리에 오를 테니까요. 하지만 헬무트 경을 제거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요.”
그는 이간질이 통하지 않을 만큼 에제키엘과 가깝고, 결혼하여 자녀를 가진 것도 아니므로 인질을 삼아 협박할 만한 대상도 없다. 결국 본인을 타깃으로 삼아야 하는데, 슈바벤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른탈의 가족은 어때?”
올리비아가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소피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설령 손자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해도 도른탈 경은 자기 권력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겁니다.”
올리비아는 더러운 짓을 피할 생각이 없었으나 그것도 통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물었다.
“로완이라는 남자는?”
“로완이요?”
“그래. 헬무트 슈바벤과 자주 만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어.”
소피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로완은 밀정 조직 안에서도 별도로 독립된 첩보 조직을 만들어 헬무트 휘하에서 일하던 인사다. 반대로 말해서, 밀정 조직 일부를 떼어 줄 정도로 에제키엘이 헬무트를 신뢰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로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없었다.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올리비아의 암살 시도 때 입은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 결국 은퇴해야 했다.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 뒤로 소피아는 그의 소식을 들은 일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헬무트 슈바벤에게 붙인 꼬리가 그러더군. 적어도 이삼 주에 한 번은 시간을 내서 만나러 가는 모양이야. 그 정도로 친했던 모양이지?”
“몰랐습니다. 친하긴 했을 겁니다만….”
“슈바벤이 아무리 꼼꼼해도 은퇴자에게까지 경호를 붙이지는 않았겠지. 그쪽으로 좀 알아보면 어떨까?”
“알겠습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암살 시도 이후로 헬무트는 자기 첩보 조직을 잃었다. 다수가 죽은 상황에서 슈바벤은 인원을 보충해 주는 대신 생존자를 다른 조직으로 흡수했다. 헬무트에 대한 징계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수장인 로완이 무사히 은퇴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그 덕분이다. 그가 알고 있던 조직에 대한 정보가 쓸모없어졌으니까.
목표 대상이 방비가 부족한 곳에 정기적으로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쓸 수 있는 수단은 확 늘어난다. 소피아는 머릿속으로 할 일을 메모했다.
똑똑. 똑.
그때 힘차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었다가 소피아에게 물었다.
“오늘은 이제 더 할 이야기 없지?”
“예. 오늘 하실 일은 끝났습니다. 시녀 선발은 진전이 있으면 보고하겠습니다.”
“무어바흐 백작 부인도 오늘 수고했어. 오늘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전해 줘.”
“예.”
무어바흐 백작 부인은 공손히 답했다. 새로 선발할 시녀 대부분은 공정조세청의 임시직으로 일하게 될 테지만, 그걸 관리하려면 올리비아의 보좌역도 숫자가 늘어나야만 한다. 이제 근왕파 귀족들이 고대하던 대로 올리비아의 측근이 될 길이 확장된 셈이다.
두 사람이 물러나며 문을 열자, 거실 문 밖에는 테오도르가 진중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두 시녀는 부드럽지만 정중한 태도로 테오도르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테오도르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표정이 약간 굳어 있었다.
메리가 얼른 물었다.
“데운 우유를 가져올까요?”
“밀크티로 부탁해. 천천히 해.”
올리비아가 대답하자 메리가 예의에서 살짝 어긋나는 태도로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밀크티는 한 시간쯤 후에 가져오면 좋을 것이다.
메리가 나가고 나자 올리비아는 테오도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습니다.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표정이 굳어 있어서.”
그러자 테오도르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힘을 풀려고 애쓰지만 잘되지 않는지 몇 번 뺨을 움직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느라 그런 듯합니다.”
“도른탈 경을 만나서 신경전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을 텐데.”
“도른탈 경을 상대해야 한다면 베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올리비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테오도르는 순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질문했다.
“보고할 일은?”
“딱히 없습니다. 무어바흐 양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집에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모양이더군요.”
“이제 곧 쉴 때가 좋았다고 생각하게 될 텐데.”
“안 그래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역시 표정이 너무 어두운데. 무슨 일 있었지?”
그렇게 말하고 올리비아가 그의 제복 상의 밑으로 손을 넣어 바지 허리에 검지를 걸어 끌어당겼다. 테오도르가 난처한 얼굴로 끌려가면서도 그녀의 손을 치워냈다. 대답은 순순했다.
“어떻게 해야 무어바흐 부부가 너무 상처받지 않는 방식으로 파혼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더군요.”
올리비아도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