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드워프의 방문
Chapter 4. 드워프의 방문
“드디어 도착했다!”
란은 자신의 침대에 온몸을 던졌다.
“가주님, 먼저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맞아요.”
소다와 디모디아가 란을 채근했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란은 ‘으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행은 분명히 호화 여행이었다. 잠도 천막에서 다리 쭉 뻗고 간이 침대에서 자고, 식사도 잘 나왔다.
중간중간 마을을 꼭꼭 들러주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집이 최고야.’
그래도 지치는 건 어쩔 수가 없다니, 몸이 그사이에 호사에 길들여졌나 보다.
8월의 하늘 저택은 수도만큼 덥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름은, 여름. 산과 정원은 녹음으로 우거지고, 화려한 분수대에서는 수정 같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얼음처럼 차가워서 자유 시간이 되면 시녀들은 한낮의 계곡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다음에 여름용 제복은 좀 더 밝은 색으로 해야겠어.”
란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아직 기침이 마저 떨어지지 않아서 소다는 그녀의 목에 얇은 스카프를 둘러 주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 란은 로스에게 눈짓했고, 로스는 문을 열었다.
집사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가주님, 손님분들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이렇게 타이밍 좋게?
“드워프분들이십니다.”
“어? 진짜?”
란은 자리에서 폴짝 일어났다.
“네, 일단 응접실에 모셔드렸습니다만.”
“지금 바로 가지.”
란은 그렇게 말하고 얼른 방을 나섰다. 응접실로 들어가니 드워프 두 명이 응접실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것 봐, 여기 보통 모퉁이 돌이 있는데 말이야. 이음매가 없잖아?”
“그렇군. 마법으로 지었다는 게 정말인가? 하지만 봐 봐. 그에 비해서 이쪽 난로 벽은 조잡하기 그지없다고.”
“이건 나중에 만들어 넣은 거 아냐? 아무리 봐도 50년 안팎으로 보이는데?”
“그럼 틀만 마법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창문은?”
투박한 손이 유리창을 두들겨 본다. 란은 어쩐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하늘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제야 드워프 두 사람이 란을 돌아보았다. 키는 란의 가슴께쯤 될까? 땅딸막하지만 술통처럼 단단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명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봤던 분이 아니네?’
머리카락과 수염이 북슬북슬해서 알아보기 힘들 것 같지만, 드워프는 가문마다 수염과 머리 장식 그리고 문신이 달라서 그걸로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란 로미아 드 라치아라고 합니다.”
“파센이라고 합니다.”
“난 제투라라고 하네.”
“말을 곱게 해야지.”
“아니, 저 여자애는 우리보다 백 살은 어릴 텐데?”
“그래도 인간 쪽 대표잖아?”
파센의 말에 제투라가 끙하고는 콧수염을 어루만지고 말투를 바꾸었다.
“제투라라고 합니다. 실언했군요.”
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두 분 모두 말씀 편하게 하세요.”
“봐 봐!”
“어허. 우리만 편하게 하면 쓰나. 그쪽도 그럼 편하게 하게.”
파센이 란을 가리키며 말해서 란은 다시 웃었다.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어. 그럼 두 사람 모두 앉지.”
란이 자리를 권해 둘은 소파에 앉았다.
란은 시종에게 좋은 술을 가져오게 시켰다. 드워프식 환대다. 드워프에게 차를 내오는 것은 인간에게는 맹물을 내오는 것보다 더 심한 접대였다.
라치아는 북쪽이었고 북쪽 사람들은 술을 잘 빚는 법.
라치아의 꿀 술은 드워프들을 금방 들뜨게 하였다.
“인간이 술은 또 잘 만든단 말이야. 이거 음료 대신으로 딱 알맞은걸.”
“푸투라 놈, 이런 걸 혼자만 마시고 말이야. 그런데 더 독한 건 없나?”
란이 피식 웃고 말했다.
“독한 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오신 이유는 듣고 싶군요.”
파센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은 주문받은 갑옷을 가지고 왔지만 말이야~ 직접 입은 걸 보고 조절해 줘야지. 푸투라가 말한 걸로만 만들기는 좀 그래.”
“그리고 가능하면 광산도 보고 싶군. 어째 채굴된 후 모양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야.”
란은 반색했다.
드워프의 광산 기술을 전수해 준다면야 두말할 것도 없이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이건 좀 미안한 말인데…….”
파센이 멋쩍은 듯 수염을 꼬았다.
“그쪽에서 주문한 물품을 못 만들게 되어 되어서 말이야……”
란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드워프들은 제 물건에 자신이 넘쳤고 인간과 오랜만의 상거래에 처음에는 의심하기도 했지만 퍽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장인은 제 솜씨를 뽐낼 장소를 원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물꼬가 트이자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거래가 진행되었다.
드워프족은 14개의 가문이 다스리고 있고 각각의 일족이 도시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란이 거래하는 일족은 런드 가문과 페하이드 가문이 함께 다스리는 검은 산 일족이었다.
그나마 덜 폐쇄적인 일족이라고 할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란의 물음에 제투라가 손을 저었다.
“산울림이 영 이상해.”
“산울림이?”
“그래, 우리가 도시를 확장하고 있다는 건 알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의 지하 도시는 화려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도시들이 있고 도시를 잇는 왕의 대로들은 드워프 일족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산이 예전 같지 않단 말이야. 다들 산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광물을 캐는 것도 다 중지돼서 말이지.”
‘검은 산…… 산울림…….’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란은 끙끙거리다가 결국 포기했다. 나중에 생각이 나겠지.
“알겠어. 그럼 먼저 갑옷부터 봐 주겠어? 기사단원들이 정말로 기대하고 있거든.”
란의 말에 드워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거 좋지.”
“일이 끝나면 좋은 술을 내놓는 걸 잊지 말라고.”
란은 두 사람을 기사단실로 안내했다. 드워프 둘이서 제국을 횡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골든로즈 상단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물건 역시 깔끔하게 포장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기사단원은 느닷없는 가주의 등장에 무슨 일인가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블레인이 란을 슬쩍 보았다가, 드워프 두 사람을 보았다.
“주문한 갑옷이 도착해서 말이야. 직접 피팅해주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씩 웃으며 란이 말하자 블레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옷 말입니까?”
“응,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블레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드워프제 갑옷.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갑옷이었다. 지금도 전통 있는 가문에서는 대대로 물려주기도 하는 물건이다.
무슨 일인가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기사단원들 역시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파센이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무리를 직접 해주지 않으면 안 돼서 말이야. 각자 상자를 가져오면 순서대로 봐 줄 테니 와주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블레인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가 당황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서른에 가까운 진중한 기사단장에게서 평소에 못 보던 모습이지만, 그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사단 역시 잔뜩 들떴다.
“그럼 여기는 두 분께 맡겨도 될까요? 블레인, 부탁할게.”
“영광입니다.”
블레인이 정중하게 말해 란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절부절못하는 로스를 보고 씩 웃었다.
“로스 경도 여기서 물건을 확인해 보도록.”
“아닙니다. 호위는―”
“어차피 하늘 저택인걸. 호위는 더 필요 없어. 어쨌든 너도 갑옷은 확인해 봐야 하니까.”
“그, 그렇다면.”
로스는 결국 욕망에 져 버렸다. 란은 키득거리고 두 드워프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다시 남기고 자리를 떴다.
“자, 그러면 저 상자를 가지고 오라고. 상자 옆에 이름이 쓰여 있으니 말이야.”
제투라가 한쪽에 쌓인 나무 상자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기사들이 한 번에 우르르 상자로 뛰어가서 제 이름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블레인은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파센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블레인에게 설명했다.
“라치아 가주는 통이 크던데? 미스릴이 섞인 갑옷으로 주문했어. 처음에는 100% 미스릴로 주문하더구만. 그런데 미스릴만으로 만든 갑옷은 우리 쪽에서도 이제는 희귀해서 말이지.”
오히려 미스릴과 다른 금속을 섞은 후 강화 마법을 이용하는 게 가볍고 튼튼한 갑옷을 만들 수 있지. 고대 드워프 마법이란 사실 대장장이 기술이나 다름없다고―
이런 식의 자랑이었지만, 블레인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미스릴(mythril).
백은색의 이 광물은 별빛을 머금은 반짝임과 동시에 최고의 강도를 자랑했다.
인간의 땅에서는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광물이 있어도 다룰 기술이 있는 인간은 없었다.
오로지 드워프와 엘프의 광물이었다. 이걸 드워프식으로 정련하면 미스릴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엘프식으로 정련하면 릴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스릴 갑옷이라면 예전에 들어본 적 있습니다. 화룡(火龍) 아타라를 토벌한 용사전에서요.”
‘정말로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하고, 블레인은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타라? 아― 제3시대 이야긴가? 그때보다 지금 우리 기술이 더 좋다고. 완전히 미스릴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강도는 보장하지.”
파센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단원들은 자기 이름이 붙은 상자를 찾아내서 무겁지도 않은지 시시덕거리며 각자 연무장에 자리를 잡아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러더니 탄성과 침묵이 이어졌다.
다들 말없이 갑옷을 살펴보고 만져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문득 블레인은 남은 상자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해 그가 작게 물었다.
“상자는 저게 전부입니까?”
“응? 그런데? 왜?”
“아뇨, 그게 제 몫이…….”
제투라가 저쪽에서 씩씩거리며 “그만 만지고 이리 오라고! 입고 봐야 하니까!” 하고 소리쳐서 블레인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휘파람 소리에 제정신이 돌아온 듯 기사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블레인이 픽 웃고 말했다.
“늦었어.”
그 말에 기사들 사이에 멋쩍은 미소가 지나갔다. 블레인이 말했다.
“번호 순서대로 자기 갑옷을 들고 앞으로 가도록.”
“네!”
단원들이 대답하고는 빠르게 일렬로 줄을 섰다. 파센이 고개를 끄덕이고 블레인에게 말했다.
“자네가 단장이군? 자네는 따로 갑옷이 마련되어 있으니 같이 가세나.”
블레인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
“드워프가 왔다고요?”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은 서류에서 고개를 떼고 그를 보았다.
“응, 갑옷을 직접 조율해주러 왔다고 하더라고.”
“갑옷이 도착했습니까?”
드물게 그의 음성에 들뜬 기색이 섞여 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응, 지금쯤 맞춰주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드워프제 물건 수급에 차질이 생길 것 같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니, 그게 산울림? 같은 게 있어서 광산을 지금 통제하는 중…… 아아아아!”
갑자기 퍼뜩 머릿속을 후려치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누님?”
유스타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 괜찮아. 아니, 그러니까―”
란은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맞아. 새로운 광물이 탄생했어. 검은 산의 별모래. 나디움.’
검은 산의 울림은 곧 사라지고, 드워프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깊이 들어간 땅 아래에서 광천수가 터진다. 터진다기보단 드워프들이 깨운 상급 정령이 짜증을 낸 거라고 해야겠지만.
여하튼 반짝이는 모래 알갱이 같은 광물을 머금은 물이 단숨에 터져 올라오는데, 그래서 광산과 지하 도시가 물에 잠겨서 검은 산 일족이 멸망해 버린다.
그리고 그 광천수에 섞인 별모래는 미스릴보다 더 가볍고 마법 반응률이 높으며 강도도 강해서, 귀한 광물이 된다.
없어진 검은 산 일족을 기리는 뜻에서 검은 산이라는 뜻의 드워프어.
즉, 나디움이라고 불리게 되고.
‘어떻게 하지?’
“누님.”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깨를 꽉 쥐며 단호하게 란을 불렀다.
란이 퍼뜩 정신이 들어 유스타프를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상쾌하게 그녀의 머릿속을 갈랐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뭐라고 설명을 할까.
“유스.”
“네.”
“만약에, 네가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밝힐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중요한 사실이라 꼭 알려주고 싶은데. 너무 터무니없는 사실이야.”
말하면서도 약간 횡설수설하나 했는데 유스타프가 핵심을 짚어냈다.
“거짓말 같은 진실과 진실 같은 거짓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겁니까?”
“어! 바로 그거야!”
란이 무릎을 쳤다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진실 같은 거짓말도 사실 생각이 안 나…….”
대체 드워프에게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만약에 원작대로 가지 않으면……? 이 산울림이 내가 아는 산울림이랑 다른 거면?’
그러면 도시 전체를 피신시켰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되어버리지 않는가?
란은 생각에 잠겼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며 물었다.
“저에게 이야기해주시지는 않을 겁니까?”
“그게―”
란의 얼굴에 곤란함이 지나갔다.
“생각을 좀 정리하고.”
슬쩍 란은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유스타프는 그런 란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루미에와 릴리의 거취는 어떻게 할 겁니까. 계속 성에 머물게 놔둘 건가요?”
“응? 아니, 아냐. 성 아랫마을에 살 곳을 구할 동안 잠깐만이야. 아, 하레쉬에게도 연락을 넣어야 하는데.”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막 도착했다 했더니만, 일이 연이어 터지네.”
작게 몇 번 기침하고 란이 투덜거렸다.
“여름 감기가 끈질기기도 하네.”
“꿀 차라도 올리라고 하죠.”
유스타프가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종을 불러 약꿀 차를 주문했다.
빙벽의 벌 중에서는 독특한 허브 꿀만 모으는 벌이 있는데, 그 벌집에서 얻은 꿀은 시원하고 달콤한 복합적 허브향이 났다.
양이 적어 밖으로 팔지도 않는, 라치아 공작가의 상비약 같은 것이다.
시녀가 타온 약꿀 차를 느리게 한 모금 넘기며 란이 말했다.
“유스, 루미에와 릴리 말인데……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누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제 시선이 닿는 곳에 둬야지요.”
‘이중적인 의미.’
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뜨거운 차를 후후 불었다. 차를 다시 마시고 그녀는 모른척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가주직도 이제 1년…….”
말을 하다가 란은 딱 멈췄다.
“누님?”
란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유스!”
“네.”
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찻잔을 황급히 내려놔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지만, 란은 신경 쓰지 않고 허둥지둥거리다가 손을 축 늘어트렸다.
“아니, 그게. 잠깐만 기다려!”
란이 그렇게 말하고는 치맛자락을 붙잡더니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유스타프는 의아해졌지만, 얌전히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복도에서 달리는 소리가 났다.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란은 옆구리에는 긴 상자를 끼고, 다른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어디 화병에서 꺼내온 게 아닐까 싶었다.
‘대체 왜?’
의아해하며 그가 고개를 드는데 란이 꽃을 내밀었다.
“유스, 생일 축하해.”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 그를 때리고 지나갔다. 란이 얼굴이 붉어져서 웅얼거렸다.
“미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 아니, 이건 변명이 안 되네. 아니 왜 네 생일에 마차 여행 일정을 잡고 그러는 거야? 으, 이것도 아니네. 하여간.”
란은 끙끙거리며 이어 말했다.
“까먹어서 정말로 미안해. 생일 축하해,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노래하듯 말하고 그녀는 긴 상자를 내밀었다.
“마음에 들면 좋겠다.”
유스타프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받아 들었다. 매끄러운 나무 상자는 짜맞춤 공예로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유스타프는 뚜껑을 열었다.
드러난 검신을 유스타프는 손끝으로 매만졌다. 나무인데도 어찌나 매끄럽게 다듬었는지 금속이나 상아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검을 집어 들어 상자에서 빼낸 후에 검집에서 검을 뺐다.
스르릉하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검날이라 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힐끔힐끔 유스타프의 눈치를 보았다.
“어때……?”
결국 그녀가 먼저 물었고 유스타프는 천천히 검을 도로 꽂아 넣었다.
“마음에 듭니다.”
“정말?”
“네.”
그렇게 말하고 유스타프가 검집을 꽉 쥐었다가 그녀에게로 돌아서서 허리를 숙였다.
“―?!”
그녀의 뺨에 키스한 유스타프가 순진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누님.”
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그래. 외국은 뺨에 키스하기도 하지? 그런데 여기도 그런 전통이 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입술에 가깝지 않았어?
그냥 내 감각이 그랬던 건가?
“생일을 축하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유스타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가서 란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왜?”
저도 모르게 물으니 유스타프가 “글쎄요. 받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하고 짧게 말했다.
그제야 란은 아차 싶었다.
친어머니가 계실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계모가 온 후로 유스타프는 생일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카데미로 가고는 그래도 친구들이 해주지 않았으려나,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란은 더더욱 분해졌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다음에는 꼭 화려하게 해 줄게. 성인식이잖아?”
“그렇군요.”
유스타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가 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때는 제가 가주가 되어 있겠지요.”
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새파란 눈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아니,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가 제 검을 들어 검집에 느리게 키스했다. 희고 매끄러운 검집에 살며시 입술이 닿는다. 그러면서도 눈은 똑바로 란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란은 어쩐지 제가 키스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뺨에 닿았던 부드러운 감촉과 열기, 가깝기 때문에 느껴졌던 향기까지 낙인찍히듯 뚜렷하게 기억났다.
그의 검은 속눈썹이 살짝 내리깔리고 푸른 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둡고 달콤한 빛을 띠고 그녀를 바라본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하지요.”
키스를 끝낸 그가 빙긋 웃으며 말해 란은 주문에서 풀려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애써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든다니 나도 기분 좋네.”
상투적인 문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음, 남은 서류는 나중에 볼 테니까.”
그리고 유스타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란은 후다닥 방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얼굴 빨개졌을 거야.’
어쩐지 더웠다.
달아오른 뺨을 부채질하며 란은 복도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우뚝 멈춰 서서 란은 옆에 있는 대리석 기둥에 이마를 박았다.
‘정신 차려, 란. 지금 그럴 때야?!’
차가운 대리석에 달궈진 뺨이 서늘하게 식은 게 기분 좋아 그녀는 좀 더 얼굴을 기둥에 밀착시켰다.
‘유스를 보면서 두근두근할 때가 아니잖아. 제길, 왜 남주는 그렇게 멋진 거야? 하긴 그렇게 멋있으니까 남주지. 괘씸한 자식. 시나가 있는데 왜 나에게―’
웅얼웅얼 헛생각을 한참 하고 란은 간신히 심장을 진정시켰다.
“좋아.”
정신 차렸다!
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스타프가 멋있는 건 당연하다. 그 올리비아도 홀딱 넘어가지 않는가? 자신이 두근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넘어가지 말자.
마음을 다잡고 란은 툭툭 제 뺨을 두들기며 걷기 시작했다.
‘드워프는…… 일단은 생각을 좀 해보자. 그리고 지금은.’
란은 멈춰 서서 복도 밖을 내다보았다. 깎아지르게 솟아오른 빙벽이 노을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라치아는 문 근처니까…….’
문득 반대쪽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빙벽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대현자 이브리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빛나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든 현자.
“나에게 당신만큼의 힘과 지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중얼거렸다가 란은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하긴, 이브리아도 애인 문제는 어떻게 하지 못했지.’
애정은,
마음은,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로 단숨에 변모할지 몰라서 무섭다.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저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약한지 란은 잘 알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복도를 다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하늘 저택은 큰 건물 여러 개가 모여 있었다.
한쪽 끝의 건물에서 반대편 끝의 건물까지 걸어가려면 적어도 십여 분은 걸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기사단실이나 하녀들의 숙소 같은 장소이고, 란이 쓰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손님방으로 향했다.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니 잠시 후 루미에가 문을 열었다가 란을 보고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지내기에 어때?”
“아주 좋습니다.”
과장되게 루미에가 허리를 숙여 보이며 웃었다. 란은 안으로 들어가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최고급 손님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방이었다. 응접실 하나에 방이 두 개, 욕실이 딸려 있는 구조였다.
“릴리는?”
“자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일단 엘프 의사에게 연락은 보내보겠지만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어. 그 사이에 편하게 묵어도 좋아.”
“네.”
루미에가 그렇게 말하며 소파 위에 앉으시라고 정중하게 손짓했다. 란은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의 루미에는 도무지 그녀의 눈앞에서 세 명을 뚝딱 죽인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란이 소파에 앉자, 루미에는 재빠르게 그녀의 다리 옆,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란은 신음을 흘렸다.
“이거 그만하면 안 돼?”
“마음에 안 드시면 어떻게 해 드릴까요?”
루미에가 무릎걸음으로 약간 물러나더니 납작 엎드렸다. 란은 행여나 그가 다시 발등에 키스할까 봐 발을 뒤로 뺐다.
“아니, 그게 아니라!”
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앉아. 여기!”
그녀가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들기자 루미에는 냉큼 그 자리에 앉았다. 마치 란이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유스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란이 알고 있는 루미에는 상처가 많은 우울한 눈빛의 거친 남자였다. 유스타프가 차가운 눈빛에 매끄럽고 서늘한 타입이라면, 루미에는 으르렁거리고 화내는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전혀 아니잖아?
‘그야 릴리가 살아 있고, 구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머리로는 납득하는데, 어쩐지 납득되지 않는 구석도 있었다.
란은 루미에를 빤히 바라보았고, 루미에는 피하지 않고 란을 마주 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란은 루미에의 뺨을 살짝 만졌다. 그러자 루미에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바닥에 입맞춤했다.
“으앗!”
놀라 란이 손을 빼자 루미에가 어깨를 움츠리며 미소 지었다.
“루, 루미에. 부탁인데 이런 짓 그만하면 안 될까.”
“주인님께서 다른 걸 원하신다면요.”
“나는 루미에에게―”
‘바라는 게 없어.’라고 말하려다가 란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바라는 게 있어.”
루미에의 주홍 눈이 어두워졌다.
“하명하십시오.”
“행복해져.”
말하고 란은 쑥스러워서 웃었다.
“이게 내가 루미에에게 바라는 거야. 그냥 릴리랑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거.”
유스타프에게 바라는 것도 그거였다. 유스타프, 루미에, 시나.
내가 좋아하는 캐릭― 아니,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
‘사람들이.’
다시금 란은 그 말을 되새겼다. 루미에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바라는 걸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하지만 나 보기보다 힘이 없으니까.”
“란 님께서 들어주실 수 있는 겁니다.”
“일단 말해봐.”
루미에는 웃음과 다정함을 머금은 짙은 초록색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신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디모디아는 란이 완전히 책상에 엎드려 있는 걸 보고 말했다.
“가주님, 피곤하시면 그냥 침대에 가서 주무시는 게 어떠세요? 이제 저택에 돌아오신 지 이틀째인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닐까요?”
“응? 으응…….”
란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쓰다만 종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주인으로.
아니, 그래도 되는 걸까?
물론 시나가 여기에 올 때, 루미에 역시 라치아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노예로 있는 건 아닌데…….
‘어떻게 방법이 없으려나. 유스타프와 상의해 볼까.’
란은 의논 상대로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렸다. 하지만 곧 ‘암살 의뢰’라는 말이 떠올라 어깨를 늘어트렸다.
‘피곤하다.’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짝이는 새 갑옷을 입은 로스가 얼른 란의 뒤에 따라붙었다. 란은 그 모습을 보며 ‘털갈이가 막 끝난 후 제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는 멍멍이’ 같다고 생각했다.
로스는 가슴을 쭉 펴고, 청염 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진 새 갑옷을 자랑스럽게, 보란 듯이, 평소에는 어깨에 걸치는 망토조차도 뒤로 전부 넘겨버리고 과시하고 있었다.
‘하긴 요즘 기사단원들이 다 저 모양이지.’
은색으로 반짝이는 갑옷은 움직일 때 소음도 적었고, 부딪쳐도 요란한 쇳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낮고 둔탁한, 묘하게 종소리를 닮은 소리가 작게 났다.
예전에 낡은 갑옷 위를 망토로 가리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망토를 모두 넘기고 보란 듯이 갑옷을 드러내고 걸었다.
파센과 제투라가 갑옷을 조율하는 일은 생각보다 좀 더 오래 걸렸다.
입고 걷거나 동작을 해보라고 하고, 벗긴 다음 다시 여기저기 갑옷을 두들긴 후 다시 입히고 동작을 해보라고 하는 걸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조정이 다 끝나지 않은 채였다.
로스는 ‘가주님의 호위’라는 특권을 발휘해서 앞 번호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까칠함이 줄어든 것 같고.’
예전 같은 무례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역시 뇌물이 직빵이었나.’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유스타프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가니 유스타프는 자리에 없고 다이아몬드 홀에 있다는 말을 들어서 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늘 저택에는 무도회를 위한 홀이 모두 세 개가 있는데, 각각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름만으로 생각하면 다이아몬드가 가장 화려할 것 같지만, 에메랄드가 가장 화려하고 큰 홀이었다.
그 다음이 루비고 다이아몬드가 가장 작은 홀이었다.
로스가 홀의 무거운 문을 열어주어 란은 안으로 들어갔다.
연회가 없는 홀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자체로도 화려했다.
흰색과 투명한 유리로 번갈아 체스 판처럼 만들어진 바닥이 다이아몬드 홀의 자랑이었다.
“유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아 란이 목소리를 높이자 테라스 문이 열렸다.
“누님.”
“뭐야, 밖에 있었어?”
“네, 잠깐 살펴볼 게 있어서.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청염 기사단 말이야.”
“네.”
“신분에 상관없이 실력만 되면 들어갈 수 있는 거지?”
란의 물음에 유스타프는 멈칫하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느리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실력은 누가 테스트해?”
“블레인 경과 제가 합니다. 본래라면 가주님이 하시겠지만.”
“난 그쪽은 젬병인걸.”
란이 손을 흔들었다.
“루미에?”
갑작스럽게 그가 그렇게 물어 와서 란은 어깨를 움찔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냥.”
“그가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합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란이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말을 뚝 끊더니 손을 놓고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놀라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유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와 란은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러나 유스타프는 그저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을 뿐이었다.
“열납니다.”
“어? 어어?”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며 이마를 떼자 란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놀랐다.’
“의사를 부르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저도 모르게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유스타프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내리깔렸다.
“누님?”
“아니, 열나는 거 아냐.”
“열나는데요.”
“괜찮은데.”
네 얼굴이 너무 가까워져서 뜨거워진 거야.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괜찮아.” 하고 한 번 더 말했다.
“쯧.”
그가 혀를 차더니 몸을 돌려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유스?!”
놀라 란이 버둥거리자 유스타프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제 상태도 모르는 바보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괜찮다니까?”
“열나는 건, 괜찮은 게 아니죠.”
당황한 로스가 뒤를 쫓아오며 말했다.
“도련님, 제가―”
“옆에 있으면서도 가주의 상태도 모르는 멍청이랑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차갑게 내뱉은 말에 로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황한 란이 몸을 세우려고 애쓰자 유스타프가 쉽게 그녀의 자세를 바꾸어주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 보게 되어 란이 말했다.
“아냐, 나 진짜로 괜찮다니까?”
“누님.”
“응.”
유스타프가 힐끗 로스를 보았다가 란에게 낮고 작게 속삭였다.
“원하시는 대로 다정하게 대해드리고 있습니다.”
“!!”
란은 입을 헤 벌렸다가 순간 발끝부터 확 치고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건 이걸 말한 게 아닌데!”
“아닌가요?”
딴청 부리듯 되묻고 유스타프는 순식간에 치료실에 도착했다. 로스가 허둥지둥 문을 열어 의사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가 유스타프와 란을 보고 후다닥 달려 나왔다.
“가주님? 도련님?”
“누님께 미열이 있으신 것 같다.”
“나, 난 괜찮다니까.”
“일단 가주님, 이쪽에 앉으시지요.”
유스타프가 란을 진료실 의자에 내려놓자 의사는 얼른 네모난 유리판 같은 것을 가져왔다.
그걸 사람에게 가져가 비추면 물에 기름띠가 뜨는 것 같은 모습들이 생기는데, 의사는 그걸 읽어서 진단을 내리고는 했다. 그걸 진찰판이라고 불렀다.
진찰판으로 란을 살펴본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열이 있으시군요. 게다가 기침이 계속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요즘 너무 무리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란은 민망해져서 유스타프를 힐끔 보았다. 서류 작업 대부분은 유스타프가 해주고 있었다.
요즘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다른 문제들이었지.
“누님은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손등으로 살짝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응.”
순순한 대답이 나왔다.
의사가 열난다고 말하자마자 어째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다.
‘이런 게 뻗을 곳 보고 다리 뻗는다는 걸까.’
“그럼 약을 올려드리겠습니다.”
의사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그럼.” 하고 허리를 숙이더니 쉽게 란을 안아 들었다. 란은 약간 당황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드는 거 어렵지 않나?’
“나, 나도 걸을 수 있어.”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니시니까요.”
유스타프의 대꾸에 란은 당황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내가 걸을래.”
“상냥하게.”
유스타프의 말에 다시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니까, 그건 이런 게 아니라니까. 아니, 안 그래도 돼.”
“안 그래도 된다고요?”
“응.”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건 술 취한 자의 헛소리였어!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맘대로 하죠.”
그리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유스!”
“네.”
“걸을 수 있다니까.”
“싫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봅니다. 소리치지 마시죠.”
“~~!”
란은 결국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사실, 부끄럽지만 싫지는 않다.
그 싫지 않음을 유스타프가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유스타프는 얌전해진 란을 보고 피식 웃은 후에 말했다.
“좀 더 의지하셔도 되는데요.”
“충분히 의지하고 있는걸.”
란이 그렇게 말하고 슬금슬금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열이 올라서?
아니면 지쳐서?
아니면 의지하고 있다고 보여주려고?
어쨌든,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졌다.
그녀가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자 유스타프는 살짝 자세를 바꿔 그녀를 한쪽 팔로 안아 들고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유스.”
“네.”
“피아노 쳐줘.”
“지금 말인가요?”
“응.”
“싫습니다.”
“에이~”
투덜거리고 란은 다리를 가볍게 앞뒤로 흔들었다.
유스타프가 곤란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엄청 어른스러워서 란은 심장을 누가 꽉 붙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쳐 드리겠습니다.”
“응…….”
고개를 떨구며 란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가 잠시 그런 란을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원하시면 테스트를 받으라고 하지요.”
“어?”
“루미에 말입니다. 그를 기사단에 넣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정말? 아! 물론 억지로 넣어달라는 건 아니야. 실력이 그럴 만하다면 부탁해.”
“네.”
“철저하게 하지요.” 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에게 안긴 채로 방으로 돌아가니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하지만 단순한 열 때문이라고 란은 설명했다.
“역시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았어요.”
“맞아요. 좀 쉬셔야지요.”
시녀들이 번갈아가면서 맞장구를 쳐서 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무리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밤늦게까지 일하시는데 왜 무리하시는 게 아니에요?”
소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항의하듯이 말했다.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은 일중독이에요.”
디모디아가 말해 란이 항의하려고 하는 순간, 로스가 검을 뽑아 들며 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디모디아 역시 휙 몸을 돌렸다.
깜짝 놀란 건 란과, 소다. 그리고 카라였다.
“아, 이번에는 무방비가 아니군.”
창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란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레쉬, 제발 정문으로 다니면 안 되나요?”
“널 바로 만나지 못하는 게 귀찮아.”
하레쉬의 말에 란은 끙하고 신음을 내뱉었고 로스가 투덜거리며 검을 꽂아 넣은 후 창문을 열어주었다. 하레쉬가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문득 그의 갑옷에 시선을 주었다.
그가 눈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져.”
로스가 뭐라고 하기 전에 란이 재빠르게 말했다.
“드워프제 갑옷입니다.”
“아, 좀 멀어져 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고 하레쉬가 란에게 다가오더니 갸웃했다.
“환자가 너인가?”
“아뇨. 다른 환자예요.”
유스타프가 하레쉬에게 공손히 말했다.
“오신 김에 누님도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쪽이 아프면 나도 곤란하니까.”
하레쉬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뻗어 란의 이마를 어루만지더니 눈 밑을 살짝 눌렀다가 다시 손목을 붙잡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윗배를 꽉 눌러 란은 “꽥” 하는 오리의 최후 같은 소리를 냈다.
“아픈가?”
“당연히 아프죠!”
란이 소리를 지르듯 말하자 하레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몰라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군. 좀 정신을 쉬면 어떤가?”
“그렇게 스트레스 받고 있지는…….”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하레쉬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고, 소다가 잽싸게 펜과 종이를 넘겼다. 하레쉬는 처방전을 적어 내린 후에 던지듯 란에게 내밀었다.
“이런 건 그냥 임시방편이야. 말 안 듣는 환자는 싫고.”
“아하하.”
란은 어색하게 웃고 처방전을 받아 디모디아에게 건넸다.
“의사에게 이대로 지으라고 할게요.”
디모디아가 그렇게 말하고 쌩하니 방을 나갔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진짜 환자를 보러 갈까요?”
“제가 안내해 드리죠.”
유스타프가 한발 나서며 말해 란은 당황했다.
“어? 유스가? 하지만―”
“전 믿지 못하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익숙한 내가 낫지 않을까?”
“누님은 쉬시죠. 그럼.”
유스타프가 하레쉬에게 손짓하자 하레쉬는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란을 보고 말했다.
“다녀오지.”
그리고 두 사람이 힁허케 방을 나가 란은 ‘괜찮을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누님은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긴 복도를 걸어가며 유스타프가 물어 하레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즘 무리한 게 아닌가 싶고. 하는 일의 양을 생각하면 저 정도인 게 다행이지.”
“그렇군요.”
하레쉬는 힐끗 또 다른 인간을 보았다.
“인간에 대해서 좀 알아봤지.”
“그래서 이 정도인 거군요.”
인간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건지, 아니면 이 정도씩이나 되냐는 감탄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레쉬는 엘프답게 유스타프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본 바로는 슬슬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닌가 하고.”
“뭘 말입니까?”
“누님의 몸을 천천히 약하게 하는 약을 원한다, 같은 이야기.”
그 말에 유스타프가 걸음을 멈추더니 휙 몸을 돌렸다.
“말하면 주실 겁니까?”
비꼬는 것도 아니고, 진심인 것도 아니고. 푸른 눈이 무감정하게 자신을 봐서 하레쉬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죽이는 약은 안 만들어.”
“그렇다면.”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약과 독약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그림자와 빛.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다.
독약의 역사는 치정과 복수의 역사이기도 해서 하레쉬는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알았다.
‘하긴.’
그걸 원했다면, 자신에게 란을 진찰해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자신은 확실히 ‘란의 편’인 의사니까.
‘이런. 인간에게 너무 물들었나.’
하레쉬는 스스로가 우스워 혀를 찼다. 유스타프를 떠본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란에게 해를 끼치는지가 궁금했으니까.
즉, 정말로 자신은 ‘란의 편’인 거다.
‘너무 깊게 관여하고 있군.’
하레쉬는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를 보았다. 릴리의 방 앞에 도착한 유스타프가 문손잡이를 잡은 후 그를 돌아보고 느리게 말했다.
“전 제 건 무척 소중하게 여깁니다.”
유스타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아주 소중히요.”
그리고 하레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루미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스타프와 하레쉬를 본 루미에는 누군가를 찾는 듯 살짝 너머를 살펴보았고, 유스타프는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며 말했다.
“누님께서 아프셔서 내가 대신 왔다.”
“그러셨군요.”
루미에는 어디까지나 공손하게 대답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하레쉬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다가 말했다.
“환자는?”
“저쪽입니다.”
침실을 가리키며 루미에가 안내했다. 침실 문손잡이를 잡은 하레쉬가 말했다.
“너 들어오지 마라. 냄새나.”
당황해 루미에가 멈칫하는데 하레쉬가 슥 안으로 들어갔다.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킁킁 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냄새난다, 하는 말이 수치로 느껴지기도 오랜만이라 그는 얼굴이 붉어졌다.
밑바닥에 있으면, 씻지 않는다. 못한다. 그러니 냄새나는 건 당연하고 그런 말도 수치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답게 대접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방 그런 감각을 되찾아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하지만 냄새 안 나는데!’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항의하고 싶은 걸 눌러 참았다.
“문을 열어둬도 되겠지요.”
루미에의 말에 하레쉬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당황해 일어나는 릴리를 보았다.
“오빠……?”
덩치가 크고 귀가 뾰족한 그는 한눈에도 인간이 아닌 게 보여서 릴리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레쉬가 짤막하게 말했다.
“난 의사다.”
“아!”
그제야 릴리는 란 님이 이야기해주었던 엘프 의사를 떠올렸다.
“그럼.”
경계심이 누그러든 걸 본 하레쉬가 바로 릴리의 얼굴을 붙잡았다. 움찔했지만 릴리는 얌전히 그가 붙드는 대로 있었다.
한참 이리저리 살피고 맥을 짚어본 하레쉬는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났다. 반응이 좋지 않아 루미에는 침을 삼켰다.
“이건 못 고쳐.”
릴리의 입이 헤 벌어졌다. 루미에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릴리 앞에서!
“여기서는.”
하레쉬가 덧붙이고 눈을 찡그렸다.
“엘프 마을로 데려가면 가능성이 있을까? 좀 오래 걸리겠지만.”
“얼마나 걸립니까?”
유스타프의 물음에 하레쉬가 릴리의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중얼거렸다.
“1년에서 3년? 편차가 커서 뭐라고 말 못 해 주겠군.”
유스타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어쩐지 가뿐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안 돼.”
하레쉬가 딱 말을 끊었다. 그가 눈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 루미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환자면 모를까, 저 인간은 안 돼. 곁에 있기만 해도 진득진득한 피비린내랑 시체냄새가 난다. 사형 집행인이라도 했던 건가? 그것보다 더 몸에 밴 냄새다만.”
루미에의 얼굴이 굳었다. 유스타프가 태연하게 말했다.
“살인이라면 저도 했습니다.”
“너랑은 달라.”
딱 잘라 말하고 하레쉬가 이어 말했다.
“하여간 얘 병은 요양이 필요하고, 인간의 땅에서는 안 돼. 데려가 준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야. 그런데 저 인간까지? 말도 안 되지.”
릴리가 그 말에 하레쉬의 손에서 벗어나 후다닥 루미에에게 달려가 안겼다.
“싫어. 오빠랑 떨어지기 싫어!”
“릴리…….”
루미에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릴리가 흐느끼며 말했다.
“싫어, 싫어. 오빠랑 있을 거야. 나 또 혼자 있기 싫어.”
어엉어엉 우는 여동생을 루미에는 달랬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레쉬를 보며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좀 더 수명을 연장시킬 수야 있겠지. 그래 봐야 반 년? 1년?”
릴리가 흠칫하고 외쳤다.
“거, 거짓말이에요. 나 이제 덜 아픈걸요.”
“지금 잠깐은. 안 좋은 환경에 있다가 옮겨졌으니 몸이 편해져서 잠깐 좋아 보이는 거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나빠질 거다.”
하레쉬의 말은 배려도 없었고, 거침도 없었다. 그가 말했다.
“나야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말할 거면 빨리 말해.”
그가 힐끗 창밖을 보았다가 말했다.
“내일 밤, 이 시간까지.”
그리고 엘프어로 뭔가 중얼거렸는데 욕이 틀림없었다.
“그럼 간다.”
그리고 창문을 열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어지간히 견디기 힘들었나 보군.’
유스타프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냄새라니, 자신은 전혀 모르겠는데.
그리고 약간의 불쾌감.
자신 역시 저런 식으로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읽힐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건 좀 불쾌했다.
유스타프는 하레쉬가 열고 나간 창문을 닫고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잠깐 할까?”
루미에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릴리의 어깨를 밀어냈다.
“릴리, 오빠 잠깐만 이야기하고 올게.”
“싫어!”
“릴리.”
곤란한 어조의 루미에의 말에 릴리는 움찔하고 얼른 손을 뗐다.
“이, 이야기만 하고 올 거지?”
“응. 금방 올게. 정말로.”
루미에는 몇 번이나 말하고 릴리를 침대로 데리고 돌아간 후에 침실을 나왔다.
그 사이 유스타프는 거실 소파에 멋대로 앉아 있었다. 루미에는 앉지 않고 그 건너편에 섰다.
“란에게 뭐라고 했어?”
유스타프의 직설적인 물음에 루미에는 움찔했다. 잠시 후 루미에가 말했다.
“란 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말씀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유스타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루미에를 바라보았다. 루미에는 똑바로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저런 눈이라면 오히려 익숙하다.
물건을 보는 것 같은 눈.
“란이 기사단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하던데.”
그 말에 루미에는 오히려 놀랐다. 약간 흔들리는 눈을 보고 유스타프는 정말로 그가 부탁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좀 더 짜증이 치솟았다. 그걸 드러내지 않고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매끄러운 어조로 말했다.
“원하면 시험을 보러 나와도 좋아. 테스트는 엄격해서, 죽거나 다칠 수도 있지만.”
“보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6시에 보는 거로 하지. 연무장에서.”
“네.”
대답하고 루미에는 고개를 숙였고 유스타프는 그걸 보다가 휙 말없이 방을 나갔다.
✥✥✥
오랜만에 란은 늦은 아침을 즐겼다. 브런치를 먹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그녀는, 응접실에 루미에가 들어오자마자 마시던 차를 거의 뿜어낼 뻔했다.
“루미에?!”
놀라 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루미에가 애교 있는 미소를 짓다가, 상처에 눈을 살짝 찌푸리고 다시 웃었다.
“그렇게 놀라실 줄은 몰랐는데요.”
“얼굴이 왜 그래?”
“합격했다고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어? 뭘?”
“기사단 말입니다.”
“진짜? 테스트한 거야?”
“네.”
“잘됐다.”
란이 웃는 걸 보자 루미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며시 지워졌다.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가 꾹 닫히고, 그는 다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 덕분이지요.”
“루미에가 열심히 한 덕이지. 참! 어제 하레쉬랑 어떻게 됐어? 같이 가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루미에는 고개를 숙인 후 하레쉬의 말을 전했고 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루미에 마음이 안 좋겠네. 모처럼 릴리랑 다시 만났는데…… 릴리는 뭐라고 해? 안 가겠다고 하지 않아?”
“제가 설득했습니다.”
“그랬구나…….”
란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건강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저도 똑같은 말을 했답니다.”
“아이가 너무 어른스러워지면 왠지 슬프더라.”
“네.”
루미에는 간결하게 대답했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레쉬는 엘프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을 테고, 릴리에게 잘 대해줄 거야. 나도 부탁할게.”
“감사합니다.”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용은―”
“아, 어차피 엘프는 인간의 화폐로 거래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내가 지급할 예정이야.”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하고 란이 손을 흔들었다.
“관대한 주인님이시네요.”
루미에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주인님 같은 거 아니잖아, 하고 말하려던 란은 루미에가 슥 머리를 내밀자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만져 주지 않으시나요?”
“으음―”
마치 애교를 피우는 커다란 개를 보는 것 같다. 하며 란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루미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은 후에 말했다.
“그럼 주인이 되어 주시는 거지요?”
“루미에.”
“제가 바라는 건 그것입니다.”
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반년간은 해 줄게.”
“반년인가요?”
“응. 그 이후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루미에가 그녀의 손목을 살짝 붙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그의 손가락이 슥 팔 안쪽을 훑었다.
란이 “흐약.”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빼자 루미에가 속삭였다.
“뭐든 시켜주세요, 주인님.”
란이 끙, 하고 말했다.
“그럼 일단 그 ‘주인님’부터 그만둬 줘. 그리고 치료받자.”
란은 그렇게 말하고 설렁줄을 당겨서 의사를 부르게 했다.
의사에게 치료받는 루미에를 보면서 란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유스타프랑 블레인에게 이야기해서, 호위로 붙여달라고 하면 되려나? 어차피 로스 혼자서 내 호위를 다 하는 건 힘들었으니까. 아니면 로스를 돌려보내든가…… 아, 그러면 보기에 좋지 않은가? 내 사람으로 채워 넣는 것처럼 보이는 건 바라지 않는데.’
란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블레인은 피아노 소리에 의아해하며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가니 유스타프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블레인이 말했다.
“오랜만에 치시는군요.”
“손가락이 다 굳었어.”
유스타프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블레인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블레인은 그가 피아노를 싫어하는 걸 알기에 갑자기 왜 피아노인가, 싶었지만 용건을 이야기했다.
“아침에 테스트하신 루미에 말입니다.”
유스타프는 이어 말하라는 듯 말끄러미 그를 보았다. 블레인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정말로 기사단에 받아들이실 겁니까?”
“실력은 입증했지.”
“네, 하지만.”
그건 기사의 검술이 아니다, 하고 블레인은 항의하고 싶었다.
“청염에는 없는 타입이지만, 실전형은 언제나 중요하지. 좋은 대련 상대가 되어 줄 거다. 번갈아서 대련시켜.”
“…….”
블레인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래서야 그저 대련 상대로 데려왔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왜?”
유스타프가 그의 침묵에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한계까지 거의 빠듯하게 돌려.”
“도련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서 블레인은 아차 했다.
“블레인 와일드.”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그렇게밖에 의사 표시를 못 하면 하지 말고. 불쾌하니까.”
유스타프가 가볍게 건반을 두들겼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미스 터치.
한숨을 내쉬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그래서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럼 나가 보도록.”
“존의.”
블레인은 허리 숙여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유스타프는 다시 피아노에 집중했다.
그러다 그는 재빠르게 피아노 뚜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빠르게 문 쪽으로 걸어갔지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란은 코앞에 서 있는 유스타프를 보고 움찔, 놀랐다.
“유스?”
“문을 열어드리려고 했는데요.”
“어떻게 알았어?”
“뭘 말입니까?”
“내가 온 거.”
“그 정도는 압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주변을 둘러본 뒤에 눈을 찡그렸다.
“호위는 어쩌고요?”
“어차피 저택 안이잖아.”
“그래도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해서 란이 뺨을 부풀렸다.
“하지만 유스는 안 데리고 다니잖아. 솔직히 나보다 유스에게 더 필요한 거 아냐?”
“전 제 몸을 지킬 능력 정도는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스타프가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피아노를 본 란이 눈을 깜박였다가 말했다.
“피아노 쳐 주세요.”
“싫습니다.”
유스타프는 단호하게 말하고 소파를 가리켰고 란은 “치.” 하고 중얼거리고 얼른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유스타프가 설렁줄을 당겨 마실 것을 가져오게 하고 말했다.
“다음에도 호위를 두고 다니시면 로스 경을 문책하겠습니다. 아니면, 다른 자를 호위로 붙일까요?”
로스가 많이 불편하시다면, 하고 유스타프가 덧붙여 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로스를 내 호위로 붙여서 꽤 소득도 있었고. 일단 나와 로스가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는 것만 해도 큰 수확이지. 게다가 통합의 의미도 크니까.”
이제 와서 로스를 내 호위에서 빼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란은 그렇게 중얼거렸고 유스타프가 그녀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그보다 호위로써 잘하는가가 중요한 거지요. 말씀드렸듯이 로스와 같이 다니는 게 싫으신 거면, 새 호위를 붙이겠습니다.”
“아― 그거 말인데.”
“네.”
“혹시 루미에에게 맡기면 안 돼?”
내 호위.
슬며시 덧붙인 말에 유스타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하지만 테스트도 통과했고―”
“이제 통과한 것뿐이지요. 게다가 누구를 호위할 만한 능력을 가진 자도 아니고요. 다른 자를 고르십시오.”
“그게, 그런데…….”
란이 힐끔힐끔 유스타프를 살피다가 말했다.
“내가 약속했거든.”
“취소하세요.”
“유스.”
“취소하세요. 그 새끼가 과거의 정으로 뭘 부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청탁은 좋지 않은 겁니다, 누님.”
거친 말이 유스타프에게서 터져나와 란은 흠칫했다.
똑똑.
그때 타이밍 좋게도 노크와 함께 시녀가 차 도구를 들고 들어왔다. 차 도구를 세팅하자 유스타프는 시녀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고 제가 차를 타기 시작했다.
“제 핑계를 대셔도 좋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가 차를 타는 걸 바라보았다.
단정한 손가락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건 보기 좋았다.
차 스푼으로 가볍게 두 스푼.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힘차게 따른 후, 뚜껑을 덮고 티코지를 씌우기.
모래시계를 돌려두고 유스타프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누님, 누님 목숨은 소중한 것이고 아무에게나 맡겨도 되는 게 아닙니다.”
“잠깐만 들어 봐. 호위라는 건 내 아이디어였고, 사실 루미에가 바란 건, 그게, 말로 하려니까 엄청 민망한데. 내 것이 되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요.”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란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걸 들어주셨다는 말입니까?”
아까와는 전혀 다른 매끄럽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유스타프는 침묵했다. 란이 허둥지둥 덧붙였다.
“이상한 뜻은 아니니까. 그런데 루미에는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아직 날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도. 그래서 딱 반년만 내가 주인님을 해주기로 했어. 반년이면 루미에도 일상생활에 적응할 테고, 그러면 주인님 노릇도 끝.”
란이 양 손바닥을 쫙 펴 보였다.
“어쨌든 루미에는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재활 훈련 같은 게 필요할지도 모르고.”
“7월의 비.”
유스타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은으로 짜인 찻잎 거름망을 다른 찻주전자 입구에 올린 후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찻잎이 남은 찻주전자와 거름망은 치워버리고 찻물만 남은 찻주전자를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웠다.
“유스.”
“네.”
“유스 집사 해도 잘할 것 같아.”
그 말에 그가 눈을 찌푸리자 란이 진지하게 말했다.
“칭찬이야. 칭찬.”
“어디가 칭찬입니까?”
“차 따르는 모습이 멋있어서……?”
푸른 눈에 짜증이 담겨서 란은 재빠르게 시선을 내리고 차에 퐁당퐁당 설탕을 넣기 시작했다.
“하여간 그래서 6개월간은 내가 루미에의 주인이니까. 호위를 시키면 안 될까 했지.”
“안 됩니다. 그것과 그건 별개의 문제지요.”
유스타프는 제 몫의 차를 따른 후 말했다.
“불쾌합니다.”
“어?”
“누님이 그렇게 하시는 게 말입니다. 기존 청염 기사단원들에게 좋게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가…….”
란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야 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 루미에가 ‘용병왕’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실력자가 된다는 걸.
그러니까 청염에 넣어도 전혀 손해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렇게 생각될지도 몰라.’
낙하산 인사처럼 생각되는 게 아닐까.
“테스트, 봐 준 건 아니지?”
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유스타프가 “그럴 리가요.” 하고 말했고 란은 안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됐다고요?”
“응, 루미에의 실력은 내가 보증할게.”
그러자 쯧, 하고 유스타프가 혀를 찼다. 란은 당황해 눈을 굴리며 유스타프를 살피다가 말했다.
“유스.”
“네.”
“불만 있으면 말해.”
“말한다고 들으실 내용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내가 루미에를 너무 밀어줘서 그래?”
“…….”
대답이 없는 그를 보자 란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유스, 질투하는구나?”
저도 모르게 놀리듯 목소리가 나왔다. 유스타프가 무슨 소리냐며 타박하겠지만, 그래도 웃음이 실실 나오는 건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유스타프는 놀란 듯 움찔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약간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어?”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란 쪽이었다.
“질투하고 있으니, 관대한 누님. 절 부추기지 말아 주시죠.”
란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응? 아니, 왜?’ 하는 생각과 함께 찻잔을 꽉 붙잡았다.
한참 뒤에 란이 말했다.
“유스.”
“네.”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요.”
“…….”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란이 유스타프를 바라보다가 후르륵 차를 빠르게 마셨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란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나 한 달 정도 자리 비울지도 몰라.”
란이 눈을 찌푸리고 덧붙였다.
“드워프 마을에 직접 가 볼까 하고.”
“거길 왜 갑니까?”
“들었던 이야기가 약간 거슬려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말하고 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허락해줘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란이 머릿속으로 읽은 내용을 더듬다가 내린 결론이 바로 저거였다.
직접 가서 이야기하기.
광산을 직접 둘러보고, 땅울림을 듣고, “이 땅울림은!” 하고 광천수가 터질 것 같다고 말하는 거다.
그냥 ‘산울림이 좀 있거든.’ 하는 걸 듣고 ‘그거 이상하네요.’ 하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수상쩍지만, 직접 듣고 판단을 내리는 건 좀 더 신뢰가 가지 않을까?
‘정 안 되면 정령을 부르는 방법도 있고.’
검은 산 밑에 잠들어 있는, 광천수를 터트린 범인의 이름을 란은 알고 있었다.
최후의 방법이지만, 최고의 방법이기도 했다.
이 방법이든 저 방법이든 하여간 직접 가봐야 했다.
‘그야 손해 볼 생각은 없으니까.’
정령의 이름을 불러 부탁을 하게 되면 란, 자신이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다. 그걸 그냥 드워프들 모르게 자원봉사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일이 터진다면, 드워프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히 정령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말도 안 됩니다. 라치아의 가주가 어딜 갑니까.”
“유스타프를 임시 가주로 할게.”
산뜻하게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그리고 후 하고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같이 가죠.”
“어?”
“같이 가는 걸로 하지요.”
“어? 말도 안 돼! 우리 둘 다 자리를 비울 수는 없잖아? 유스, 생각해 봐.”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아니, 아닌데. 유스, 네가 임시 가주가 되는 거야. 내가 없는 사이에.”
거기서 오는 이득을 생각해 봐.
“드워프 마을에 가려면 제가 가야죠. 가주가 직접 움직이는 거라면, 저 역시도 함께 갈 겁니다. 누님께서 억지를 부리시니, 저도 이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습니까?”
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유스도 직접 가서 드워프들과 친교를 구축해 두는 게 좋겠지. 내가 떠나도 거래는 계속해야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금방 납득이 되었다.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드워프들이 허락해 줄 때의 이야기지만.”
제투라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같이 가보고 싶다고?”
“응, 그 땅울림이 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하거든.”
“우리도 모르는 걸 네가 안단 말이야?”
파센이 흥 하고 콧방귀를 크게 뀌며 말했다.
“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
란이 그렇게 말하자 드워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파센이 물었다.
“어떤 울림이라고 짐작하는데?”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야. 직접 가서 들어보겠어.”
신중하게 란이 말을 고르자 파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좋아.”
“잉? 인간 계집을 달고 돌아가겠다고?”
제투라가 눈썹을 꿈틀하며 말하자 파센이 말했다.
“상관없잖아. 해를 끼칠 만한 인간도 아니고. 대신 인원은 최소한으로 해라.”
“알겠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쉽게 허락이 떨어져서 다행이다.’
란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최소한의 인원이라…….’
란은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출발이 사흘 뒤라고 정해지고 나서, 하레쉬가 릴리를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하늘 저택 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쩐다.”
“진짜로 새하얗네?”
연신 감탄하던 두 남자는 응접실 안에서는 약간 긴장한 태도였다.
유스타프가 응접실로 들어서서 두 사람을 보더니 말했다.
“진짜로 올 줄이야.”
“헐, 너무하시네.”
“고향에 자랑 잔뜩 하고 왔거든?”
유스타프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이 그에게 항의하는데 란이 이어 들어왔다.
“누님.”
유스타프가 그녀를 돌아보았고 란은 살짝 미소 지었다.
“유스타프의 손님이라고 하기에. 인사차 들렀어요.”
한 명은 붉은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이었고, 한 명은 약간 창백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주근깨가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카루소라고 합니다.”
“데릴입니다. 유스타프와는 아카데미 동기이지요.”
고동색 머리카락의 데릴이 덧붙여서 란은 ‘어라, 어디서 들어본 듯한……?’ 하고 끙끙거리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유스타프가 영입한 인재분들이군요. 라치아에 온 걸 환영합니다.”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며 란이 인사했고 카루소는 얼굴이 붉어져서 버벅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유스타프가 혀를 찼다. 데릴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환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귀족의 예법에는 익숙하지 않으니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유스의 친구라면, 제게도 소중한 손님이지요. 그럼 일단 편히 묵으세요.”
“아니, 바로 일에 투입시키죠.”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을 보았다.
“자리 두 개가 비었거든. 회계관이랑 부회계관.”
카루소가 씩 웃었다.
“맡겨만 주신다면.”
“그 전에 봉록이 얼마인지…….”
데릴이 손을 들며 말했고 란은 당황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막 오셨는데…… 잠깐은 쉬는 편이―”
“아뇨, 저희가 떠나기 전에 일을 잔뜩 맡겨두고 가는 편이 낫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지요.”
안 그래도 그녀 앞으로도 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행정관에게 맡길 일도 가득이었다.
도로를 재정비하고 기반 시설을 보강하는 등, 라치아에 들어오는 흘러넘치는 부로 영지를 새롭게 가꾸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1, 2년 사이에 끝낼 일은 아니니까.’
그만큼 초석은 단단해야 하고, 란은 밀린 일과 앞으로의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회계관이 없었기 때문에 란과 유스타프가 회계관의 일을 나눠서 하고 있었다.
‘그럼 바로 숫자에서 해방인 건가?’
란은 순식간에 ‘바로 일 시키자.’ 하는 유스타프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부탁할게.”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살짝 미소 지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데릴과 카루소는 ‘저 자식이 웃네?’ 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유스타프가 방을 나가며 손짓하자 허둥지둥 란에게 인사를 하고 따라 방을 나섰다.
란은 응접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인재 영입…… 다행이다…….’
문득 란은 드워프 마을에 가서 인재 영업을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몇 명 데리고 와서, 우리 영지 도시화 계획을 시키고 말이야. 번쩍번쩍하게 하고…… 돈도 많으니까…… 헐? 괜찮은데?’
안 되면 꼭 광천수를 막은 공으로라도 인재를 데려와야겠다.
란은 그렇게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유스 친구라니.’
생각보다 평범한 남자아이들 같아서 놀랐다.
‘아니지. 평민인데 유스타프에게 그렇게 말하려면 보통 깡은 아닌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보통 담력이 아니니 범상찮은 인물들인 건 확실했다.
‘그럼 회계 일만 빠져도 훨씬 내 일은 수월해지지.’
숫자 계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란은 기뻤다.
“좋다.”
중얼거리고 란은 느긋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루미에는 잘 있으려나……?”
아침에 울음을 참으며 떠나는 릴리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레쉬가 나쁜 사람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절한 엘프인 것도 아니니까. 아무래도 낯선 곳으로 가니 걱정도 되겠지.
‘루미에가 함께 가면 좋았을 텐데.’
하레쉬가 루미에를 거절한 이유를 란은 모르고 있었다.
루미에도, 유스타프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란은 그냥 ‘외부인에 민감한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루미에에게는 좀 미안한데…….’
란은 괜히 가책이 들었다. 그의 주인이 되겠다고 했지만, 딱히 뭔가 해주는 게 없었다.
‘호위도 못 하게 됐고.’
하지만 드워프 마을에 가는 여정의 일행에는 넣었다.
일행은 란, 유스타프, 루미에, 로스, 디모디아.
이렇게 다섯이었다.
블레인과 엘리자벳이 거품을 물고 반대했지만, 란은 단호했다.
기사단을 이끌고 드워프 왕국에 들어갈 수는 없잖은가?
게다가 많은 인원이 오히려 눈에 띌 수도 있다. 이건 은밀하게 다녀오는 거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간신히 진정했다. 그래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란은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로 눈을 떴다. 창문 밖에 정오의 햇살이 찌르듯이 반짝였다.
‘루미에를 찾아가 볼까.’
엘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 그래도 마음이 좀 나아지지 않으려나.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루미에는 어깨까지 올라온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땀이 툭툭 턱을 타고 떨어졌다.
“다음.”
블레인이 짤막하게 말해 루미에는 느리게 몸을 펴고 새 대련 상대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원은 슬쩍 블레인의 눈치를 보았다.
아침부터 루미에는 쉬지 않고 대련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벌써 일곱 번째 상대였다.
그런 상대에게 달려드는 건 기사로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과 상사의 명령이 항상 같이 갈 수는 없는 법.
그는 목검을 치켜 올렸다.
“시작.”
블레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는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 된 거 상대를 빠르게 때려눕혀 주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루미에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반사로 검을 피해내고 제 검을 휘둘렀다.
딱!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루미에는 입술을 깨물고 그대로 검을 밀어붙였다. 검날이 서로 미끄러지자 기사는 그걸 퉁겨내고 다시 검 끝을 루미에에게 향했다.
그 순간 루미에가 반대 손을 뻗어 기사의 손목을 잡았다. 완전히 빈틈을 찔려 어? 하는데 루미에가 손목을 비틀고 반대쪽 목검으로 그의 관절을 올려쳤다.
“악―!”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쓰러진 상대의 머리를 향해 목검을 휘두르는데 블레인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텅―!
그의 브레이슬릿과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만.”
블레인이 말하자 루미에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뒤로 물러섰다.
“괜찮은가?”
블레인이 몸을 돌려 묻자 기사는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의사!”
블레인의 말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진찰판을 펴 보았다.
루미에는 땀 때문에 눈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며 그걸 바라보았다. 어쩐지 현실 감각이 없었다.
‘아직 못 끝냈는데?’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블레인 경? 루미에?”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루미에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확 현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제야 입이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루미에가 상대에게 말하자 블레인이 그를 뒤로 물러나게 하며 말했다.
“데리고 의무실로 가게.”
“네. 그렇게 심하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진찰판을 가방에 넣으며 그렇게 말하고 기사를 조심스럽게 일으켜서 그를 데리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뭐야? 사고 난 거야?”
연무장 근처에서, 연무장에 들어가도 되나 서성이며 란이 목소리를 높였다.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대련 중에 부상은 흔한 일입니다.”
“루미에는? 괜찮아?”
“네, 저는…….”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블레인은 루미에를 바라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제어를 못 한 거지.”
흠칫 루미에의 어깨가 떨렸다. 망설이던 란이 결국 연무장에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의사와 함께 가는 기사를 곁눈질하며 후다닥 블레인에게 다가왔다.
“부상자는? 어떻대? 두 사람 다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블레인이 그렇게 말한 뒤 루미에를 보았고, 루미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란은 그렇게 말하고 루미에를 보았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루미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를 부르자 루미에가 웃었다.
“네.”
그린 듯한 미소로 답하는 말에 란은 눈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오늘은 대련 그만하지.”
“네.”
블레인은 그렇게 대답하고 루미에에게 말했다.
“씻고 돌아가서 쉬게.”
“네, 단장님.”
루미에는 공손히 답했다. 그리고 란에게 말했다.
“더러우니 저는 먼저 가서 씻겠습니다. 주인님은 편안히 이야기 나누세요.”
그리고 총총 연무장을 떠났고 란은 어색해졌다.
“주인님이요?”
블레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어서 란은 끙 하고 손을 저었다.
“그런 게 있어.”
잠시 블레인은 침묵했다가 물었다.
“루미에의 과거 이력을 아십니까?”
“어? 조금…….”
“그럼 알려주십시오.”
“아― 그게.”
블레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구나. 하지만 이야기했다가 편견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란은 고민하다가 블레인을 똑바로 보았다.
“블레인 경. 내가 경을 믿고 말한다는 걸 알아줘.”
“물론입니다.”
“루미에는 불법 검투장의 검투노예였어.”
그녀의 말에 그가 눈썹을 꿈틀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검술이…….”
“응.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주겠어? 아무래도 출신 때문에 편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블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살기가 담긴 공격 아니면 잘 싸우지 못하는지 알겠군.’
그리고 어째서 유스타프가 한계까지 밀어붙이라고 했는지도.
루미에는 시합을 하면 무조건 전력으로 상대를 ‘죽이는 것’만 생각했을 거다.
기사의 싸움은 그것과 다르다.
전쟁의 선봉에서야 당연히 상대를 ‘죽이는 것’만 생각하겠지만, 그 외의 때는 전략에 따라서 움직인다.
즉 싸움의 제어가, 고삐가 필요하다. 죽이는 것 말고도 다른 걸 생각해야 한다.
호위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걸 익히려면 몸으로 감각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가주님.”
“응?”
“저자는 위험합니다.”
블레인의 말에 란은 허탈하게 웃었다.
“알아.”
눈앞에서 세 사람을 단숨에 죽이는 걸 봤는걸.
“하지만 루미에는 분명히 좋은 기사가 될 거야. 그것도 알아.”
빙긋 웃으며 란이 덧붙이자 블레인은 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부럽군요.”
“응?”
“가주님께서 그렇게 믿어주신다는 점이 말입니다.”
“블레인 경도 믿고 있어.”
눈에 부릅 힘을 주며 하는 말에 블레인은 낮게 웃었다.
“그거 감사하군요.”
기사단실은 얼마 전에 새로 샤워실을 정비했다.
란은 이것저것 마법 물품을 잔뜩 주문했고, 자동 펌프도 그중의 하나였다.
루미에는 아직 어색하게 레버를 돌렸고,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여름, 대련으로 달아오른 몸에 찬물은 기분 좋았다.
루미에는 살짝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물줄기를 맞으며 멍하니 제 양손을 바라보다가 루미에는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때렸다.
상대를 끝장내고 싶었다.
목검으로 머리를 깨부수고 싶었다.
살의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제어가…….’
자신은 길들여진 것일까? 살인귀가 되어서 벗어날 수 없나? 죽이는 것으로만 만족하게 되었나?
―피비린내랑 시체냄새가 난다.
엘프의 말을 떠올리며 루미에는 강박적으로 몸을 씻었다.
씻고 나오니 란이 벽에 기대서 서 있는 게 보였다. 기다릴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지라 루미에는 빠르게 다가갔다.
“주인님.”
“아니, 그건 그만두라니까. 란 님까지는 봐 줄게.”
“그럼 란 님.”
생글 웃으며 루미에가 대답했다. 란의 녹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보았다.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눈을 내리깔자 란이 까치발을 하더니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
놀라 어깨를 움찔하자 란이 말했다.
“괜찮아, 아까 의사에게 물어봤는데 크게 부상당한 거 아니라고 하더라. 후유증 없이 나을 거래. 그리고 블레인 경도 대련 중에는 다칠 수도 있다고 했어. 피커 경도 괜찮다고 했고.”
응? 그러니까 기운 차려.
속삭이는 말에 루미에는 양 무릎을 꿇었다. 란이 “그러니까 이런 짓은―” 하고 말하려다가 끌어 안겨 말을 멈췄다.
‘엥? 에엥?’
당황해 란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몸에 힘을 뺐다. 만약 그가 추행이라도 하려는 거였다면 그대로 밀쳤겠지만, 어딘지 그의 몸짓에는 필사적인 곳이 있었다.
‘꼭 동아줄을 붙잡는 것처럼.’
그래서 매정하게 밀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란은 다시 살살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의 속삭임에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아니면 울 것 같은 기분.
사락사락.
부드러운 주홍색의 약간 긴 머리카락을 란은 한참 쓰다듬었다. 굽슬굽슬한 게 골드리트리버를 닮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참, 그녀를 안은 채로 있다가 루미에는 팔을 풀었다.
“좀 괜찮아졌어?”
란의 물음에 루미에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저에게 뭔가 바라는 게 없으신가요?”
“말했잖아. 루미에가 행복해졌으면 한다고.”
란이 미소 지었다.
“주― 란 님은 어려운 분이시군요.”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힐끗 주홍색 눈동자만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해 드릴 텐데요.”
기는 것도, 짖는 것도 성심성의껏 해 드릴 텐데.
“정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나중에 내가 부탁하면 들어주는 걸로 하자.”
란은 가볍게 말했다.
“약속해주시는 겁니다?”
루미에가 빠르게 확답을 원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 씻었는데 금방 흙투성이가 되잖아.”
루미에가 일어나기 전에 고개를 갸웃하고 속삭이듯이 낮게 말했다.
“유스타프 님을 죽여 드릴까요.”
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가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아니, 아니거든?!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절대로 아니야!”
흔들흔들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란이 추궁했다.
“누가 그랬어? 내가 그, 그런 걸 원한다고? 누구야? 누군데?”
루미에는 그녀의 격렬한 반응에 약간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 본 것뿐입니다.”
“정말?”
“네.”
하아, 하고 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미친놈이 루미에를 이용해 먹으려는 건 줄 알았다.
“그럼 진짜로 틀렸어. 나랑 유스타프는 적이 아니야. 그리고 계약했거든.”
“계약이요?”
“응. 그러니까 상잔(相殘)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루미에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고 란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힘으로 일으켜 세워질 리 없지만, 루미에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갈 거지? 같이 가 줄게.”
그녀의 말에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네, 부탁드립니다.”
데릴과 카루소는 인수인계를 하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아니, 주로 말하는 건 카루소고 데릴은 맞장구 정도였지만.
“헐, 뭐야. 진짜 이만큼 버는 거야? 야, 이거―”
카루소가 입을 벌렸다 닫았다가 하다가 속삭였다.
“황실 재정보다 더 나은 거 아냐?”
“그럴지도.”
유스타프는 어깨를 으쓱했고 데릴은 빠르게 숫자를 살폈다.
“관리는 잘되어 있네.”
“이 앞쪽은 엉망이지. 이건 그냥 묻어 두자.”
카루소가 예전 회계관이 다뤘던 자료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는 새로운 회계 자료를 보며 웃었다.
“이거 보기 편하게 되어 있는데. 서식을 다 지정한 거야? 괜찮네.”
“누님의 아이디어야.”
“그렇군.”
카루소가 고개를 끄덕였고 데릴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둘을 데려오는 걸 반대할 줄 알았는데.”
“누가?”
“유스타프의 누님.”
“가주님이? 왜?”
카루소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어 데릴이 중얼거렸다.
“넌 멍청해서 좋겠다.”
둘 모두 유스타프가 데려온 사람이고, 유스타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회계만큼 행정에서 중요한 종목은 없다.
돈줄을 쥐고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니 그 자리를 유스타프의 사람으로 채우는 게 란에게는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거다.
데릴이 그렇게 설명하자 카루소가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하지만 환영받았잖아.”
“그야 겉으로는. 하긴, 환영이기는 했지.”
“나와 란 사이는 너희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유스타프의 말에 카루소가 히죽 웃었다.
“맨날 찾아오는 누님을 문전박대했으니 말이야. 진짜 독하지. 어떻게 한 번을 제 발로 안 나가 보냐.”
“그건 맞아.”
데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짤막하게 말했다.
“거기까지.”
카루소는 잽싸게 입을 다물고 히죽거리는 웃음도 지웠다. 유스타프와 오래 부대낀 결과, 그는 어디까지가 선인지 알았다.
그는 평민이고, 유스타프는 귀족.
어쨌든 건너지 못하는 선은 있는 것이다.
“하여간 이 정도면 인수인계는 깔끔해. 나머지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어. 그런데― 우리 밑에 사무관들, 귀족도 있지.”
속닥속닥 하는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작위 없는 귀족들은 신경 쓸 필요 없어.”
깔끔하게 대답하고 유스타프가 행정관을 불렀다.
엘리자벳은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표정은 밝았다.
돈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던 행정이 요즘 금화로 기름칠을 잔뜩 해서 빠르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길을 재정비하고 집집마다 겨울을 대비한 마력 물품을 전달하는 일 등,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요즘 웃음이 가득했다.
게다가 란은 시원하게 급료에 보너스도 쏴주었기 때문에 사기도 높았다.
“도련님.”
엘리자벳이 가볍게 인사하자 유스타프가 소개했다.
“우리 쪽 행정관. 그리고 이쪽은 새로 온 회계관.”
카루소가 재빠르게 인사했다.
“회계관을 맡게 된 카루소라고 합니다.”
“데릴입니다. 부회계관입니다.”
“행정관인 엘리자벳입니다.”
마흔 중반쯤 된 엘리자벳은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아카데미에서 내가 픽업해 왔어. 누님도 허락하신 일이고.”
유스타프의 말에 “그렇군요.” 하고 엘리자벳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절대로 그냥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는 않고 네놈들 실력을 보마.’ 하는 기세가 느껴졌다.
“우리가 없는 한 달 동안, 잘 부탁해.”
카루소가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한 달이라뇨?”
“아, 내일모레 나와 가주님은 자리를 비우거든. 한 달 정도.”
카루소는 입을 떡 벌렸다. 데릴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우리를 여기에 이렇게 내팽개치고!
“그러니까 물어볼 거 있으면 빠르게 파악해서 물어봐. 그럼.”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자리를 떴고 엘리자벳이 싱긋 웃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럼 업무 파악 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