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신년회
Chapter 4. 신년회
신년회는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특산품인 꿀 술과 리들 열매 술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고 음식도 높이 쌓여 있었다.
곳곳이 은가시나무로 장식되어 화사하게 보였다.
은가시나무는 호랑가시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잎 뒤쪽이 은색이고 열매는 빨간색이었다. 겨울에도 짙은 초록색이라 신년회 장식으로 잔뜩 가져다가 쓰고는 했다.
경쾌한 춤곡이 연주되고, 적당히 술을 마신 사람들은 웃으며 빠른 스텝을 밟았다.
새 마법 도구인 온풍기 덕분에 연회장 안은 후끈후끈했다.
란은 기둥 근처 의자에 살그머니 앉았다.
‘술이 꽤 독한데?’
리들 열매는 빨간색에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그래서 술 역시도 선명한 붉은빛에 같은 맛을 가지고 있었다. 란은 금방 이 달콤한 술이 마음에 들어서 벌써 큰 컵으로 세 잔째 비우고 말았다.
‘빠르게 마셔서 그런가.’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그나마 신년회 중간이라 다행이다.
그때 누군가가 물 잔을 내밀어 받아 들고 보니 유스타프였다.
“고마워.”
“너무 빨리 드시더군요.”
“독한 줄은 몰랐는데.”
유스타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란이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어째서 아카데미 제복이야?”
“정장이 없어서.”
“하나 맞추지!”
“그럴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동생 정장 한 벌쯤은 사줄 수 있어.”
눈에 힘을 주고 란이 말하자 유스타프가 힐끗 그녀의 드레스를 보고 말했다.
“드레스가 짧네요.”
아.
드러난 발목을 한 번 꼬며 란이 말했다.
“어머니가 나보다 키가 작으셔서.”
어머니에게는 끌리는 길이였지만, 그녀에게는 발목 길이다.
“하나 맞추시지 그러셨습니까.”
란이 피식 웃었다.
“드레스가 산더미야.”
신년회마다 어머니는 드레스를 맞췄다. 그것도 세 벌씩. 당연히 거기에 맞춘 장신구까지 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갈아입고 나오는 게 어머니가 신년회를 즐기는 방식이었다.
황궁에서 열리는 신년회에 참여하지 않고 라치아의 연회에 참여하는 대가였다.
‘그야 라치아가 촌구석이기는 하지.’
화려하고 세련된 미인이었던 어머니는 라치아에만 있으면 수도에 비해 십 년씩은 올드해지는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다른 가신들의 아내와 비교하면 어머니는 그야말로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재정이 파탄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공작가가 공작가 중에서 가장 가난하거든요. 땅이 척박해서.
‘마력석을 팔면 이제 역전이지.’
후후.
란이 음흉한 웃음을 짓는데 유스타프가 손을 내밀었다.
“……?”
란이 의아해하며 물 잔을 그의 손에 돌려주었다.
“…….”
유스타프는 물 잔을 지나가던 시종에게 돌려주고 다시 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추시죠.”
“어?”
놀란 란이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 자신의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겹쳐지기 전에 멈추고 그녀가 눈을 찡그렸다.
“나 춤 잘 못 춰.”
“그러실 것 같았지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 쥐어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제가 잘 추니 괜찮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녀를 플로어로 데리고 갔고, 어쩐지 끌려가는 모양이 되어 란은 플로어에 섰다.
“콰트로움(quattrom : 넷이서 짝지어 추는 복잡한 춤) 같은 거 추면 나 그냥 서 있는다?”
란이 협박하듯이 말했지만 유스타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자들을 돌아보았다. 금방 곡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느린 춤곡이다.
‘아, 더블릿이다.(doublit: 둘이서 추는 춤)다.’
왈츠와 흡사한 이 춤이 수도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고 듣기는 했다. 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유스타프의 손을 꽉 잡았다.
“힘 빼세요. 절 치겠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그를 노려보는데 그가 허리를 끌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왁.’
생각보다 강한 힘으로 끌려가서 란은 어색하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란이 ‘우와우와.’ 하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자 유스타프가 혀를 찼다.
“정말로 못 추시는군요.”
“말했잖아?”
“수도에 올라가서 어쩌시려고요?”
“춤은 안 추면……?”
“라치아가의 가주가 춤을 하나도 출 줄 모른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유스타프가 “고개 드십시오.” 하고 짧게 명령해 란은 발에서 눈을 뗐다.
파란 눈이 이제 확연하게 더 위에 있었다. 진짜로 이 잠깐 사이에 많이 컸구나.
‘아.’
유스타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까 확실히 편하다. 스텝이 엉망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그냥저냥 춤추는 모양새는 되는 듯했다.
그제야 여유가 생겨 란이 말했다.
“왜? 걱정돼?”
“라치아에 흠집이 가는 게 싫습니다.”
그 말에 란은 눈을 깜박였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유스타프는 라치아를 엄청 좋아하나 봐. 아니지, 그게 당연한가?”
“누님은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란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라치아가 오래된 가문이고 전통이 있고, 명예가 있는 가문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게 나에게 엄청나게 중요하냐고 하면 아니야.”
“거기다가 춥고, 척박하고, 촌구석이죠.”
그 말에 란은 명랑하게 웃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유스타프가 그런 란을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들며 말했다.
“저에게서 라치아를 빼면 뭐가 남을까요?”
“잘생김?”
란이 눈을 찌푸리며 한 말에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느릿하게 말했다.
“그건 감사한 일이군요.”
“라치아는 네 거야.”
그 말에 유스타프가 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도 너에게서 라치아를 빼앗지 않을 거야.”
“빼앗기지도 않을 겁니다.”
유스타프가 낮게 속삭였다. 라치아에 속한 모든 것은 자신의 것.
라치아의 유스타프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끝없이 말했다. 아직 어린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라치아는 그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유스타프, 당신의 것이에요.”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게 자신에게 냉랭한 남편에 대한 유일한 복수라도 되는 듯이.
갈퀴처럼 파고든 손가락은 아팠고, 어머니의 표정은 무시무시했지만 유스타프는 그 모든 것에 익숙했다.
소리 내서 웃지 마세요.
울어서도 안 됩니다.
뛰지 마세요.
라치아의 차기 가주로서 위엄을 보이세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어린아이같이 굴지 마세요.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을 생각하며 유스타프는 란을 보았다.
란은 식은땀이 흘렀다. 벌써 세 번째 유스타프의 발을 밟고 있었다. 어떻게 끌려가는 걸로 춤은 춰도, 스텝이 꼬여서 발을 밟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유스, 발 괜찮아?”
“괜찮습니다.”
어쩔 줄 모르는 게 다 드러나는 얼굴.
소리 내서 웃고, 뛰고, 감정이 다 드러나고.
간신히 춤이 끝났을 때는 안도로 얼굴이 가득 찼다. 어쩐지 심술궂은 기분이 들어 유스타프는 말했다.
“가시기 전까지 춤 연습을 해두시는 게 좋겠군요.”
“으―”
란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안 해도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럭저럭 출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유스타프 덕분이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플로어 밖으로 데려다주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춤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방금 제가 춘 걸 보고서도 춤추고 싶어요?”
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블레인에게 묻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춰 주시면 영광이죠.”
“으음.”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하고 란은 블레인의 손을 잡았다.
‘와.’
확실히 성인 남자는 다르구나.
약간 감탄하며 란은 두 번째 춤을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블레인은 꾹 웃음을 눌러 참았다.
“정말로 못 추시는군요.”
“미안…….”
“아닙니다.”
말하고 그가 잠시 시선을 들어 주변을 보았다가 낮게 말했다.
“로스가 건방지게 굴지 않습니까?”
“응? 음, 조금?”
“역시.”
블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마.”
“아뇨. 하셔야지요. 가주님은 가주님이십니다. 자기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기사의 몸가짐이 아닙니다.”
말하고 블레인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로스는 어렸을 때부터 도련님을 섬겼지요. 아마 자신을 도련님의 큰형처럼 여기고 있을 겁니다.”
블레인은 로스와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났다. 로스는 남작가의 늦둥이 막내였고, 그러다 보니 제멋대로 자라게 둔 것 같아 블레인은 민망스러웠다.
“유스타프만 좋다면야.”
란의 말에 블레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보십니까?”
“어?”
“그분이 로스를 좋아한다고요?”
“으음.”
짧게 신음을 토해 내고 란이 답했다.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스스로 생각해도 참 확신 없는 대답이다. 블레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란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 태도가 더 안 좋은 걸 수도 있어. 상관이 부하들에게 호불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건 딱 봐도 나쁘잖아.”
“그렇지요.”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안심이 되어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가 눈을 찌푸렸다.
“블레인.”
“네.”
“부츠 튼튼한 거지?”
블레인은 다시 웃음을 참고 진지하게 말했다.
“튼튼한 겁니다.”
“다행이다.”
안심하며 란은 춤을 끝냈다. 도대체 몇 번을 밟았는지 셀 수도 없었다.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블레인의 인내심에 그녀는 손뼉을 치고 싶었다.
플로어를 빠져나온 란은 잇달아 춤을 청하는 기사들을 피하려고 재빨리 음식 코너로 몸을 옮겼다.
‘음, 역시 고기 쪽이 빠르게 떨어지는군.’
얇게 만든 샌드위치 사이에는 햄, 치즈, 혹은 연어가 끼워져 있었는데 인기가 있는 것은 역시 햄이었다. 오이 샌드위치는 비싸서 올릴 수 없었다.
‘다음에는 좀 더 화려하게 채워 넣어야지.’
내년 신년회 계획을 세우며 란은 가장 인기 없는 연어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가을이 되면 계곡과 강에서 어마어마하게 잡히는 연어는 훈제되어 겨울에 주요한 양식이 된다. 그만큼 흔해서 아무래도 인기가 없는 녀석이었다.
란은 주변을 살펴보고 큰 컵에 가득 리들 열매 술을 담은 다음에 살짝 테라스 문을 열고 나왔다.
온풍기와 술에 달아오른 뺨이 차가운 공기에 닿자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북풍도 강하지 않은, 겨울치고는 온화한 날씨였다.
“기분 좋다.”
큰 소리로 말하는 건 술기운 때문일까?
어쩐지 웃음이 나와 란은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리듬을 맞춰 가볍게 빙글 한 바퀴 돌고 다시 웃었다.
“아, 좋다.”
란은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다음에 독한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우와.”
핑 돈다.
목구멍과 배 속에서 열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연어 샌드위치를 한입에 털어 넣고 란은 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입김이 용처럼 뿜어져 나왔다. 란은 난간 가장자리로 걸어 나갔다.
“덥다.”
연회장은 2층이었다. 높은 난간 아래 새하얀 벌판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눈, 눈, 눈.
사방이 눈이다.
란은 가볍게 웃었다. 어머니는 이 눈이 지긋지긋하다고 했었지.
하지만 밤에 달빛이 반사된 눈은 여왕의 드레스 자락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길이야 부지런히 시종들이 치워 놓았지만, 정원에 쌓인 눈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정원사 말로는 눈이 두둑하게 쌓여야 알뿌리가 보호된다고 하니, 뭐.
‘답답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에 손을 올렸다. 정성스럽게 땋아 올린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란은 머리핀을 뽑기 시작했다.
긴 빗 모양의 핀을 뽑자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아래로 탁 떨어졌다.
란은 ‘에잇’ 하고 껑충 뛰어올라 난간에 앉았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난간에 앉아 그녀는 머리카락을 마저 풀기 시작했다.
“됐다!”
간신히 머리카락을 다 풀어헤치자 그렇게 머리가 가벼울 수가 없었다.
머리 안쪽까지 쓸고 지나가는 겨울바람이 기분 좋았다.
“누님?”
안쪽 문이 살짝 열리고 목소리가 들려와 란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스!”
그의 푸른 눈이 놀란 듯 둥그레졌다. 란은 어쩐지 그게 귀여워서 웃었다.
“여기야, 여기! 여기!”
그녀는 이제 힘껏 양손을 흔들었다. 유스타프는 뛰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빠르게 걸었다.
그때 강한 산바람이 휙 불어왔고 그녀는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날리며 몸이 붕 뜨고 흔들리는 걸 느꼈다.
‘와, 날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며 팔을 벌리고 웃는데 언제 왔는지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를 꽉 감고 있었다.
“유스?”
웃음이 멈추지 않아 킬킬거리며 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반짝이는 밀빛 머리가 바람에 부드럽게 물결치듯 흔들렸다.
“나 방금 날아갈 뻔했어.”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응? 왜?”
“왜?”
유스타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고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가 살짝 풀며 말했다.
“조약에 집어넣어야겠습니다. 제가 가주가 될 때까지는 죽지 않으시는 거로요.”
“죽을 생각은 없는데.”
난 오래오래 살 거야.
란이 히죽이며 말하자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온 숨이 새하얀 구름이 되어 흩어졌다.
“제발 그래 주십시오. 제가 말했었죠. 쉽게 죽는 사람은 싫다고.”
“응, 응, 응, 안 죽는다니까.”
란은 몇 번이나 대답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푸른 눈동자를 보니 어쩐지 그녀의 기분도 잔잔해지는 기분이었다.
“유스.”
“네.”
“웃어 봐.”
유스타프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이 마신 것 같지 않았는데.”
그의 중얼거림에 란이 눈을 찌푸렸다.
“안 마셨어.”
“정말로 안 마신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심술쟁이.”
“제가요?”
“그래. 요 못된 입!”
란이 쪽 하고 입맞춤을 시도했지만 흔들린 몸은 입술 대신 그의 이마에 키스하게 만들었다.
흠칫하는 그의 움직임이 느껴져 란은 다시 낄낄 웃었다.
“유스는 심술쟁이, 바보. 나빴어. 나 진짜 열심히 하는데.”
“압니다.”
말하고 빤히 유스타프가 란을 바라보았다.
“그럼 왜 심술쟁이야.”
“그다지 심술부리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그렇지만.”
란은 눈을 찌푸렸다.
“그럼 어떻게 대해 주길 원하십니까?”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줘.”
“친절하게, 그리고요?”
“상냥하게.”
“충분히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냐.”
란이 눈을 찡그렸다. 유스타프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라치아를 좋아하십니까?”
아까와 같은 질문.
란은 갸웃하고 솔직히 말했다.
“으음, 그다지?”
그녀가 라치아를 좋아해서 이렇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유스타프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사실 자신을 위해서기도 하다. 그래도 비벼 볼 곳이 이제 여기밖에 없으니까.
기반을 다져도 지금 돈 벌 때 다져 둬야 나중에 여기를 떠나서도 편하지. 지금 여기를 떠나면 빈털터리 신세다.
“매정한 사람이 누군가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답하자 란이 투덜거렸다.
“안 매정한데. 얼른, 다정하게 대해 줘.”
그의 입에서 어이없음이 섞인 웃음이 가볍게 새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다정한 겁니까?”
“상냥하게 말해 줘.”
“상냥하게요. 그거 참 추상적이군요. 그리고요?”
“나 죽이지 말고.”
그 말에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을 놓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란이 그를 바라보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밀었다.
“―?!”
그대로 상체가 뒤로 넘어가 놀라 허공을 휘저으니 유스타프가 그 손을 붙잡았다.
“유스?”
놀라서 술이 깨 버렸다.
그녀가 붙잡은 손을 당겨 상체를 세우려고 했지만, 그가 한 걸음 다가서자 다시 휘청, 상체가 뒤로 미끄러졌다.
“나 떨어트릴 거야?”
“어떨까요?”
푸른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란은 웃었다. 그 웃음에 허를 찔려 유스타프는 흠칫했다.
“약속했으면서.”
유스타프는 말로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각에 잠시 서 있다가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휙 당겨지면서 가볍게 유스타프에게 부딪쳤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말을 하십니까? 제가 당신을 죽일 거라고?”
“동맹 이후를 말하는 거야, 이후를.”
유스타프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매정한 분이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망토를 벗더니 그녀의 머리부터 망토를 씌워 감싸고 그대로 난간 위의 란을 안아 들었다.
“유스?!”
놀라 소리 지르자 유스타프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차가워요. 입술도 파랗게 질리셨고요.”
“별로 안 추운데…….”
“그게 더 무서운 겁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테라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곳에 들어오자 피부가 간질간질해졌다.
‘졸리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들어 와서 란은 하품했다.
홀 입구까지 그녀를 안고 와서 유스타프는 시녀를 불렀다.
카라가 그의 손짓에 재빠르게 다가왔다. 유스타프는 그제야 란을 내려놓고 말했다.
“목욕하고 쉬십시오.”
이어 정중하게 인사하고 그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카라가 란의 얼굴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가주님. 너무 창백하세요. 세상에 얼굴도 다 얼어붙으셨네요.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얼른 올라가요.”
“미안, 카라도 연회 즐기고 싶을 텐데.”
“무슨 말씀을.”
카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란의 방으로 돌아와 벽난로 불을 더 크게 키우고 온풍기도 틀었다.
따끈따끈한 곳에 앉아 있으니 저절로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다가 카라의 손길에 깨워져서 목욕까지 끝내고 나오니 고개가 거의 상모돌리기 수준이었다.
란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유스타프는 깊게 숨을 내쉬며 검 끝을 늘어트렸다. 그의 몸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땀이 뚝뚝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새벽 검 훈련을 막 끝낸 참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블레인이 수건을 내밀어 유스타프는 받아 들며 물었다.
“로스는?”
“겨울 훈련이요.”
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저런.” 하고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한겨울 훈련은 대부분 뺑이치기다.
“말씀하신 대로 가주님 호위는 실력자로 구성했습니다.”
그가 명단을 건네, 유스타프는 땀을 닦으며 종이를 훑어보았다. 기사단 안에서도 정평이 난 기사만 모여 있었다.
“이대로 진행하도록. 수고했어.”
그가 종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가 같이 따라가면 좋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가장 커다란 썩은 부분을 도려냈으면, 이제 남은 자잘한 곳을 쳐낼 때지.
유스타프는 검에 기대어 빙벽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만년설이 쌓인 오래된 산맥이 저택 뒤에 당당히 서 있다.
―유스타프는 라치아를 좋아하나 봐.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좋아한다, 라니.’
유스타프는 웃었다. 그냥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란이 우스워서, 그리고 자신이 우스워서.
라치아는 그의 전부였다.
라치아를 빼면 자신은 그저 빈껍데기다.
배운 것, 익힌 것, 모든 것은 라치아의 가주가 되기 위해서.
―약속했으면서.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으면서도 약속을 믿는 주제에, 정작 유스타프 자신에 대한 믿음은 하나도 없다.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유스타프는 새하얀 숨을 길게 내쉬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블레인.”
“네.”
“란을 부탁하지.”
“존의.”
블레인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팡파파파파팡!
연신 깃털 베개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란은 양 손바닥으로 베개를 두들기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란, 돌았어! 돌았다고!!!’
한참 두들기니 깃털 베개가 보기 좋을 만큼 부풀어 그걸 옆으로 놓고 란은 또 하나 있는 베개를 가져와 두들기기 시작했다.
‘미쳤어, 미쳤어. 진짜, 미쳤어! 술에 취해서 뭘 하려고 한 거야? 응? 뽀뽀라니, 무슨 아저씨가 성희롱하는 것 같은 행동이여?’
파파파팡!
깃털 베개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베개가 완전히 빵빵해지자 란은 얼굴을 문질렀다.
으아아아!
몇 번 발로 시트를 걷어차다가 란은 한숨을 내쉬며 축 늘어졌다.
‘게다가 그 자식 날 난간에서 밀었잖아!’
마치 시험해보는 듯한 그런 행동.
싫다, 정말.
물론 성희롱한 자신이 나쁘기는 했지만. 죽을죄는 아니지 않을까요.
‘아냐, 내가 당했어도 상대방을 난간에서 밀어 버리고 싶었을 거야. 이, 일단 사과하자.’
그리고, 그리고―
사과하자.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란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한 준비 시간이 오늘따라 너무 짧게 느껴졌다.
느릿느릿 식당으로 내려가니 유스타프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깍듯한 인사에 란은 슬쩍 그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표정이었다.
의자에 앉으며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유스타프는?”
“저도 잘 잤습니다.”
정말? 진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지만 유스타프는 별말 없었다. 두 사람 앞에 가벼운 식사가 놓여졌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 봤는데 말입니다.”
“미안!”
란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누님?”
의아한 그의 목소리에 란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어젯밤에 내가, 그러니까 너에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유스타프는 “괜찮습니다.” 하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저, 정말?”
슬그머니 란이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 드려야지요.”
아아아아아!
맞아, 나 그런 말도 했었어.
란은 온몸을 비틀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유스타프는 그런 란을 모른 척하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춤 말입니다. 굳이 익히실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요.”
“어? 그래?”
“네. 춤추실 필요가 없죠.”
그의 말에 란은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귀리죽이었다. 설탕 없이 귀리죽을 먹으며 란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 가기 전에 이야기해 둘 게 있어.”
유스타프가 그녀를 바라보아 란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아차 했다. 정신이 없어서 그림을 깜박했다.
“나중에 보여줄게. 내가 말하는 나무의 수액을 받아 줬으면 좋겠어.”
봄이 되기 전까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란은 미리 운을 떼어 뒀다.
“수액이요?”
“응, 그리고 그 수액을 졸여서 설탕을 만들 거야!”
드디어 설탕 값에 손을 떠는 나날이여, 안녕이다.
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나무에서 설탕을 만든다고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를 불러 책상 위의 그림을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시녀가 종이를 가져왔다.
“이 나무야.”
유스타프는 그녀의 어설픈 나뭇잎 그림을 바라보았다. 란이 열심히 설명했다.
“이 나무 수액이 달콤하거든.”
당단풍 나무에서 메이플 시럽이 나오는 것과 똑같은 원리였다.
북부의 설백나무 수액 역시 달콤한 맛이 났다. 이걸 끓여서 졸이면 시럽이 되고, 시럽을 더 끓이면 설탕처럼 덩어리가 된다.
“설탕이라니.”
유스타프는 식사를 멈추고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그림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설탕은 전량 수입이다. 남부 쪽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있기는 했지만, 수확량이 미미했다.
설탕은 같은 무게의 은과 금액이 동일했다.
“사실 나도 자세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라. 일단 시범적으로 수액을 채취해서 이것저것 시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수액 자체가 달콤하고, 끓이면 설탕처럼 된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도해 봐야겠군요.”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 이제 설탕을 마음껏 먹을 수 있지.”
“이미 얼음수정만 팔아도 그럴 것 같은데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가볍게 웃었다.
“레버리의 말에 따르면 지금 수도에서 열기가 장난 아니래.”
“당연히 그렇겠지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과 그가 고민해서 만든 첫 번째 작품.
그것은 바로 말에 다는 장신구였다. 말에 무슨 장신구를 다는가 싶겠지만, 귀족들에게 보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차 지붕에 귀여운 옷을 입고 앉아 있기만 하는 남자아이가 유행할 정도니까.
란이 착안한 것도 그 점이었다.
‘천마의 날개’라고 이름 붙인 이 장신구를 착용하면 말에게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투명한 날개가 솟구쳤다.
환영 마법이다.
그러면서 말의 근력과 지구력도 약간 상승시켜 주는 효과를 같이 주었다.
황후는 자신의 마차를 끄는 모든 말에게 이걸 장착했고,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투명한 무지갯빛 날개를 달고 대로변을 위풍당당하게 달리는 사두마차를 생각해 보라.
모두가 그걸 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얼음수정을 독점으로 파는 대신에 우리가 개발한 상품도 골든로즈 상단에서 팔아 주기로 했으니까.’
1년간 마력석은 골든로즈 상단에 독점으로 제공한다.
100만 베라트의 선금을 받기는 했지만, 어차피 얼음수정은 그 이상의 부를 안겨줄 터였다. 그래서 란은 그 1년간 자신이 만든 세공품도 같이 팔아 달라고 했고, 레버리는 저렴한 수수료만 떼고 팔아 주겠다고 약조했다. 마력석과 함께 초반에 마법 세공품을 같이 팔면 들어오는 이익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골든로즈 상단은 밀려드는 문의에 환호성을 질렀다.
기존 마력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도를 가진 얼음수정의 등장은 모든 귀족이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얼음수정의 가격은 생산 단가의 열 배 정도였다. 보통 서민은 한 알도 구하기 어려운 가격이었다. 그러나 귀족에게는 파격적으로 낮은 가격이다.
‘게다가 마력석은 소모품이니까.’
안에 든 마력이 고갈되면 끝. 새로운 마력석을 끼워 넣어야 한다.
모두가 대체 이 마력석이 어디서 난 거냐며 레버리에게 캐물었고 숫제 협박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란이 수도로 올라가겠다고 한 지금, 레버리는 슬그머니 출처를 퍼트렸다.
얼음수정은 라치아 공작가에서 나오는 거라고.
이미 수도에 있는 라치아 공작가를 마법 세공품 카탈로그처럼 꾸미고 있다고도 했다.
‘으, 황후를 만날 걸 생각하면 위가 아파.’
황제도 만나게 되겠지.
“황제가 분명히 돈을 내놓으라고 할 텐데 말이야.”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당연히 그러겠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300년 전에 세워진 제국은 완전히 새로 물갈이를 했다. 정복 황제인 라이언은 영토를 빼앗고, 기존의 호족들을 전부 쫓아낸 후 자신의 가신에게 땅을 주었다.
즉, 지금 제국의 모든 귀족은 300년 전에 초대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론적으로 제국의 모든 땅은 황제의 것이고, 황제가 신하들에게 나눠 준 봉토이다. 그래서 작위를 이어받고, 그걸 황제에게 인정받는 것은 귀족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통적인 절차였다.
자기 핏줄의 정당성이 제국 황제에게서 나오니 말이다.
그래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에도 큰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라치아는 다르다.
라치아는 유일하게 갈아 치워지지 않은 오래된 핏줄이었다.
‘문’을 수호하는 가문.
전설 속의 대현자 이브리아와 함께 내려오는 문지기.
초대 황제였던 라이언도 빙벽까지 올라와 라치아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한 마법사는 빙벽으로 다가가지 못했고, 지금은 사라진 정령술사들은 청염 앞에 막혔다.
하지만 라치아 가주는 기꺼이 대륙을 정복한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고, 황제는 그에게 공작 위를 내림으로써 서로 체면을 유지한 채로 싸움은 끝났다.
그게 라치아가 지금도 황실과 동떨어진 독립성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문을 수호한다는 이유로, 또한 북부는 척박하다는 이유로 라치아의 세금은 다른 곳에 비하면 현저하게 낮았다.
‘하지만 광산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황제로서는 어떻게든지 광산에 대해서 세금을 물리고 싶을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지금까지는 라치아가 가난해서 별 관심 없었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면 다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황제와 싸우기는 싫어.”
“그렇죠. 게다가 얼음수정을 팔려면 싸워서도 안 되고요.”
“그러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한해서는 이야기한 대로 하면 될 듯합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욕심을 부리기 전에 적당히 수수료를 올려 주기로 둘은 미리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마법사 협회도 자신의 편이다. 황제만 넘어오게 하면 행보를 막을 자는 없다.
‘게다가 광고판으로 로열패밀리보다 좋은 게 없지.’
마케팅 인센티브를 준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장사다.
유스타프는 히죽히죽 웃는 란을 바라보았다. 그녀 혼자 수도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치아를 비울 수는 없었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되겠지.”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될 겁니다. 그리고 부디 몸조심하시길.”
“유스도. 혹시 영지전을 걸어오는 미친놈이 나올지도 몰라.”
란의 걱정에 유스타프는 미소 지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반격해 오는 게 좋다고?”
“네.”
가볍게 대답하고 유스타프는 냅킨을 들어 란의 입가를 슥 닦았다.
“도대체 나이가 몇인가요.”
“열아홉, 아니 이제 스물인가?”
태연하게 대꾸하고 란이 그의 손에서 냅킨을 빼앗아 자신의 입가를 닦았다.
“신년회가 끝나고 바로 움직이려니 좀 미안한데.”
“하지만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많지 않으니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오늘 아침이 란이 수도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이미 저택은 가주의 외출로 부산스러웠다.
“응,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재빠르게 올라타야지.”
“그래야죠.”
“맛있는 거 사올게.”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어라?
의외의 반응에 란은 눈을 깜박였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요.”
그럼 뭘 기대해?
갸웃하며 란이 의아해하는데 유스타프가 말했다.
“해가 짧으니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응.”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썰매를 타고 가는 만큼 그녀는 온몸을 꽁꽁 무장했다.
썰매에 오른 그녀의 위에 시녀들이 마지막으로 푹신하고 따끈따끈한 마법 장판을 둘러 주었다.
란은 이대로면 춥기는커녕 덥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다녀올게. 손이라도 잡고 인사하고 싶지만…….”
포대기에 싸인 아기 꼴이다. 유스타프는 “아닙니다.” 하고 말한 후에 정중하게 인사했다.
“다녀오십시오.”
어라, 이번에는 ‘다녀오십시오.’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지만 눌러 참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충고하듯 덧붙였다.
“술은 드시지 마시고요.”
윽, 하고 란은 찔린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숙였다.
“안 마실게.”
“좋습니다.”
유스타프가 한 걸음 물러나 블레인을 보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손을 들었다.
신호에 따라 썰매가 출발했다.
깃발을 든 기사 무리가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유스타프는 일행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란이 수도에 도착한 것은 한 달 정도 걸려서였다. 겨울이라 길이 험해 평소보다 더 늦어졌다.
‘그래도 수도에 도착하니 북부에 비하면 천국이네, 천국.’
라치아의 바람이 ‘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하는 느낌이면 수도의 바람은 ‘피부가 어는 것 같군.’ 정도였다.
란이 수도에 있는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만나자는 이야기가 쇄도했다. 초대장은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엄청난걸요.”
란이 중얼거리자 레버리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가장 유명 인사이신걸요.”
“그래 봐야 우리 가문은 판매에는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데요.”
란의 말에 레버리가 “표면적으로는 말이죠.” 하고 덧붙였다.
상업에 손을 댄다는 게 아직 천박하게 생각되는 시대였다. 공작가의 가주가 직접 판매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란이 상단을 찾은 거였고 말이다.
“레버리는 인기 좋지 않아요?”
“어머, 가주님. 제게 얼마나 많은 약속과 예약이 잡혀 있는지 아시나요. 이렇게 저와 느긋하게 이야기하고 계신 가주님이 특별하신 거예요.”
“그거 고맙네요. 일단은 황후마마를 먼저 알현해야겠지요. 폐하와의 약속도 잡혀 있고…….”
“캐머론 후작에게 죽지 않게 조심하세요.”
“캐머론 후작? 아아. 기존에 마력석 광산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어차피 그렇게 팔리지도 않았잖아요?”
“네, 하지만 현재 마력석 광산은 그가 독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 얼마 되지 않는 수익마저 끊기게 생겼다고요.”
“그래도 생각보다 수익이 좀 났었나 보지요?”
실크 장갑을 벗으며 란이 중얼거렸다. 레버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독점이니까요.”
“하긴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비싼 이유는?
희소해서?
아니다. 진짜로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건 완벽한 옥이다. 사실 다이아몬드는 매장량으로만 따지면 꽤 많은 편이다.
사실 기존 마력석도 질이 엄청나게 떨어진다 뿐이지 매장량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캐머론 후작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가격이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마치 드비어스 사가 다이아몬드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자기가 역으로 당할 차례지.’
란은 미소 지었다.
얼음수정은 이미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다.
드비어스 사가 독점만으로 가격을 올렸는가?
당연히 아니다. 동시에 마케팅을 통해서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올렸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 is forever.
보석에 관심이 있다면 이 문구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럼 이 드비어스 사가 다이아몬드를 귀족에게 팔았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중산층에게 팔았다. 귀족들은 이미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란과 레버리가 노리는 것도 그런 비슷한 효과였다.
마법사를 가지고 있는 황족도 쓰는 마법 세공품.
얼음수정.
수로만 따지면 고위 귀족보다 그렇지 않은 귀족들이 훨씬 많다. 황족이 뭔가 하면 유행이 되기 마련이니 모두가 얼음수정을 사기 원할 거다.
마법 세공품 하나만 팔아 놓으면 얼음수정은 저절로 팡팡 팔리게 되어 있다.
게다가 란의 목적은 사실 또 따로 있었다.
엘프와 드워프의 마법 세공품.
붉은 얼음수정과 푸른 얼음수정을 쓴 이 제품은 남들과 다른 것을 원하는 고위 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릴 것이다.
게다가 그건 내탕금으로 들어간다.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재미있게도 그녀가 색 있는 얼음수정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은 마법사 협회 덕분이었다.
필사적인 연구 끝에 마력석을 활성화시키면 자신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마력석 안의 마력은 멈춰 있는 상태라서, 이걸 마법 도구에 끼워서 움직이게 하려면 가볍게 마법으로 충격을 줘야 한다.
그렇게 돼서 마력이 움직이게 되면 자신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마법사 협회는 당당히 말했다.
‘물론 활성화 안 된 얼음수정은 여전히 해를 끼치지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란은 바로 엘프와 드워프의 마법 물품을 수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레버리가 란의 상념을 깨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꼭 하우스 파티를 열어주세요.”
란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본격적으로 일할 때다.
✥✥✥
“세상에, 라치아 공작가에서 열린 티파티에 가보셨어요?”
“맙소사, 진짜 굉장했어요. 이국적인 정원에서 파티하는 것 같았어요.”
“저녁에 열린 무도회는 어떻고요? 겨울인데도 따뜻해서 라치아 공작가 파티에 가실 때는 옷차림을 꼭 주의해야 해요.”
“조명 보셨어요? 그렇게 반짝이는 건 처음 봤어요. 아아, 빨리 가지고 싶어라.”
“공작가에 있는 제품을 벌써 황궁에서는 전부 주문했다고 하더라고요.”
재빠르게 팔락이는 부채 사이로 붉은 입술들이 빠르게 소문을 날랐다.
이제 라치아 공작의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는 게 사교계의 직위를 말해 줄 정도였다.
황후마마께서 직접 파티에 참석하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천마 이야기는 무성히 부풀어져서 퍼져 나갔다.
물론 그럴수록 물밑의 이야기도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진짜로 라치아 핏줄도 아니잖아요? 고작 하급 귀족의 딸일 뿐인데, 라치아를 등에 업고 설치는 꼴이라뇨.”
“남동생이라니, 우습죠. 둘이 피도 통하지 않으면서 말이에요. 그쪽은 정말로 가주직을 물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캐머론 후작의 표정을 보셨어요? 영지 수입 중에서 마력석을 팔던 돈이 삼 분의 일이라던데. 어떻게든 흠을 잡으려고 난리예요.”
“사교 시즌에 나왔으니, 남자를 잡아서 결혼할 생각 아니겠어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상속녀인 셈이잖아요. 얼음수정 광산을 지참금으로 들고 오니 말이죠.”
키득키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험담도 심해졌다.
물론, 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구혼자가 늘고 있어. 왜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는데.”
현관을 가득 채운 꽃바구니를 보며 란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게다가 지금은 한겨울이니 꽃바구니는 전부 온실에서 가져온 것으로 가격도 어마어마한 물건이었다.
그녀에게 자작시나 자작 노래를 들려주려는 남자들은 줄을 이었고, 그녀와 파티에서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사람 역시 넘쳐 났다.
솔직히 한밤중에 베란다를 향해서 “그대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녹색!” 같은 세레나데를 불러대는 남자는 민폐였다.
“오오― 그대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만 보여주오.”
같은 소리를 하다가 기사단에게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소다가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보세요, 가주님! 남쪽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난이잖아요. 이건 한 송이에 금화 하나는 할 거라고요? 이런 걸 다발로 선물하다뇨!”
카라 역시 꽃바구니를 보며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맞아요.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상황이에요.”
난 꿈꾸지 않아.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때 집사가 들어왔다.
“가주님.”
란은 고개를 돌려 집사를 바라보았다.
라치아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는 ‘녹색 아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정문의 아치가 비취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정복 황제 라이언이 라치아 공작가에 선물한 것으로 유명한 비취 문이었다.
이 녹색 아치의 집사인 롤프는 전 란스 남작의 둘째 아들로, 라치아를 섬기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캐머론 후작님께서 와 계십니다.”
“또? 약속도 없이.”
“바쁘시다고 전할까요?”
란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아니,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말씀드려야겠어. 어디에 계시지?”
“첫 번째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가지.”
란은 그렇게 말하고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그 뒤를 블레인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란이 첫 번째 응접실에 들어서는 순간, 캐머론 후작이 날카롭게 말했다.
“드디어 그 값비싼 얼굴을 보는군.”
“요즘 내가 좀 바빠서. 캐머론 후작은 시간이 많으신 듯하지만.”
란 역시 곧장 받아쳤다.
캐머론 후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시건방진 계집이!’
나이가 오십을 넘긴 그는 갓 스무 살 된 계집이 가주랍시고 설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린드버그 남작은 자질은 모자랄망정 제 분수를 알았다. 심지어 이 계집은 진짜 라치아도 아니지 않은가?
“앉지. 차라도 하겠는가?”
명백하게 아랫사람 취급이었다.
“사양하네.”
캐머론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여전히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서 있었다.
‘너는 서 있어라.’
란은 자리에 앉아서 자신 몫의 차를 주문했다. 그녀가 앉는 것을 본 후작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어디에서도 그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여자는 없었다.
“요즘은 가주직을 무례한 순서대로 뽑나 보지?”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게 캐머론 후작가의 전통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란이 싱긋 웃었다.
캐머론 후작의 미간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그가 낮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러 온 거다.”
“경고?”
“그래, 귀족이 아닌 너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규칙이 있어. 그걸 네가 훼방 놓고 있는 거야.”
“뭘 훼방 놓는다는 건지 모르겠네. 내게 있는 물건을 내놓는 게 훼방인가.”
캐머론 후작이 손바닥으로 쾅 나무 테이블을 내리쳤다. 란은 그걸 보며 ‘아, 손바닥 아프겠네.’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를 다 망하게 하고 시장을 독점하려는 그 속셈을 모를 줄 알아!”
그야말로 생떼나 다름없었다. 네 물건이 좋아서 내가 피해를 입게 생겼으니 보상하라.
‘미친 거 아냐?’
하지만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논리가 맞는 모양인지, 얼마 전부터 캐머론 후작은 ‘마법 세공사를 키운 것도 자신’이라며 마법 세공사를 데려갔으니 수수료를 내라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물론 마력석이 있기 때문에 마법 세공사가 있는 건 사실이다. 캐머론 후작령에 마법 세공사 길드가 있는 것도 그 이유고.
“내 물건에 가격을 얼마를 붙이든 내 마음이지. 그걸 후작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어.”
란의 말에 캐머론 후작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란은 입술이 마르는 걸 느끼고 그것을 숨기려 미소 지었다.
캐머론 후작이 날 선 어조로 쏘아붙였다.
“마법 세공사 길드는 내 것이야.”
“길드는 개인의 것이 아니지.”
지지 않고 란은 맞받아쳤다. 만약 후작이 길드를 압박해서 세공사를 데려가겠다고 한다면, 이쪽에서는 길드를 탈퇴하고 새 길드를 세우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한 가지 업종에 길드는 하나밖에 세울 수 없다는 게 법이니, 어떻게든 저쪽을 무너트려야겠지.
노회한 고위 귀족을 상대하는 건 항상 진이 빠진다.
눈싸움이 뻐근한 느낌이 들 때쯤이 되어서야 그는 몸을 폈다.
“그래.”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마지막 경고였으니 이제 잠자리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희번덕였다. 나이 든 후작은 분노를 갈무리하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내 잠자리는 다사 덕분에 편한데. 캐머론 후작가에도 하나 선물로 줄까?”
란이 말하자 그는 굳은 얼굴로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차를 들고 들어오던 시녀를 거칠게 밀어 시녀는 작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와장창!
요란하게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후작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시녀만 당황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허겁지겁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란이 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아. 천천히 치워. 손 베겠네. 차는 더 마실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까.”
란은 새하얗게 질린 시녀를 달래고 블레인에게 말했다.
“암살자라도 풀 생각인가?”
“경비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대답하고 그가 약간 곤란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저는 파티도 피하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파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란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라도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란은 환하게 공개된 표적이나 다름없었다. 음료나 음식에 독이라도 탄다면? 파티에서 하나하나 기미를 볼 수도 없다. 자연히 경호는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블레인이 아무리 그녀의 호위라고 해도 따라갈 수 없는 장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 한창 물이 올랐는걸.”
란의 말에 블레인은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그에게는 이미 충분한 걸로 보였다.
얼음수정은 잘 팔릴 게 눈에 보이는데 뭐를 더 어떻게 한단 말인가?
“혹시 영지전이라도 하려는 게 아닐까?”
란의 말에 블레인이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
“아직 날씨가 덜 풀렸습니다. 겨울에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없죠. 게다가 영지전을 열기 위해서는 황제 폐하의 인가가 필요합니다.”
“예고장을 받는다는 말이군.”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하고 란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응접실 입구에서 집사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가주님, 레버리 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해.”
란의 말에 잠시 후 레버리가 서너 명의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레버리.”
웃으며 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레버리가 그녀와 가볍게 포옹한 뒤에 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이제 그 드레스는 벗어버리세요.”
“어?”
“그 구식 드레스 말이에요! 대체, 라치아 가주라는 분이 언제까지 재작년에 유행한 드레스를 입고 있을 겁니까?”
“하지만―”
“그것도 길이가 짧아서 천을 잇대어 늘린 걸요.”
“어떻게 알았어?”
놀라 란이 묻자 레버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알죠. 알지요. 다들 알아요! 사교계가 다 알고 있다고요!”
란은 신음을 흘렸다. 어머니가 사치한 드레스가 넘치고 있어서, 그녀는 굳이 새 드레스를 맞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길이야 조금 천을 덧대면 되니까 말이다.
“더는 안 되겠어요.”
레버리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뒤에 있는 분들은?”
“수도에서 유명하신 분이지요. 특별히 모셨습니다.”
“하지만.”
란이 한마디 더 하려고 하자 레버리가 낮게 말했다.
“가주님.”
“응?”
“제발.”
“윽.”
그렇게까지 나오자 할 말이 없다. 그래, 너무 아끼는 것도 보기 안 좋아.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까, 벌이가 꽤 되겠지.
“알았어.”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버리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다가와 사르르 웃으며 인사했다. 키는 백오십을 좀 넘을까?
이제 나이가 사십에 가까워 보이는데도 미혼의 젊은 아가씨 같은 옷차림이며, 부풀린 헤어스타일이 사랑스러웠고, 그게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마담 누와즈라고 합니다.”
제국 억양이 아니었다. 남부 왕국의 억양이 섞인 소개에 란 역시 가볍게 인사했다.
“란이에요.”
인사하고 란이 “제 방으로 올라가죠.” 하고 말해 마담은 “영광입니다.” 하고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마담 누와즈는 기합을 넣었다. 현재 라치아 공작은 사교계의 걸어 다니는 광고판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만 로열패밀리는 항상 인기가 좋다. 그들이 입는 옷, 사는 가구, 쓰는 물품은 언제나 동이 난다.
그리고 라치아.
라치아는 일반적인 귀족이 아니다. 제국의 역사는 300년이지만 라치아의 역사는 천 년.
라치아 역시 격식으로만 따진다면 제국 황족보다 더 고귀한 핏줄이라고 이야기하는 축도 있었다.
물론 란이 라치아의 핏줄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현재 라치아 공작은 그녀이고, 그녀보다 사교계에서 눈을 끄는 사람은 없었다.
“과도한 사치가 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누와즈는 그렇게 말하며 상냥하게 웃었고, 란은 머릿속에서 가볍게 주판을 퉁겼다.
“그렇다면 좋아요. 하지만 너무 화려한 건 싫어요.”
“네, 원하시는 것과 원치 않으시는 것을 모두 말해 주세요.”
“아아, 참. 그리고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란은 갑자기 반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뭔가요?”
“시녀 제복을 만들려고요.”
그 말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얼굴을 했고, 란만이 방긋 웃었다.
✥✥✥
카트야 황후는 기분이 좋았다. 무료하던 사교계가 이렇게 즐거웠던 것이 언제였던가?
라치아 공작이 ‘무지갯빛 천마의 날개’를 자신에게만 팔겠다고 약속한 뒤로 더욱 그러했다.
그때 수석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황후에게 말했다.
“황태자비마마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올리비아가?”
황후는 눈을 찌푸렸다.
카트야 황후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면 바로 황태자였다. 어디에 그런 핏줄이 있었는지 난봉꾼의 끼가 흐르는 그를 걱정해서 황후는 지혜롭고 정숙하다고 소문난 미로 공녀와 빠르게 결혼시켰다.
그때는 이미 황태자에게 사생아가 둘이나 있었다. 그런데 그 후로 황태자를 잡아주기를 기대했던 황태자비는 영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황태자를 나무라기도 하고, 태자비에게 남편에게 잘하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하는데도 그랬다.
게다가 결혼한 지 이미 3년이나 지났는데 아이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였지만, 오늘 자신은 기분이 좋다.
“들어오라 이르게.”
황태자비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그것마저도 황후의 눈에는 탐탁찮았다. 자기 자신은 저렇게 잘하면서 왜 남편 하나를 건사 못 한단 말인가?
하지만 황후는 제국의 황후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 오게, 자리에 앉지.”
“감사합니다, 어머님.”
올리비아는 격식에 맞춰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잘 지내고 있는가? 황태자와는 좀 어떤가?”
첫 질문이 제 아들과 잘 지내고 있냐는 질문이다. 어차피 같은 궁에 사니 다 아는 사이에 묻는 질문이지만 올리비아는 공손히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하긴 요즘 태자가 철이 들기는 했지요. 어서 황태손을 봐야 할 텐데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래서 어쩐 일인가?”
“요즘 라치아 공작과 자주 만남을 가지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렇지. 참으로 마음에 드는 아가씨야.”
흐뭇하게 웃으며 황후는 말하고 문득 깨달아 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자비와는 아직 만나지 못했나? 마침 오늘 나와 약속이 있네. 오려는가?”
올리비아가 살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냥 자네 살롱으로 불러도 될 텐데 말이야. 젊은 사람들끼리 재미도 있을 테고.”
“어머님이 안 계시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알아도 기분이 좋아 카트야 황후는 가볍게 웃었다. 올리비아 역시 함께 웃었다.
그녀는 황태자비다.
황후가 내궁의 정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그녀는 그녀만의 독자적인 모임을 강력하게 가질 수가 없었다.
황후와 라치아 공작이 가깝다는 건 온 사교계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자신이 따로 라치아 공작을 불러 봐야 뒷말이 나올 뿐이었다. 게다가 혹여나 황후와의 사이를 염려해 라치아 공작이 초대를 거절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어젯밤 남편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라치아 공작인가? 소문을 들었는데 아주 괜찮은 여자 같던데. 너같이 목석 같은 여자보다는 더 잠자리에서 낫겠지.
‘그래, 그렇다면.’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감췄다.
‘정말 그런 여자인지 한번 보지.’
카트야 황후의 이번 티타임은 적은 수로 진행되었다. 단연 주인공은 라치아 공작이었고, 그 외에 모인 사람들도 만만찮은 면모를 가진 사람뿐이었다.
우슬라 공작 부인과 키릭스 후작 부인, 그리고 새로 온 황태자비 올리비아까지.
새로 맞춘 드레스를 두르고 일찍 도착한 란은 카트야 황후를 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어머,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인사를 하고 그러나. 자아― 들어와 앉게.”
카트야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으며 란은 키릭스 후작 부인, 우슬라 공작 부인과도 인사했다. 황후의 소개로 두 부인과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키릭스 후작 부인은 나이가 스물 초반 정도로 어렸고, 우슬라 공작 부인은 황후와 나이가 비슷했다.
“자리가 하나 비어 있네요.”
란의 말에 카트야가 “아아.” 하고 말했다.
“오늘 황태자비가 올 거라네.”
황태자비.
그 황태자비?!
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마마께서요?”
“그래, 미리 말을 하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갑자기 자네를 만나고 싶다지 뭔가.”
“그러셨군요.”
란은 당황스러움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며 부채를 펼쳤다.
황태자비.
그녀는 사천왕 중에서 두 번째 같은 존재다. 왜 흔히 악당 보스 밑에 4명 정도 중간 보스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들을 흔히 사천왕이라고 부르고 말이다.
엄청난 실력자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막상 주인공이 한 명을 쓰러트리고 나면,
―훗, 그 녀석은 우리 중에서 가장 약한 녀석이었지. 사천왕이라는 이름이 아까웠어.
이런 대사를 꼭 치지 않는가?
황태자가 그 짝이었다.
사천왕 중에서 가장 약한 녀석.
‘뭐, 원작 시작 시점에서는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사를 치는, 사천왕 중에서 두 번째로 강한 중간 보스가 바로 황태자비다.
‘자기 남편을 독살했으니까.’
황태자가 죽었을 당시 황태자비는 임신 중이었는데, 란이 알기로는 그 아이 역시 황태자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유스타프에게 반해서…….’
유스타프가 처음으로 사교계에 발을 디딘 것은 스물둘쯤이 되어서였다. 성인이 되고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도무지 사교 시즌을 즐길 여유가 없었던 거다.
그리고 젊은 공작에게 황태자비는 첫눈에 반하고 만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시나의 불행이 시작된 거지. 음.
‘적이 되고 싶지 않아.’
절대로 적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가까이 있고 싶지도 않다. 마치 우리 속의 맹수처럼, 창살 너머에서 자신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 주면 좋겠다.
란은 가볍게 숨을 삼키고 미소 지었다.
“태자비마마를 만난다니 기대가 되네요.”
“무척이나 영민하신 분이죠.”
키릭스 후작 부인의 말에 카트야가 타박하듯 말했다.
“영민하면 뭐하누? 제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데.”
그 말에 키릭스 후작 부인은 멋쩍은 듯 입을 다물었고, 우슬라 공작 부인이 위로하듯 말했다.
“두 분 다 아직 젊으셔서 그렇지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벌써 3년째야. 그런데 아이도 없어. 아이가 생기면 태자도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방중술이라도 가르쳐야 하는 건지, 원.”
카트야 황후가 부채를 파닥였다. 란은 ‘아니, 황태자는 사생아도 있지 않아? 아이가 생겨서 마음이 잡히는 거면 이미 잡혔겠지.’ 하는 생각을 슬며시 밀어 놓으며 입을 꼭 다물었다.
그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처럼 시종이 황태자비의 입장을 알려 왔다.
“제가 가장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어머님.”
올리비아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와 가볍게 인사했다. 카트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방금 모였으니 걱정 말고 앉으시게.”
“관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올리비아가 자리에 앉는 걸 보며 란은 감탄했다.
백은의 미로.
미로 공작가가 그렇게 불리는 첫 번째 이유는 깨끗한 백은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올리비아 역시 미로 공작가 특유의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 올리고 있었다. 이제 이십 대 초반인 그녀의 청초함은 한창 물이 오르는 와중이었다.
제 남편을 독살할 독부로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 란은 감탄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안녕하십니까, 비마마.”
그녀가 들어올 때부터 일어나 있었던 세 사람이 차례로 인사했다. 공작인 란이 가장 먼저, 그러고 나서 공작 부인과 후작 부인 차례였다.
태자비가 인사를 받고 나자, 황후가 자리에 앉으라고 말해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그럼 다시 내가 소개를 할까. 오늘 둘은 처음 보는 거니 말이오. 이쪽이 라치아 공작인 란 로미아 드 라치아라고 하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마마.”
“그리고 알겠지만, 황태자비인 올리비아 프란 라 마르텔이라고 하네.”
“그냥 올리비아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제가 어찌 감히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란은 재빠르게 납작 엎드렸다. 조금도 그쪽과 친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라치아 공작은 겸손하지.”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비는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깜박이더니 살며시 웃었다.
“그래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아니, 아니. 싫다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란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내용은 사교계에서 곧 선보일 새로운 마법 도구와 황후가 황금 백조 궁에서 열 무도회로 옮겨 갔다.
“새 마법 도구를 많이 선보이니 기대해도 좋아요.”
“어머, 어떤 도구일까요? 라치아 공작은 참, 항상 황후마마께만 신제품을 소개한다니까요.”
키릭스 후작 부인이 입을 비죽이자 란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후작 부인께도 따로 사람을 보내라고 말해 두지요.”
“어머, 정말이에요?”
어린 키릭스 부인은 황후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좋아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황후마마께 먼저 보여드리겠지만요.”
란의 말에 황후가 호호 웃고는 관대하게 말했다.
“어찌 나에게만 보일 수 있나. 후작 부인이 저리 조르니, 다음에는 후작 부인에게 먼저 보여주게나.”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키릭스 후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발랄해서 란은 금방 그녀가 좋아졌다. 붉은색 곱슬머리에 호박색 눈동자가 명랑함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후작 부인이 되기에는 신분이 낮은, 기사의 딸이었는데 어째서 키릭스 후작이 그녀에게 반했는지 란은 알 것 같았다.
후작 부인과 후작 사이는 나이 차이가 열 살 정도 났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큰 흠이 아니었다.
그래도 뒤에서 뒷말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말이다.
‘뭐, 뒷말이라면 나도 만만찮지.’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슬라 공작 부인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굉장한 미녀였다고 하는데, 나이가 든 지금도 그 미모는 남아 있었다.
그녀가 장미가 그려진 화려한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저도 항상 기대하고 있답니다. 오늘은 라치아 공작이 어떤 물건을 가져올까, 하고 말이지요.”
가시 같은 공격이라, 란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생각만 낼 뿐이죠. 골든로즈 상단주가 이 말을 들으면 기뻐할 거예요.”
내가 장사하는 게 아니라, 골든로즈 상단이 장사하는 거라고 란은 못을 박았다.
청염의 인정을 받은 건 라치아에서만 통하는 말이고, 사교계에 나오니 라치아의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천것이 라치아 공작 행세를 한다고 생각하는 고위 귀족들도 있었다.
바로 지금의 우슬라 공작 부인처럼 말이다. 위세가 있으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골든로즈 상단주는 하프 엘프라지요?”
“네, 그렇습니다.”
“엘프라니, 믿을 만한가요? 그들의 손에 얼음수정이 들어가는 것도 걱정되네요.”
올리비아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말해서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시는 황태자비마마의 마음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알고 보니 하프 엘프는 엘프들 사이에서 경시당한다고 하더군요. 그보다 차라리 인간 사이에서 사는 게 살기 좋으니까요.”
란은 레버리가 항상 늘어놓는 변명을 고스란히 읊어 주었다. 올리비아는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시비를 걸지?’
란은 긴장으로 뒷목이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따뜻한 찻물을 삼켰다. 온풍기를 펑펑 돌리고 있는 티 살롱 내부는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정도로 틀어 대면 얼음수정이 빠르게 소모될 텐데.’
나야 돈을 버니 좋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습도 조절기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프라면 신비한 느낌이잖아요. 언젠가 한번 실제 모습을 보고 싶어요.”
키릭스 후작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해 란은 하레쉬를 떠올렸다. 그래, 미남이기는 미남이지.
게다가 엘프는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더 크다. 그것도 매력적인 면이었다.
“언젠가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란은 방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물건은 곧 소통하겠지만.’
그런 음흉한 생각을 하며 말이다.
엘프와 드워프의 마법 세공품이 나오면 마력석, 그 이상의 가치를 손에 넣을 거다.
바로 브랜드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캐머론 후작이 직접 협박까지 했다면서요?”
우슬라 공작 부인의 말에 황후가 눈을 찌푸렸다.
“뭐 하러 그런 이야기는 꺼내는가?”
“아니에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슬라 공작 부인. 하지만 후작님과는 약간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이랍니다.”
“캐머론 후작가도 오랫동안 황가에 충성을 바쳐 온 유서 깊은 집안이지요.”
우슬라 공작 부인의 말에 카트야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 말은 캐머론 후작가 뒤에는 황제가 있으니 깝치지 말라는 말이다.
“물론입니다. 라치아 역시 그 점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녹색 아치를 볼 때마다 생각하지요.”
우리는 초대 황제 때부터 같이한 몸이야, 하고 답하며 란은 케이크를 포크로 조심스럽게 한 조각 잘랐다. 수도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은 고급 과자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라치아도 얼른 설탕을 생산해야…….’
유스타프는 잘하고 있으려나.
‘아, 보고 싶다.’
수도에는 영 유스타프만큼 잘생긴 남자가 없었다. 그가 ‘누님’ 하고 부르는 것도 듣고 싶고, 특유의 서늘한 억양도 듣고 싶다.
황후가 방긋 웃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녹색 아치 앞에 구혼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지.”
“맞아요. 세레나데를 밤새 부른 분도 계셨다면서요.”
키릭스 후작 부인이 키득키득 웃었다. 올리비아가 “어머나.” 하고 눈웃음을 지었다.
“어떤 분이 공작님과 함께하실지 궁금하네요.”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유스타프도 아직 어리고요.”
“그러고 보니 유스타프는 아직 정혼하지 않았지?”
황후의 말에 란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아직 어리기도 하니 시간을 충분히 두고 싶어서요.”
란은 재빠르게 연막을 쳤다.
사실 열여덟이니 어리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핑계가 아슬아슬하게 먹힐 시점이었다.
“그야 물론, 라치아 공작은 유스타프 영식의 혼사에 관여할 수 없겠지요.”
넌 그와 어떤 관계도 아니니까.
우슬라 공작 부인이 다시 가시를 세웠다. 란은 약간 피로감마저 느끼며 대답했다.
“네, 전 유스타프를 존중하니까요. 그 아이는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이기도 하답니다.”
란은 벌쭉 웃어 보였다. 그녀는 틈만 나면 동생 자랑을 하고는 했다. 그러면 좀 귀찮은 것들이 떨어져 나갈까 하고 말이다.
“아아, 아쉽네요. 전 라치아 공작님의 결혼식도 보고 싶은데 말이에요. 세상에, 그래서 그 많은 남자에게 구혼당하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키릭스 후작 부인이 해맑게 화제를 돌려 란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솔직히 말하면 그 많은 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식으로 대화는 이어져서,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끝났다. 란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기다리고 있던 블레인 경이 란의 얼굴을 살피고 속삭이듯 말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피곤해.”
란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걸음을 빠르게 했다. 빨리 이 궁을 나가고 싶었다.
그때 마치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에서 누군가가 슬그머니 나왔다. 블레인이 멈칫했다가 화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씨.’
속으로 작게 욕을 하고 란 역시 깊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게 누군가,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라치아 공작 아닌가?”
황태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올해로 스물여덟인 그는 화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외모만 보면 딱 왕자님, 그 자체였다. 그 내면이 난봉꾼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송구스럽습니다.”
란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황태자가 그녀를 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란이 최대한 그를 피했으니까.
그녀의 정중한 대답에 황태자인 루스는 손을 저었다.
“아닐세. 인사는 됐네.”
란이 무릎을 펴고 고개를 들자 루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순간 블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이 행동은 심한 처사였다.
“라치아 공작이 굉장한 미녀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인데?”
“황태자비마마만 하겠습니까.”
너 마누라나 돌아봐, 이 자식아.
이런 마음을 담아 란은 웃으며 대답했다. 올리비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루스는 눈을 찌푸렸다.
“그런 이야기는 접어 두고, 라치아 공작과 담소를 나누고 싶군.”
란은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황태자와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황태자 부부와 얽히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게 욕심이라는 것도 알아.’
황실과 얽히고 있는 이상, 황태자 부부와도 당연히 마주치게 되어 있겠지.
란은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초대장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루스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유스타프와는 전혀 다른 푸른색.
란은 저도 모르게 그와 유스타프를 비교했다. 그리고 역시 내 동생이 최고야. 하는 결론을 내렸다.
“초대장이라, 그거 준비하지 않았는데 아쉽군. 정식으로 초대하면 와 주는 건가?”
“기꺼이요. 오늘 황태자비마마와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리비아와?”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가볍게 웃고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었다.
“그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꼭 듣고 싶군. 정원이라도 잠깐 걷지 않겠나?”
란은 신음을 삼켰다. 그래,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거지?
“잠깐이라면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그의 팔에 손을 얹는 것을 슬쩍 피하며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차기 황제와 라치아 공작.
이 두 가지 단어만 두고 보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하고 했던 생각은 10분, 아니 5분도 되지 않아서 깨졌다.
‘역시 그냥 망나니였잖아.’
란은 얼굴이 구겨지는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루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맞나, 아닌가? 라치아 가주는 분명 처녀겠지.”
“왜 그런 게 궁금하십니까?”
“말 돌리는 것 보니 아닌가?”
란은 ‘미치려면 지금이야!’ 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상대는 황태자고 무례하게 굴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가 저딴 소리만 지껄이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태자 전하, 지금 지극히 무례하십니다. 도무지 제국의 황태자라고는 볼 수가 없는 발언이시군요.”
란이 정색하며 걸음을 멈췄다.
“아아, 화끈하군. 난 뜨거운 여자가 좋더라.”
란은 이를 악물고 웃으며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란은 쌩하니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스는 히죽히죽 웃었다.
빙벽의 라치아라고 해서 차가운 여자인 줄 알았더니만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라치아만 없으면 아무런 힘도 없지.’
루스는 머리를 굴렸다. 차기 가주인 유스타프에게 협조를 구하면 어떨까?
차기 황제가 뒷배가 되어 준다고 하면 든든할 것이다. 게다가 수도에서 영향력을 떨치는 란이 유스타프에게 위협이 되니, 마음에 들 리도 없다.
‘아니면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임시로 유스타프가 가주직을 허가받게 하거나.’
그러면 더 이상 그에게 란은 필요 없을 테니, 떨어진 과실을 줍기만 하면 된다.
루스는 히죽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녹색 아치 저택은 잔뜩 들떠 있었다. 오늘이 드디어 하녀 제복이 지급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녀들은 자신이 가져온 옷을 입었다. 허름한 옷이기 때문에 당연히 옷만으로도 시종인지 아닌지 구별되었다.
하지만 오늘 나눠 주는 옷은 매끄러운 고급 재질의 옷이었다. 색깔은 남색에 옷감도 풍성하게 사용했다.
직급별로 단추와 소매 깃, 크게는 옷 자체의 색이 달랐기 때문에 입은 사람이 무슨 직위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하녀에게만이 아니라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 시종 등 모든 사람에게 제복이 맞춰 지급되었다.
옷을 맞추기 위해 가봉을 몇 번이나 했기 때문에 오늘을 기다리며 시종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제복이 지급된 것이다.
모두가 얼른 새 옷으로 갈아입기에 여념이 없었다.
소다는 새 옷을 입고 꺅꺅거리며 몇 번이나 매끄러운 옷을 쓸어 보았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제복에서 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란은 디자인에 가장 공을 들였다.
물론 질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올이 가는 고급 천은 처음이었다. 거기에 풍성한 패티코트까지 함께 지급되어서, 옷을 입고 서자 자신이 가졌던 어떤 옷보다 아름다웠다.
카라 역시 자신의 단추와 소매의 색이 다른 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저택의 시종들과 시녀들은 오늘 새 옷으로 하루 종일 들뜬 기분을 느꼈다.
당연히 라치아 가문에 대한 소속감도 강해졌다.
‘제복을 맞춰 입는 이유가 그거지.’
피아의 식별뿐 아니라, 소속감과 일체감을 위해서다. 동시에 라치아 가문에 대한 이미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라치아 가문의 시녀 제복은 가문 밖에서도 특별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모두가 그 제복을 동경했고, 제복 때문에도 라치아가에 시녀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사람들의 태도도 공손해졌다.
라치아에 대한 충성심은 자연히 강해졌다.
란은 그렇게 좋아하는 가문 사람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잔뜩 만들어 라치아에도 보냈으니, 거기 사람들도 분명히 즐거워하리라.
하지만 그 미소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 멍멍이 때문이지.’
흑단목으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 앞에 앉아,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란은 손끝을 모았다.
그녀는 황태자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떠올리려 애썼다.
사실 이야기는 원작 시작 이후가 가장 자세하다. 황태자는 원작 시작 시점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난봉꾼이라는 것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황태자비가 유스타프에게 한눈에 반해서, 집요하게 그를 쫓아다니고 그의 사랑을 받는 시나를 질투해 그녀를 죽이려고 든다.
그러다 유스타프와 시나가 황태자가 독살당한 것과, 황태손이 황태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면서 황태자비는 끝이 난다.
둘째 황자가 황제가 되고 말이다.
‘하지만 이해돼.’
황태자를 직접 겪고 나니, 그를 독살시킨 황태자비가 이해된다.
‘그러고 보니 황태손이 누구의 아이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었지?’
아이는 미로 공작에게 맡겨지게 된다고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가장 좋은 것은 모른 척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거다. 그런데 이놈의 황태자 멍멍이가 자신에게 자꾸 달라붙고 있으니 문제였다.
벌써 사교계에 소문이 퍼지는 중이었다.
새 라치아 공작에게 황태자가 푹 빠졌다고.
‘으아아아아―!’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란은 끙끙거렸다. 내가 먼저 독살해? 없애 버려? 응?
란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블레인 경.”
옆에서 란이 끙끙거리는 걸 지켜보던 블레인이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어디 좋지 않으십니까?”
“어디서 암살자를 구할 수 없을까.”
“그건―”
블레인은 순간 당황해 말을 멈췄다가 곧 란이 그저 해 본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황태자 새끼. 진짜.”
그야말로 지독한 폭언이었다. 불경죄로 잡혀갈 말이지만 블레인은 깊이 동감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귀찮은 분입니다.”
“그러니까.”
란은 책상 위에 몸을 뻗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어쩔 수 없나.”
황태자를 제어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지.
황제.
란은 머릿속으로 카드를 하나씩 꺼내 보았다.
‘무겁다.’
그녀는 라치아가의 가주이고, 모든 결정은 그녀에게 달렸다. 동시에 모든 책임 역시 그녀의 것이다.
정치적인 행동, 말.
그녀의 모든 행동은 무게가 있었다. 그 무게에는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
라치아의 흥망성쇠가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은 견디기 힘들었다. 누구와 의논할 수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으며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으으―’
이럴 때 유스타프가 있었다면 적어도 의논은 해 볼 텐데.
란은 깊게 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폐하께 알현을 청하겠어.”
어쨌든 저 황태자 새끼를 어떻게 해야지. 저런 놈이 차기 황제―는 아마 못 되겠지만, 하여간 들러붙는 것이 짜증 난다.
쾅쾅쾅!
그때 예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조급한 문 두드리는 소리에 란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블레인 역시 그런 듯 “무슨―” 일이냐고, 그가 채 묻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거기에는 집사 롤프가 황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캐, 캐머론 후작에게서 전령이 왔습니다.”
“캐머론 후작이?”
란이 눈을 찌푸리자 롤프가 황급히 덧붙였다.
“영지전 선포장입니다!”
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지전을 선포했다고? 캐머론 후작이? 지금?”
“그렇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아니, 내가 지금 내려가지.”
란은 서둘러 집무실을 나왔다. 첫 번째 응접실로 가니, 캐머론 후작가의 전령이 빳빳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영지전이라고?”
란의 물음에 전령은 양피지를 쭉 펼치며 말했다.
“아둔 월의 물 긷는 세 번째 날, 위대하고 용맹한 캐머론 후작은, 후안무치하고 분수를 모르는 라치아 공작에게 명예롭게 싸우자는 뜻을 알리노라.”
란은 이를 갈았다.
예고장이 왔다는 건 황제도 이 일을 승인했다는 말인가?
그때 블레인이 조용히 말했다.
“예고장이 아닙니다.”
“뭐?”
란이 휙 그를 돌아보았다. 블레인의 갈색 눈이 타오르듯이 이글거렸다.
“선포장입니다.”
란은 순간 숨을 삼켰다가 전령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러면 지금 라치아 영지에 후작가의 사병이 들어가 있나?”
전령은 “라치아 공작에게 알렸으니, 물론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녹색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래, 그럼 전쟁 중이니, 전령을 잡아 목을 베도 되는 거겠지?”
순간 전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란이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그러기 전에 당장 꺼져.”
전령은 엉덩이에 불붙은 듯이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선포장이라고? 하지만 영지전은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지금 전쟁이 시작됐단 말이잖아. 영지전을 하면 이길 가능성이 있는 걸까? 청염 기사단의 인재는 다 내가 데려왔는데.”
어찌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술이 터지며 피가 흘렀지만, 란은 그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전쟁.
전쟁이라니.
“어떻게 하지.”
유스타프는 고작 열여덟인데.
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계절에 라치아에서 싸움을 일으키다니.”
블레인 역시 황망한 얼굴이었다. 수도야 이제 봄바람이 분다고 할 법한 날씨였지만, 라치아는 아직 아니었다.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돌아가도 늦을 겁니다.”
블레인의 말에 란은 신음을 내뱉었다.
“유스타프 님을 믿으십시오.”
“하지만.”
란은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이라도 캐머론 후작가에 쳐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투는 시작되었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정령을…….’
정령의 이름을 안다.
이름을 알면 명령이 가능하다. 하지만 후폭풍은 장담할 수 없었다. 명령을 해서 정령이 들었다고 치자. 그 사실이 불쾌한 정령은 어떻게 할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거래를 하려고 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들은 정령이니까.
“하여간 당장 라치아에 사자를 보내. 정보를 최대한 빨리 수집하지.”
란의 말에 블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라치아가 위험하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정령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란은 간절히 빌었다.
유스타프는 미소를 머금었다. 푸른색 눈동자가 벼려진 칼날 같은 빛을 발했다.
“영지전이라.”
어쩐지 즐거움마저 묻어나는 듯한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로스는 침을 삼켰다.
청염 기사단은 현재 전원 무장하고 산길에 서 있었다.
“이 계절에 라치아로 쳐들어오는 멍청이가 있을 줄이야.”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덕분에 영지민의 피해가 극심합니다. 영지전이라기에는 영지민을 향한 약탈이 도를 지나쳐요.”
로스가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
라치아의 겨울은 혹독하다. 그 혹독함을 이기기 위해서 캐머론 후작의 병사들은 사정없이 영지민의 가옥을 수탈하고 있었다. 겨울에 양식을 빼앗기는 일은 목숨을 빼앗기는 일과 다름없었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가구와 집을 부수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집을 빼앗겨서 한겨울에 온가족들이 피난을 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자 사상자도 줄을 이었다.
“내 라치아에서.”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산 아래로 길게 이어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엉금엉금 움직이는 속도였다. 앞에서부터 사람들이 느려져서 계곡에 빽빽하게 병사들이 들어차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계곡의 길은 먼지 같은 토양이라 이맘때면 차가운 진흙 펄이 되고는 했다.
‘그래서 가장 빠른 길이지만, 이용하지 않는 길이지.’
이쪽 길로 유인한 것이 정답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조사도 안 하다니.’
얼마나 라치아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걸까?
그래, 가주는 여자인 데다가 고작 스무 살. 그런 가주가 기사단을 이끌고 수도로 올라갔으니 남아 있는 사람을 열여덟짜리 남자아이와 쭉정이 기사단이라고 생각했겠지.
쉽게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거다. 아직 유스타프가 가주도 아니니 청염을 사용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을 테고 말이다.
“화살.”
유스타프의 말에 모여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당겼다. 끼익 하고 활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사.”
피피핑핑―
날카로운 소리가 동시에 들리며 화살 비가 아래쪽의 병사들에게 퍼부어졌다. 금방 비명과 함께 허둥거리는 병사들이 보였다.
동상에 걸린 데다가 추위에 진흙 얼음을 걸으며 손이 다 곱아, 굼떠진 병사들이었다.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금방 진형이 흐트러진 채 픽픽 쓰러지는 게 보였다.
유스타프는 투구 창을 내렸다. 계곡 양쪽에서 쏟아지는 화살 비는 화살통이 비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화살 비가 끝나자 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아래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말들은 이런 진흙탕에서 움직이기 편한 특수한 편자를 착용하고 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말을 타고 있던 후작의 기사들은 결국 말을 버리고 검을 빼 들었다. 그때 기사 한 명이 투구를 벗으며 소리쳤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유스타프가 그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상대방 갑옷 위 튜닉을 보니 그가 지휘관인 듯했다.
유스타프는 병사를 꿰뚫었던 창을 뽑아냈다. 창대를 타고 흐르는 피에서 김이 물씬 뿜어져 나왔다.
도무지 열여덟 살짜리의 근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힘이었다.
사람을 관통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경직된 몸에서 관통한 창을 뽑아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전투 중에 투구를 벗어 던지다니.’
유스타프가 창에서 피를 털어 내며 짧게 말했다.
“미친놈.”
그 말에 기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왁자한 웃음에 지휘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렇게 전장에서 기사에게 모욕을 주는 법은 없소!”
유스타프는 그 말에 침묵하며 지휘관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타고 있는 흑마가 훅훅 흰 김을 내뿜었다. 유스타프의 닫힌 투구 사이에서 길게 입김이 새어 나왔다.
지휘관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섰다.
“좋아.”
“주군!”
로스가 당황하며 유스타프를 불렀다. 그냥 창으로 찔러 죽이면 될 것을 뭘 일대일 결투까지 한단 말인가?
“뒤로 물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말에서 내려왔다. 피에 젖은 창을 바닥에 푹 꽂고 그가 검을 빼 들었다.
결투를 신청한 캐머론 후작의 장남은 침을 삼켰다. 말에서 내려온 유스타프를 보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위에 있을 때는 커 보였지만, 내려오니 호리호리한 소년인 것이 보였다.
키는 자신과 엇비슷했으나 경험에서 자신을 따를 수는 없으리라.
“나는 캐머론 후작의 장남인 아골 폰 캐머론이라고 하오.”
“유스타프.”
유스타프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오라는 듯 손을 까닥했다. 그 시건방짐에 아골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래, 지금은 네가 이기고 있을지는 몰라도 결투에서는 아니다!
이렇게까지 수세에 몰리고서도 항복하지 않고, 결투까지 신청해서 살길을 찾는 것이 보통 대담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 방심하는 게 대담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골의 검을 받아냈다. 검이 미끄러지며 유스타프의 목을 향해 오는 걸 퉁기듯 피해 내고 그는 발을 쭉 미끄러트리며 검을 내밀었다.
진흙 펄에서 가능한 스텝이었다. 순식간에 목젖 앞에 날카로운 검 끝이 닿자 아골은 침을 삼켰다. 그가 검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졌다.”
“그렇지.”
대답하고도 유스타프는 검 끝을 내리지 않았다. ‘설마’ 하고 아골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영지전이 뜸해진 요즘은, 사로잡은 귀족을 해치지 않는다지.”
잡담이라도 건네듯이 유스타프가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였다.
싸움에서 귀족들은 서로를 포로로 잡을 뿐 해치지 않는다.
그야 당연했다.
져도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서로가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아 극진히 대접하고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10년에 한 번이나 영지전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실제로 검을 부딪치는 것보다는 기세 싸움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렇게 예고장도 아닌 선포장을 보내고, 영지민을 수탈하며 들어오는 영지전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 그렇다. 나 아골 폰 캐머론은 후작가의 장남이니 포로로서 정당한 대우를―”
유스타프의 검 끝이 목젖에서 떨어지자 아골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 숨이었다. 유스타프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그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천천히 몸뚱이가 쓰러졌다.
유스타프가 시체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는 내 라치아지.”
목이 잘린 시체에서 쿨럭쿨럭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걸 바라보고 있던 캐머론 후작의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던진 후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했다. 그건 남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죽였으면, 죽임당하는 것도 생각해라.”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구른 머리통을 가볍게 툭 발끝으로 쳤다.
불타오른 가옥과 영지민의 시체들, 울부짖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는 혀를 찼다.
“정리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곧 환성이 울려 퍼졌다.
“만세! 라치아 만세! 유스타프 만세!!”
“청염을 떨치소서!”
로스가 흐뭇하게 웃으며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손이라도 들어 주시죠.”
유스타프는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드러난 외모에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시는 사람이 잘생겼다는 건 커다란 자랑거리다.
유스타프가 손을 들자 목청껏 병사들은 고함을 질렀다. 청염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영지전이 시작될 때만 해도 기사단의 사기는 높지 않았다. 단장인 블레인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실력자들이 가주의 호위를 위해 함께 떠났기 때문이었다.
유스타프가 이리저리 길을 변경하고 틀게 명령하는 것도 미심쩍었다. ‘이렇게 잔일만 해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달콤함을 맛보자 그 기쁨은 전부 유스타프를 향한 존경으로 바뀌었다.
함성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