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수도에서
Chapter 5. 수도에서
란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아래층으로 뛰듯이 내려갔다. 뒤에서 카라가 “가주님, 넘어지세요!” 하고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일 층으로 내려와 현관으로 달려간 그녀는 열린 현관문 밖으로 말에서 내리는 사람을 쉽게 발견했다.
“유스!!”
소리를 지르고 현관 계단에서 냅다 뛰어든 란은 유스타프를 꽉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몇 번이나 말하며 그녀는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목 안쪽에서 낮게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그가 그녀를 달랑 들어 올렸다.
란은 낯선 목소리에 눈을 깜박이며 몸을 떼어 냈다.
“유스타프……?”
“네.”
“어, 목소리가……?”
“이상한가요?”
“아냐, 좋아. 엄청.”
재빠르게 란은 부정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또 키가 컸어!
그리고, 목소리도 낮아졌다. 예전 같은 소년 특유의 미성이 아니라 남자다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갑자기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이 부끄러워져서 그녀는 슬며시 두른 팔을 풀어 그의 어깨에 올렸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라 란은 손끝을 오므렸다. 어쩐지 유스타프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열렬히 환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현관 계단을 올라간 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서 있는 기사와 시종들을 보고 란은 그제야 얼굴이 붉어졌다.
“유스, 진짜 많이 컸구나.”
“옷이 안 맞아서 불편하지만 말입니다.”
“옷이야 맞추면 되지.”
란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못 보던 옷이니 새로 지은 걸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새 옷 느낌이 없는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것처럼 유스타프가 말했다.
“로스 경의 옷입니다.”
“엑.”
놀라 란이 고개를 들어 유스타프를 보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빨리 옷부터 맞추자.”
유스타프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문득 란이 멈춰 서서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는 거지?”
“물론입니다. 제가 그렇게 약하게 보이십니까?”
“그거랑은 전혀 상관없어. 유스타프가 전설의 용사라도 난 걱정한다고.”
란이 뺨을 부풀리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슬쩍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짧게 쓸었다가 말했다.
“계속 여기 서서 이야기할 생각이신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아차 하며 그를 잡아끌었다.
“일단 씻을래? 아니면 식사?”
“먼저 씻고 옷을 갈아입죠. 누님께서는 식사하셨습니까?”
“기다렸어.”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른 씻겠습니다.”
“천천히 해도 돼. 맞춰서 저녁 내오라고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란에게 인사한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캐머론 후작이 영지전을 선포했다는 이야기는 사교계에 순식간에 퍼졌다.
란은 모든 외부 활동을 접었다. 황제에게 알현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답답해서 발을 구를 때쯤, 그러니까 영지전이 선포된 지 3일 후쯤 되었을 때, 란은 녹영을 만났다.
라치아 가문의 첩보 기관.
쇼트커트를 한 중성적인 남장미인이 란에게 알현을 신청한 것이었다. 와일드 남작의 이름을 빌려 와서 란은 두 번째 응접실로 그녀를 불렀다. 블레인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며 미심쩍어했고, 결국 그게 정답이었다.
“두 번째 그림자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자신을 녹영이라고 밝힌 그녀는 가볍게 상황을 설명했다.
“가주님께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네, 도련님께서는 승리를 장담하셨습니다.”
녹영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녹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제가 모르는 라치아 가문의 첩보 기관이 있단 말이죠.”
“이제는 아시지요.”
“아, 정말.”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입 안으로 소리를 지르고 란은 녹영을 바라보았다. 녹영은 조금의 찔림도 없다는 얼굴로 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래. 찔리지도 않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하면서도 배신감도 느껴지고.
복잡한 기분이 되어 란이 녹영에게 말했다.
“그럼 편하게 말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부디.”
“유스가 이길 거라고 장담했는데, 뭐 특출한 방법이 있는 거야? 청염이라도 사용해?”
가주가 아니라도 가능한가?
“아뇨, 그렇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그쪽 병력이 더 많잖아.”
캐머론 후작만의 병력이 아니었다. 근처의 다른 가문들까지 부추겨서 상당한 인원을 모았다고 알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라치아의 위세도 이제 끝이라고 말하는 소문이 벌써 대세였다.
“유스타프 님은 빈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하지만 걔는 고작 열여덟이잖아?”
마지막 말은 마치 소리 지르듯 나왔다. 고작 열여덟. 란의 감각으로는 고2짜리 어린애다.
이곳도 성년이 열아홉으로 늦기 때문에 열여덟이라고 해도 크게 쳐주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더욱 만만하게 보고 쳐들어온 거겠지.
‘내가 좀 더 경계했어야 했어.’
고작 열여덟 남자아이가 전쟁에 나가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본다니. 란의 감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분은 라치아의 가주가 되기 위해 준비되신 분입니다. 그냥 평범한 열여덟이 아닙니다.”
녹영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란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지. 알아. 하지만.”
그녀가 끙끙거리는데 녹영이 덧붙였다.
“그리고 전할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뭔데?”
“황제 폐하에게 캐머론 후작이 제의를 한 모양입니다.”
“폐하께?”
“네, 자신들이 승리하면 광산 지분의 절반을 드리겠다고요.”
“아.”
란은 이를 악물었다. 과연, 그렇군. 황제로서는 조금도 손해볼 게 없는 장사다.
‘그래서 지금 내 알현 신청도 무시하고 있는 거였군. 제풀에 찔려서 말이지.’
만약에 캐머론 후작이 패배하고 라치아 공작이 항의한다면, “나도 캐머론 후작이 그럴 줄은 몰랐네.” 하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면 될 것이다.
라치아 공작이 패배하고 항의한다고 하면 더더욱 그 항의는 쓸모없다.
어차피 신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주종 관계라고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친 것 아닌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마를 눌렀다.
‘하긴 우리도 황가에 충성할 생각 따윈 없으니까.’
황가 역시 라치아를 봐줄 필요가 없겠지. 이익이 되는 대로 삼키기만 하면 그만이다.
‘제국의 황제라는 놈이.’
그래도 쪼잔하기 그지없다. 눈앞의 이익에 너무 열중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란은 둘째 황자를 떠올렸다.
아직 실제로 둘째 황자를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원작에서도 그냥 둘째 황자가 어부지리로 황제가 되었다, 하는 느낌이지 딱히 뭔가 특별히 서술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만나 볼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가 녹영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명령해도 듣나?”
“물론입니다. 단지―”
녹영이 살그머니 란의 눈치를 살피듯 하며 말했다.
“유스타프 님의 명령이 더 상위 명령이기는 하지만요.”
“그거면 됐어.”
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유스타프와 대립할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다.
“그럼 규모는? 어느 정도야? 아, 유스의 용돈이 많이 나간다 했더니 이거였나.”
“규모는 충분합니다.”
녹영의 말에 란은 ‘자세히 대답해 줄 생각은 없나 보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째 황자에 대해서 조사해 줄 수 있을까?”
“둘째 황자에 대해서요.”
“응.”
“알겠습니다.”
녹영은 그렇게 대답한 후 차를 한잔 얻어 마시고, 유유히 저택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 다시 3일이 지나, 라치아 공작가의 승전보가 사교계를 강타했다.
유스타프가 캐머론 후작의 장남인 아골의 목을 베었다는 소식과 함께 말이다.
후작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며 눈이 시뻘겋게 되어서 항의했다.
하지만 성문법상, 영지전에서 승자는 패자를 마음대로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후작은 배상금이라는 전통이 있다고 말했지만, 성문법은 관습법보다 위에 존재한다.
결국 후작의 항의는 기각되었다.
란 역시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말에 놀랐다. ‘불필요하게 깊은 원한을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하지만 사교계는 오히려 흥분했다. ‘실제 상황’이라는 이름이 붙은 방송이 더 짜릿한 것처럼 ‘생사가 붙은 영지전’이라는 말은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라치아다.
북방의 가문.
날카롭고 잔혹하며 겨울처럼 차가운 북쪽의 기사들.
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자극적인 말인가?
모두가 청염 기사단에 대해서 수군거렸고, 음유시인들은 오래된 시가를 꺼내 불렀다.
블레인 경은 청염 기사단 단장이라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주목을 받았고, 유스타프에 대한 소문은 들불 번지듯 번져 나갔다.
‘소문만 들으면 유스타프 혼자서 적을 전멸시킨 것 같아.’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봐야 열여덟짜리 꼬맹이인 것을.’
좀 무서운 꼬맹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배상 문제며 기타 여러 가지 일로 수도로 올라온 유스타프는 깜짝 놀랄 정도로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래 봐야 아직 애티는 다 못 벗었지만!’
란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시종에게 천천히 저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
마담 누와즈는 눈을 빛내며 자신의 작품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새 옷을 맞춰 입은 유스타프는 가볍게 재킷을 툭툭 두들겨 보고는 란을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어? 어어.”
란은 자신이 침을 흘리지 않았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 누와즈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멋있으세요.”
“누님?”
“응? 아니, 멋있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는 오더메이드 정장을 입은 유스타프는 진심으로 멋있었다.
“그런데 유스, 키가 몇이야?”
“글쎄요?”
“도련님께서는 키가 177cm 정도 되신답니다. 아마 더 자라실 것 같은데요.”
마담 누와즈가 유스타프를 대신해 대답했다. 직접 치수를 잰 사람의 말이니 정확하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랑 키가 비슷했는데!’
1년 사이에 10cm가 넘게 자라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아직 얼굴에는 살짝 소년스러운 느낌이 남아 있지만, 이제 그것도 곧 사라지지라.
게다가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다른 사람 같다는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년다운 목소리의 “누님.”과 낮은 중저음의 “누님.”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캐머론 후작은 결투라도 신청할 작정인가 봐.”
란은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을 돌렸다. 시종들이 그에게서 재킷을 벗겨 주고 새로 가봉을 시작한 코트를 입혀 주고 있었다.
“신청하라고 하죠. 후작가에 그럴 배짱이 남아 있는 기사가 있다면 말입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하긴, 하고 턱을 괴었다.
청염 기사단과 유스타프의 용맹성은 드래곤을 잡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그보다 누님께서는 둘째 황자에 대해 알아보신다고요?”
“응, 아, 유스타프도 들었어?”
“물론입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푸른 눈으로 란을 보았다. 그가 가볍게 손을 들고 말했다.
“여기까지 하지.”
마담 누와즈가 약간 당혹한 듯 “하지만 아직 가봉이―” 하고 말을 하려다가 유스타프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와서 마저 하도록 하지요.”
그러고는 잽싸게 시종과 가봉 도구들을 챙겨서 방을 떠났다. 순식간의 일이라 란이 의아해하며 유스타프를 보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뇨, 그게 아니라.”
유스타프가 란에게로 돌아섰다. 단순히 셔츠에 딱 붙은 검은색 바지 차림인데도 눈부셨다. 란이 ‘이렇게 잘생긴 건 반칙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반역이라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
놀라 란은 파드득 몸을 떨고 유스타프를 똑바로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면 이 시기에 둘째 황자는 왜요?”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려고.”
“그러니까, 왜입니까?”
란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황태자가 혹시 황제가 안 될 수도 있잖아.”
“반역죄에 가까운 말씀을.”
“솔직히 말하면 안 됐으면 좋겠어.”
“이제 반역죄가 되겠군요.”
“하지만, 그 자식이.”
란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황태자가 자신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는 굳이 유스타프에게 하지 않았다.
알릴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황태자가 자신에게 지껄인 멍멍 소리는 두 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황태자비의 독살을 응원합니다.
이렇게 플랜카드를 만들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유스타프가 물었다.
“그 자식이, 그다음은요?”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습니다.”
“적어도 남동생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냐.”
“그렇다면 더더욱 하셔야겠군요. 전 남동생은 아니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끄응 하고 숨을 삼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님.”
유스타프가 가지런한 손가락을 뻗었다. 그가 고양이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그녀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말씀해 보세요.”
달래는 듯한 손길이었다.
간지러움과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리며 란이 뒤로 상체를 뺐다.
“그냥 좀…….”
“그냥 좀?”
유스타프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성희롱을 했지.”
유스타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뭐라고요?”
“황태자가 망나니라는 건 이미 아는 사실이잖아. 어쩐지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고. 왜인지 황태자비가 나에게 뻣뻣하게 굴더라니.”
말문이 터진 란은 푹푹 숨을 내쉬며 황태자의 폭거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런 이야기는 아랫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어서, 유스타프에게 하소연하자 오히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자식이 내 등도 쓸고, 엉덩이도 만지고―”
유스타프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란의 목소리가 더더욱 높아지고 빨라졌다.
“가슴이 커 보인다는 둥, 속옷을 선물하겠다는 둥―”
란은 한바탕 쏟아 내고 나니 속이 시원해져서 얼굴이 밝아졌다.
“뭐, 그랬단 말이야.”
“그랬군요.”
“그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둘째 황자를 직접 만나 보도록 하죠.”
“응?”
문득 란은 ‘잠깐?’ 하는 생각을 하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란이 둘째 황자를 만나려고 하는 건 정말로 그냥 궁금해서였다.
그녀는 황실 가족사에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유스타프의 ‘만나 보죠.’는 완전히 다른 의미 아닌가?
“유스.”
“네.”
“만나서 어떻게 하려고?”
“어떤 사람인가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유스타프가 가볍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 쓸어내리고 놓아주며 말했다.
“그다음을 생각해야죠.”
“그다음이 뭔데?”
“누님은요?”
“어?”
왜 질문이 나에게 돌아와?
“둘째 황자와 만난 후에 어떻게 하시려고 했습니까?”
“약간의 친목을 다져 둘까 하고…….”
“그럼 그 정도로 좋겠군요.”
란은 미심쩍다는 얼굴을 하고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반역 어쩌고저쩌고하더니만?’
란은 유스타프의 조각상같이 서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돌덩이 같은 인간이 시나에게 푹 빠져서 이렇게 저렇게 된단 말이지.
‘흠.’
사랑이란 놀랍구나.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난리 났어.”
“뭐가 말입니까?”
“유스타프 말이야. 보고 싶어 죽을 거야. 그런데 유스는 성인이 아니니까 사교계 출입이 안 되잖아.”
“그렇지요.”
“그러니까.”
란은 웃었다.
“어떻게든 유스타프 얼굴 보려고 난리 날걸.”
“안 그래도 볼 텐테 말입니다. 어차피 캐머론 후작과의 일도 마무리해야 하고.”
그 말에 란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정말로 유스가―”
그녀가 말을 시작하고 끝맺지 못하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직접 베었냐는 질문이라면, 네. 그렇습니다.”
란은 짧게 숨을 삼키고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이 말끄러미 자신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눈은 광기나 살의나, 하여간 그 비슷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간신히 란은 농담처럼 말할 수 있었다.
“창대에 머리를 걸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결투로 죽인 상대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요.”
그건 결투로 죽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거라는 말인가.
“그보다 저는 다른 질문을 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의아해져서 녹색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질문? 어떤 거?”
“하실 게 없으시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요.”
산뜻하게 물러서는 그의 발언에 란은 쓰게 웃었다.
“녹영에 대한 이야기라면 굳이 꺼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면서 꺼내시는 겁니까.”
“뭐, 됐어. 어쩐지 용돈을 많이 가져간다 했어.”
“됐다고요.”
“그래. 어차피 난 이제 1년― 아니, 이제 1년도 안 남았나? 그 정도면 가주직도 끝나는걸.”
“…….”
유스타프는 말없이 살피듯이 란을 바라보았다. 란은 ‘정말로 괜찮아.’ 하는 얼굴을 하며 유스타프를 올려다보았다.
가늘게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유스 분위기가 달라졌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물론 키도 크고 목소리도 변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전체적으로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예전 같은 날카로운 느낌이 그래도 둥글게 변했다고 하면 내 착각인가? 내가 유스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은 유스타프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십니까?”
“유스가 변했나? 하고.”
이런 데에서는 솔직하기 짝이 없는 란이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말에 “그런 것 같습니까?” 하고 묻더니만 생각에 잠긴 듯했다가 덧붙였다.
“싫으십니까?”
“응? 아니.”
여유가 생겼다는 건 좋은 거지,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니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습니다.”
그는 이어 “참.” 하고 드물게도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부탁하신 설백나무 수액 말입니다.”
“맞아. 어떻게 됐어? 영지전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나도 잊고 있었는데.”
“시제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
“제 짐 중에 있을 겁니다. 원하시는 설탕이요.”
그 말에 란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설탕!”
“네, 설탕이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픽 웃었다. 하지만 설탕에 정신이 팔려 란은 그의 웃음을 보지도 못했다.
‘설탕. 이제 설탕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영지민들에게도 설탕을 마음껏!
‘하지만 그러면 이 닦는 법도 같이 교육해야겠군. 안 그랬다간 영지민들이 다 합죽이가 될 거야.’
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유스타프는 어째 그녀가 얼음수정이 나오는 것보다 설탕을 더 기뻐한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황태자라.’
유스타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황태자가 망나니라는 소문은 그도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와 황궁 사교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구체적인 뭔가가 아니었다.
오늘까지는 말이다.
✥✥✥
라치아 공작과 캐머론 후작의 보상금 공방은 지루하다면 지루한 공방이었다.
하지만 사교계의 화제는 그 일로 꽉 찼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그 존재 때문이었다.
“맙소사, 라치아 차기 가주 얼굴을 보셨나요?”
“그럼요, 봤지요. 세상에.”
여자들은 부채를 퍼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벌써부터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줄을 잇는다는 소식 역시 함께 들려왔다.
배상금 조율은 황궁에 있는 크리스털 홀에서 이루어졌다. 중립적인 곳인 동시에 주군의 거처에서 영지전 배상을 논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다.
초대 황제가 전장의 천막에서 논공행상을 치렀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배상을 논하는 동안 크리스털 홀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드나드는 길은 다르다. 배상 논의가 있는 날은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털 홀 근처를 서성이곤 했다.
란은 길게 숨을 내뱉고 크리스털 홀을 나섰다.
믿고 있던 후계자인 장남을 잃은 후작의 외침과 증오를 정면에서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유스타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후작의 말을 모조리 격파했다.
게다가 사교계에서 유스타프의 인기가 높았고, 황제 역시 찔리는 사항이 있었던지라 후작의 패색은 역력했다.
“괜찮으십니까?”
유스타프가 란에게 물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한쪽 어깨에만 망토를 두르고 있는 유스타프는 멈춰 서서 잠시 란을 바라보았다. 란은 싱긋 웃어 보였고 그는 그제야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허둥지둥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라치아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라치아 공작님, 잠깐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앞다투어 말을 내뱉는 사람들에게 란은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여기서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군요. 원하신다면 녹색 아치로 알현을 청해 주세요.”
일일이 이야기를 듣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때 째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치아 공작!!”
놀라 란은 고개를 들었고 사람들도 입을 다물며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새까만 상복을 입은 여성이 두 명 서 있었다.
한 명은 나이가 든 여성이었고, 한 명은 아직 어렸다. 소리를 지른 것은 어린 쪽이었다.
“오라버니를 돌려줘! 살려 내라고!!”
어린 여성이 악을 쓰며 소리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금방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캐머론 후작 영애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소녀는 핏대를 세우고 소리 질렀다. 옆에 서 있는 나이 많은 여인이 말려 보려는 듯했지만 소용없었다.
캐머론 후작 영애는 붙잡는 팔을 뿌리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사람들은 좌우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란의 앞에 선 후작 영애는 유스타프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란을 노려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설마?
하는데 몸이 가볍게 들리고 시야가 휙 돌았다. 동시에 짧은 비명이 들렸다.
“아악!”
“유스?”
당황해 상황을 보니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들어 옆으로 옮기고 다가온 후작 영애의 손목을 붙든 형국이었다.
“호위는 멍청하게 뭘 보고만 있는 걸까?”
유스타프의 차가운 말에 블레인은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기사인 그가 레이디에게 손을 댈 수가 없어 순간 망설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 이거 놔라! 무례한!”
캐머론 후작 영애는 잡힌 손목을 빼려고 애썼다. 유스타프는 그 잡은 손목에 천천히 힘을 주었고 캐머론 후작 영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거 놔! 아파! 이, 살인자!! 오라버니를 죽였듯이 나도 죽이려고!! 살인자! 살인자!!”
악악 소리를 질러대며 떠드는 후작 영애를 보자 유스타프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가 붙잡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돌리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범인을 제압하듯 팔이 뒤틀려 캐머론 후작 영애는 공포와 고통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복도 안의 모든 사람은 당황해 이 상황을 보며 우왕좌왕했다. 여자에게 손을 대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유, 유스―”
당황한 란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후작 영애의 팔을 놓아주었다. 후작 영애는 극적으로 바닥에 쓰러지며 울기 시작했다.
나이 많은 여인이 달려와 그녀를 달래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네 오라비를 죽인 건 내가 아니지. 네 아비의 욕심이 자식을 삼킨 거다.”
차갑고 무자비한 목소리가 복도 안에 울려 퍼졌다.
“원망할 거면 그쪽을 하는 게?”
비꼬는 말까지 덧붙이자 후작 영애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이어진 유스타프의 목소리가 그 울음을 누르며 이어 들렸다.
“게다가 날 공격하는 거면 모를까, 더 만만한 누님에게 손을 올리는 건 캐머론 후작가도 그 정도라는 거겠지.”
긴 복도는 침묵에 잠겼고, 그 높은 궁륭을 울음소리만 채우는 가운데 유스타프가 태연한 얼굴로 란에게 말했다.
“가죠.”
“어? 으응.”
란은 의식적으로 후작 영애를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빠져나와서야 란은 긴장이 풀렸다. 그제야 손끝이 떨려 왔다.
돌발 상황에 놀라기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그걸 본 유스타프가 가볍게 란의 손을 쥐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응. 나 좀 놀랐나 봐…….”
중얼거리고 란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살핀다.
“유스는 괜찮아?”
“뭐가요?”
“그러니까…….”
‘살인자!’ 하는 높은 목소리에 란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유스타프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은 걸까?
“영애가 욕하고, 그래서…….”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가 픽 웃으며 말했다.
“욕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뭘 말씀하시는지는 압니다. 그리고 괜찮아요. 사실이니까.”
“사실이라니…….”
웅얼거린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녀의 떨림이 멈춘 걸 눈치채고 손을 놓아주며 답했다.
“제가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마른 입술을 가볍게 핥고 란이 입을 열었다.
“유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정말로요?”
“으응?”
“제가 살인자라도 괜찮다고요?”
“그야―”
란은 말을 골랐다.
“유스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잖아. 상대방이 먼저 공격한 건데―. 영지민도 지켜야 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유스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뒷말은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했다.
꼭 필요해서 죽였다면 필요해서 죽인 거고, 그렇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냐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걸 말해 주고 싶지는 않았고, 영지전과 전투를 즐겼다는 것 역시 굳이 고지할 필요는 없지.
“괜찮으시다면 다행이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때마침 도착한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란이 먼저 마차에 올라타고서 유스타프는 올라타기 직전, 블레인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이야기 좀 하지.”
블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복도에서 있었던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캐머론 후작 영애가 추태를 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가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가 얼마나 차가운지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더해서 그가 자신의 누이를 챙긴 것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왔다.
‘그렇다면 약혼녀에게는 얼마나 다정하겠어요?’
묘하게도 여론은 그렇게 흘러갔고, 크리스털 홀 앞에 모이는 여자들의 수는 더 늘어났다.
그 여론은 대부분 유스타프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 역시 캐머론 후작 영애의 행태에 대해 한 소리씩 얹었다.
‘가엽기는 하지만, 결투에 의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캐머론 후작의 주장도 억지야.’
결국 황제는 금방, 여론과 마음속 찔림을 따라 라치아 공작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캐머론 후작가는 장남을 잃고도 상당한 전쟁 배상금을 라치아 공작에게 지불해야 했다.
유스타프가 수도에 올라온 지 보름째의 결론이었다.
“제가 후작님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유스타프 영식에게 푹 빠졌을 거예요.”
키릭스 후작 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란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후작님이 들으시면 섭섭해하실 거라고요.”
“그렇겠죠?”
키릭스 후작 부인이 킥킥 웃었다. 란은 키릭스 후작 부인을 친구로서 녹색 아치에 초청했고, 지금은 단둘이서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 사교계에서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구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란은 키릭스 후작 부인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보다 언제까지 후작 부인이라고 부를 건가요? 그냥 리제라고 불러줘요.”
엘리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키릭스 후작 부인은 그녀의 애칭을 불러 달라 친근하게 청했다.
“저도 란이라고 불러 주세요.”
“좋아요, 란.”
란과 엘리제는 서로 마주 보았다가 명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제는 약간 상기된 뺨을 하고 말했다.
“사실 후작 부인이라니, 저에게는 너무 큰 짐이라서 말이에요. 카티, 아니 키릭스 후작님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요.”
“저도 그건 후작님 말씀에 찬성이랍니다. 굳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고요. 그래도 황후마마께서는 리제를 좋아하잖아요?”
“그런가요? 전 너무 어려워요.”
한숨을 내쉬며 엘리제가 말했다. 란은 ‘그런 것치고는 잘하던데.’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잘하고 계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양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란도요. 라치아의 가주가 저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정말로 빙벽은 깎아지르듯 높은가요? 정말 마물도 있어요? 문은요?”
“정말로 높아요. 마물도 있지요. 문도 물론 실재해요.”
“굉장해요!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라니. 낭만적이에요.”
엘리제가 호박색 눈을 반짝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하늘 저택도요? 정말로 대리석으로 이음매 없이 지어져 있나요?”
“이음매가 없는지는 확인 안 해 봤는데,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 맞아요.”
엘리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정말로 아름답겠어요.”
“네.”
란은 하늘 저택을 떠올리며 힘주어 대답했다.
“아름다워요.”
새하얀 설화석고로 지어진 하늘 저택은 햇빛을 받을 때마다 눈부시게 빛났다.
“다음에 꼭 초대해 주세요.”
엘리제의 말에 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후작님께서 허락하신다면요.”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아, 정말로 부부 사이가 좋은가 보구나.
괜히 자신이 흐뭇해져서 란은 미소 지으며 엘리제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그때, 문득 엘리제가 생각난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고 보니 요즘 황태자 전하 때문에 곤란하다면서요?”
란은 저절로 어깨가 처졌다.
“네.”
간결한 대답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서 엘리제는 눈을 찌푸렸다.
“정말로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가시면 되지, 굳이 란에게 귀찮게 굴다니요.”
“그렇죠.”
게다가 란이 계속 거부를 하고 있으니 황후의 시선도 점점 날카로워졌다.
물론 자기 아들이 유부남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 아들이 좋다고 매달리는데 저렇게 매몰차게 거절을 해?
그런 심리인 게 뻔히 보였다.
“안 그래도 폐하께 부탁을 드리려고요. 이제 캐머론 후작과의 일도 마무리가 되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엘리제는 갸웃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비마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걱정스럽게 덧붙인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엘리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요.”
“네.”
“다음에 저희 부부와 함께 피크닉 가지 않으시겠어요?”
엘리제의 말에 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지요.”
유스타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를 보았다. 녹영에서 쓰는 암구호로 되어 있는 서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좌에서 우로― 읽는 것도 아니었다.
유스타프는 짧은 내용을 읽고 초에 종이를 태웠다.
‘피임이라.’
황태자비가 결혼 후에도 계속 피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쪽지였다.
‘그랬단 말이지.’
황태자비가 권력을 얻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뭘까?
아들을 낳는 거다.
차기 황세손을 낳는다.
그걸로 황태자비는 단단한 직위와 권력을 붙잡을 수 있다.
‘그런데 피임이라고.’
유스타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툭툭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그렇다면 황태자비는 정말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거다. 3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건, 황태자비 몸에 흠이 있다고 소문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압박은 어떻고?
그런데 그걸 다 무시하면서 이렇게나 남몰래 피임이라.
녹영이 이 정보를 얻는 데에 들어간 돈과 인원이 엄청났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무슨 생각인 걸까?’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든가?
의외로 사람은 감정 앞에서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황태자비가 결코 황태자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는 거였다. 단순히 부부 사이의 악감정을 넘어서서.
일단 그 정보를 머릿속에 넣고 유스타프는 두 번째 서류를 열었다.
둘째 황자에 대한 서류였다.
그때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 유스타프는 서류를 뒤집으며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들어온 노집사는 매우 드물게도 곤란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련님…….”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유스타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누님께 무슨 일이라도?”
“아뇨, 그게 아니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나에게?”
“네.”
롤프가 잰걸음으로 재빠르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유스타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지금? 저택에? 전하께서?”
“네.”
“어디에 계시지?”
“네 번째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가장 좋은 응접실이다.
“바로 가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 방을 나섰다.
녹색 아치의 응접실은 모두 4개이며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간단하고 실용적인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좋은 응접실이고 말이다.
네 번째 응접실에 앉아 있는 황태자는 암행을 나온 게 뻔한 차림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암행이 아니라 ‘암행 나온 황태자’라고 이름 붙여야 할 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상대를 향한 제 마음이야 어떻든, 유스타프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황태자가 한 손을 들며 웃었다.
“그런 딱딱한 인사는 접어 두지. 여기에는 황태자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온 거니까.”
“그러시군요.”
평범한 사람으로 왔다면 경비병이 문도 열어 주지 않았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스타프가 물었다.
“차라도 한잔 올릴까요?”
“아니, 독한 거로 하지. 아니면 나이 어린 공자를 생각해서 차로 할까?”
“전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응접실에 놓인 장식장을 열어 술을 꺼냈다.
유스타프가 크리스털 잔을 삼 분의 일 정도 채워 루스에게 건네고 자신 역시 자리에 앉았다.
루스는 술에 입을 대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겠지.”
“전하께서 저택을 찾아 주시는 건 영광이지요.”
“다름이 아니라, 내가 공자 편이라는 걸 알려 주려고 왔지.”
루스가 히죽 웃었다. 유스타프는 짐짓 당황한 듯 눈을 깜박였다. 란이 보았다면 ‘유스가 연기의 천재였다니.’ 할 만한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제 편이요?”
“그래. 지금 라치아 공작이 공자보다 더 유명한 걸 아는가?”
“누님께서 가주이시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겠어, 응? 자네도 자네 몫을 챙겨야 할 거 아닌가.”
히죽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루스가 더 낮게 말했다.
“물론 아버님도 언제까지 황제이시겠는가?”
그 말에 유스타프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눌렀다. 지금 그 말은 반역죄로 잡혀가도 손색이 없는 발언이었다.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는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하군.’
황태자에 대한 평가를 더욱 하향 조정하는데 루스는 그런 유스타프의 속마음 따위는 모른 채로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 이 말이야.”
“어떻게 말씀입니까?”
“뭐, 라치아 공작이 아무리 잘해 봐야 결국 라치아도 아니지.”
루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라치아를 나오면 그냥 평범한 계집 아닌가?”
유스타프는 란을 ‘평범한 계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지요.”
“그러니, 공자가 조금만 도와주면 라치아 가주를 내가 처리해 주겠다는 말이네.”
“처리요.”
“그래. 뭐, 배라도 부르면 가주직을 계속 못 하지 않겠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루스가 말했다. 유스타프는 순간 뻗어 나갈 뻔한 살기를 안으로 갈무리하며 미소 지었다.
“그렇겠지요.”
같은 남자로서, 유스타프는 이런 사고방식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린드버그 남작도, 황태자도, 란이 여자이니 침대에서 깔아뭉개면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유스타프는 죽은 사촌형을 생각했다. 불쾌한 가정이지만, 만약에 란이 그대로 당했다고 해도 그녀가 ‘그렇군요. 그럼 지금부터 당신이 제 남편이고 전 당신에게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뭐, 그러니까 멍청한 쓰레기인 거겠지만.’
유스타프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호적상은 남매인데, 남동생에게 누나를 강간해서 치워 주겠다고 친절하게 말하는 머리통.
반대로 말하면 황태자 자신 역시 권력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무도 믿으면 안 됩니다. 절대, 절대, 절대, 아무도 믿지 마세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다시 들리는 듯했다.
“황태자 전하의 제안은 마음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에 루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 언제 공자와 함께 내가 잘 가는 가게에 한번 같이 가지, 응? 진정한 남자가 되어야지.”
황태자는 마치 유스타프와 친구라도 된 듯이, 더러운 말을 쏟아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살펴 가십시오.”
황태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유스타프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고 응접실을 나섰다.
루스를 배웅하고 유스타프는 당장 씻고 싶은, 물리적인 더러움을 느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스?”
밀빛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황태자가 왔다가 갔다며?”
“들으셨습니까?”
“응, 롤프가 말해 줬어.”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빤히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라치아의 녹음과 똑같은 빛깔.
유스타프는 어쩐지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걱정하실 일은 없었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네.”
대답하고 그는 드물게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라치아로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느닷없는 말에 란은 놀라 눈을 깜박였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으음, 적어도 이번 사교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있을 생각인데.”
“알겠습니다.”
유스타프는 별다른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면 유스는 먼저 돌아가도 괜찮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란이 힐끗 그의 얼굴을 살피고 말했다.
“하지만, 음. 있어 주면 좋겠어.”
“기꺼이.”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상체를 살짝 숙였다. 느닷없이 그와 가까워져서 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스?”
“네.”
“음, 어― 나 뭐 묻었어?”
“아니요.”
느긋하게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관찰하고 유스타프는 허리를 편 후에 물었다.
“같이 제 서재로 가시겠습니까?”
“응?”
“둘째 황자에 대한 보고서가 들어왔습니다.”
“갈래.”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믿으면 안 됩니다. 특히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자를 조심하세요.
광기에 젖은 눈으로 어머니는 몇 번이나 속삭였다.
―안 그럼, 저처럼 되어 버립니다.
“누님.”
“응?”
“제가 누님을 배신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앗! 설마 황태자에게 날 팔아넘기려고?”
놀라 란이 휙 그를 돌아보며 말하자 유스타프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설마요.”
“그렇지?”
놀랐다는 게 거짓이었다는 듯 란이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싱긋 웃고 말했다.
“유스가 날 배신하면? 글쎄. 엄청 괴롭겠지.”
“그렇군요.”
“그리고 지옥에서 돌아온 란 로미아 드 라치아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야.”
후후후 웃으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가만히 란을 보다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겠군요.”
“어디가 괜찮아?”
란이 눈을 찡그리며 되묻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럴 만한 일이 있으며 미리 말해. 이미 이야기 끝났잖아? 너에게 방해되지는 않는다고.”
“그랬죠.”
“그럼, 뭐.”
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흐흥, 나 너 하나도 안 무섭다 뭐.’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란은 힐끗 유스타프를 보았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찔끔해서 얼른 눈을 돌린 탓에 란은 유스타프가 미소 짓는 걸 보지 못했다.
자신의 서재로 들어간 유스타프는 녹영이 준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었고 란은 눈을 잔뜩 찡그렸다.
“이거 글씨야?”
“네. 아, 암호는 볼 줄 모르시는군요.”
“몰라.”
“그럼 잠시 앉아 계십시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잉크병을 열었다. 란은 앉는 대신에 졸졸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유스타프는 해석본을 옮기다가 어깨너머로 자신을 빤히 보는 란을 돌아보았다.
“뭐 하십니까?”
“유스, 글씨도 예쁘구나.”
“누님은 악필이시죠.”
“너 깃펜이 얼마나 쓰기 어려운지 알아?”
그녀의 항의에 유스타프가 자신이 들고 있는 깃펜을 들어 보이고 말했다.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란은 볼펜, 아니 적어도 만년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워프나 엘프 세공술이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주문해 봐야겠다, 하고 란은 유스타프가 옮기는 내용을 눈으로 읽었다.
“생각보다 그냥 평범하네?”
“황태자가 있는데 눈에 띄고 싶어 하는 둘째 황자는 없을 겁니다.”
“하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의 글씨는 인쇄 활자처럼 깨끗하면서도 빠르게 적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누님, 황태자비와 만난 적이 있으시죠.”
“아, 응.”
“어떤 사람입니까?”
“무서운 사람.”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낮게 물었다.
“누님께 해를 끼쳤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시비를 걸더라고. 그야 자기 남편이 나에게 수작을 거니까…….”
말하다가 문득 란은 말꼬리를 흐렸다. 황태자비가 그런 걸로 화를 낼 사람인가?
‘어차피 남편은 독살할 거잖아?’
갸웃했다가 란은 ‘하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휙휙 변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황태자는 그녀의 남편이니까, 거기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거다.
“누님?”
유스타프가 쓰는 걸 멈추고 그녀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란은 “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적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
유스타프는 그녀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고 쭉 종이 위에 가지런한 글자를 적어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마지막 단락을 적으며 말했다.
“누님, 너무 가깝습니다.”
“어?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
유스타프의 등에 달라붙듯 붙어서 그가 글씨 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던 란은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하지만 신기하단 말이야.’
깔끔한 글자 쓰는 모습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구나, 하며 란은 멋쩍어져서 물러났다.
마지막 문장을 적고, 유스타프는 잠시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란에게 종이를 건넸다.
“이미 다 보셨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볼래.”
란은 그렇게 말하고 서류를 바라보았다.
둘째 황자.
라벨 모니아 라 마르텔.
황태자와는 두 살 차이, 올해로 스물여섯인가.
‘딱히 눈에 띄는 점도 없고, 시끄러운 면도 없어.’
공부를 좋아한다는 점이나, 사교계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에 란은 크게 가산점을 부여했다.
‘원작, 아니, 내가 읽은 바― 하여간 원작에서도 딱히 큰 반발 없이 황제가 됐으니까. 그 뒤 문제도 없었고.’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서류를 슬쩍 초에 가져다 댔다. 서류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문득 란은 깨달아 물었다.
“유스, 이거 어디에 버려?”
“벽난로예요.”
아, 하고 란은 허둥지둥 벽난로로 다가가 종이를 던져 넣었는데 타오르는 가벼운 종이는 안으로 가지 않고 카펫 위로 떨어졌다.
란은 놀라 발로 몇 번 종이를 밟았다. 카펫에 약간 탄 자국이 생겨, 란은 한숨을 내쉬며 덜 탄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벽난로 안에 종잇조각을 넣고 성냥을 주섬주섬 찾아 불을 붙이려는데 유스타프가 다가와 손가락을 퉁겼다.
화륵―!
푸른 불꽃이 종이를 삼켰다. 깜짝 놀라 란이 그를 바라보자 유스타프가 물었다.
“손가락은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방금 그거, 청염이야?”
“네. 완전히 쓸 수는 없지만, 이 정도는 가능합니다. 깜짝 놀라게 하는 정도는 되겠죠.”
“그렇구나.”
란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럼 내가 둘째 황자를 만나볼게.”
전에 한번 만나자고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 뒤로 바빠서 통 알현 신청을 넣을 수가 없었다. 유스타프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러시겠습니까?”
“응. 알현을 청할까?”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른 방식으로 하지요.”
‘녹색 아치’의 자랑은 녹색 아치만이 아니었다. 그 이름과 딱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정원이 이 저택의 자랑이었다.
라치아 공작 부인들은 대부분 차가운 북쪽인 하늘 저택보다 녹색 아치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이를 가지면, 아예 라치아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북부의 척박함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정원에 힘을 쏟아서 라치아의 정원은 아직 눈이 채 녹기도 전에 피어나는 스노우드롭을 시작으로 해서 겨울철의 동백과 은가시나무까지, 사철 다채롭게 빛났다.
그래서 라벨은 라치아의 정원을 보러 오지 않겠냐는, 정중한 초대장에 순순히 가겠노라,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나 혼자 초대받은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라벨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에서 차를 따르는 라치아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편한 사교 모임답게, 화려하게 성장하지 않고 편한 옷차림을 하고 머리카락을 길게 푼 후에, 느슨하게 땋아 내리고 있었다.
‘과연.’
어째서 형님이 그녀를 그렇게 쫓아다니는지 알 것 같다고 라벨은 생각했다.
사교계에는 화려한 온갖 꽃들이 있고, 그녀들이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래도 귀족 영애는 귀족 영애다.
어쩔 수 없이 풍기는 느낌이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딱, 라치아 공작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 정확하게 꼬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가 좀 다른 것 같은…….’
라벨은 그렇게 생각하며 란을 바라보았다. 우아한 밀빛 머리카락에 딱 첫눈에 시선이 꽂힐 수밖에 없는 녹색 눈동자.
저렇게 에메랄드처럼 선명한 녹색 눈은 처음 봤다. 그 모든 게 이질감과 함께 어우러져서 독특한 매력을 공작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설탕이나 우유를 넣을까요?”
“아니, 내가 직접 넣지.”
라벨은 그렇게 말했고 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잔에도 차를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살랑 정원의 나뭇잎을 흔들고,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초여름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이군.”
“감사합니다. 저도 항상 감탄하고는 한답니다.”
“그리고 나 혼자 초대받은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라벨의 말에 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황자님께 흥미가 있거든요.”
“흐음.”
라벨은 애매한 대답을 하며 찻잔에 설탕과 우유를 골고루 넣고 잔을 들었다.
“나도 소문이 자자한 라치아 공작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럼 오늘 만남은 우리 둘 모두에게 적당하겠네요.”
란이 싱긋 웃으며 설탕을 듬뿍 넣은 제 잔을 건배라도 하듯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런가? 난 궁금한데. 어째서 라치아 공작이 둘째 황자인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란은 가볍게 웃었다.
“안 되나요?”
“형님이 그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태자 전하께는 올리비아 님이 계시지요.”
“그건 결혼 상대자로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일까?”
라벨의 말에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레이디의 예법은 아니지만, 그 웃음이 상쾌하다고 생각하며 라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귀족적인 어법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답은 ‘아니오’예요.”
“아아, 라치아 영식에게 가주직을 물려주기 전까지는, 이라는 단서는 들었네.”
“그렇군요. 하지만 그걸 제하고서도 아니오, 입니다.”
“그렇군.”
라벨은 그렇게 말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보통 차와 향이 좀 다르다.
“설탕이요.”
느닷없는 말에 라벨이 란을 바라보자 란이 그의 마음을 읽은 듯이 대답했다.
“설탕이 달라서 향이 다르게 느껴지는 거랍니다. 라치아산(産) 설탕이에요.”
“설탕이라니.”
라벨은 “실례.” 하고 가볍게 설탕을 덜어 맛본 뒤 말했다.
“다르군.”
보통 설탕과 향이 다르다.
“다르지요. 차에 잘 어울려요.”
“설탕 산업에도 손을 대는 건가? 라치아의 부가 지나치게 쌓여 가는 게 아닌지?”
란이 피식 웃었다.
“라치아의 부는, 제국의 부지요.”
“익숙하지 않다고 했으면서.”
라벨의 말에 란은 다시 웃었다. 저 말은 ‘귀족적 어법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으면서, 하는 말이다.
‘뭐야, 이 사람.’
완전히 호감이다.
황태자가 금발에 푸른 눈으로, 소녀들이 생각하는 왕자님 상 그대로라면, 이쪽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그윽한 호박색 눈동자.
지적인 느낌이 강했다.
“마음에 드셨다면, 황자님께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양하지 않겠네.”
라벨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의 접근, 황제가 눈을 감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영지전, 그 가운데서 자신과의 접촉.
“라치아 공작.”
“네.”
“난 시끄러운 건 싫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용당하는 것도 취향은 아니고.”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란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뭘 염려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건 그냥 친목 자리일 뿐이에요. 정치적인 염려는 필요 없는, 그런 자리예요.”
정말로요.
그런 얼굴로 란이 지그시 라벨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렇다면. 나도 편하게 즐기도록 하지.”
“네, 기꺼이요.”
란이 다시 웃었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 란이 물었다.
“잠깐 정원 산책이라도 하시겠어요?”
“그거 좋지.”
라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정원 안내를 시작했다. 라치아 공작가의 정원은 그 명성대로 구석구석 훌륭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으므로 라벨은 연신 감탄했다.
중간쯤 지났을 때 라벨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황자님?”
란이 가시에라도 찔린 건가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지금 저쪽 관목 사이에 흑표범이 있는 것 같아서…….”
내뱉고 나니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말이라 라벨은 멋쩍어졌다.
“흑표범이요?”
란 역시 의아한 얼굴이 되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아.” 하고 웃었다.
“유스!”
관목 사이로 늘씬하게 검은빛 정장을 빼입은 유스타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님.”
유스타프가 깍듯이 인사했고 라벨은 쓴웃음을 삼켰다.
‘과연.’
자신이 흑표범이라고 헷갈렸던 게 이제 부끄럽지도 않았다.
“이쪽은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제 남동생이랍니다. 그리고 라벨 모니아 라 마르텔 황자님이시고.”
“명성은 익히 들었소, 유스타프 공자.”
“별 볼 일 없는 소문들이지요.”
유스타프의 대답에 라벨은 감탄했다. 보통이라면 저 말은 겸손의 말일 터였다.
‘그런데 저 말을 저렇게 오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그깟 소문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은 조금도 없다는, 그런 뉘앙스.
“괜찮다면 같이 걷지 않겠나?”
라벨의 권유에 유스타프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부디 라치아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하.”
다시 깍듯이 인사하고 유스타프는 성큼 가버렸다. 란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가 라벨을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다지. 나도 예의상 권해 본 거였거든.”
라벨은 그렇게 말하고 란은 다시 가볍게 웃었다. 그걸 바라보다가 라벨이 이어 말했다.
“라치아 공작.”
“네.”
“그대는 결혼하기 힘들겠어.”
그 말에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라치아 가문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특수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 게 맞으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라벨은 뭔가 설명을 하려다가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설명을 할 필요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저렇게 멋진 남동생을 두고 있으니 말이야.”
“아하.”
깨달았다는 듯이 란은 웃고 말했다.
“맞아요. 유스가 멋있지요.”
‘하지만.’
라벨은 잠시 생각했다. 그녀는 임시 가주지만,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차기 가주가 된 유스타프가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녀의 모든 권리를 빼앗은 후에 내쫓는 일일 터였다.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 같은 여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라치아 공작.”
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라벨이 조용히 말했다.
“의탁할 곳이 없어진다면, 내 궁의 문은 항상 열려 있소.”
란은 정말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사르르 웃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란의 녹색 눈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죄송하지만 황자님은 제 선택지가 아닐 겁니다.”
새 신분으로 신분 세탁을 해서 뉴 라이프를 즐기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고 라벨은 쓰게 웃었다.
“아쉽군.”
“무슨 그런 말씀을. 시끄러운 건 싫어한다고 하셨으면서요.”
란은 명랑하게 대꾸하고 정원 안내를 계속했다.
✥✥✥
“둘째 황자, 마음에 들어.”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녀는 지금 저녁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치장을 하는 중이었다. 코르피스를 있는 힘껏 조이고, 그 위에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후, 머리를 땋아 올리고 입술을 덧그린다.
유스타프는 그 옆의 의자에 사냥개처럼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그녀가 치장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다와 카라는 힐끔힐끔 유스타프를 보면서도 손은 바지런히 움직였다.
머리를 올려 짙은 사파이어를 물린 머리 장식으로 꼼꼼히 고정하고 같은 빛깔의 귀걸이를 달아 주었다.
“어때?”
“어울립니다.”
비딱하게 팔걸이에 기대어 유스타프가 대답했다. 란이 씩 웃었다. 그런 그녀의 턱을 붙잡으며 카라가 말했다.
“자, 가주님. 이쪽을 보세요.”
화장하실 때는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며 카라가 붓으로 그녀의 입술을 붉게 칠했다.
덧칠한 후 기름종이를 들어 그녀에게 몇 번 물린 후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녀의 말에 란은 거울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보기에도 거울 속의 자신은 놀랍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화장의 마술이란.’
란은 힐끔 유스타프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그의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로 뭐가 좋을까?’
하지만 역시 직접 물어보는 건 서프라이즈가 아니니까.
란은 선물을 생각해 둬야겠다고 마음속에 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소다와 카라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보석 관처럼 땋아 올린 밀빛 머리카락에 사파이어 장식, 짙은 푸른색의 우아한 드레스는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소녀다운 앳된 느낌이 보이다가도 그녀의 태도와 표정에 따라 팔색조처럼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코르피스로 조인 허리를 손으로 가늠하며 란은 거울을 통해 유스타프를 보았다.
“오늘 파티만 끝나면 당분간은 휴식이야. 지겨워,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소다가 그녀의 드레스 매무새를 고쳐주며 말했다.
“다들 가주님을 눈이 빠지게 보고 싶어 한다고요?”
보통의 스무 살이라면 사교계의 꽃인 생활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벌써부터 지겹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니, 하고 소다가 타박하듯 말했다.
“그렇지만.”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또래 여자아이들 무리에 끼어서 보통의 여자아이들처럼 걱정 근심 하나도 없이, 멋진 남자나 새로운 드레스나 인테리어에 대해서만 떠드는 거였다면 충분히 즐거웠을 거다.
‘생각만 해도 즐겁네.’
하지만 자신은 라치아 공작이다. 그녀의 사교계는 얼음판이고 쟁쟁한 상대들과의 밀당이며, 정치적인 대화와 외교의 장이었다.
란은 왜 정치인들 옆에서 ‘저분이 비서실장이신 이영남입니다. 아내분 성함은 김도현이며, 딸이 둘 있습니다. 각각 이름은―’ 하고 속삭여 주는 보좌관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귀족들의 대화는 계보에 따라 소개하는 순서와 호칭이 달라졌고, 그걸 달달 외우는 게 귀족의 소양이었다.
‘그나마 제국이 작위를 장자 상속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넘쳐 나는 귀족들 때문에 머리가 아팠을 거다.
‘공작의 아들들이 전부 공작이라든가. 러시아가 그랬었지?’
그래서 귀천상혼이라는 제도도 생기고 그랬던 거겠지.
다행히도 제국은 일인 상속이었으므로, 신분 낮은 여인과 결혼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단지, 남자 형제들은 알아서 제 밥벌이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린드버그 남작 같은 경우도 생기는 거고…….’
“누님.”
유스타프의 뚜렷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트렸다.
“어? 어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파티 시간에 늦겠습니다.”
“아, 응.”
고개를 끄덕이고 란이 발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 위로 매끄러운 천이 끌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맞아, 키릭스 후작 부처가 같이 소풍 가자고 제안했는데―”
슬쩍 유스타프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응!”
란이 활짝 웃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의 소풍은 그녀에게도 기대되는 바였다.
오늘의 무도회는 황금 백조 궁에서 열리는 황실 무도회였다.
마차에 올라타는 그녀에게 유스타프가 말했다.
“몸조심하십시오.”
“응, 다녀올게.”
싱긋 웃고 란이 손을 흔들었다.
마차는 곧 지는 해를 따라 긴 그림자를 남기며 달려 나갔다.
무도회는 밤부터 시작이다.
✥✥✥
은은한 조명이 부드러운 빛을 곳곳에 반사했다. 조명은 모두 초에서 마법 등으로 바꾸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긴 원통형의 조명이었다.
원통형 조명은 맨 위에 마력석이 떠서 빛을 발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그 조명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걸로 무도회가 끝나는 것이었다.
양초의 불이 꺼지면 무도회가 끝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하지만 이 조명은 뚜렷하게 불빛의 위치가 보였으므로,
―불빛이 중간쯤 오면 정원에서 만나요.
―아, 그 사람? 불빛이 사 분의 일쯤 내려왔을 때 도착했더라고.
같은 대화가 가능해서 곧 모든 무도회에서 이 조명이 쓰이게 되었다.
‘냉풍기도 틀고 있고.’
란은 벽에 기대어 가느다란 잔에 담긴 샴페인을 홀짝였다.
“라치아 공작님이 벽의 꽃이 되신 건 아니겠지요.”
고개를 드니 은색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미로가의―”
“가주입니다.”
미로 공작.
란은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굳이 먼저 인사할 필요는 없지만 첫 만남에서 좋은 인상은 중요하고, 그런다고 라치아의 격이 떨어지지 않으니까.
미로 공작은 서른 초반으로 황태자비의 큰오빠이기도 했다.
“저 역시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치아 공작님. 드반 더스크 라 미로입니다. 드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란 로미아 드 라치아입니다. 저도 란이라고 불러 주세요.”
“라치아 공작가의 위세가 미로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드반의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지만, 란은 결코 속지 않고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봐야 ‘백은의 미로’만 할까요.”
드반은 그 말에 가볍게 웃었다.
“글쎄요, 저희 백금 광산과 그쪽의 얼음수정 광산을 바꾸자면 기꺼이 바꾸고 싶습니다만.”
이게 미로 공작가가 백은의 미로라고 불리는 두 번째 이유였다. 광대한 백금 광산이 그들의 소유다.
“어머나?”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거로 대화를 넘겼다.
라치아가 북쪽에, 우슬라 공작가가 남쪽에 있다면 미로 공작가는 중앙에 가까이 위치했고, 전통적으로 황가와 가까웠다.
올리비아가 황태자비로 채택된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다.
중앙 정계에 강한 공작가.
‘게다가 백금 광산으로 자본도 튼튼하고, 어지간하면 부딪치고 싶지 않은데.’
“이런 곳에서 공작님을 뵙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란이 가볍게 말했다.
“아아, 네. 황실 무도회는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라치아 공작께서 나오신다기에.”
“그건―”
란은 살짝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뚜렷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저 때문에 굳이 무도회까지 찾아오셨다니, 초대장을 보내셔도 충분하셨을 텐데요.”
“그렇게까지 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중얼거리고 드반이 허리를 가볍게 숙인 뒤에 속삭였다.
“황태자비는 제 여동생입니다.”
란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겉으로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쨌든 내면으로는 입을 벌렸다.
‘지금 내 여동생 남편 건들지 말라고 나에게 경고한 거야?’
아니―
란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필요 없어. 황태자 필요 없다고!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란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에, 두 분이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시지요. 아주 완벽한.”
마지막 말은 살짝 씹어뱉듯이 나왔고 드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요.”
그때 마치,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황태자가 란에게로 다가왔다. 드반을 보고 멈칫했던 그는 곧 유들유들한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이거 미로 공작 아닌가?”
“전하.”
드반은 가볍게 고갯짓하며 인사했고 루스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두 공작이 같이 있는 걸 보게 되니, 제국의 장래가 밝은 것 같네.”
“미로 공작가는 항상 황가와 함께합니다.”
드반의 인사에 루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힐끗 란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쳐 란은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가 펴 보였다. 루스는 입맛을 다셨다.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손에 넣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그를 더 안달 나게 하였다.
갓 성인식을 치른 데뷔탕트들과 비슷한 나이이면서도 그런 순진한 소녀들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유부녀 같지도 않았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작 열아홉에 라치아 공작이 되어 사교계의 중심에 선 이 여자를 침대에서 깔아뭉개면 어떤 표정을 할까?
생각만으로도 루스는 아랫도리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한 곡 추지 않겠나?”
루스가 란에게 손을 내밀어 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벽의 꽃으로 남으려 합니다. 다리가 안 좋아서요.”
“그러지 말고―”
루스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기려는 것을 드반이 교묘하게 막아섰다.
“아직 제 누이와 첫 춤도 추지 않으셨습니다, 전하.”
드반의 말에 루스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내가 누구와 첫 춤을 추든 그건 내 마음 아닌가!”
드반의 눈썹이 짧게 꿈틀했다가 도로 펴졌다.
“사람들의 눈이 있습니다.”
“흥, 사람들의 눈은 무슨. 내가 라치아 공작에게 푹 빠져 있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지. 그런데 춤조차도 거부하는 건가?”
마지막 목소리는 컸다. 드반의 턱에 힘이 들어갔고, 주변 사람들은 이제 대놓고 침묵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란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방 저 멍멍이 자식이 뭐라고 지껄인 것인가요?
‘좋아. 기절하자.’
오늘 일정은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란은 그렇게 결심하고 놀란 듯이 부채를 접으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어떻게, 비전하께서 함께 계시는데―”
헐떡이며 그런 말을 내뱉은 연기를 하다가 란은 최대한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옆으로 쓰러졌다.
“가주님!”
놀란 블레인이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받쳤다.
‘이게 바로 신뢰의 도약.’
블레인이 제때 받아 줄 거라 생각해서 있는 힘껏 쓰러질 수 있었다.
란이 블레인의 팔을 붙잡으며 작게 말했다.
“다리가, 아프, 네요…… 마차로 돌아가 줘요.”
그 말에 블레인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심 란은 놀랐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양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주님이 쓰러지셔서,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공작 각하.”
정중히 인사를 하고 블레인이 서둘러서 무도회장을 빠져나왔고, 호위 기사에게 푹 안겨서 회장을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블레인은 그녀를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빠르게 걸어서 시종들이 허둥지둥 부른 마차에 실었다.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란은 쿠션을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미친, 돈 거 아냐! 아오!!”
퍽퍽 쿠션에 먼지가 날렸고 블레인은 차갑게 말했다.
“언제까지 저분의 작태를 지켜봐야 합니까?”
황태자비가 독살할 때까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그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란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고마워, 잘 데리고 나와 줘서.”
“아닙니다. 설마 미로 공작 앞에서 그렇게까지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도 그래.”
설마 매형 앞에서, ‘내가 지금 불륜하고 싶은데 쟤가 안 받아 주고 있잖아!’ 하고 외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
‘미로 공작은 여동생을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일부러 무도회장에까지 나와서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으니까.
‘아니면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황태자는 공작 앞에서 선을 넘었다.
란은 이마를 짚으며 쿠션에 몸을 기댔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제 황태자비가 어떻게 나오려나. 미로 공작가는? 황가는?’
황태자를 탓하기 싫으니 괜히 란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다른 식으로 나올까.
황태자비는 이제 무슨 생각을 할까.
“아아! 멍멍이 새끼!!”
버럭 소리를 지르고 란은 쿠션에 머리를 푹 묻었다.
‘그,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어.’
엘프와 드워프 세공품에 관해 이야기하자마자 고위 귀족들의 눈에서 빔이 쏘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첫 출발이 황가가 되면 좋겠지만.’
지금 이 상황으로 봐서는 어지간하면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레쉬와도 만나 봐야 하고…….’
란은 푸우 숨을 내쉬었다. 가짜 상단주를 할 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결국 진행은 란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도 그럴 것이 이종족들은 란이 아닌 다른 사람을 거치는 걸 꺼렸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만.’
뭐, 다른 사람들은 이종족과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얼음수정처럼 완전 독점이 가능하다는 거니까.
‘이건 그러면 상단을 만들지 않고 해볼까? 익명으로 가짜 신분을 하나 만들어서 말이야. 이종족과의 거래는 내가 하고, 인간과의 거래는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되잖아?’
어차피 대량생산이나 판매가 가능한 물건도 아니니 그런 식의 눈 가리고 아웅이 가능할 것 같았다.
‘미로 공작에게도 하나 팔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다가 제 스스로의 생각이 우스워 란은 픽 웃었다.
‘아주 그냥 장사꾼 다 됐구나, 란.’
란은 똑바로 자리에 앉아서 쿠션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말했다.
“마차 창문을 열까요? 먼지가 좀 있는 것 같네요.”
블레인은 충직하게 ‘방금 쿠션을 두들기셔서 그렇지요.’ 같은 말은 하지 않고 창문을 열며 말했다.
“아무래도 라치아보다 공기가 탁한 것 같습니다.”
란은 그 이중적인 말에 슬쩍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
생각보다 일찍 들어온 가주의 마차에 녹색 아치는 약간의 소동이 일었다. 허둥지둥 그녀의 외투를 받기 위해서 나온 소다와 카라가 란의 눈치를 살폈다.
유스타프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에 ‘저녁은 드셨습니까?’ 하고 물었고 란은 고개를 저었다.
식사하며 란은 황태자와 미로 공작에 대한 울분을 토했고, 차를 마시며 진정했다.
“정말이지, 그 인간 줘도 안 가진다고!”
마지막으로 란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골치 아파.”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 역시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골치 아픈 작자입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루미니티 백작에게서 편지가 와 있습니다.”
“어?”
놀라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유스타프가 시종에게 눈짓하자 그가 은쟁반 위에 재빠르게 편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란은 편지를 받아 들고 편지 칼로 가볍게 봉투를 연 후에 칼을 다시 은쟁반 위에 올렸다.
내용은 가벼운 인사와 유스타프가 잘 올라갔냐는 말, 그리고 루루가 건강해졌다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원하는 찻잎을 찾았다는 이야기였다.
‘루미에를 찾았구나.’
심장이 쿵 하고 빠르게 울렸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유스타프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아 지레 찔려 란은 입을 열었다.
“루루가 건강해졌대.”
“잘됐군요.”
“그리고 일루미니티 백작이 병사도 내줬었어?”
“영지전이니까요. 가신들에게 전부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랬구나. 안부 전해 달라고 하는데…….”
“답장하지요.”
“나도 얼른 해야겠다.”
란은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도로 쟁반 위에 올렸다. 혹시나 유스타프가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누님.”
“어? 응?”
그녀의 반응에 유스타프는 별말 없이 말했다.
“내일모레면 키릭스 후작 부처와 함께 소풍을 가니, 그걸 생각하면서 마음을 푸시죠.”
“아, 맞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내일모레 리제를 만나는구나.
생각하니 정말로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발을 까닥거리며 경쾌하게 말했다.
“나 소풍 가는 건 처음이야.”
“저도 처음입니다.”
“그래? 아카데미에서 친구들과 가지 않았어?”
“안 갔습니다.”
“그랬구나―”
학교에서 소풍은 다들 가는 줄 알았지, 하고 란이 팔짱을 끼는데 유스타프가 물었다.
“그럼 오늘은 한 곡도 추지 못하신 거군요.”
“어? 응. 어차피 춤은 다 거절할 생각이었어.”
“아쉽네요.”
“그런가?”
“그럼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어?”
놀라 란이 고개를 들자 유스타프가 손을 내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 사이인가 시종도 없고, 티 룸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 나간 거야?’
당황하면서도 란은 조그마하게 말했다.
“하지만 노래도 없잖아.”
“그건 그렇군요.”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란이 안도하는데 그가 스윽 티 룸 한쪽에 놓은 커다란 기계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태엽이 감기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설마?’
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스타프가 손을 놓자 천천히 손잡이가 돌아가면서 오르골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 출까요?”
그의 말에 란은 입을 벌렸다가 웃음을 터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못 춰.”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는 픽 웃고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그녀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란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신년회 때랑은 완전히 달라.’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손도, 자신이 손을 올리고 있는 유스타프의 팔……? 어깨? 하여간 거기도 완전히 달랐다.
‘내가 올려다봐야 하는 것도.’
그냥 볼 때는 키가 컸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이렇게 붙어서 더블릿을 추니 유스타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온몸으로 체감이 되었다.
오르골 연주는 길지 않았고, 란은 어쩐지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춤을 끝냈다.
“미안.”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체 몇 번이나 그의 발을 밟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집중을 못 하시던데요.”
“미안.”
“아뇨, 제가 더 정진해야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했고 란은 피식 웃었다.
“얼마나 더 인기가 좋아질 셈이야?”
“글쎄요.”
묘하게 말꼬리를 흘리며 말하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머리 장식에 손을 댔다가, 다시 손을 떼며 말했다.
“약간 흐트러졌습니다. 가서 빼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응, 이제 벗어야지. 그래도 지금까지 아까워서라도 입고 있었던 보람이 있네.”
란이 웃으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팔을 내밀며 말했다.
“방까지 모셔다 드리죠.”
“어머?”
‘에스코트까지?’ 하고 란은 키득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람?’
갸웃하고 란은 소다와 카라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이 실실 웃고 있는 걸 발견하고 깨달았다.
‘아, 기분 좋아졌어.’
유스 나름대로 내 마음을 달래 주려고 그런 건가? 싶자 귀엽게 느껴졌다.
‘귀엽다는, 좀 아닌가? 멋있다?’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킥킥 웃었다. 머리를 풀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으니 산뜻한 기분이었다.
란은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어 일루미니티 백작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 잘 있고, 루루가 건강해졌다니 다행이고, 발견한 찻잎에 대해선…….’
잠시 펜을 멈추고 란은 생각에 잠겼다. 루미에를 노예 생활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단 그럼.’
란은 ‘찻잎을 꼭 구매해 줬으면 좋겠다, 대금은 다음에 치르겠다’ 하고 짧게 글을 남겼다. 루미에를 구하고 나서는 일루미니티 백작이 오든 아니면 대리인을 보내든 뭔가 이야기가 있겠지.
‘직접 내가 가서 구매하는 건 너무 위험도가 크니까.’
유스타프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빨리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마침표를 찍었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곱게 접고 인장을 찍은 후 쟁반 위에 올렸다.
쭉 기지개를 켜자 실크 로브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란은 로브를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자자. 오늘 피곤했어.’
란은 얼른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열어둔 창문으로 서늘한 여름밤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세레나데를 불러대던 민폐스러운 청혼자들도 유스타프가 녹색 아치에 도착한 이후로는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아서 밤에도 안심하고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정원에서 살랑살랑 꽃향기가 밤공기를 타고 흘러들어 왔고, 덕분에 란은 푹 잠들 수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