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공평한 애정은 현실감이 없다
Chapter 5. 공평한 애정은 현실감이 없다
출발하는 일행은 평범한 상단처럼 위장했다. 골든로즈 상단의 짐수레와 표시를 빌렸다.
힘 있는 상단이기 때문에 산적의 염려도 없고, 국경이나 경비소를 통과하는 데도 좋다며 레버리가 적극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이었다.
란 역시 평범한 여행자 복장을 몇 개나 구비했다. 오랜만에 바지를 입으니 어찌나 편한지 몰랐다.
드워프는 눈에 띄니 제투라와 파센은 짐마차 안에 앉았고, 로스가 마차를 몰았다. 다른 또 하나의 짐마차는 디모디아가 몰았고, 란은 그 옆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유스타프와 루미에는 말을 탔는데, 이제 막 승마를 배우기 시작한 것치고 루미에의 승마 솜씨는 훌륭했다.
말은 귀족의 것이다.
말을 키우는 데에도 시간과 돈과 인력이 들어가고, 그걸 단지 ‘한 명을 태우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승마가 귀족의 전유물인 이유였다.
물론, 돈이 있다면 상인이나 용병들도 타기는 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루미에도 말을 탈 줄 몰랐다. 하지만 승마는 기사의 기본이다. 루미에는 필사적으로 승마 연습을 했고, 이제 제법 말을 타고 랜스를 들 정도는 되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유스타프가 란에게 말했다.
“누님, 조금은 말을 타서 익숙하게 해 놓으시죠.”
“그럴까……?”
“네.”
실력이 늘려면 많이 타는 수밖에 없다. 유스타프는 긴 여행길이니 란에게 확실히 승마 연습을 시켜놓을 생각이었다.
“네, 이리 오시죠.”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고 디모디아가 눈을 찌푸렸다.
“멈추면 내리셔야죠.”
“느리니까 괜찮아.”
웃으며 란은 대꾸했다. 유스타프가 그녀가 등자를 밟고 올라가는 것부터 도와주었다.
파센이 그걸 보며 말했다.
“왜 저렇게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해서 안달인 건지.”
“우리도 노새는 타잖아.”
“그야 안전하니까.”
제투라의 말에 파센이 반박했다.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로스는 ‘등자에 발이 안 닿아서 못 타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현명하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다른 게 불만이었다.
‘내가 마차를 모는 게 아니라 신입이 몰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저 빨강머리 신입이 란 때문에 굴러들어 왔다는 건 청염 기사단원은 다 알았다.
물론 철저하게 테스트해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로스였다.
마치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듯이 루미에가 로스에게 다가왔다.
“이제 제가 마차를 몰까요?”
“어?”
“피곤하실 테니 번갈아서 몰지요.”
“어, 그럴까.”
로스는 ‘의외로 괜찮은 녀석인가.’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하며 마차 고삐를 그에게 넘겼다.
유스타프는 란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말을 달리게 시켰다.
그의 말은 훈련이 잘된 말이었기 때문에 유스타프의 가벼운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걷고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해가 지기 시작해 작은 마을에 들렀을 때쯤 란은 후들후들 다리가 떨려왔다.
“못 내려가겠어…….”
란이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손을 뻗었다.
“등자에서 발을 빼시고, 절 붙잡으세요.”
란은 괜찮을까, 하고 머뭇거리다가 에잇 하고 상체를 기울였고 유스타프는 단단히 그녀를 붙잡아 안았다.
말에서 내려오니 저절로 온몸에 긴장이 풀려 란은 흐늘흐늘해졌다. 멈춘 짐마차 뒤 칸에 유스타프는 란을 앉혔다.
“괜찮으십니까?”
“응.”
란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보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정말?”
“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투라와 파센에게 가는 길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마차는 여관 근처에 세우고, 말은 마구간에 넣었다.
디모디아와 란은 한 방으로 배정을 받았다.
“죽겠다.”
란이 침대에 푹 퍼지자 디모디아가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시죠?”
“응. 그래도 이렇게 계속 말 타면 익숙해지겠지?”
“그럼요.”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격려했다. 그때 ‘똑똑’ 가벼운 노크에 디모디아가 문을 열자 루미에가 서 있었다.
“루미에?”
란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야?”
“근육을 풀어드릴까 해서 왔답니다.”
그가 생글 웃었다. 란이 무슨 소리인가 했다가 ‘아! 마사지해 준다는 이야긴가!’ 하고 솔깃했다.
안 그래도 종아리며 허벅지며 땅땅 뭉치는 것 같은데 마사지라니, 감사한 이야기다.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말에 디모디아가 “란 님!” 하고 눈을 부릅떴고 란은 움찔했다.
“응? 안 되나?”
“시녀님께서 옆에 어차피 계실 거고, 옷 위로 마사지할 겁니다. 아니면 내일 더 고생하실 테고요.”
생글생글 웃으며 루미에가 말했다. 디모디아는 참으로 뻔뻔하고 매끄러운 낯짝이라고 생각했다.
라치아에서는 볼 수 없는 타입의 인간이다.
하지만 루미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그거야 그렇지만…….”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여 루미에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침대에 누워 주세요.”
란은 얼른 도로 침대에 누웠다. 루미에가 그녀의 발바닥을 꾹 누르자 그것만으로도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루미에는 섬세하게 그녀의 다리 전체를 마사지해주었다. 마사지를 끝냈을 때 란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잠 드셨네요.”
루미에가 가볍게 혀를 내밀어 보이고 디모디아에게 살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혹하는 듯한, 그런 미소.
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초리에, 독특한 주홍빛 눈동자에 그 미소는 잘 어울렸다.
디모디아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뭘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주님도 도련님도 만만한 분은 아니니까요.”
“알고 있답니다.”
루미에가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속삭였다.
“저도 제 주인님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주인님이 누군데요?”
“물론 란 님이시죠.”
루미에가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디모디아는 더더욱 얼굴을 굳혔지만, 대답 대신 문을 가리켰다.
루미에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문을 나섰다.
쯧, 혀를 차고 디모디아는 완전히 잠든 란을 바라보았다. 깨우자니 너무 깊게 자고 있어서 깨우기 죄송스러웠다.
‘야식을 준비해 둘까.’
새벽에 깨시면 배고프실 테니, 뭔가 먹고 다시 주무시면 되겠지.
디모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란의 머리카락을 풀어 주었다.
녹영에서 명령을 받고 차출되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란은 좋은 사람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무엇보다도 그걸 시녀들이나 다른 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그건 귀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몇몇은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다.’ 하고 비하했고 몇몇은 ‘능력도 있고 좋은 사람 아닌가.’ 하고 편을 들어주었다.
디모디아는 편을 드는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요즘 유스타프 님의 모습을 보면, 왠지.’
디모디아는 눈을 데굴 굴렸다.
자신은 응원하는 편, 이라고 생각하며 디모디아는 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란이 말에 제법 익숙해지고 잘 달리게 되었을 때 일행은 드워프 도시에 도착했다.
높은 산 안쪽으로 뚫려 지하로 내려가는 거대한 지하 도시는 제투라와 파센이 자랑하지 않아도 란의 입을 떡 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높은 천장에는 별처럼 마법 등이 박혀 있어서 내부를 밝혀 주고 있었다.
“굉장해.”
“하하하하하, 굉장하지? 그렇지?”
제투라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제 배를 두들겼다. 파센은 구역이 어떻게 정리되고 나눠져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인간이 대가문의 수장을 만나는 건 오랜만이구만.”
제투라의 말에 파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센이 말을 이었다.
“우리 집으로 초대하고 싶지만 말이야. 말을 둘 공간이 없으니까, 외부 손님은 그쪽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야. 크기도 인간에게 맞을 거고.”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자신이 드워프에 대해서 아는 것을 다시 머릿속으로 암기해 보았다.
일행은 주거 지역으로 들어가 커다란 집으로 안내되었다. 직접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집어넣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돌 자체의 아름다움을 살린 저택 내부가 암석 박물관을 연상시킨다고, 란은 생각했다.
“어서 오시오.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구려. 락투라고 하오. 란 님이신가?”
“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수장님.”
싱긋 웃으며 란이 인사하자 락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반갑습니다. 머리색이 아름답군. 나도 그런 색으로 금을 뽑아낼 줄 알지.”
란이 경쾌하게 웃었다.
“저는 반짝임을 좋아하는 눈이 있지요.”
락투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띠었다.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그쪽 눈동자 같은 에메랄드 원석도 만져봤다네.”
“그 에메랄드가 꼭 어울리는 하얀 손도 있답니다.”
둘의 대화에 로스는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얼굴을 했다.
락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래된 말장난을 아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참으로 환영하네.”
“환대 감사드립니다.”
란이 씩 웃었다.
일종의 주고받는 말이었다.
나는 뭐뭐 할 줄 안다.
그래? 난 이거이거 할 줄 알지.
하는 식으로 제 기술을 자랑하는 게 드워프식 인사였다. 하지만 란은 인간이고, 기술을 자랑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당신의 기술을 감상할 수 있어요, 하고 대응한 것이다. 아무리 솜씨 좋은 장인이라고 해도, 사용자가 없으면 소용없지 않나요? 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난 당신의 작품에 경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말.
그래서 락투는 기분 좋게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이어 란이 말했다.
“그리고 제 예상이 틀릴지 맞을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빨리 광산으로 들어가서 산울림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요.”
락투의 얼굴이 금세 진중해졌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네, 하지만 그 전에 제 일행들은 들어가서 쉬게 해도 될까요?”
란의 말에 락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포포스! 이분들을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리게.”
그러자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성 드워프가 잽싼 몸놀림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자, 날 따라오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일행에게 손짓했고 란은 따라가라고 턱짓했다. 루미에가 마지막으로 머뭇거리며 일행의 꽁무니를 따라가자 유스타프만이 남아 있었다.
“유스?”
“저도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리에 앉게.”
락투가 권하며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응접실에 있는 소파도 돌이라 란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따끈따끈하게 데운 술이 차 대신 나와서 란은 술에 입만 댔다.
그랬는데도 알코올이 확 느껴졌다.
‘대체 얼마나 도수 높은 술을 데운 거야.’
란은 그런 생각을 한 뒤 술잔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말했다.
“제 생각에 검은 산에 광천수가 터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광천수?”
정말로 뜻밖의 말이라 락투는 눈을 크게 떴다.
“네, 그 독특한 울림 소리는 수맥이 움직이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령이 깨어나는 소리가 아닐까요.”
“수맥이라…….”
락투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물론 정확한 건 제가 광산에 직접 들어가서 소리를 들어봐야 알겠지만요. 하지만 제가 빙벽의 주인이라는 것 역시 알아주시길.”
덧붙인 말에 락투의 손이 멈췄다. 그의 갈색 눈이 진지해졌다.
“검은 산의 주인은 빙벽의 주인이 하는 이야기를 듣겠소.”
란이 빙긋 웃었다.
“그럼 바로 움직여도 될까요?”
광천수가 언제 터질지 모르니, 빠르게 확인하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만약 울림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면 정말로 무시무시한 사태가…….
“알겠네.”
락투가 몸을 일으켰다. 소파 뒤에 서 있었던 유스타프가 란에게 속삭였다.
“쉬지 않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응. 어차피 확인만 하고 오는 거니까.”
란은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유스타프는 쉬어도 돼.”
“누님을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했다.
1시간 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유스타프가 낮게 말했다.
“누님을 혼자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유, 유스. 괘, 괘, 괜찮아?”
덜덜 떨면서 란이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도 녹슨 쇠 냄새가 나는 게 느껴졌다.
피비린내가.
“누님은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하지만, 유스가―”
란은 저도 모르게 흐느끼듯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깊게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를 반복하고 란은 깜깜한 사방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거친 돌바닥과 돌멩이들이 손끝에 닿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하 도시와 광산은 바로 이어져 있었다. 아직 도시를 확장하는 부분도 있었고, 깊게 들어간 부분도 있었다.
락투는 광산 안으로 란과 유스타프를 안내했다. 꽤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울림 소리가 났다.
‘아.’
란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쿵쿵 하는 땅울림이 아니라 마치 고래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광산 안쪽 깊숙이에서 들려왔다.
그때, 청염이 울기 시작했다. 유스타프는 놀라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 들었다.
반지가 눈으로 보기에도 미친 듯이 떨리면서 웅웅웅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염?”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는 그 순간 지진이 일어났다.
위에서 돌멩이가 떨어져서 란이 몸을 던져 유스타프를 밀쳐냈고―
‘그 다음이 생각이 안 나.’
뭔가 쿵 하고 엄청 아프게 전신에 뭔가가 부딪치고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유스.”
“네.”
“나 유스를 밀치고 나서부터 생각이 안 나.”
유스타프가 잠시 침묵하더니 느리게 말했다.
“바닥이 꺼졌습니다.”
“뭐?!”
“저희는 아래로 떨어졌고,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위에서 낙석이 떨어져서 일단 무조건 안으로 누님을 데리고 온 겁니다.”
‘그럼…… 지금 광산 안에 갇힌 거야……?’
오싹 소름이 돋으며 동시에 목소리가 떨렸다.
“다친 곳은?”
“괜찮습니다.”
“안 괜찮거든? 심하게 다친 거 아냐? 제길, 하나도 안 보여!”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란의 외침에 건너편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웃는 소리가 났다. 란이 그쪽으로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살짝 어디에 닿는 기분이 들자 유스타프가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여기 있습니다.”
“웃음이 나와? 정말이지.”
다른 한 손으로 열심히 유스타프를 더듬으며 란은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 때에 그의 얼굴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지만, 눈도 코도 입도 얼굴도 머리 뒤통수도 멀쩡했다.
‘그럼 어디가 다친 거야?’
란이 설마 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서 그의 등을 더듬으려고 하자 유스타프가 몸을 살짝 돌렸다. 그가 맞잡은 손을 꽉 잡았다.
“역시! 다쳤구나!”
“등을 좀 다쳤지만, 괜찮습니다. 그보다 누님은요?”
“난 괜찮아.”
정말입니까? 하는 말 대신 유스타프의 손이 그녀의 몸을 조금씩 더듬기 시작했다.
제가 유스타프에게 했던 짓인데, 왜 당하니 민망스러운 건지. 란은 움찔거리면서도 얌전히 있었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란의 얼굴을 쓸었다. 마지막으로 등까지 쓸어내리고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괜찮으시군요.”
“그렇다니까―”
대답하고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아파!’
왼쪽 발목이 욱신거렸다. 아니 욱신 정도가 아니라…….
누가 발목에 못을 박아 넣은 듯한 통증이었다. 부츠를 못 벗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스타프는 부상자니까 앉아 있어봐 내가 주변을―”
“청염.”
그때 유스타프가 작게 속삭이자 자그마한 파란 불꽃이 팟팟 켜졌다. 란이 눈을 둥글게 떴다가 투덜거렸다.
“불을 켤 수 있으면 진즉에 말해.”
“저도 지금 생각났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이 그의 등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유스!”
“보이는 것만큼 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옷이 찢겨져 있고, 피와 흙투성이였다. 괜찮을 리가 없다.
“척추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살이 좀 찢긴 겁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괜찮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도닥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굴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걸까요? 보니까 드워프들이 만든 광산 같지는 않고 자연적인 동굴 같은데요.”
“유스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다녀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란은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불꽃이 흐려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얼굴이 고통으로 창백해진 걸 들켰을 거다.
‘그, 그렇게 아프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해. 응.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아.’
“제가 없으면 불꽃도 없는데요.”
“―!!”
란은 눈을 찡그렸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땅이 꺼졌으면 뭔가 같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아!”
가죽 가방이 눈에 들어와 란은 후다닥 그쪽으로 가서 가방을 끌고 왔다.
“이것 봐!”
“이것도 어딘가에서 떨어진 걸까요? 오래되어 보이는군요.”
“어쨌든 고맙지.”
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쓸모 있는 게 들어 있기를 빌며 가방을 열어보았다.
작은 삽이나 망치, 정과 끌 같은 도구들이 나오고, 이어 간단한 구급약품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 덩어리가 나왔다.
“아, 물통―이 아니라 술통이잖아?”
작은 물통을 열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리고 수건이 한 장.
‘정말 쓸모없군.’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란이 술통과 구급약품을 챙긴 후에 말했다.
“일단 상처부터 보자.”
“그걸 제 등에 끼얹으시려고요?”
“감염보다는 낫잖아.”
“남의 일이라고.”
중얼거리는 유스타프에게 란이 눈을 샐쭉 떴다.
“얼른.”
유스타프는 한숨과 함께 돌아앉았다. 란은 수건으로 살살 먼저 유스타프의 등을 닦아내고, 술을 부었다.
그의 전신이 움찔하고 경직했으나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술을 전부 다 부어버리자 상처의 실체가 드러나 란은 다시 눈물이 나오는 걸 느꼈다.
수건으로 꽉 상처를 눌러서 피를 닦아내며 지혈을 하고, 란은 구급상자를 열어서 연고를 조심스럽게 발랐다.
“미안해.”
“뭐가 말입니까?”
“내가 오늘 오자고 하지 않았으면…… 아니, 유스타프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면 유스가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거다.
“제가 안 왔으면 누님 혼자 여기 떨어지셨겠죠.”
“그건 상관없지만―”
유스타프가 몸을 홱 돌려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의 푸른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왜 상관이 없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말투는 부드러워서 란은 침을 삼켰다.
“아니, 그게ㅡ”
“그게요?”
“난 괜찮지만, 유스는…….”
“왜 누님은 괜찮습니까?”
“…….”
란이 입을 살짝 벌렸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기울였다.
“―?!”
키스라도 하는 줄 알고 그녀가 움찔하는데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란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안 잊었어. 안 죽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꼭 나가자. 나만 믿어!”
가슴을 두들기며 란은 힘차게 말했고 유스타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란은 최대한 왼발에 힘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30여 분쯤 걸었을까.
이제 왼발에 감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쯤 길이 끝났다.
그리고―
“누님 말이 맞군요. 밑에서 물이 올라오고 있어요.”
갱도의 끝, 벽에서 물이 맺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닥은 이미 펄같이 되어 있었고 말이다.
“큰일이다.”
란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광천수가 터지면 나랑 네가 먼저 익사할 텐데.”
그리고 그녀는 힐끔 유스타프를 보았다. 그는 경악하거나 놀란 얼굴이 아니라 담담한 얼굴이었다.
“걱정 안 돼?”
“누님께서 누님만 믿으라고 하셨으니까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했고 그 대답에 란은 눈을 깜박였다가 웃었다.
“유스가 날 구해줬으니까.”
“제가요?”
“왜 등을 다쳤겠어. 그 정도는 안 봐도 뻔하거든?”
감싸다가 다친 거지.
란은 한숨을 내쉬었고 유스타프는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이상한 곳에서는 눈치가 빠르시군요.”
“뭐야.”
중얼거리고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손을 내밀었다.
“나, 잠깐만 손 잡아주면 안 돼?”
“언제든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란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서 그는 눈썹을 모았다.
“누님?”
그러나 란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펄 바닥을 내려다보고 속삭였다.
“샬.”
다음 순간 진흙 펄이 솟구치더니 란을 덮쳤고 란은 그대로 시야가 홱 도는 걸 느꼈다.
“내 이름을 아는 자, 부르는 자, 그대는 누구인가?”
웅웅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저는 읽는 자. 프하니아스입니다.”
란이 대답하자 사방이 확 밝아졌다. 연푸른색의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공간이었다.
“그것참, 진귀한 손님이로군.”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와 란은 고개를 돌렸다가 입을 떡 벌렸다.
커다란 사람이 턱을 괴고 있었다. 적어도 키가 5m쯤은 되어 보였다. 하반신은 고래였고, 상반신 역시 인간의 피부가 아니라 대리석이나 조개껍질 안쪽 같은 매끄러운 흰색이었다.
게다가 눈이…….
‘흰자가 없어.’
새까만 동자가 눈을 꽉 채우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짙푸른 색이었는데, 기묘한 광물 같은 광택을 내고 있었다.
“진귀한 이방인이여. 내 이름은 왜 부르는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란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거대한 꼬리가 가볍게 좌우로 움직였다.
“부탁?”
“저와 제 일행이 광산에 갇혔습니다. 저희를 지상으로 꺼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리고― 지금 당신의 위에 지하 도시가 있습니다.”
“시끄럽게 구는 놈들 말이군.”
“가능하다면 도시를 가라앉히시지 말고 평화롭게 해결했으면 합니다.”
그러자 그가 씩 웃었다. 상어 이빨 같은 무수한 송곳니가 번득였다.
“왜? 넌 내게 뭘 해줄 거지? 게다가 내 이름만 아는 것은 아닐 테지. 제 이득을 위해서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무례한 자야.”
란은 심장이 크게 뛰는 걸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랬습니다. 원하시는 대가를 말씀해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은―”
그 말에 그가 손을 뻗었다. 정령의 손에는 손톱이 하나도 없었는데 생각보다 그게 더 이상해 보였다.
커다란 샬의 손이 란의 머리와 어깨를 쓸었다.
“하지만 즐겁구나.”
“네?”
“생각보다 이런 대화가 오랜만이니. 정령과 다른 생명체의 교류가 끊긴 지도 오래되었고.”
그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란의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빙벽의 냄새가 난다. 이스타리프도 거기에 있나.”
“있다.”
익숙한 목소리에 란은 반가움에 깜짝 놀라 외쳤다.
“이스타리프!”
이스타리프는 스타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로 란을 보고 사자 앞발로 땅을 긁었다. 불쾌하다는 명백한 표시였다.
“다른 자는 내 주인이야.”
“알아, 그래서 여기로 못 데리고 왔지. 인간과 함께 가는 길은 여전히 즐거운가?”
“나름대로.”
이스타리프의 대답에 샬은 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촘촘한 이빨이 좀 무섭다. 란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샬이 말했다.
“네가 나에 대해 읽은 것을 말해 봐라.”
란은 순순히 광천수가 터져 도시가 가라앉고, 나디움이라는 광물이 탄생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샬이 물었다.
“왜 이걸, 질문에 대한 답을 거래 대가로 삼지 않았지?”
“그럴 수도 있지만…….”
란이 슬쩍 샬을 보며 말했다.
“그런 관계는 싫습니다. 서로 이득을 위해서 이야기하는 관계요.”
그 말에 샬이 입을 살짝 벌렸다가 마구 웃기 시작했다.
“속에 뭐가 들었는지. 신기하구나, 이방인이여.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자여. 내 이름을 부르는 자야.”
그의 검은색 동자가 짙푸른 빛으로 바뀌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팔을 흔들자 란은 순식간에 몸이 휙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눈이 저절로 번쩍 떠졌다.
“컥?!”
그때 누가 가슴을 꽉 눌러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란!”
“뭐야, 아파―”
“정신이 듭니까?”
유스타프가 창백한 얼굴로 물어 와서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늘이네?”
붉은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느릿느릿 져 가는 해와…….
“유스, 완전히 젖었어.”
중얼거리며 란이 몸을 일으키자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유스?”
“정말로― 당신은―”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오다가 그가 그녀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는 그렇게 크지 않은 호수가 있었고, 둘은 그 옆의 잔디에 나란히 앉아 있는 꼴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드워프 도시 근처입니다.”
“어떻게 된 거야?”
“제가 묻고 싶은―”
유스타프는 말을 하다가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느리게 말했다.
“누님이 제 손을 잡고, 뭔가 말하신 후 갑자기 물이 솟구쳐서 저희 둘을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나마 손을 잡고 있었기에 망정이죠. 계속 급류에 휩쓸려서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로 나온 겁니다.”
“나는…… 정령을 만났어.”
“정령을요.”
유스타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란은 ‘왜 잘생긴 사람은 흠뻑 젖어도 멋있을까. 아니, 왜 더 섹시해 보일까?’ 같은 생각을 하며 말했다.
“응. 광천수가 터지게 된 원인인 정령이었어. 유스는 청염이 있어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대.”
그 말에 유스타프는 목에 걸린 반지를 어루만졌다.
그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물방울이 노을빛을 산란하며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났다. 창백했던 얼굴에도 이제 혈색이 돌기 시작해서 란은 넋을 잃고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멋쩍어져서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유스, 상처는 괜찮아?”
“네. 덕분에요.”
“다들 걱정할 테니까 얼른 가자.”
그리고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
“누님?!”
유스타프가 놀라 그녀를 붙잡았다.
‘발목, 진짜 아파!’
까먹고 있었던 만큼 반동이 장난 아니었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유스타프가 재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 그녀의 왼 발목을 부츠 위로 붙잡자 란은 “악!” 하는 소리를 냈다.
“이게 뭐가 괜찮습니까!”
유스타프가 으르렁거리듯 소리 질렀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부드럽게 그녀를 잔디밭에 앉혔다.
부츠 위로도 느껴질 만큼 그녀의 발목은 부어 있었다.
유스타프는 제 허리띠에 달린 단검을 빼냈다.
“자를 겁니다.”
“발을?”
울먹울먹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농담도 받아쳐주지 않고 말했다.
“자릅니다.”
그는 가죽부츠를 자르기 시작했다. 란은 이를 악물었다. 칼이 날카롭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스의 솜씨가 좋아서인지, 젖은 가죽 부츠는 생각보다 잘 잘렸다.
그러고 나자 보라색으로 변해 퉁퉁 부은 발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압박하던 부츠가 사라지자 통증이 더더욱 느껴져서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스타프는 입을 딱 다물고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화가 났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어서, 란은 아픈데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유스……?”
작은 부름에 그가 획 눈을 들었다.
“대체 왜―”
그가 목소리를 높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스타프는 발목을 꼼꼼히 살피고 말했다.
“이대로는 못 걷습니다.”
“아냐, 부축해주면 걸을 수 있어.”
유스타프는 란의 말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며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일어났다.
“유스! 등!”
상처 도로 터지겠어!
란이 버둥거렸지만 유스타프는 꿈쩍도 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누님, 얌전히 계시지 않으면 이대로 손을 놓을 거고, 그럼 착지하실 텐데 매우 아프시겠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움찔하며 버둥거리는 걸 그만두었다.
“참 잘했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속삭이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란은 얌전히 안겨서 침묵 속에 손을 꼼지락거렸다.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니다. 한참 말을 고르다가 란은 슬그머니 동정받을 만한 대사를 골랐다.
“유스.”
“네.”
“나 이제 못 걷게 되는 걸까?”
유스타프가 가볍게 눈을 깜박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발목 아파…….”
“물론 아프시겠지요.”
그의 목소리가 더더욱 다정해져서 어쩐지 란은 어리광 부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은 유스타프에게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자각도 있었다.
왜냐면 자신은 임시라도 가주이며, 유스타프는 그녀의 책임하에 있는 사람이니까.
학생이 다치면, 선생님의 부상은 일단 뒤로 미뤄두게 되는 것처럼.
이제 유스타프에게 그렇게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면 사이도 매우 좋아졌고.’
처음에 유스타프가 자신을 죽일까 봐 벌벌 떨었던 거에 비하면, 요즘은 ‘아, 날 죽일지도.’ 하는 건 좀 관성 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고 선을 긋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유스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까? 싶기는 했다.
“유스.”
“네.”
“남동생과 누나는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그런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긴.”
란은 가볍게 웃었다.
만약 유스타프가 진심으로 자신을 ‘누님’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역시 아닌 것 같다.
적당히 빈정거리는,
‘너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그래도 부를 호칭이 딱히 없으니까.’
하는 뉘앙스의 누님이 유스타프에게는 딱이지.
“당신은 정말로 날 남동생 삼고 싶은 겁니까?”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은 “아니.” 하고 대답했다.
유스타프가 남동생이라니, 감당 안 되죠.
“그럼 우리 관계는 뭘까?”
란이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남자와 여자죠.”
그 말에 란이 다시 웃었다.
“왜? 인간과 인간이라고 하지?”
그건 너무 원론적이다. 하고 란이 말하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군요. 인간과 인간.”
“에이.”
란은 그렇게 말하고 슬쩍 유스타프를 보며 말했다.
“그럼, 친구는 안 될까요.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씨?”
“거절합니다.”
“냉정해.”
란은 투덜거렸다.
자신이 말하고도 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우리는 뭘까?’
친구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원작자와 캐릭터도 아니지.
문득 모든 게 막막해졌다. 란은 붉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발목은 아프고, 오늘은 죽을 뻔하고.
라치아를 위해서 열심히 했지만, 자신은 이제 곧 라치아를 떠날 거다.
새로운 신분.
새로운 삶.
‘왜 다들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싫어하는지 알겠어.’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완전히 새로운 신분을 주는 삶.
그걸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싫어하지?’ 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쓸쓸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미 라치아에서 오랜 시간 살았다.
가장 정이 붙은 곳이 라치아인데, 거기를 떠나 전혀 모르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와 란은 화급히 눈 밑을 훔쳤다.
“누님?”
“어,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그러나 한번 터진 울음은 멈추지가 않았다.
그쪽에서는 죽은 거니까, 여기서 보너스로 사는 삶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보너스라 현실감이 없는 그런 삶인데.
그러니까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을 텐데.
그렇게 기쁘지도 않아.
유스타프는 란을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의 자세를 바꾸어서,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대게 한 후에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란은 순순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뺨을 묻었다.
‘내, 내가 고생한 게 얼만데. 이 정도는 기대도 되지 않아?’
그런 변명을 속으로 하며 란은 눈을 꾹 감았다.
눈 안쪽이 뜨끈했다.
감은 눈 밑으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유스…… 나…….”
외로워.
힘들어.
어느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스타프는 마치 그녀의 말을 들은 것처럼 속삭였다.
“제가 있습니다.”
확 눈물이 흘러넘쳐서 란은 입술을 깨물고 팔에 힘을 주었다. 젖은 셔츠 너머로 그의 체온이 전해져왔다.
단단한 어깨와 팔의 열기가 실감이 나서 위로가 되었다.
진짜 정말 여기 있는 유스타프.
어차피 내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시나의 것이 될 거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만 빌릴게.
란은 흐느껴 울었다.
우는 내내 유스타프는 아무런 말도, 추궁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손이 위로하듯 일정하게 그녀의 등을 두들겼을 뿐이었다.
란은 어깨에서 고개를 떼고 속삭였다.
“미안.”
“미안하실 건 아무것도 없, 지는 않군요.”
드물게도 유스타프가 끝말을 바꿨다. 그가 이어 말했다.
“다음에는 아픈 곳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응.”
“누님이 아프다고 두고 가거나 버리고 가지 않습니다.”
란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작게 웃었다.
“유스는 바람둥이가 될 자질이 보여.”
“누님보다는 덜하죠.”
“뭐?”
놀란 란이 “말도 안 돼” 하고 반박했다.
“내가 무슨 인기가 있어? 황태자는 논외로 쳐.”
“물론 개는 논외로 쳐야지요.”
“맞아!”
큰 소리로 대답했다가, 란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스, 진짜 황실모독죄로 잡혀가.”
그녀가 속닥속닥 말하자 유스타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코웃음을 쳤다.
그때 저쪽에서 빠른 속도로 마차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러다가 마차가 부서지는 게 아닌가 하는 속도였다.
“로스군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눈도 좋아.’
난 아직 안 보이는데, 아!
순식간에 가까워진 짐마차의 마부는 로스였다. 그가 팅팅 부은 눈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려 달려왔다.
“주군!!”
그가 유스타프의 앞에 부복했다.
“무사하셔서, 정말, 정말―”
말을 잇지 못하고 로스는 얼굴을 문질렀다. 짐마차 뒤에서 뛰어내린 루미에의 얼굴을 보자 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란 님!”
“괜찮아. 괜찮아.”
그녀가 루미에의 손을 잡았다가 비명을 질렀다.
“너 손 왜 이래?!”
손이 피투성이였다. 손톱이 깨지고 빠진 게 보였다.
“그냥, 일이 좀 있었습니다. 괜찮답니다. 란 님은― 발목이…….”
루미에가 팔을 뻗으며 말했다.
“제가 안겠습니다.”
“됐어.”
“아뇨, 제가!”
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란 역시 버둥거렸다.
“이제 내려 줘. 마차 있으니까. 게다가 유스도 부상당했잖아.”
“뭐라고요!”
로스가 펄쩍 뛰었다.
“그런데 안겨 오신 겁니까!”
“나도 괜찮다고 했는데…….”
“어딜 다치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로스가 황망한 얼굴로 유스타프를 살폈고, 그 사이 루미에가 빼앗아 들듯이 란을 당겨 제 품에 안았다.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확 타오를 듯하다가 가라앉았다.
“루미에, 손 다쳤잖아.”
란이 당황하며 그에게 안겨 속삭이자 루미에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란 님은 가벼워서요.”
“얼른 마차에 내려줘. 그보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로스는 유스타프의 상처를 발견하고 그를 안아 옮길 듯이 굴었고 유스타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 사이 루미에는 짐마차 뒤 칸에 란을 조심스럽게 앉혔다.
“정령이 나왔습니다.”
루미에가 란의 발목을 살피며 말했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정령이?”
“네, 그리고 란 님과 일행분을 근처 호수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달려온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르고요.”
“그래…….”
샬이 나타났다는 말이겠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란은 끙끙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옆에 훌쩍 올라타며 말했다.
“출발하지.”
루미에는 움직임이 없는, 짐승과 같은 눈동자로 유스타프를 보았다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곧, 짐마차가 출발하자 란은 몸을 마차 벽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긴장이 풀리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대로 잠들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몸이 기울어져서 툭 하고 제 어깨에 기대지는 걸 느꼈다.
돌아보니 란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온몸은 다 젖어서 엉망이고, 아직 눈가에는 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스타프는 몸을 돌려 그녀가 편하게 기대게 해주며 조심스럽게 눈물 자국을 훑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둘 다 벌벌 떨었을 거다. 그래도 흠뻑 젖은 상태보다는…….
하고 마차 안을 둘러보는데 그 흔한 담요 한 장 없었다.
‘도대체.’
정신없이 달려와 준 점은 고맙지만, 그래도 제대로 준비를 갖추고 와 주었다면 더 좋았겠지.
유스타프는 로스와 디모디아가 얼마나 황망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광산이 낙석으로 폐쇄되고, 안에 라치아 후계 두 명이 다 갇혀버렸다. 순식간에 라치아를 이을 사람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정신없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마차가 지하 도시 안으로 들어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디모디아가 커다란 수건을 들고 뛰어나왔다.
“욕실도 준비해 뒀습니다. 다치신 곳은요?”
디모디아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부드러워서 유스타프는 ‘한 명이라도 제대로 일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누님은 다리를 다치셨고, 난 등 쪽에 부상을 입었어. 누님, 일어나세요.”
유스타프가 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몇 번 강하게 흔들어서야 란은 눈을 떴다.
“으응?”
“도착했습니다. 의사의 진찰을 받고 씻으셔야죠.”
“그리고 정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디모디아가 마지막 말을 붙여서 란은 눈이 번쩍 떠 졌다. 자리에서 움직이려다가 란은 멈칫하고 말했다.
“나 지금 한 걸음도 못 움직이겠어. 가만히 있어도 아파.”
“제가―”
유스타프가 말하는데 언제 왔는지 로스가 말했다.
“안 됩니다. 도련님, 등의 상처 터지신다고요.”
“맞아. 맞아.”
란이 맞장구를 치자 루미에가 “제가 하지요.” 하고 란을 가볍게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어 유스타프가 내리자 디모디아가 수건을 건넸다.
락투와 몇몇 드워프들이 저택 앞에 나와 있었다.
“정령의 말이 정말이었군. 몸은 괜찮은가?”
“발목과 피곤한 것만 빼면요.”
루미에에게 안긴 채로 그녀가 말하자 락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지. 자네 연인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맨 손으로 돌을 파내고 있는 걸 말리느라 혼났네.”
“네?”
연인? 누구?
순간 란의 머리에 루미에의 손이 스쳐 지나갔다.
당황해 란이 말했다.
“저 연인 없는데요. 아니 그보다, 루미에 손이 그래서! 아니, 나 내려줘. 생각해 보니까 그 손으로 날 든다는 게―”
횡설수설하는 란을 데리고 루미에는 안으로 들어갔고, 락투는 “애인이 아니라고? 그럼 짝사랑인가?” 하는 소리를 하며 그 뒤를 따랐다.
“루미에와 저는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 말에 란이 큰 목소리로 반박했다. 안의 의자에 루미에가 란을 내려놓자 의사인 게 틀림없는 차림을 한 드워프가 다가와 란의 발목을 살폈다.
락투가 갸웃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필사적인데―”
“아니, 아악!”
란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드워프 의사가 란의 발목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뼈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걸요. 평생 절름발이가 될 수도 있지요. 일단 제대로 붙여 보기는 하겠지만…….”
―내가 고쳐줄까.
그때 바닥에서 반투명한 상체가 쓰윽 솟아올랐다. 란은 저도 모르게 ‘샬!’ 하고 외칠 뻔한 걸 참았다.
드워프들은 그 사이에 겪은 일인지라 놀라지 않고 공손히 물러났다. 락투가 말했다.
“정령이시여, 다시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처럼 날 즐겁게 해주는 여행자다. 날 나디움이라고 불러도 좋아.
샬이 란을 향해 말해서 란은 “나디움.” 하고 그를 불렀고 그는 다시 히죽 웃었다.
―그 발목 고쳐줄까?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럼 넌 대가로 뭘 줄 거지.
“그 대가는 제가 지불하지요.”
샬―나디움이 고개를 돌렸다.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나디움의 푸른 광물성 머리카락이 기묘하게 흔들렸다.
―청염의 주인이로군.
“그렇습니다.”
“아니지. 두 분 모두 손님 아닙니까! 게다가 란 님은 우리 도시가 물에 잠길 뻔한 걸 막아주셨지요. 저희가 대가를 지불하는 게 당연합니다.”
락투가 한 걸음 나서서 말해 나디움은 갸웃하다가 말했다.
―좋지.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의 반투명한 손이 마치 관절 없는 문어 다리처럼 그녀의 다리를 휘감았다.
“―!”
란은 차가움에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곧 그 차가움이 뼈 안까지 스며들면서 통증이 사라졌고, 나디움이 손을 떼자 그녀의 발목은 퉁퉁 부은 보라색에서 보통 때처럼 희고 가늘게 돌아와 있었다.
“혹시 가능하면 유스타프도 고쳐주실 수 있나요? 아, 루미에도요.”
란이 부탁하자 나디움은 별말 없이 유스타프에게도 손을 뻗었고, 그는 움찔했다가 곧 신기한 얼굴로 등을 돌아보았다.
그의 상처 역시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어 루미에의 상처도 고쳐주고서 나디움이 락투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내 쪽으로는 더 땅을 파지 마라. 시끄러우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광천수가 고일 수 있게 호수도 만들어.
“그건 시간이 걸리겠지만, 하겠습니다.”
―난 꽃이 좋아. 꽃 모양의 작품을 매년 하나씩 호수에 던져 넣어라.
“네.”
―그럼 대가로 호수에 선물을 섞어 주지. 이건 란,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다. 모처럼 즐거운 대화였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디움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볼링공만 한 진줏빛 물체가 생성됐다.
란은 그게 뭔지 알았다.
‘나디움!’
란이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자 나디움이 그녀의 두 손 위로 떨어졌다. 무게는 아주 가벼웠다.
―그럼.
그렇게 말하고 나디움은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비눗방울 터지는 것처럼 산산이 사라져 버렸다.
락투와 드워프들이 눈을 반짝이며 란을 둘러쌌다.
“그게 대체 뭔가?”
“만져 봐도 되나?”
“한번 보여주게.”
“오오, 가벼워!”
“금속인가?”
“새로운 금속 같은데―”
“소리를 들어 봐. 강도도 높을 것 같군. 미스릴과 비교하면 어떨까?”
란이 드워프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나디움을 얼른 집어 들고 씩 웃으며 말했다.
“저는 금속을 다루는 데에는 문외한이니, 가능하면 이 나디움을 여러분께 맡기면 어떨까 합니다.”
“나디움?”
“좋은 이름 같은데?”
“그렇군. 맡겨 달라고.”
란이 더더욱 짙은 미소를 짓고 이어 말했다.
“물론 그 전에 협상을 먼저 해야겠지만 말이지요.”
✥✥✥
란이 일어난 것은 하루 종일 자고 나서, 이튿날의 아침이었다.
멍한 눈으로 부스스 일어나니 디모디아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셨어요?”
“응…….”
란은 길게 하품을 했다.
“배고프시죠? 드워프 음식이 의외로 괜찮네요.”
디모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란을 일으켜 씻으러 가라고 떠밀었다.
뜨끈한 욕조에서 완전히 기운을 차리고 란은 벌떡 일어났다.
진한 토마토 스튜로 뱃속까지 든든히 채우고서 란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호위를 하고 있던 로스가 인사해 왔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비꼬는 건가 했더니 의외로 그런 얼굴은 아니어서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일어났지. 유스타프는?”
“도련님은 대련 중이십니다.”
“대련?”
“루미에와요.”
어라? 그건 또 진귀한 조합이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어디서?”
두 사람의 대련 장소는 옥상이어서, 란은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지하인데도 어떻게 설계를 했는지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저택의 옥상인 만큼 꽤 넓어서 란은 저쪽 끝에서 두 사람이 대련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에 란은 움찔했다.
‘목검이 아니고?’
당황해 빠르게 다가가니 두 사람이 진검으로 대련하고 있는 게 보였다. 문외한인 란이 보기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괜히 너무 다가가거나 소리를 내면 방해가 될까 봐, 란은 적당히 떨어진 장소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루미에의 검이 빠르게 꺾여 유스타프의 목으로 들어갔다. 유스타프는 그걸 흘려 피해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진짜로 살기를 뿌리는군.’
이런 상대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짜증도 났다.
‘없애 버릴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벌레는 미리미리 제거해 두는 게 상책이고.
유스타프는 제 것을 빼앗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루미에는 유스타프의 검술이 약간 달라진 걸 눈치챘다.
그리고 등 뒤의 시선도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어서 루미에는 순식간에 마음속이 가라앉았다.
깊게 깊게.
―괜찮아, 괜찮아.
머리를 쓰다듬던 손과 목소리.
루미에는 간격을 띄웠다. 유스타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살기가 억제되고 그게 검술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유스타프는 좀 더 날카롭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루미에는 거기에 맞추면서도 날뛰던 기색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 유스타프가 뒤로 물러서면서 자연스럽게 대련이 끝났다. 유스타프는 고개를 들어 달려오는 란을 보고 피식 웃었다.
“뛰다가 넘어지십니다.”
“그 정도로 운동신경이 없지는 않네요. 두 사람 다 괜찮아?”
루미에가 란을 보고 웃었다.
“도련님이 잘해 주셨답니다.”
“누님에게 검집 역할을 맡기는 건 어떨까 싶지만 말입니다.”
“응?”
란이 갸웃하자 루미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몸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24시간을 꼬박 자고도 더 잤으니까. 루미에는 이제 손 괜찮아?”
그녀가 루미에의 손을 잡아 살폈다. 나디움 덕분에 그의 손톱도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다행이다.”
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고 그래? 손으로 광산을 파 봐야 안 되는 거 알면서.”
“주인님을 잃은 개가 되는 것보다야 낫지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꽤나 통렬한 소리를 해서 란은 입을 떡 벌렸다.
뭐랄까.
란에게 루미에는 아픈 손가락 같은 느낌이었다. 제 타이밍에 구해 주지 못한 것도 그랬고, 서브 남주라서 시나랑 결국 이어지지 않는 것도 그렇고.
“개 같은 거 아니거든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꽉 잡은 루미에의 손등에 허리를 숙여 입 맞췄다. 루미에가 경직하는 게 느껴지는 순간 란의 몸이 획 끌려갔다.
“켁? 유스?”
“뭐 하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하도 스산해서 란은 제가 큰 잘못을 했나 싶어 당황했다.
“어? 아니, 루미에도 소중하다구…….”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란 말이지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십시오.”
“으, 으응.”
란이 대답하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목깃을 놓아 주었다.
란은 깃을 다듬고 목을 가다듬었다.
루미에는 제 손등을 붙박인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루미에……?”
조심스럽게 란이 그를 부르자 루미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고 웃었다.
‘우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쾅하고 어딘가에 부딪치는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그때 유스타프가 둘 사이에 살짝 끼어들어서 란의 팔을 잡아당겼다. 란은 어어 하며 그에게 끌려가며 말했다.
“유스? 왜?”
“더는 봐 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어?”
“누님.”
유스타프가 딱 멈춰 섰다. 란 역시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들 있었군!”
그때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 란이 돌아보자 제투라가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제투라가 란에게 손짓했다.
“잠깐 이쪽으로 와 보게.”
“응. 잠깐만. 유스, 뭐 할 이야기 있어?”
들을게, 해 봐.
“아닙니다. 나중에.”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해서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투라 쪽으로 가볍게 뛰어갔다.
“뭔데? 무슨 일이야?”
“그 나디움 말인데―”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유스타프는 비딱하게 서서 지켜보았다. 그때 루미에가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저는 란 님을 지킬 겁니다.”
그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를 돌아보았다가 피식 웃었다.
“할 수 있다면.”
“네.”
루미에는 그렇게 대답하며 짙게 웃었다.
제투라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써는 나디움을 다룰 수가 없다는 거지?”
란의 말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거지.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광물이야. 저런 광물에 ‘나디움’이라는 이름이 붙는다니 기분이 좋구만.”
우리 고향의 이름이니, 하고 제투라가 핫핫 웃었다.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유 있게 만들어 줘. 어차피 일도 다 끝났고, 슬슬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 말에 제투라가 깜짝 놀랐다 그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벌써?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은가? 여독도 풀리기 전에 출발한다고?”
“나도 내 영지를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유스타프가 라치아에 남아 있었다면야 여기서 엉덩이를 한참 붙이고 있었겠지만, 자신과 유스타프 둘 다 라치아를 비우고 있는 상태니 빠르게 돌아가야 했다.
“한 달은 있을 줄 알았는데.”
“나 혼자였다면 그랬겠지.”
“아쉽군. 그렇다면 대족장에게 얼른 말해야겠는걸. 언제 떠날 예정인가?”
“글쎄? 빠르면 내일모레?”
“이럴 수가.”
제투라는 짧은 다리로 폴짝 뛰더니만 후다닥 옥상에서 내려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란은 당황했지만 곧 돌아섰다.
“더 대련할 거야? 이제 내려가자.”
그녀가 손을 흔들자 두 남자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란과 함께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며 란은 제 계획을 이야기했다.
“모레나, 글피쯤에는 라치아로 돌아갈까 하는데. 어때?”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기는 하네요.”
루미에의 말에 란이 웃으며 “그렇지?” 하고 힐끗 유스타프를 보았다.
“유스, 혼자 먼저 돌아가라고 하면―”
“안 갑니다.”
“역시. 그렇지. 응, 같이 돌아가자. 아니면 유스는 좀 더 있다가 올래? 내가 먼저 돌아가고―”
“누님께 눈을 뗄 수 있으면 좋겠군요.”
“으응?”
“눈을 떼면 무슨 일이 꼭 생기니 제 눈이 닿는 곳에 계셔야겠습니다.”
“그건―”
란은 가볍게 웃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네. 변명의 여지가 없군.”
깔끔하게 란이 인정하자 유스타프는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다고 우길 줄 알았는데.
“유스만 돌려보내는 건 나도 불안하고.”
씩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유스타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방으로 돌아가 일행에게도 알리자 디모디아는 “벌써요?” 하고 보라색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워두는 것도 그렇지요.”
“맞아. 그리고 라치아의 겨울이 빠르다는 걸 감안하면…….”
란은 눈을 찌푸렸다.
“이러다가 라치아에 가는 길에 첫눈을 맞을지도 몰라.”
“설마요.”
디모디아가 날짜를 가늠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란은 “혹시 모르잖아.”라고 해서 디모디아가 바싹 긴장하게 만들었다.
디모디아가 “그럼 물자를 좀 챙겨야겠네요.” 하고 주먹을 불끈 쥐는데 유스타프가 찾아왔다.
“누님, 모처럼 왔으니 한 바퀴 돌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도시?”
란의 눈이 반짝였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여 그녀는 재빠르게 말했다.
“당연히 좋지.”
그러며 란이 디모디아에게 말했다.
“모처럼이니까 디아도 같이 가자.”
“네?”
디모디아는 슬쩍 유스타프의 눈치를 살피고는 빠르게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두 분이 다녀오세요.”
“그래도 괜찮아? 여기에 다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아, 로스는?”
“로스는 지금 저택에 없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어?”
“심부름을 보냈으니까요.”
“어디로?”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유스타프는 미리 준비한 듯이 매끄럽게 답했다.
“어제 대족장과 하셨던 협정을 일단 문서로 정리했습니다. 그걸 대족장에게 보내라고 했지요.”
“유스가 정리한 거야?”
“네. 일단 문서화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난 생각도 못 했어…… 고마워.”
“별말씀을. 그럼 가실까요?”
“응, 루미에도 데리고 가자.”
“……원하시는 대로.”
어쩐지 뒤에서 디모디아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결국, 란은 유스타프와 루미에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드워프의 집은 제각각 솜씨를 뽐내며 높고 낮게, 그러면서도 어울리게 지어져 있었다.
돌의 재질이 다 같아서 통일감이 느껴졌다. 셋은 대족장의 저택을 나와 주거 지역을 지나서 상업 지구로 들어갔다. 도시를 구경한다고 하자 포포스가 종이에 도시 구조를 간단히 그려줘서 란은 그걸 보며 길을 걸었다.
“드워프제 국자나 드워프제 냄비는 어때?”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그걸 어디에 쓰려고요?” 하고 되물어서 란은 하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식재료를 파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가게들을 쭉 지나니 안에 대장간이 보였다.
“드워프제 칼은?”
란의 물음에 루미에가 “궁금하네요.” 하고 말해 란은 대장간으로 향했다.
“아…… 하지만 역시 칼이나 갑옷을 걸어 두고 팔지는 않는구나.”
대장간이라고 해도 늘어놔져 있는 물건은 대부분 생활용품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드워프들은 대부분 자기가 자기 물건을 만들 테니까.’
“오, 인간 손님이로군. 얼마 전에 정령으로 우릴 구해 준 사람 맞지?”
앞치마를 맨 드워프가 안에서 걸어 나와 란을 보며 웃었다.
“네, 검을 볼까 했는데―”
“검이나 갑옷은 미리 만들어 두지 않아. 전부 맞춤이라고.”
드워프의 말에 란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렇군요.”
“응? 그런데 그쪽 손님이 차고 있는 검은 뭐지?”
날카로운 눈으로 드워프가 유스타프의 검을 가리켰다. 유스타프가 제 검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냥 검입니다.”
“그냥 검이라고?”
후다닥 드워프가 판매대를 돌아왔다. 란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키였지만 몸놀림은 잽쌌다. 그가 유스타프의 검집을 바라보고 눈을 팍 찡그렸다.
“이건 엘프제로군.”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죠?”
“이 나무는 엘프들밖에 못 키우거든. 제길. 검날을 한번 보여줄 수 있습니까?”
드워프의 말이 정중해졌고, 유스타프는 망설이다가 검을 뽑았다.
“오―”
드워프가 검날에 얼굴을 들이댔다.
“이 반짝임은 어떻게 연마한 거지? 어이, 카룩! 이리 와봐! 엘프제 검이야!”
그러자 안쪽에서 일하던 드워프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엘프제?”
“어디 봐봐.”
“이 물결무늬는 어떻게 만들어 낸 거지?”
유스타프는 순식간에 드워프들에게 둘러싸였다. 그중 한 명은 심지어 망치로 유스타프의 검날을 두들겨 보려고 하다가 그의 정중한 제지를 받았다.
“이봐, 그 검을 내 검과 바꾸지 않겠어?”
흥분한 드워프 중의 한 명이 제안했다. 그러자 다른 드워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검이랑 바꾸자고! 미스릴 함량이 아주 높은 검이야.”
“어허! 네 솜씨로 만든 미스릴 검이야 뻔하지.”
“뭐? 풀무 불 맛 좀 볼래?”
“나는 검 두 개를 제안하지.”
“난 세 개!”
“네 검은 세 개 줘도 안 가져!”
“웃기시네, 풀무 불이나 꺼트려 버려라.”
“뭐라고!!”
갑자기 분위기가 흉흉해지더니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이제 공용어가 아니라 드워프어로 된 거친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란이 당황하는데 유스타프가 제 검을 도로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겁니다.”
“뭐야, 우리 검보다 그 엘프 검이 더 좋다는 건가?”
갑자기 화살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 같아 란이 유스타프의 소매를 살짝 당기려는데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선물받은 거니까요.”
그 말에 질문을 던진 드워프가 쩝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선물로 받은 걸 팔라고 하는 건 어렵다.
“돌아가죠.”
유스타프가 란에게 속삭이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란은 드워프들에게 인사하고 손이 잡혀 그대로 끌려 걸었다.
상업 지구를 빠져나오자 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놀랐네.”
루미에가 신기한 듯이 말했다.
“저렇게 금방 흥분하는 종족인지는 몰랐습니다.”
“그지? 엘프제라서 그런 게 아닐까.”
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가 생각했던 즐거운 도시 구경이 아닌걸…… 돌아갈까?”
란의 말에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야 란은 상업 지구로 가는 게 아니라 건축이나 조각 같은 걸 보러 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여간 짧은 외출을 끝내고 시무룩해져 돌아오니 락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떠난다고 제투라가 그러던데, 사실인가?”
인사 없이 용건부터 바로 물어 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영지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어서요.”
“내가 큰 연회를 베풀려 했는데…… 일단 오늘 저녁에 작은 연회라도 열 테니 꼭 참석하게나.”
“알겠습니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락투는 잠시 그런 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가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스물입니다.”
“정말로 젖먹이 같은 나이로군. 인간과 교류는 오랜만이라.”
“드워프들은 오래 살지요.”
“인간에 비하면 그렇지. 나는 올해로 126세네.”
드워프들의 평균 수명은 300세. 인간의 세 배 정도다.
126세라면 그야말로 한창인 젋은 나이었다. 락투는 씩 웃었다.
“그래도 성인은 된 거겠지?”
“네.”
“좋아, 좋아. 좋은 술을 많이 준비할 예정이네.”
락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란은 ‘드워프의 좋은 술…….’ 하며 신음을 흘렸다.
연회가 열린다는 말에 디모디아는 란에게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권했고, 란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연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연회장에 나가, 란은 그렇게 입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락투 역시 화려한 갑옷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은 장밋빛 마블이 들어간 새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었다.
란은 벽에서 반짝이는 마법 물품들을 눈여겨보았다. 대부분이 라치아산 얼음수정인 게 보여서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대족장인 락투는 제 자리 옆에 란의 자리를 권했고, 란은 자리에 앉았다.
락투가 뿔잔을 높게 들며 말했다.
“우리의 손님이자, 정령을 부른 자, 란 로미아 드 라치아를 드워프의 친구로 선포한다! 그대의 풀무 불이 꺼지는 일이 없기를!”
드워프의 친구.
란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재빠르게 자신의 잔을 들고 말했다.
“친구로서 오랜 우정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광산이 마르지 않기를!”
란의 말에 아래 앉아 있던 드워프들이 소리를 지르며 같이 잔을 들어 올렸다.
락투는 잔을 비웠고, 란은 잔을 비우고 나서 숨을 삼켰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아.’
순식간에 머리가 핑 돌았다. 대체 얼마나 독한 술인 것인가?
생각하기도 무서웠다.
“그대가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했소. 게다가 나디움이라는 새로운 광물도 선물했지. 우리도 그대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했소.”
락투의 말에 드워프들이 줄줄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란의 앞에서 제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였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세공품이었다.
“푸른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입니다.”
“붉은 산호와 하얀 옥으로 만든 머리 장식입니다.”
“팔목에 꼭 어울릴 금세공 장식입니다.”
드워프들은 그렇게 말하며 제 물건을 내밀었고 란은 정신없이 칭찬하고 놀라기에 바빴다.
그런 장신구뿐만이 아니라, 단검이나 마법 물품도 있었다. 그렇게 상자를 스무 개 정도 받고 나니 란은 돌아갈 길이 걱정되었다.
‘강도를 당하지는 않겠지.’
선물 증정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먹고 마시는 시간이 되었다. 드워프들의 춤은 어깨동무를 하고 추거나 하는 군무가 대다수여서 란은 얌전히 앉아서 락투가 잔을 채워주는 대로 술을 마시며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술을 거절하는 것은 드워프 예절에 매우 무례한 일이었기 때문에 란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란에게 다가왔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대족장님, 가주님께서 너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응? 몇십 잔 한 것도 아닌데?”
“인간은 이런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취합니다.”
“그렇군. 이런. 내가 실례했네. 먼저 올라가 보아도 좋네.”
“감사합니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일으키자 란은 묘하게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말했다.
“난 아직 괜찮아.”
“아뇨, 전혀 아닌데요. 똑바로 서지도 못하시면서.”
“아냐. 난 똑바로 셔 있셔.”
그러면서 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
락투가 “이건 취했군.” 하고 확인 도장을 찍어주었다.
유스타프는 란의 허리를 단단히 안아서 흔들리지 않게 하고 반쯤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연회장을 나와서야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란이 “욱” 하고 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나 토해.”
“―!”
유스타프의 걸음이 빨라졌다. 건물 밖으로 나가서 배수로에 내려놓자마자 란은 토하기 시작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속을 다 게워내고 나서 란은 숨을 헉헉거렸다.
“란 님, 수건과 물을 가져왔습니다.”
언제 왔는지 루미에가 다가와 물 잔과 수건을 내밀었다. 란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물 잔을 잡았다.
물을 얼마 마시지도 못하고 그녀는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려 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유스타프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바로 쓰러졌을 거다.
“술을 잘하시지도 못하시면서.”
“하, 하지만…… 거절하는 거 예의가 아니란 말이야…… 모처럼…… 대족장의 호의도 얻었는데…….”
좋은 거래를 따낸 영업사원마냥 란이 중얼거렸다.
루미에가 그녀의 얼굴을 훔쳐 주었다. 그녀의 눈가에도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내가 하지.”
유스타프의 말에 루미에가 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으응……? 루미에가 데려다 줄래? 유스는, 연회장 너무 비우면 안 되잖아…….”
유스타프는 눈을 찌푸리고 잠시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몸을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키스해주고 말했다.
“푹 쉬십시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몸이 같이 휘청휘청했다. 유스타프가 자리를 뜨자 루미에가 그녀를 반짝 안아 들었다.
“어떠세요?”
“응, 괜찮아.”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의 방으로 돌아가니, 디모디아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루미에는 그녀를 침대에 앉히고, 드레스를 벗겼다.속치마만 남겨두고 루미에가 물었다.
“마저 벗겨 드릴까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괜찮은 거지?”
사고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루미에가 피식 웃었다.
“아, 웃었다.”
란이 눈을 깜박이며 말하자 루미에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항상 웃고 있는데요.”
란이 양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하지만 진짜로 웃는 것 같지는 않은걸. 루미에는, 좀 더,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에…….”
“마음대로요?”
“응.”
“그건 무섭습니다.”
“뭐가?”
루미에가 입술을 달싹였다. 란이 고개를 기울인다는 게 상체가 확 기울어져서, 그쪽으로 쏟아지려는 걸 루미에가 붙들었다.
란이 키득키득 웃었다.
“나, 진짜, 취했나?”
“네, 완전히요.”
루미에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말해 봐.”
“뭘 말입니까?”
“무서운 거. 왜 무서워?”
루미에의 주홍색 눈이 란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움받는 게 무섭습니다.”
“누가?”
“제가요.”
“누구에게?”
“란 님에게요.”
란이 눈을 깜박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배를 붙잡고 구르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걸 루미에가 붙잡았다. 하지만 침대에서 떨어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루미에는 그녀 밑에 깔린 꼴이 되어 말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우십니까?”
“루, 루미에―”
킥킥 웃으며 란이 말했다.
“내가 루미에를 미워하는 일은 없어.”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어째서입니까?”
“내가 루미에를 잘 아니까.”
“어떻게요?”
“내가 프? 프? 프 뭐더라? 하여간 뭐 있는데.”
“그게 뭡니까?”
“읽는 자아― 루미에.”
“네.”
“루미에는 강하고 멋진 사람이야. 나는 알아. 행복해질 수 있어. 나에게 미움받는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좋아해, 루미에.”
활짝 웃으며 란이 말했다.
루미에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본래 루미에답게 굴어도 괜찮아.”
내 비위를 맞추느라 그러는 건 좀 싫잖아? 그지이?
그러며 란이 그를 꼭 끌어안았다. 루미에는 잠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건 건강한 숨소리뿐이었다.
루미에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잠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디모디아가 들어와 그 광경을 보고 꺅 소리쳤다.
“가주님! 다, 다, 당신!”
“제가 덮친 게 아니라 주인님이 덮친 겁니다.”
제가 위에 있는 게 아니라 가주님이 위에 계신 걸 봐주시죠.
그렇게 말하고 루미에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잠든 란을 들어 올려 침대에 내려놓았다.
디모디아가 후다닥 달려와 침대 앞을 가로막았다. 루미에가 날카롭게 웃었다.
“저에게는 란 님이 소중하고,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디모디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어?’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눈치를 보는 듯한, 그 살살거리는 미소가 사라졌다.
“그럼.”
루미에는 그대로 방을 나섰고 디모디아는 침대에 누운 란을 돌아보았다.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작게 코까지 고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디모디아는 양팔을 걷어붙였다.
‘일단 옷을 갈아입히자!’
란은 새벽에 눈을 떴다.
‘머리 아파…… 목 말라…….’
주변을 더듬거려 그녀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란은 길게 하품을 하고 옆의 협탁에서 작은 물 컵을 찾아내 물을 마셨다.
‘부족해.’
잠시 고민하다가 란은 우물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서 란은 잠시 머리를 붙잡고 있다가 물 컵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디모디아가 혹여나 깰까 봐 란은 조용히 움직였다.
밤은 밤인지, 천장을 밝히던 마법 등의 대부분이 꺼져 있었다. 진짜 환한 별처럼 몇몇 개만 남아서 반짝이는 게 보였다.
가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란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졌다가 당황했다.
‘두레박이 물에 떠서 물이 안 퍼져.’
물 표면에 닿은 두레박은 둥둥 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줄을 붙잡아 란은 기겁했다.
돌아보니 유스타프였다.
“이, 인기척을 좀 내.”
란이 뭐라고 하는 걸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유스타프는 줄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두레박이 가라앉았고, 그는 그걸 쉽게 끌어올린 후에 물었다.
“한밤에 우물가에서 뭐 하십니까?”
“물 긷지.”
“디모디아는 뭐 하러 데려오신 거고요?”
“자는데 깨우는 거 미안하잖아.”
“제 할 일을 안 하고 주인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게 더 미안해할 일이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입을 비죽이며 얼른 두레박의 물을 물 컵에 퍼서 연거푸 몇 잔 마셨다.
차가운 물을 마시자 좀 살 것 같았다.
“유스.”
“네.”
“나 기억이 안 나.”
“……언제부터요?”
“연회장에서 술을 마시다가, 락투가 영원한 우정을 위해서 건배하자고 하고…… 그 뒤부터?”
“상당히 기억이 안 나시네요.”
“나 이상한 짓 했어? 추태 부리거나 그런 거 아니지?”
“안 그러셨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머리 아파. 속 안 좋아.”
그녀가 투덜거리듯 말해서 유스타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그렇게 마시셨으니 당연하죠. 적당히 마시지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모처럼 좋은 분위기였잖아? 게다가 드워프 예절에서 술을 거절하는 건 무례한 일이란 말이야.”
“이야기하면 그쪽도 이해해줬을 텐데요.”
“그런가…….”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숨에서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게 느껴졌다. 술기운이 다 빠지지 않아 약간 어지럽기도 했다.
“하지만 성과가 좋잖아? 드워프 기술자들도 몇 명 보내주기로 하고, 마법 물품도 꾸준히 만들어 주겠다고 했고. 라치아와 검은 산 일족 사이에 동맹도 맺었고.”
친구라고 불리기도 했고.
그녀가 헤헤 웃었다.
“고생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그렇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했다.
“며칠 더 머무르시겠습니까?”
“응?”
“여기에요.”
“뭐야, 갑자기.”
란이 가볍게 웃었다. 별빛처럼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래도 집이 최고야. 얼른 돌아가자.”
라치아로.
그러자 유스타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렸다. 란은 심장이 꼬옥 쥐어지는 것 같았다.
“네, 돌아가죠.”
라치아로.
유스타프가 낮게 속삭여서, 그건 왜인지 낯간지럽게 들렸다.
뺨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라 란이 화급히 말했다.
“그럼 이제 들어가서 자자.”
“네.”
유스타프는 란을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복도를 걷다가 란이 물었다.
“그런데 유스는 왜 나와 있었어?”
“방금 연회가 끝났습니다.”
“정말?!”
란이 놀라 펄쩍 뛰었다.
“네. 그래서 취기가 도는 것 같아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는 사람이 비틀비틀 나오더군요.”
“비틀비틀 안 나왔어. 그럼 유스, 지금까지 계속 마신 거야? 괜찮아? 취한 거 아냐?”
“그렇게 보이십니까?”
“으음―”
란이 눈을 가늘게 뜨자 유스타프가 낮게 웃었다.
“조금은 취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유스가 취한 틈을 타서 뭔가 부탁해볼까.”
“말씀해 보십시오.”
“으―음.”
란이 멈춰 서서 그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유스타프가 가주가 된 후에도 계속 라치아에 남아 있게 해달라든가……?”
유스타프가 우뚝 멈춰 섰다.
복도의 작은 등을 그가 등지고 있어서, 유스타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란은 차가운 복도 벽에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 돼?”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져 란은 가볍게 숨을 삼켰다.
역광 속에서 푸른 눈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침묵하다가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나중에요. 제 조건을 들어보시고 결정하시지요.”
“뭐야, 조건도 있어?”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 란이 투덜거리듯 말하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있습니다.”
“뭔데?”
“제가 가주직을 이은 후에 말씀드리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한참 란을 내려다보다가 비켜섰다.
“그럼 들어가세요, 누님.”
일부러 덧붙인 듯한 ‘누님’이라 란은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조건일까?’
상속권 포기, 이런 걸까?
‘그런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해줄 텐데.’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생각은 잠깐이었고, 그녀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라치아로 돌아오니 모두가 반가운 얼굴로 란과 유스타프를 맞이했다.
그제야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란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카루소와 데릴은 죽어가는 얼굴로 보고서를 올렸고, 엘리자벳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진행 보고서를 올렸다.
루미에가 싱긋 웃으며 서류를 바라보았다.
“바쁘시네요, 주인님.”
“응, 바쁘지.”
란은 씩 웃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루미에의 말투나 행동에도 변화가 있었다.
‘좋은 쪽으로.’
란 님이라고 부르는 걸 그만두고 주인님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부를 때의 억양이 좀 달랐다.
게다가 ‘뭐라고 하시든 주인님이라고 부를 겁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해서 란은 “정말로 원한다면.” 하고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라치아는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시월에 접어든다.
‘세월 빠르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신년이고, 그러면 유스타프가 성년이다.
‘그러면 가주직도 넘겨줄 거고.’
그리고 라치아에 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유스타프가 조건을 건다고 하긴 했지만,
‘호적에서 파내는 걸 수도 있어.’
이건 가능성이 좀 높았다.
‘하지만 별 상관 없기는 해.’
어차피 새 신분으로 시작할 거였고, 그러면 라치아와 관련된 건 다 버리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호적에서 파내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본래 성으로 돌아가나?
본래 성이 뭐더라?
‘그리고 라치아가 아니면 여기에 남을 명분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
그래도 공녀로 꿀 빨기는 빨았는데, 아쉽다.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레버리가 사람을 시켜 보내준 네모난 상자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새로운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 패와 새로운 이름으로 만들어진 골든로즈 상단의 계좌가 함께 들어 있었다.
언제든지 그 상자만 들고 떠나면 되는 거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르다니.
‘고생 많았다, 란. 정말.’
핫, 하고 란은 눈을 떴다.
‘잠깐. 뭐야, 이거. 주마등? 아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아니거든요.’
란은 정신을 차리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루미에가 “주무시지요?” 하고 말해서 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집에 오니까 좀 덜 피곤한 것 같아. 그런데 루미에.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있는 거 아냐? 블레인에게 돌아왔다고 보고하지 않아도 돼?”
“로스 경에게 대신 부탁드렸습니다.”
루미에가 씩 웃었다.
란은 어쩐지 로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는 길에 로스와 루미에는 대련을 했고, 로스가 져버렸다. 그 후로 로스는 시간이 될 때마다 루미에에게 대련을 신청했는데 전부 다 루미에가 이겼다.
로스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고, 그 뒤로는 마차 뒤에서 열심히 검술 훈련을 하고는 했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이었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모디아는 그걸 보고 “권력 관계가 바뀌어 버렸네요.” 하고 가볍게 평했다.
여행하는 동안, 란은 디모디아가 더 좋아졌다.
은발에 보라색 눈이 자꾸 미로 공작가를 연상시켜서 란이 한번 물어본 적도 있었다.
“혹시 황태자비 전하와 친척 관계라도 되는 거 아냐?”
그랬더니 디모디아가 고개를 갸웃하고 대답했다.
“글쎄요. 벨로인 백작가는 왕국민이지만, 어쩌면 선대에 제국과 피가 섞였을지도 모르지요.”
그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묘하게 카라나 소다보다 거리감이 적었다.
잔소리하는 디모디아는 더더욱 란의 마음에 들었고, 란이 본인에게 직접 그렇게 이야기하자 디모디아는 입을 쩍 벌렸다가 웃었다.
“정말로 가주님은 특이하시네요.”
그게 그녀의 평가였다.
‘게다가 굉장한 미인이고.’
란은 가산점도 더했다.
“가주님, 벌써 일하시는 거예요?”
디모디아가 눈을 찌푸리며 말해서 란은 서류에서 눈을 뗐다.
“아니, 딴생각하고 있었어.”
“딴생각을 하시면서 서류 페이지는 넘어가시나 보죠.”
디모디아의 말에 란은 웃었다. 소다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디모디아도 좀 쉬어야지요. 그건 가주님도 마찬가지고요. 가주님이 쉬시지 못하면 저희도 못 쉽니다.”
“응. 알았어.”
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약간 불편한 얼굴로 소다가 루미에를 바라보았고 루미에가 정중하게 말했다.
“전 그냥 서 있는 나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 잘생긴 나무는 없어요.”
소다는 입 안으로 그렇게 웅얼거리고 헛기침을 한 뒤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남자분이 계시면 편히 쉬기가 어려우니까요.”
루미에가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저는 나무입니다.”
소다가 입을 떡 벌리는데 란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나는 괜찮지만. 역시 직접 보고하는 게 좋지 않겠어? 블레인 경 보기에 내가 민망해.”
란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루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루미에가 거실을 나서자 소다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저분 저런 분이셨나요?”
저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란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몰랐는데, 저런 사람이었나 봐.”
그리고 내가 뭔가 했을지도 몰라.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면 술에 취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니까 루미에가 상당히 묘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참’ 하고 웃으며 말했다.
“드워프들에게서 받아 온 장식품 볼래?”
소다의 눈이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볼래요.”
시종의 손에 들려 나온 장신구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며 소다와 카라는 연신 비명 같은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이 보석 좀 보세요.”
“어떻게 이렇게 반짝거리죠?”
“스스로 빛이 나는 것 같아요. 맙소사. 이 팔찌는 어떻구요? 진짜 나뭇잎에다가 금칠한 것 같아요. 진짜 금이죠? 다 금이죠?”
“응, 진짜 금이야.”
란이 확인해주자 카라도 소다도 모두 잎맥까지 섬세한 금세공을 바라보았다.
반지도 밀그레인(millgrain) 세공이 촘촘하게 들어가 있었는데 인간의 솜씨로는 불가능한 작품들이었다.
“이건 뭐죠? 작은 램프?”
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로 만들어진 램프는 새장을 모티프로 한 아름다운 모양새였다.
“응, 그거 위에 고리를 돌려봐.”
란의 말에 소다가 고리를 돌리자 팟 하고 환한 빛이 켜졌다. 소다가 경탄하며 웃었다.
“마법 도구군요.”
“예쁘고 실용적이에요. 허리춤에 차고 다녀도 되겠어요.”
“맞아요.”
두 사람이 번갈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너무 예쁘지 않아요?”
이미 모든 상자를 여행 내내 열어보고 또 열어본 디모디아가 다른 상자를 열어서 몇 가지 마법 도구를 더 선보였다.
그럴 때마다 소다와 카라는 경탄했다. 작은 단도 역시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거라면 장신구로 패용하고 다니겠어요.”
소다와 카라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렇게 구경이 끝나고 나서 란은 모처럼 유스타프와 함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겨울 준비는 잘 되어가?”
“네. 영지민들에게 표시한 얼음수정을 배분하고, 마법 물품 역시 나눠주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참, 마법 세공사들이 사는 마을을 만드는 건 어때?”
“그것도 괜찮겠군요. 길드를 옮겨올 테니 그걸 중심으로 해서 말이지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탕을 만드는 작업 역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겁니다.”
“정말? 와아―”
란이 작게 환호성을 질러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란은 기분 좋아져서 말했다.
“설백나무 설탕은 정제할 필요도 없이 흰색으로 나오니까 좋은 것 같아. 이름을 눈설탕이라고 짓자! 이것도 브랜드화 하는 거야.”
“얼음설탕이 아니고요?”
“그건 뭔가 이름이 안 예쁘잖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란은 꿈에 부풀었다가 슬쩍 유스타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물론 이걸 맡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겠지…… 내가 앞으로 없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요.”
유스타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렇게 말해서 란은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곧 재빠르게 미소 지었다.
“일루미니티 백작의 아들은 어때? 그쪽은 아들만 셋 아니던가? 성에서 고용한다면 좋아할 것 같은걸.”
“안 그래도 후보를 추리는 중입니다. 총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나에게도 보여줘.”
“이미 서류는 보내놨습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행정관과 회계관 둘만으로는 아무래도 힘들지. 총관이 있으면 좀 더 확실하게 일을 조율할 수도 있을 거고.’
내 일도 상당량 나눠지겠지. 떠날 걸 생각하면 그편이 좋아.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소와 데릴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회계 정리도 깔끔했고, 장부 정리도 빈틈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누님.”
“응?”
“카루소가 그러는데 현금이 많이 남으니까 돈을 빌려주는 게 어떠냐고 하더군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고리대금업자 같은 거?”
“고리까지는 아니지만, 현금을 그대로 놔두는 것도 아쉬우니까요.”
“싫어. 사채업자는.”
란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귀족들에게 사실 돈놀이나 이자 놀음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란의 현대적 감각에는 그다지 좋지 않게 들렸다.
“게다가 돈 못 받으면 그건 그것대로 손해잖아.”
“라치아 공작가에 돈을 안 갚는다고요?”
“으,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게 싫어. 아, 그런데 돈을 빌릴 구석이 필요하기는 하겠고, 그러면 안전한 제1 금융권이 나은 건가…… 우리 영지민들 중에 돈 빌릴 사람이 많아?”
“제1 금융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글쎄요. 영지에 제대로 돈이 돌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고리대금을 진 영지민도 꽤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건 대신 갚아주는 게 좋겠군. 그리고 낮은 이자를 갚게 하는…….”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이 일을 하려고 해도 사람이 꽤 필요하겠는걸.”
중얼거리고 란은 웃었다.
“그래도 라치아 공작령은 작아서 다행이야. 인구수도 다른 공작령에 비하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고.”
“땅이 황폐하니까요.”
“그렇지. 겨울도 엄청 길고. 농사짓기 좋은 곳은 얼마 있지 않아.”
“하지만 눈설탕과 얼음수정이 나오지요. 설백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맞아. 목재로도 가치가 있으니까. 난 좋아해, 색이 예쁜 크림색이라.”
“하지만 무른 게 문제죠.”
“그러네.”
무른 나무는 가공하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아무래도 가치는 좀 떨어진다. 물론 아름다운 크림색 때문에 장식품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목재보다는 설탕이 더 효율적일 겁니다.”
“그것도 그렇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부유한 영지가 되면…… 영지민들도 잘 먹고살게 될 테고…….’
멍하니 란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올렸다.
“전염병.”
유스타프이 눈이 팍 찡그려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 아니. 아냐.”
란은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칼질이 좀 더 빨라졌다.
‘아니지, 전염병은 생각해 보면 린드버그 숙부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영지 상태가 안 좋아져서 피폐해져서…… 더 쉽게 번졌던 거고…….’
란은 힐끗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원작의 유스타프는 숙부의 딸과 결혼했었지.
거기에 대해서 불평을 한 적도 없다. 그 딸을 처리하려고 하지도 않다. 그냥 전염병이 돌았을 때 죽었을 뿐.
시나가 오기 전에도, 유스타프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는 결혼 문제였다. 그때 라치아 공작가는 정말로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빚뿐이어서, 지참금을 많이 가져올 수 있는 여자를 찾는 게 그의 의무였다.
하지만 시나가 오고, 그녀가 얼음수정을 발견하면서 거기서 벗어나게 되었지.
란은 칼질을 멈췄다.
소고기에서 흘러나온 붉은빛 육즙을 바라보며 그녀는 당혹감을 삼켰다.
유스타프가 시나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분명히 그 이유도 있었겠지. 어려운 순간에 이 세계에서 날아와 구명줄을 내려준 은인.
‘만약에 유스가 시나를 안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그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고.’
끙끙거리며 고민하는데 눈앞에서 접시가 치워졌다. 란이 놀라 고개를 드니 유스타프가 가지런히 고기를 자른 제 접시와 그녀의 접시를 바꿔주었다.
“칼질이 힘들어 보이셔서.”
“어? 아냐. 괜찮아―”
“저도 괜찮습니다. 드시죠.”
“미리 썰어 두는 건 안 좋은 거래.”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픽 웃더니 가져간 란의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안 먹는 것보다는 미리 썰어 두는 게 낫겠지요.”
“안 먹는 거 아닌데…….”
그러면서도 란은 스테이크를 얼른 입 안에 넣었다. 확실히 썰려져 있으니 먹기 편하기는 했다. 칼질이 은근히 귀찮으니까.
먹으며 란은 가볍게 생각했다.
‘미래가 바뀌는 건 당연한 거야. 생각해 보면 바꾸려고 내가 고생을 한 거잖아. 나름 나도 예언자인 거니까.’
만약에 시나와 유스타프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둘 사이의 결정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의 단정한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물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연애……?”
휙 그의 푸른 눈이 빠르게 란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절 바라보시면서요?”
그의 물음에 란은 약간 당황해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가 하고 말했다.
“아니, 그냥, 유스타프의 미래 연인에 대해서……?”
“대체 왜 누님이 그런 걸 생각하십니까.”
란은 눈을 깜박였다.
“진짜 그러네.”
내가 왜 그런 걸 고민할까.
“그냥 걱정이 돼서? 그랬나 봐.”
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남은 고기들을 입 안에 쏙쏙 집어넣었다. 적당히 익힌 소고기는 부드러웠고 독특한 허브와 소금 간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었다.
“그 돈 빌려주는 문제는 카루소와 데릴과 한 번 더 이야기해보자. 생각해 보면 둘 다 평민 출신이니까, 영지민에게 나쁘게 하지 않겠지.”
“그건 편견입니다.”
“그런가?”
“네, 오히려 그랬기에 더 혹독하게 착취할 수도 있는 거지요. 귀족이라 몰라서 더 관대해질 수도 있는 거고요.”
“그렇군…… 그럼 편견 없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그러지요.”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란은 식사를 마저 끝냈다.
라치아의 겨울은 빠르게 오고, 길게 간다.
란이 가주로 머무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골든로즈 상회를 통해서 밀을 잔뜩 들여와서 영지민에게 저렴한 가격에 파는 일이나, 마법 도구를 나눠주는 일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땔감을 들여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겨울 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늘 저택 곳곳에도 마법 물품이 가득 채워졌다. 프란체는 재미있는 물건들도 많이 만들었고, 그의 요청에 따라 란은 마법 관련 서적도 잔뜩 구매했다.
작년 겨울이 빚을 갚기 위해 졸라맨 겨울이었다면, 올해 겨울은 여유가 넘치는 겨울이었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모든 게 빠르게 흰 눈에 파묻혔다.
더 이상은 행정적인 사항을 전달할 수도 없다.
겨울은 쉬는 때다.
신년회 준비로 은가시나무를 몇 그루나 베어오고, 사방에 반짝이는 장식을 달았다.
청염 기사단원들은 드워프제 갑옷을 애지중지하며 날마다 반들반들하게 관리했고, 란은 블레인에게 마구도 엘프제로 바꿀 예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침마다 란은 토스트처럼 따끈한 침대 안에서 나오기 싫어서 웅얼거리다가 침대 밖으로 나오곤 했다.
온풍기를 펑펑 돌려서 방 안은 전체적으로 따뜻했지만, 그래도 이불 속만큼은 아니었다.
아침 식사를 하던 란은 유스타프의 말에 놀라 물었다.
“겨울 사냥?”
“네.”
“이 겨울에? 무슨 사냥감이 있어서?”
“빙벽에서 마수들이 내려오니까요.”
“그런 거…… 안 했잖아?”
“예전에는 했습니다.”
“그래?”
란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님이 오시기 전에는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아.” 하고 짧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겨울 사냥은 라치아의 전통입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멈춰 버리셨지요. 그 뒤로 종종 겨울에는 산 아래에 마수 피해가 생깁니다.”
“아아, 맞아. 작년 겨울에 그런 일이 있었지.”
“네.”
“그랬군.”
란이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아? 게다가 신년회 전이잖아? 그런데―”
“겨울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서 신년회를 크게 열 겁니다. 작년에는 공작가 식솔들만 불렀지만, 올해는 가신들도 전부 다 부를까 하는데요.”
그 말에 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 네가 가주가 된 것도 발표하는 자리를 같이 가져도 되겠다. 모처럼이니까 화려하게 할까.”
우리 돈도 많이 벌었고.
란이 빙긋 웃자 유스타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러면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겨울에 사냥이라니, 잘못하면 동사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캠핑용 마법 도구도 만들어 달라고 할걸.
그런 말을 늘어놓으며 란은 뜨거운 옥수수 빵과 나무딸기 잼, 부드러운 홍차를 마셨다.
식사를 끝내고 란과 유스타프는 블레인을 불러서 겨울 사냥에 대해 이야기했다.
블레인은 준비도 해야 하니 사흘 후에 출발할 수 있게 하겠다고 이야기했고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유스타프에게 언제쯤 사냥이 끝날지 물었다.
“글쎄요. 신년회 전에는 끝낼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인데? 그래도 미리 들어와야 할 거 아니야. 사흘 후 출발해서 한 달씩이나 밖에 있지는 않을 거잖아?”
란의 물음에 유스타프는 대답 없이 고개를 기울였고 그게 대답이라 란은 펄쩍 뛰었다.
“미쳤어? 이 겨울에? 한 달씩이나? 마수를 잡기 전에 얼어 죽겠다.”
“하지만 마법 물품도 있고…… 침낭 안이 따끈따끈하니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란이 눈을 찌푸렸다.
유스타프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짧게 2주 정도로 하지요.”
“제발 그렇게 해줘.”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싱긋 웃고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쓸어주고 말했다.
“누님은 너무 걱정이 많지요.”
“네가 너무 태연한 거거든.”
란이 입을 비죽였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걱정이 많은 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미에가 사람을 죽인 걸 봤을 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눈앞의 유스타프도 사람을 죽인 건 마찬가지다.
이게 당연한 세상에서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정말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
“너무 걱정하는 건 그런가?”
란이 중얼거려서 유스타프가 푸른 눈을 깜박였다.
“전 좋습니다.”
“정말? 걱정할 때마다 타박했으면서?”
“타박하지 않았는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어찌나 쌓였는지 오늘 1층 현관문을 사용하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전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방을 떠나자 란은 제 방으로 돌아와서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루미에를 발견했다.
얼마 전에 글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이제 어린아이 수준의 책을 읽을 만큼 글을 읽게 되었다.
“루미에는 안 가?”
“제 주인님을 두고 어딜 갑니까?”
루미에가 책을 덮으며 웃었다.
“유스타프가 그러는데, 기사들 데리고 겨울 사냥 갈 거라고 하더라.”
“겨울 사냥이요.”
어감이 좋지 않아 루미에는 눈을 찌푸렸고 란이 가볍게 설명했다.
“겨울이 돼서 배고픈 마수가 내려오지 않게 미리미리 처치해 두는 거라는데.”
“그런 거군요.”
그의 굳은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제가 가면 주인님을 누가 지킵니까? 안 갑니다.”
“아니, 그건 안 되지. 일단 루미에 너도 청염 기사단 단원이고, 단원은 단장의 말을 들어야 하는 법이야.”
“저는 주인님 건데요?”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해서 란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없어도, 루미에는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하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응?”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서렸다.
“이곳에 와서 저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 망해가는 라치아 공작가를 일으키신 게 주인님이시라고요. 라치아의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호적상으로는 확실히 라치아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걸 다 유스타프 도련님에게 주고 주인님이 물러나셔야 하는 거지요?”
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다른 시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없으니까 저런 말을 한 건가.
“루미에.”
이름을 부르고 란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하며 다가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속닥였다.
“괜찮아. 나 다른 주머니도 착실하게 챙겼거든.”
예상외의 말이라 루미에가 주황빛 눈을 크게 뜨자 란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일단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시작한 거니까. 라치아 공작이라는 자리에 크게 미련도 없고. 이런 건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게 제일이지.”
“하지만 계속 일하시잖습니까. 저와 놀아줄 시간도 없으실 정도로요.”
투덜투덜 하는 말에 란은 다시 당황해서 말했다.
“나랑 놀고 싶어?”
“제가 매일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었나요? 주인님?”
“아니, 농담인 줄.”
중얼거리고 란이 말했다.
“그럼 나가서 썰매라도 탈까……?”
“주인님의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루미에가 등을 슥 돌리며 하는 말에 란은 어쩐지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왜 이렇게 귀엽지?
덩치는 란보다 한참 더 큰데, 어쩐지 귀여웠다.
커다란 개가 슥 뒤돌아선 다음에 어떻게 나오나 슬쩍 한 번 돌아보는―
눈이 마주치자 루미에는 얼른 다시 시선을 내렸고 란은 큰 소리로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오늘은 그럼 루미에랑 놀지, 뭐. 낮에 놀고 밤에 일하면 돼. 어차피 밤이 긴걸.”
란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과 루미에는 몇 겹이나 옷을 꽁꽁 싸매어 입었다. 그리고 썰매 대용으로 쓸 만한 널빤지를 하나씩 가지고 눈밭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모아 “썰매요? 두 분이서?” 하고 말했지만, 란은 “응.” 하고 당당히 대답했을 뿐이었다.
눈은 어디에나 쌓여 있었기 때문에 란은 인적이 드물고 경사가 완만한 곳을 골랐다.
루미에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말로 춥군요.”
“오늘은 그래도 날씨 좋은 거야.”
“그렇습니까?”
“응, 진짜로 추워지면 숨이 바로 서리가 되어버리거든.”
머플러에 내뱉은 숨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얼굴에 달라붙으면 기분 나빴다.
“루미에는 어디 출신이야?”
“여기보다 더 서쪽 출신입니다.”
“그런가. 그럼 춥겠네.”
“주인님도 여기 출신이 아니시면서.”
그 말에 란은 웃었다. 숨이 흰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건 그러네. 그러면 타 볼까.”
란은 그렇게 말하고 널빤지를 펴서 앉았다. 그리고 발을 당겨서 앞으로 널빤지를 밀자 순식간에, 날아가듯이 썰매가 달리기 시작했다.
10초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란은 멈춘 썰매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에메랄드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이어 내려온 루미에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보기보다 재미있는데요.”
“그지?”
“주인님과 함께 타니 더 재미있는 것 같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루미에가 말하고 그녀의 손에서 널빤지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그럼 더 타죠.”
란은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썰매를 타자 이제 온몸이 후끈해졌다. 중간에 넘어져서 눈밭에 구르자 완전히 눈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잠깐만요.”
루미에가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가에서 눈을 닦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란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둘은 더, 더 높은 곳을 찾아서 올라갔다.
그렇게 질릴 정도로 썰매를 타고 란은 비틀거릴 정도로 마구 웃으며 성 안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눈투성이가 되셨네요.”
묘하게 공손한 어조로, 유스타프가 현관에 서 있다가 란을 맞이했다. 그 말에 란이 다시 웃었다.
“나 나무에 부딪쳤어.”
유스타프의 얼굴이 굳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그런데, 나무에서 눈이 떨어져서―”
그녀가 마구 웃었다. 가지에 쌓인 눈에 푹 묻혀버렸다. 그 상황에는 당황했는데, 자신보다 더 당황해서 “주인님!” 하고 부르며 눈에서 자신을 꺼낸 루미에를 생각하자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차갑네요.”
“응, 뺨이 얼었나 봐. 감각이 없네.”
유스타프의 손이 따듯한지 아닌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혀를 찼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아니, 동상은 아니야. 괜찮아. 이제 좀 간질간질한걸.”
유스타프는 란의 눈이 불꽃 튀듯 빛나는 걸 보고 낮게 신음했다.
“뜨거운 물을 준비했으니 가서 푹 쉬십시오.”
“응! 그리고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썰매를 만들어야겠어.”
그리고 방울을 잔뜩 달아야지.
란은 그렇게 말하며 뒤뚱뒤뚱 제 방으로 올라갔고 루미에가 그 뒤를 따르려는 걸 유스타프가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
루미에는 충실하게 멈춰 서서 물었다.
“옷은 벗어도 될까요?”
눈투성이 옷이 따뜻한 실내에 들어오면서 녹아, 그의 발아래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들어가서 벗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앞장섰고, 루미에는 올라가는 란의 뒷모습을 보았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근처의 작은 응접실로 들어가 루미에는 머플러와 외투를 벗어서 탁탁 털었다. 그 안에 입은 외투를 또 벗고서 루미에는 똑바로 섰다.
“말씀하십시오.”
“사흘 후부터 겨울 사냥이고, 블레인이 명단을 짰어. 블레인은 네가 네 위치를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걸 걱정하던데.”
그 말에 루미에는 가지런한 속눈썹을 내리깔며 물었다.
“도련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에는 살의도 제어 못 하는 미친개를 주워 왔다고 생각했는데.”
유스타프가 느리게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벽장에 기대며 말했다.
“제법 목줄에 익숙해진 모양이지.”
“애정보다 강한 목줄은 없지요. 주인님이 저에게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루미에가 달콤하게 웃으며 수줍게 말하자, 응접실의 온도가 단박에 떨어졌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유스타프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네.”
“란은―”
뭔가 이야기하려다가 유스타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충실한 개는 싫어하지 않아. 개라는 본분만 잊지 않으면.”
“도련님도 아시잖습니까. 주인님이 어떻게 사람을 보는지.”
유스타프의 새파란 눈이 가늘어졌다. 루미에 역시 더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그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마주 보았다.
유스타프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충고 하나 할까.”
루미에는 대답하지 않았고, 유스타프도 대답을 바란 게 아니어서 말을 이었다.
“란이 어떻게 사람을 보는지, 대하는지 알아.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해 두는 거야.”
말하고 나자 유스타프는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사심 없는 녹색 눈동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과 다정함.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잔인한 애정과 다정함이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고쳐서 생각하고 말했다.
“겨울 사냥에는 빠져도 상관없어. 마음대로 해.”
그리고 가보라는 듯 돌아섰고 루미에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
겨울 사냥으로 기사단원들이 빠져나가자 란은 기합을 넣어 신년회 준비를 시작했다.
가기 싫어하는 루미에를 일부러 사냥에 밀어 넣은 것은 란 자신이었다. 그래도 합숙은 빠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단체 생활을 하면 자연스럽게 친목이 생기기 마련이다.
란은 거기서 루미에가 제외되기를 원하지 않아서 굳이굳이, 일부러 그를 가라고 부추겼다.
유스타프에게는 드워프에게 선물받은 등불을 빌려주었다.
“비싼 거니까 돌아와서 돌려줘야 해?”
출발하는 그의 앞에 서서 말하자, 그는 웃고 말 위에서 허리를 숙여 그녀의 뺨에 키스해주었다.
“다녀오지요.”
란은 얼굴이 붉어져 펄쩍 뛰었고 유스타프는 픽 웃고는 말을 출발시켰다.
줄줄이 말을 탄 기사단이 출발하는 걸 배웅하고서, 저택에는 묘하게 활기가 없어졌다.
그걸 내버려 두지 않고, 란은 기합을 넣어서 시녀장을 불러 신년회 무도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얼마나 크게 열지에 대해서도.
신년회 겸 무도회 소식은 순식간에 저택에 퍼져서 모두가 들뜬 얼굴이 되었다.
란은 일루미티니 백작, 와일드 남작, 란스 남작에게도 각각 초대장을 보냈다.
저택에는 장식으로 황금빛과 진홍색의 커다란 리본들이 매달리고, 커튼도 녹색에 금빛 자수가 놓인 것으로 바뀌었다.
벽에는 평소의 태피스트리 대신에, 라치아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빽빽하게 걸렸다.
신년회 만찬 메뉴와 자리를 정리하고, 란은 느긋하게 뜨개질을 하고는 했다.
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는 일은 그녀에게 잘 맞았다.
그리고 한밤중이 되면 시녀들 몰래 레버리가 준비해 준 상자를 열어보고는 했다.
한참 그 상자를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그 상자를 깊숙한 곳에 넣고 란은 잠들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