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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귀향


Chapter 2. 귀향 란은 눈을 살며시 떴다. 어둑어둑한 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어?’ 유스타프가 앉아 있었다. ‘꿈인가.’ 참 리얼한 꿈도 다 있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거기에 집중해 있어서 란은 방해 없이 그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의 눈이 푸른빛을 띠고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키는 이제 자신보다 조금 더 큰가? ‘이제부터 훌쩍 자라겠지.’ 란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안녕.” “깨셨습니까?” “응.” 대답하고 란은 다시 웃었다.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손등으로 가볍게 눌러보았다. “열은 없네요.” “응, 유스 손가락 예쁘네.” 내뱉은 말에 유스타프가 움찔했다. 란이 다시 히힛 웃었다. 꿈이니까, 편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예쁜가요.” 유스타프는 제 손을 들여다보며 말했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길고 곧아서 예쁘지. 악기를 잘 다룰 것같이 생겼으니까. 아, 피아노는 치려나?” “조금은 칩니다.” “들어 보고 싶다.” “시간이 되면 들려 드리지요.” 유스타프의 대답에 란은 가볍게 웃고 “치사해.” 하고 내뱉었다. “뭐가 말입니까?” “잘생겼는데, 손도 예쁘고, 피아노도 치고―” “…….” “치사해, 유스타프.” 웃으며 한 말에도, 푸른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꿈인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피곤하다…….” 습관처럼 중얼거리고 란은 손등으로 자신의 눈을 덮었다. “불을 끌까요?” “아니, 그냥…….” 머뭇거리다 란은 살며시 내뱉었다. “유스.” “네.” “나 죽이지 마.”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열심히 할 테니까…….” 란은 한숨처럼 작게 내뱉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난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이제 밝아진 침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란은 고개를 돌려 유스타프를 발견했다. 그는 꿈속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이번에는 서류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깨어나셨습니까?” “유스……?” “네.” “이것도 꿈이야?” 유스타프의 차가운 얼굴이 약간 찡그려졌다. “아닙니다.” “어……?” 제대로 사태가 인식되지 않아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란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진짜야?!” 휙 일어나자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란은 눈을 꽉 감았고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눌러 도로 눕혔다. “치료사를 부를 테니, 누워 계십시오.” “어떻게 된 거야? 겨울이야? 나 반년 동안 잔 거야?” 횡설수설하는 란을 보고 유스타프는 설렁줄을 당기며 말했다. “아닙니다. 쓰러지신 지 이제 이틀째니까요.” “그런데 유스가 왜 여기에 있어……?” 묻고 란은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여기 있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아직 학기 중이니까―”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시간이 맞아서 다행이군요.” “돌아와?” 란의 얼굴이 굳었다.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누가 괴롭혔어?” “아닙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뭔가를 생각하듯이 빤히 란을 바라보았다. 란은 이제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런데 왜? 어떻게 된 거야?” “아카데미에는 조기 졸업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어?” “수석, 원하신다고 하셨죠.” “어?” “학점은 이수했고, 시험도 당겨서 치렀습니다. 이후 만점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수석은 저겠지요.” 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만족하십니까?” “굉장하다!” 란은 환하게 웃었다. “굉장해. 진짜 대단하다, 유스타프. 진짜, 정말.” 조기 졸업에, 만점이라니. “대단해, 유스.” “누님보다는 아니죠.” “응?” 되묻는데, 때마침 치료사가 들어왔다. 나이가 지긋한 치료사는 이리저리 란을 살펴보고 결론을 내렸다. “역시 과로이십니다. 잘 드시고, 며칠 동안 푹 쉬십시오.” “그럴 수 있나.” 란은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치료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몸을 보하는 약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사가 나가고 나자 란은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새하얀 맨발이 푹신한 카펫에 닿았다.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맨발 끝을 보았다가 휙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쉬셔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응, 하지만, 일은 이제 시작인걸. 지금이 가장 일이 많을 때고.” 유스타프는 일어나려는 란의 어깨를 붙잡아 눌렀다. “유스?” 초록색 눈이 놀라 자신을 바라본다. 유스타프는 약간의 힘으로 그녀를 도로 침대에 눕혔다. 손바닥 밑의 어깨가 생각보다 훨씬 가냘파서 유스타프는 숨을 짧게 삼켰다가 말을 이었다. “쉬시죠. 일이 바쁘시다고 해서 온 거니까요.” 그 말에 그녀의 입술이 헤벌어졌다. “일부러?” “어차피 조기 졸업 조건은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렇구나…… 음, 편지에 적은 대로 일은 진행되고 있고, 자세한 건 엘리자벳이 서류를 가지고 있을 거야.” “어제 읽어 봤습니다.” “그래…….” 대답하고 란은 문득 어젯밤 꿈을 떠올렸다. “유스.” “네.” “어, 음, 그러니까.” 란이 눈동자를 데굴 굴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젯밤에도 여기 있었니?” “네.” 세상에. 란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면 어젯밤 그게 꿈이 아니란 말이야? 어제 한 헛소리를 전부 들었단 말이야? “미안.” “뭐가 말입니까?” “어, 내가 좀 헛소리를 한 거. 그냥 잊어.” “손가락이 예쁘다는 칭찬은 처음 받아봐서요.” 으아아아―! 란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꿈이라고 생각했다고, 꿈이라고, 꿈! “그리고.” 유스타프는 양손으로 얼굴을 푹 가린 란을 바라보았다. 귀 끝까지 붉어진 게 보였다. ‘죽이지 말라는 말은, 잊을 수가 없죠.’ 죽인다. 유스타프는 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죽인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인다면 자신의 부모가 먼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미친 여자와 그녀에게 홀린 아버지.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마차 사고로 죽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죽이지 말라니. 목표를 잃은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 거라 생각한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유스타프는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란을 바라보았다. 한참 변명하다가 란은 살그머니 손가락을 벌리고 유스타프를 힐끗 보았다. 너무 조용해서 거기에 없는 줄 알았더니, 여전히 서서 자신을 보고 있다. 얼굴이 뜨거워진 것도 좀 진정이 된 것 같아 란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잊어 주면 고맙겠어.” 유스타프는 대답 대신 그녀의 이마를 다시 살며시 손등으로 쓸어 주고 말했다. “쉬십시오.” 그가 나가고 나자 란은 “아아! 진짜!” 하고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죽이지 마, 라니. 유스가 뭐라고 생각했겠어? ‘아냐, 잘된 걸지도 몰라.’ 내가 자기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 아닌가. 그러면 좀 더 나에게 관대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핑핑 머리를 굴리는 가운데 시녀가 약을 들고 돌아왔다. ‘윽…….’ 정체불명의 검붉은 핏빛 약에서는 지독한 약초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거 다 마셔야 해?” 그녀의 물음에 시녀는 “마셔야 하세요.”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란은 울상을 지으며 코를 잡고 약을 마셨다. 코를 잡았는데도, 냄새가 지독하다. 약을 마시자마자 얼른 물컵을 비우고 란은 침대에 다시 누웠다. “좀 더 쉬세요, 가주님.”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곧 잔을 챙겨서 나가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 란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려 애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이 안 와.’ 생각해보니 쓰러진 지 이틀째라고 했잖아? 이틀이나 쿨쿨 잔 거잖아? 잠이 올 리가 없지. 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약 때문인지 아니면 일어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인지 어지럼증도 사라졌다.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와 그녀는 겉옷을 걸쳤다. ‘도서관이라도 갈까.’ 가서 책이라도 좀 빼 올까. 아냐, 사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정도면 서류를 읽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광산 인부나 감독 뽑는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하고……. 슬리퍼를 꿰신고 란은 살그머니 방을 나섰다. 유스타프는 팔락팔락 서류를 넘겼다. 서류는 이제 대부분이 일정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기 쉬웠다. ‘100만 베라트.’ 그 어마어마한 금액은 유스타프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초안은 란이 잡아 둬서 그대로 진행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얼음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때 찾았단 말이지.’ 그날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매해 신년이 되면, 라치아 공작가는 문을 살피는 의식을 가진다. 봉인이 깨진 곳은 없는지, 흠집 난 곳은 없는지. 기사단을 사열하고, 문까지 갔다가 돌아와 신년회를 연다.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그리고 그해는 계모와 란이 함께 간 첫해였다. 문을 살피고 돌아오는 와중에 숲에서 둘이 살짝 빠져나간 것까지는 기억났다. 그리고 자신은 도로 돌아왔는데, 란은 오지 않았고. ‘처음으로 아버님에게 맞았어.’ 간신히 란을 찾았을 때, 계모가 그녀를 치마폭에 감싸고서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것도 기억났다. 마치 자신이 란을 숲으로 보내기라도 한 듯이. 아니라고 했지만 믿어 주지 않았고, 란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호되게 아버님께 얻어맞았다. 그 뒤에 계모에게 연이어 매질을 당했고 그 흉터는 지금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계모의 매질보다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충격이 더 컸다. ‘이걸 발견했었단 말이지.’ 유스타프는 생각했다가 눈을 감고 가볍게 수정을 쓸어내렸다. 그때 느꼈던 수치와 분노와 아픔과 억울함과 100만 베라트,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광물이라. 나쁘지 않은 거래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군. 새 회계관을 뽑는 문제는 어떻게 됐지?” 엘리자벳은 서류를 받아 들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눈에 띄는 사람을 후보로 추려서 가주님께 올렸습니다.” “그렇군.” 그의 대답에 엘리자벳은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지?” “가주님은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유스타프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엘리자벳을 보았다. 눈이 마주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누님은 괜찮으셔. 과로라고 하더군. 그러니 서류는 당분간 내가 보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엘리자벳은 허리를 숙여 보이고 얼른 서재를 나섰다. 닫힌 문 뒤에 서서 엘리자벳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 건드린 건가.’ 란이 임시 가주가 된 지 이제 한 달 반을 좀 넘은 시간인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모든 것들이 란을 중심으로 빠르게 돌아가서, 이제 와 유스타프가 그 자리를 차지하자 오히려 약간의 균열이 느껴졌다. 불안에서 오는 균열이었다. 윗사람이 바뀌면, 시스템도 바뀌고, 그러면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이었다. “엘리자벳.”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 놀라 고개를 드니 저쪽에서 란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가주님?” 엘리자벳은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옷차림을 보니, 잠자리에서 나와 로브 하나만 질끈 묶어 걸친 모습이었다.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잠이 안 와서, 도서관이라도 갈까 하다가 엘리자벳을 발견한 거지.” 란이 가볍게 웃어 보이고 손을 내밀어 엘리자벳은 홀린 듯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넘겨보는 란을 보고 엘리자벳이 주변을 살핀 후 조용히 속삭였다. “유스타프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응, 알아. 조기 졸업하고 돌아왔대. 굉장하지 않아?” 엘리자벳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분은 정말로 욕심이 없는 걸까? 조금도? 아니면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 능력을 가지고, 조금의 야심도 없단 말인가? “유스가 지금 서류 결재하고 있는 거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됐어.” 란은 서류를 도로 닫아서 엘리자벳에게 넘겨주었다. “뭔가 덧붙이실 내용은 없습니까?”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실 거면 그냥 서재로 오시죠, 누님. 그리고 행정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두 사람 모두 화들짝 놀라 휙 몸을 돌렸다. 유스타프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엘리자벳의 앞을 란이 가로막듯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내가 서류 보여 달라고 한 거야. 행정관은 아무런 잘못 없어.” “제가 잘못했다고 하기라도 했습니까?”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건 아니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더 할 말 있나?” 유스타프가 서늘한 눈을 들어 말하자 엘리자벳은 “아닙니다.” 하고 얼른 인사한 후 복도를 빠르게 떠났다. 란은 침을 삼켰다. 유스타프가 성큼 다가왔다. ‘아.’ 그 사이에 또 키가 컸나? 이제 한 달 반 지났는데? 이제 자신보다 조금 더 크다. “옷차림은 이게 뭡니까.” “편한 옷차림. 그냥, 도서관 가려는 중이었어.” “쉬라고 한 치료사의 말은 안 들으시고요?” “이틀이나 잤잖아. 충분히 잤고, 쉬었어.” “제가 못 미더우신 겁니까?” “어?”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투명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스타프는 어떤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뭔지도 알기 전에, 란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돼서 미안해. 그냥 일이 어떻게 진행되나 좀 궁금했어.” 유스타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이 차가웠다. 다른 사람의 체온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건 정상이 아니겠지. “들어오시죠.”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서재로 란을 끌고 들어갔다. 어어 하며 란이 그에게 끌려 서재로 들어섰다. 로스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가주님?” 란은 그가 칭하는 가주가 자신일까, 아니면 유스일까 궁금해졌다. “불 피워.” 유스타프의 명령에 로스는 ‘여름인데요?’ 같은 말을 하지 않고, 충실하게 불을 피웠다. 유스타프는 의자를 끌어다가 난로 앞에 놓고 란을 앉게 했다. “몸이 차갑습니다.” “고마워.” 란은 그렇게 말하며 발끝을 뻗었다. 안 그래도 손발이 시린 참이었다. “아, 맞아. 유스.” “네.” “린드버그 남작에게 1만 베라트를 갚아야 해. 이자가 매월 천 베라트씩 나간단 말이야. 게다가.” “결혼, 말이죠.” “그래.”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쬐니 금방 몸이 훈훈해졌다. “상대가 괜찮았으면 혹시 모를까. 로비라니, 말도 안 되지.” “괜찮으면 결혼하셨을 겁니까?” 그 말에 란이 이마를 찌푸리고 고민했다. “음, 빚을 탕감해 준다고 하고, 얼음수정이 없었다면 했어야겠지. 그런데 아마 하지는 않았을 거야. 왜냐면 지금 나와 결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라치아 공작가를 노리는 걸 테니까.” 벽난로는 이제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일렁이는 주홍빛 불꽃을 보며 란이 고요히 말했다. “그러니 가주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군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그러모았다. ‘부드러워.’ 약간 놀라움마저 느끼며 그는 살짝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란의 부드럽게 물결치는 밀빛 머리카락은 길어서, 그녀의 가슴 아래까지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머리 엉망이야?” 하긴, 자다가 왔지, 하고 란이 쑥스러워하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로스는 어쩐지 그 장면에서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여자의 풀어 내린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남자라니, 침실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두 분은 남매시니까.’ 남매라고 해도 도를 약간 넘었지만, 유스타프가 아직 미성년이니 눈감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두 사람을 남매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 남매는 맞지.’ 호적상 확실하게 두 사람은 남매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라는 것만 빼면.’ 게다가 같이 생활한 시간은 아주 짧았다. 이런저런 소동 탓에 유스타프는 아카데미로 떠났으니까. 그리고 3년 반 만에 다시 돌아왔다. ‘아냐, 에이 설마.’ 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란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란이 빙긋 웃어왔다. “로스 경은 좋겠네요.” 느닷없는 말에 로스는 눈을 찡그렸다. “뭐가 말입니까?” “주군이 돌아와서요.” “그렇군요.” “뭐예요, 안 좋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게다가 유스타프도 빤히 자신을 보고 있다. “좋습니다.” 당당히 인정하니 란 역시 웃었다. “저도 좋아요.” 유스타프는 란을 내려다보았다가 말했다. “누님.” “응?” “누님은 왜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어?” 질문에 눈을 껌벅였다가, 란은 대답했다. “그야, 유스타프니까.” 그의 입매가 슬쩍 틀어졌다. “그게 어째서 이유가 되는 건지?” “아니, 비꼬는 게 아니라―” 란은 자신이 설정한―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유스타프를 생각했다. “항상 열심히 하잖아. 난 알아. 유스가 열심히 하고 있는 거. 포기하지 않는 거.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란은 무릎을 모아 웅크리고, 거기에 살며시 머리를 대며 그를 보고 웃었다. “그러니까 굉장해. 그러니까 믿고 있고. 그러니까 좋아해.” 말하고 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하는 건 싫어. 일을 나눠서 할 수 있게 해 줘.” 그녀의 얼굴에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은 누님이시고, 쓰러지신 것도 누님이신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어라, 그런가. 란이 고개를 기웃하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저야말로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너무 많은 일을 하고 계시니까요.” “당연하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일하는 게 쉬운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같이 하면 나중에 인수인계할 필요도 없을 거고, 여러모로 편할 거다. “아, 그리고 인재 영입 말입니다.” “아카데미에서 괜찮은 사람 건졌어?” “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든 사람 몇몇에게 얘기했고, 그들 중 몇은 기꺼이 찾아오기로 했던 터였다. “졸업하고 나서, 고향 집에 들렀다가 오겠지요.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군요.”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임관되면 이 영지에 뿌리를 내리게 될 테니까. 가족까지 오라고 한다든가?”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하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이야?” “평민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어떤 사람이야?” “회계관을 삼으면 적당한 사람이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란은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여자야? 남자야?” “남자입니다.” “이름은?” “카루소와 데릴입니다.” “두 사람?” “네.” “괜찮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게다가 평민이라면 더더욱 공부도 열심히 했을 거고. 두 사람이라도 크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회계관이라니 지금 딱 필요한 인재 아닌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니 당분간은 임시 회계관으로 땜빵을 해야겠군.’ 엘리자벳이 회계관 후보를 올렸는데, 하고 고민하는데 유스타프가 물었다. “그런데 광산 말입니다.” “응.” “다른 가문도 참여하게 할 겁니까?” “그럴 필요가 있어?” 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론 란스, 와일드, 일루미니티, 세 가문 모두 공작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역시 그렇지요.” “아, 그러고 보니.” 란이 다리를 도로 펴며 의자에 기대어 말했다. “일루미니티 백작의 딸이 아프다고 하던걸.” “그런가요?” “응, 치료사도 무슨 병인지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건 큰일이네요.” “그렇지.” 그래서 백작은 치료약을 주겠다는 말에 넘어가, 크게 공작가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막을 수 있겠지.’ “그래서, 골든로즈를 통해서 약을 알아봐 주면 어떨까 하고.” “나쁘지 않군요.” “그렇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물었다. “정말로 쉬지 않으실 겁니까?” “으음, 쉬고 싶기는 하지만, 일이 많기도 하고―” “그럼 오늘까지만 쉬는 걸로 하시죠.” “그럴까?” “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뻗었다. “어? 잠깐, 유스? 우와?!” 순간 그가 자신을 끌어안나 했던 란은 번쩍 들어 올려져 깜짝 놀랐다. 유, 유스 말랐는데 힘이 좋구나. 아니, 이제 마르지도 않은 건가? 머릿속의 유스타프는 항상 상처 입고 깡마른 남자아이라, 란은 그가 자신을 들어 올리자 진짜 놀랐다. “내려놔, 무거워. 떨어트리겠어.” “안 떨어트립니다.” 유스는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다. 놀란 토끼 눈을 했던 로스가 허둥지둥 방문을 열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침실까지 들어가 도로 란을 침대에 내려놓고 말했다. “그럼 쉬십시오.” “어, 어, 으응.” 어안이 벙벙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타프는 픽 웃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란은 털썩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진짜 놀랐다.’ 유스타프, 힘세졌구나. 팔은 단단했고,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놀랍다.’ 그렇게 생각하고 란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늘까지만 쉬고.’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잠깐 사이 움직였기 때문인지 스르르 잠이 밀려와 란은 그대로 잠들었다. ✥✥✥ 린드버그 남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원금과 이자입니다. 숙부님.” 유스타프의 말에 린드버그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어떻게 저 돈을 마련했지? “설마 형수님의 보석이라도 판 건가?” “그럴 리가요.” 유스타프의 대답에 린드버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물론 돈을 돌려받은 게 싫은 건 아니다. 그에게도 큰돈이니까. 하지만 저 돈을 통해서 라치아 공작가를 흔들려던 계획이 다 틀어져 버렸다. “숙부님, 차용증을 돌려주시죠.” 조카의 저 빳빳한 낯짝에 주먹을 날려 주고 싶어졌다. ‘어린 것이!’ 감히 웃어른인 자신에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물론 공작 영식인 그의 지위가 실제로 훨씬 더 높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생각은 원래 밀어 두는 법. ‘애답잖은 얼굴을 하곤.’ 유스타프의 무표정한 얼굴은 언제나 린드버그 남작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는 더욱 그랬다. 어린아이에게 위압을 느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는 항상 어린애답지 못한 얼굴이라고 수없이 지적하고는 했다. 형수에게도, 형에게도 ‘표정도 없고, 백치가 아닌가 싶다.’ 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렇군, 맞는지 세어 보지.” 보통이라면 모욕당했다고 생각할 법한 발언이었다. 게다가 하대까지. 로스는 발끈해서 검 손잡이를 붙잡았지만 유스타프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했다. 그야 자신은 아직 가주가 아니니까. 건방진 끄덕임에 린드버그 남작은 이를 악물고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육각형의 금화가 주머니 안에서 빛을 발했다. 한 닢 꺼내 앞뒤로 살피고 이로 깨물어 보기까지. 정말로 금화, 정말로 베라트였다. “조카님은 어디 계시지?” 린드버그 남작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누님께서는 다른 일로 바쁘십니다.” “숙부를 보러 올 시간도 없다는 건가? 내가 직접 보러 가겠네.” 이렇게 그냥 끝내라고? 말도 안 된다. 그가 뚱뚱한 몸을 일으키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알현을 원하시면 미리 약속을 잡으셔야 합니다.” “난 그 애의 숙부야! 가족이란 말이다.” “그리고 누님은 라치아 공작가의 가주시지요. 가족이라고 해도, 위아래가 있는 겁니다.” 린드버그는 순간 욕을 내뱉을 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라치아 공작가가 그의 입 앞에 잘 익은 열매처럼 달랑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린드버그가 씩씩거리며 유스타프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치려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군.”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접었다. 불도그같이 늘어진 뺨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가주님은 가주님이시지.” 유스타프의 눈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내가 실례했어.” 린드버그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도로 앉아 차용증을 내밀었다. “여기.” 이어 그가 말했다. “가주님께 뵙고 싶다고 전해 주시게, 약속시간이 잡힐 때까지 여기서 꼼짝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유스타프는 차용증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쌩하니 로스와 함께 방을 나섰다. ‘제법이군.’ 보통이 아니다. 거기서 화를 내고 자신을 모욕이라도 하면, 그대로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가주님께 전하실 겁니까?” 로스의 말에 유스타프가 “그래야지. 아니면 기다리겠다는데.” 하고 비소했다. 로스는 갈색 눈동자로 힐끗 앞서는 주군을 보았다가 물었다. “주군.” 유스타프의 눈동자가 힐끗 로스를 보았다. “란 님을 믿으십니까?” “어떤 의미에서?” “네? 그게.” 로스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적인지 아군인지 말입니다.” “적이라면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없겠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가주가 된 것은 그야말로 잠깐,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를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자신 역시 흔들린다는 걸 유스타프는 잘 알았다. 만약 자신이 6개월 후에 졸업하고 돌아왔다면, 끼어들 여지조차 없게 됐을 터였다. “너무 빨라.”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주군?” 유스타프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블레인 경에게 가지.” ‘란 님께 가는 게 아니라 말입니까?’ 하는 말은 충실한 로스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단장님이라면 지금 훈련장에 계실 겁니다.” 단지 그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숙부님이?” 란이 갸웃하며 물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서류 더미가 한가득이었다. “네. 그리고 차용증입니다.” 차용증을 내려놓고, 유스타프는 서류 뭉치의 반을 덜어서 자신의 책상 위로 옮겼다. 서재에 책상을 하나 더 들여놓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 니은 자로 책상을 붙이고 거기서 유스타프는 비서처럼 일을 돕고 있었다. 란은 차용증을 확인하고 흥, 콧김을 내뿜었다. 도무지 숙녀의 행동은 아니었다. “시원하다.” 란은 그렇게 말하고 차용증을 잘 정리해서 서랍에 넣었다. “그런데 만나자니.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란은 한숨을 내쉬며 “일부러 유스에게 미룬 건데.” 하고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냐, 어쩔 수 없지. 만나 보는 수밖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할 말이야 뻔하지만.’ 란은 시종을 불러 숙부를 뒤쪽 방으로 안내하라고 말했다. 전에 로스에게 보여 줬던, 도청이 잘되는 방이었다.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여기 코르셋은 본격적이 아니라 다행이지.’ 코르셋이 아니라, 코르셋의 조상쯤 되는 코르피스를 착용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진짜 코르셋으로 꽉 조이는 거였다면……. 18세기의 이상적인 허리 사이즈가 43cm~46cm. ‘이것도 지금 조이는데…… 생각만 해도 무섭다. 절대로 오랫동안 앉아서 서류를 볼 수 없을 거야.’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란은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와 있던 린드버그 남작은 초조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었다. “숙부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많아서.” “유스타프가 돌아왔더군.”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이었다. 란은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네, 조기 졸업을 하고 왔더군요.” “알고 있었나?” “아뇨. 저도 놀랐어요.” 린드버그 남작의 얼굴에 쾌재가 서렸다. 그가 얼른 마주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해야 해.” “뭘 말인가요?” “당연히 유스타프지. 그가 네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게야. 가주가 되려 한단 말이다.” “어차피 2년 후면 가주 자리는 유스타프의 것인데요.” 그 말에 남작은 코웃음을 쳤다. “넘겨주고 나면? 네 목은 무사할 것 같으냐?” “…….” 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란의 침묵에 남작은 더더욱 흥이 붙었다. “게다가 벌써 가주 행세를 하고 있지 않아, 응?” “그가 가주가 될 거니까요.” “널 없애고 말이지? 얼마 전에 몸이 안 좋아서 쓰러졌다지. 정말로 네 몸이 안 좋아서 쓰러진 것 같아? 너 같은 팔팔한 나이에?” 그는 독 같은 말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약을 먹고 있다지? 그 치료사에 대해서 알고 있니? 네 어머니도 치료사에게 두통약을 지으라고 했지만, 조금도 낫지 않았지. 그 치료사가 전 부인이 데려온 치료사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거냐?” 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몰랐어!’ 생각해 보면 설정하지 않은 부분들이 나머지 90%쯤을 차지할 텐데 어떻게든 메워져 있다. 그걸 생각하면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이 없는 걸 보고 린드버그 남작은 의기양양해졌지만,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하지만 난 널 진짜 내 친조카처럼 생각한다. 란 로미아 드 라치아. 정말로 네 편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렴.” “충고 감사합니다, 숙부님. 더불어 제 편이 누군지 고르는 건 제 몫이랍니다.” 싱긋 웃으며 란이 말하자 린드버그 남작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수면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늘같이 란의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는 떨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없이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야말로 오만방자한 행태였다. 남작이 나서자마자, 란은 그대로 퍼졌다. ‘피곤해. 나이 먹은 아저씨랑 기 싸움이라니, 피곤해!’ 더해서 못생기고 뚱뚱한 아저씨랑! 하지만 오래 안 나가고 있으면 밖에서 듣고 있는 유스타프와 로스가 뭐 하나 궁금해할 테니 나갈까― 하는데 문이 열리고, 유스타프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은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보기만 해도 더위가 가시는 듯한 차가운 아이스티가 놓여 있었다. 빙벽이 있는 라치아는 여름에도 얼음을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어서 여름에 흔하게 얼음을 쓰곤 했다. 란의 눈이 고기 붙은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반짝였다. 유스타프는 쟁반을 내밀었고, 란은 잔을 들어 거침없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비싼 설탕을 아낌없이 넣은 달콤하고 차가운 냉차가 식도를 타고 짜릿하게 내려간다. 한 번에 전부 다 비우고 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유스타프는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물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마시셔도 되는 겁니까?” “어?” 역시 한 번에 마시는 건 숙녀답지 않았던 건가. “제가 독을 탔으면 어쩌시려고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빈 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유스타프를 보았다. “탔어?” 그래서 설탕을 잔뜩 넣었다든가! “아뇨.” “그럼 뭐.” 된 거지. 유스타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물론 그의 표정은 대부분 모든 것을 가면 속으로 갈무리한 듯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란은 알 수 있었다. “왜?” “누님은 절 믿지 않으시죠.” “어? 아니, 믿는데?” “제가 누님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잖습니까.” 헐. 란은 침을 삼켰다가 “으음, 아니, 그게―” 하고 웅얼거렸다. 유스타프가 이어 말했다. “그러면서도, 절 경계하지 않습니다.” 유스타프는 고개를 기울였다. 차라리 ‘얘는 날 죽이지 않을 거야. 우리는 이제 친해.’ 같은 생각으로 자신이 주는 모든 것을 믿는다면, 그건 납득할 수 있다. 반대로 ‘얘는 언젠가 날 죽일 거야.’ 하고 자신의 모든 행동을 의심하며 경계한다고 해도,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얘는 언젠가 날 죽일지도 몰라.’라고 하면서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새파란 눈이 란을 바라보아, 란은 더듬더듬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유스가, 가주가 되고 나면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힐끔, 눈치를 보니 유스타프는 계속 이야기를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게 열심히 노력하자고 생각하고 있고―” 끙끙거리다 란은 최후의 말을 내뱉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차갑다. 차가운 침묵이 방 안을 내리눌렀다. 마치 살갗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차가움이었다. 란은 어깨를 움츠리고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를 내거나, 움찔하거나, 아니면 짜증을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공기가 확연히 차갑다. ‘남자 주인공이란 대체 뭘까.’ 필사적으로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란은 침을 삼켰다. 란이 머릿속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다섯 번쯤 불렀을 때, 유스타프가 물었다. “어째서요?” “응?” “어째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응……?” 유스타프가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멀리 있을 때는 그래도 고개를 많이 들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고개를 뒤로 젖히듯 들 수밖에 없었다. 살짝 위압감을 느끼며 란이 의자 뒤쪽으로 물러났지만, 등받이가 그녀를 똑바로 앉게 해 줄 뿐이었다. “어째서요?” “그게…….” “동정? 죄책감? 자포자기?” 유스타프의 손이 그녀의 뺨을 스쳐서 목으로 내려갔다. 희고 가는 목을 부러트릴 수 있을지 가늠이라도 하는 듯 그가 살며시 목을 쥐었다. 팔딱팔딱팔딱. 빠르게 그녀의 경동맥이 뛰기 시작했다. “셋 중 어느 하나가 대답이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군요.” 유스타프는 바닥이 비쳐 보일 듯한 깊은 녹색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란은 가볍게 입술을 핥고 물었다. “유스타프는.” “네.” “날 미워하지 않아?” “글쎄요.” 유스타프는 애매한 대답을 하며 손을 뗐다. 란은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유스타프는 남작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란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손등에 턱을 얹었다. “유스.” “네, 누님.” 대답은 깍듯하지, 대답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푸스스 가볍게 웃었다. “사실 죄책감도 좀 있어.” 유스타프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내가 널 괴롭혔던 건 사실이잖아.” “그렇죠.” 하지만 죽어도 좋을 만큼 괴롭혔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계모의 괴롭힘을 그녀가 책임지겠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유스타프는 그걸 란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좀 웃긴데, 만약에 유스가 날 죽여야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 “비뚤어진 신뢰네요.” “그런가.” 말하고 란은 허리를 펴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해결될 것 같으면 말해 줘. 바로 짐 싸서 나갈 테니까. 그리고 두 번 다시 여기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정말로.” 유스타프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내뱉었다. “당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어? 아니? 왜? 또? 뭐? 당황하는 란을 보고 유스타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드물게 그는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숙부님은 상당히 공작가 사정에 정통하신 것 같더군요.” “어? 아아, 응.” 란은 이야기를 따라잡아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건강 상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상당히 끄나풀이 많은 모양이야.” 가주의 건강 상태는 기밀에 속한다. 괜히 역사서를 보면 왕이 죽었는데, 측근들이 그걸 숨기고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아니다. 한데, 숙부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까이에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치료사는 어떤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아까 숙부의 발언을 떠올렸다. 란이 어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랬다고 생각해?”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끄나풀이 있고, 한둘이 아니라는 건 사실이지요.”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내서 축출하는 게 좋겠지.” 조사하는 것도 일이겠지만. 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좀 더 압박해 볼까요.” “숙부님을?” “네.” 유스타프가 다리를 꼬고 발끝을 가볍게 까닥거렸다. ‘다리 길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이 물었다. “어떻게?” “대놓고 찾아보죠.” “그냥? 오픈해서? ‘첩자 나와라!’ 하고?” “네.” “나올까?” “압박이 목적이니까요.” “그렇게 압박해서?” “튀어나오길 바라는 거죠.” “그렇군.” 길고양이를 물에 넣으면 튀어나오는 벼룩들처럼 말이지. 확실히 그편이 빠른 처리가 가능하기는 하다. 더 깊이 숨어들 위험성은 둘째 치고 말이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자.” ✥✥✥ 린드버그 남작은 이를 갈았다. ‘감히 그 천한 계집이!’ 라치아는 자신의 이름이었고, 혈통이었다. 모드 우라스 드 라치아. 그게 자신의 본래 이름이었다. 라치아 공작가를 나오며 라치아라는 성을 쓸 수 없게 되어 그저 모드 우라스가 되어버렸지만. 둘째 아들인 그에게 남작령을 떼어 줬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애정을 말해 주는 거였지만, 그는 그래서 더 애가 탔다. “라치아의 피도 섞이지 않은 창녀의 딸이!” 와장창! 그가 식탁을 걷어찼다. 그 전통과 명성이 전부 자신의 것이었는데……. 생각할수록 속이 쓰렸다. 아버님은 형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아껴 주었다. 할 수 있다면 라치아 공작 작위도 자신에게 물려주었을 거다. 라치아 공작가. 그 이름만으로도 사교계에서 수많은 시선을 모을 수 있었다. 모두가 라치아 공작저인 하늘 저택에 초대받기를 원했다. 마법사가 만든 아름다운 상앗빛 저택 역시 자신의 집이었다. 도저히 건물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산맥에 설화석고처럼 뽀얀 대리석으로 층층이 만들어진 건물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눈을 감으면 아침 햇살이나 저녁놀 아래 진주와 은으로 지어진 듯 빛나는 하늘 저택이 생생히 보였다. 지금도 어린 시절 공중 정원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또렷하다. 사교 시즌에 쌓이던 초대장들이며, 하우스 파티에 초대해 달라는 부탁까지. 그야말로 영광의 시간이었다. ‘그 계집은 어떻게 청염을 낀 거지?’ 자신도 낄 수 없었다. 끼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는 가주가 청염을 다루는 것을 보았다. 전설은 거짓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그 반지를 삼켜 버리고 싶을 정도로, 모드는 청염을 원했고 동시에 증오했다. 섭정, 섭정으로도 족했다. 다시 한번 그 단맛을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둘러야 해.” 린드버그 남작은 중얼거렸다. 유스타프가 가주직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첩자를 골라내겠다며 시종들을 심문하고 출신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정말로 내 줄이 다 끊어지기 전에 해결책을 내야 해.’ 린드버그 남작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래 봐야 어린것들이다. 고작 열일곱, 열아홉. 자신과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자신이 그 저택 곳곳에 뿌린 돈만 해도 얼마인가? 란에게 약을 먹이라고 했던, 그 치료사도 사실 남작의 끄나풀이었다. 유스타프 친모의 치료사라서 일부러 공들여 섭외해 두었다. 란과 유스타프를 확실히 이간하기 위해서였다. 문득 그는 란이 공작가를 빠르게 쇄신하고 있는 걸 떠올렸다. 젊은이의 객기라니. ‘빠른 행동은 불안감을 부추기게 되어 있지.’ 모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종을 흔들어 시종을 불렀다. “로비에게 오라고 해라.” 아들을 부르며 그는 뚜렷하게 떠오른 계획을 더듬었다.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좀 더 앞당길 뿐이었다. 공작가에 충성을 바치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계관을 사형시키는 일이 몇몇에게는 환호성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르지만, 몇몇에게는 자신의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왔다. 흙탕물 안에서 흙탕물이 튀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운 법. 모드는 그걸 이용할 작정이었다. 잠시 후 그의 아들인 로비가 어슬렁 들어왔다. 백부의 죽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도에서 돌아온 그는 불만에 잠겨 있었다. 하필 한창 시즌일 때 돌아가실 건 뭐람? 올해는 버턴(세 살배기 말(馬)만 출연하는,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마 대회)에서 큰돈을 딸 예정이었는데. 린드버그 남작은 이례적으로 형님보다 더 빠르게 결혼했기 때문에 로비의 나이는 스물셋으로 한창때였다. “부르셨다면서요?” 인사하며 들어오는 아들을 모드는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 너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다.” “무슨 일인가요?” “너 란을 기억하지?” 로비는 금방 자신의 사촌을 기억해냈다. 사교계에서도 보기 드문 미인이어서 더욱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요.” “네 부인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로비의 갈색 눈이 번쩍 빛났다. “그쪽에서 혼담이라도 들어온 겁니까?” 그 역시도 그녀가 가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작가의 방계인 자신과 혼인을 한다는 건 상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차기 라치아 공작은 네가 되는 거다.” 모드는 그렇게 말하며 아들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지만 여자는 항상 그렇듯, 이성적인 생각을 못 하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고 모드는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 부르르. 란은 몸을 떨었다. “추우십니까?”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로스가 “한여름인데요.” 하고 말하면서도 힐끗 벽난로 쪽을 보아 불을 확인했다. “아니,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뭐였을까. 그리고 로스 경, 한여름이라고 해도 라치아는…… 라치아잖아.” “다행이지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갑옷을 가볍게 두들겨 보였다. 하긴, 하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까지 올라오는 제복이나, 갑옷을 입고 다닐 병사들을 생각하면 이 날씨 정도가 딱이겠지. ‘하긴 나도 뭐.’ 레이스가 잔뜩 달린 페티코트를 입고 있으니, 이런 날씨도 괜찮다. 물론, 사교 시즌에 사교계로 옮겨가게 되면 푹푹 파이고 하늘하늘한 옷차림을 할 수 있겠지만. ‘마법 물품으로 온풍기랑 냉풍기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맞아! 겨울용 전기장판!’ “세공사가 필요해.” 느닷없이 란이 중얼거린 말에 유스타프가 펜을 잉크에 적시며 물었다. “마법 세공사 말입니까?” “응, 마법사는 데려올 수 없지만, 세공사는 가능하잖아? 공작가에서 만든 물품을 값싸게 영지 내에 공급하고 싶어. 적어도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고 싶네.” “하지만 공작령 내에서 마력석을 저렴하게 공급하면, 그걸 갖다가 파는 자도 생기지 않을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그런가.” 하고 란은 눈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공작령 밖으로 나가면 힘을 못 쓰게 한다든가?” “가능합니까?” “세공사에게 물어봐야지.”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정말로 영입해야겠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진짜 굉장하잖아.’ 란은 자동차를 떠올렸다. 환경오염의 주범들인 모든 동력원은 전부 마력석으로 대체 가능하다. 즉 친환경. 조금도 대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면서,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래도 매장량이 끝이 있기는 할 테지만.’ 그건 지금 내 문제는 아니잖아? 호호.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은 미소 짓고 서류에 서명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광산 채굴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가신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저택의 몇몇이 알고 있기는 해도 아직까지는 비밀로 부치고 있는 중이었다. ―채권자들이 압박을 넣으면서 이율 분배를 퍼센트로 하자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하는 것이 란이 제시한 대외적인 이유였다. ‘그래도 무력에 있어서는 믿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기사단장인 블레인 경이 충성심 깊은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무력을 가진 사람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그때는 정말로 힘드니까. ‘그래도 충성심 깊은 기사로 설정해 놔서 다행이야.’ 어차피 다 몰살하면서 남주에게 피폐함을 주기 위한 도구였지만. ‘그, 그래도 지금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란은 로스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로스는 그녀의 웃음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다음 주쯤 되면 골든로즈에서 요구하는 첫 출하가 끝나겠네.” “네, 양이 워낙 많아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해도 그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 골든로즈 상단에서는 수시로 연락이 오고 있었다. 레버리가 주고 간 마법 통신기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이야기가 가능해 편했다. “마법사들이 라치아 공작가에 오고 싶어서 난리가 났다는군요.” 유스타프가 서류 한 장을 란에게 넘기며 말했고 란은 웃었다. “그럼 안 되지. 괜히 오지 말라고 한 게 아니잖아.” “그렇지요.” 마법사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처음 골든로즈 상단주인 레버리가 얼음수정을 보여주자 상단에 속한 마법사는 당연히, 그 사실을 마법사 협회에 알렸다. 마법사 협회는 레버리에게 압박을 가해 얼음수정을 얻어 냈고―사실 레버리가 은근슬쩍 넘긴 거지만― 거기 담긴 마력량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마법사 협회의 원탁 회원들은 우르르 골든로즈 상단으로 몰려갔다. 거기서 레버리가 팔뚝만 한 마력석도 있다고 말하며 샘플을 보여주자 다들 그걸 자기가 가져가 살펴보겠다고 하다가 싸움이 난 모양이었다. 결국 레버리가 그렇다면 줄톱으로 12개로 나눠서 주겠다고 하자―원탁 회원은 모두 열둘이기 때문에― 다시 난리가 났다. 모두가 이것의 가치를 모르냐면서 분노해 엉뚱하게 레버리에게 불꽃이 튀었던 모양이다. 결국 원탁 회장이 샘플 원석을 흐뭇하고 행복한 얼굴로 차지하고, 레버리는 라치아 공작에게 부탁해서 나머지 분들 몫의 원석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레버리가 이 소식을 전하자 기쁘게 란은 나머지 11개의 조각도 보냈다. 마법사들은 권력이나 돈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그것도 이제 마법 관련 루트를 뚫을 예정이니― 더할 나위 없는 뇌물이었다. “출하한다고 해도 어차피 시연은 12월이 되어서야 하니까.”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년이 아니면 사교 시즌에 출입할 수 없다는 게 불편하군요.” “그러네. 유스도 같이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사교 시즌. 대다수의―특별한 일 없는 모든 귀족들이 수도에 모이는 시즌이었다. 12월부터 시작해서 8월까지 길게 이어지는 이 시즌의 피크는 5, 6, 7월이었다. 이때는 하루도 무도회가 열리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수도의 타운하우스는 북적거리고, 삼나무 길(수도에 있는 부티크 거리)은 마차로 가득해진다. 물론 여름 나무 공원이나, 예레니아 공원도 마찬가지다. 열아홉 성인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서 사교 시즌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사교계보다 더 좋은 광고판은 없지.’ 마력석만 가지고 나갈 생각은 그녀도, 레버리에게도 없었다. 이 마력석으로 만들 수 있는 놀라운, 지금까지는 본 적도 없는 마법 세공품을 만들어 시연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시연장은 당연히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 시즌이 될 거다. 그중에서도 황궁인 황금 백조 궁전에서 열리는 대규모 무도회보다 더 적절한 시연장은 없으리라. ‘어쨌든 귀족 상대 장사니까.’ 황족이 첫 번째 구매자가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되겠지. ‘그렇군. 황후마마께도 선물을 해 두는 게 좋겠어.’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잠깐, 생각해 보니까 최종보스 비슷한 사람이 황궁에 있잖아?’ 최종보스는 아니고, 중간보스 중에서 두 번째급이라고 할까? ‘으― 이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란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고민해 봐야 지금은 해결되지 않을 문제니까. 그나저나 아무래도 이놈의 신분제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라치아 공작가는 외따로 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고 꽉꽉 묶여 있는 거였다면 지금 이상으로 큰일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라치아 공작가가 외따로인가 하면, 란이 임시 가주가 되고 나서 공작 작위를 이어받아야 할 때, ‘임시라 직접 가서 하사받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편지를 보내자 ‘그럼 임시로 인정하노라.’ 하는 답장이 돌아올 정도였다. ‘물론 비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임시 인정이면 충분했다. ‘앞으로 2년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사교 시즌이 돼서 수도로 내려가면. ‘서브 남주를 찾아야 해, 서브 남주……!’ 남주가 귀족적으로 굴렀다면, 서브 남주는 하급 인생으로 굴렀다. ‘루미에.’ 그런 이름이었지. 그런 이름의 노예를 찾아 주세요, 라는 건 너무 광범위해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설정 자체가 두리뭉실하기도 했고. “누님?” 유스타프가 그녀를 불러 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응. 미안, 못 들었어.”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냐, 괜찮아. 차 한잔 진하게 마시면 금방 다시 일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 란은 싱긋 웃고 시종을 불러 진한 차를 주문했다. 진한 차를 마시고, 란은 업무를 계속했다. 양초가 다 타고 나서, 업무는 끝났다. ‘그래도 두 사람이니까 훨씬 낫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저녁 목욕을 하고 나오니, 시녀가 또 그 이상한 약을 들고 서 있었다. 란은 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약을 먹고 물을 마셨다. ‘어라……?’ 갑자기 엄청 졸려. 눈꺼풀이 무거워서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침대로 가서 자야…….’ 그때 무릎에서 휙 힘이 빠지며 그녀는 바닥에 넘어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정신 일부분이 경종을 울렸다. 이거 이상해. 이상해.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 그 이상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안 돼, 누군가를 불러야― 간신히 거기에 생각이 닿아 란은 어떻게든 깨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바닥이 눈앞에 다가오고 끝이었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불꽃은 뜨겁지 않았고, 기분 좋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스타리프. 속삭이는 듯한 여자 목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서 들려왔다. ―이스타리프. 다시 한번. “이스타리프.” 란이 호응하듯 이름을 부르자 불꽃이 확 타오르더니 형체를 갖췄다.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사자,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푸른 불꽃. 눈동자는 평범한 동공이 아니라 마치 스타사파이어처럼 보였다. 보통이라면 흠칫하고 징그럽게 여기겠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잘 어울렸다. “드디어 내 목소리가 들린 모양이지?” 이스타리프의 목소리는 허스키했다. 불꽃을 태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스타리프?” 란이 되묻자 이스타리프는 “그래.”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청염?” 두 번째로 묻자 이스타리프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그래, 라치아 공작가에서는 날 그렇게 부르지.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는데. 넌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지?” “왜 여기에……? 여기는 대체 어디고?” 당황해서 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로 꽉 찬 하얀 공간이다. 그렇게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난 약을 먹고 쓰러져서…….’ 유스타프인가. ‘하지만 굳이 왜 날 죽여? 성인식 때까지는 참을 줄 알았는데.’ 란이 생각한 죽음도 유스타프가 가주가 된 이후지, 그 전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숙부님이?’ 하지만 숙부 쪽 움직임에 대한 보고는 따로 올라온 게 없었다. ‘하긴 이제 와서 생각해 봐야.’ 란은 가볍게 혀를 찼다. 유스타프를 보면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었다. 그 애의 상처 입은 얼굴을 봤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힘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현실감은 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죽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현실감이 안 드는 걸까. 그때 이스타리프가 목을 쭉 늘리더니 란의 코앞에 얼굴을 불쑥 디밀었다. 란은 혼비백산해서 뒤로 물러났다. “킥킥킥.” 이스타리프는 목을 한 번 꼬더니 이상하게 웃고 다시 목을 줄여 평범한 길이로 돌아왔다. “뭐, 뭐예요.” 저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이스타리프가 흔들리는 푸른 불꽃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고 말했다. “혼자 생각에 푹 빠져 있기에.” 이스타리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란은 가슴께를 눌렀다. 너무 놀라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사후세계라면 이스타리프가 왜 여기에 있지?’ 갸웃하고 란이 이스타리프에게 물었다. “난 죽은 건가요?” “아니.” 그녀의 말에 란은 눈을 깜박였다. “그럼 어떻게 된 거죠?” “넌 잠이 든 거야. 여기는 정신계란다.” “그냥 잠든 거라고요?” “그래.” 이스타리프의 대답에 란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니까 그냥 너무 피곤해서 쓰러진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란이 고민하는 것 따위 상관하지 않고 이스타리프는 제 말을 이었다. “정신계는 네가 아주 깊은 꿈을 꾸고 있을 때에 연결되는 곳이지. 자, 여기서는 내가 더 우위에 있어.”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는데도?” 란이 노려보며 말하자, 이스타리프는 언짢은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거지?” “안 가르쳐 줘.” 용기를 그러모아 란은 말했다. 여기가 사실 내가 창작한 세계입네, 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상대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령이라면 더더욱. “하핫―” 그때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안개를 스윽 헤치고 이번에는 남자가 등장했다. 상반신은 인간 남성, 그리고 하반신은 뱀이었다. ‘세상에.’ 여기 정령들은 다 반인반수인가? 내가 그런 설정을 했었나? 아닐 텐데? 남자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어깨부터 팔까지 두 줄로 새까만 뱀 비늘이 마치 문신처럼 드러나 있다. 그가 빙긋 웃었다. “그대를 괴롭힐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냥 궁금할 뿐이야. 한 번 죽었었던 그 몸뚱이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 말이야.” 상냥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 내용은 통렬했다. 란은 흠칫했다. 이스타리프는 입을 비죽거렸다. “그래, 그리고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지 말이야. 참격(慘擊), 넌 끼어들지 말고.” 참격. 그제야 란은 그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른 공작가인 장미의 우슬라, 그곳에 있는 정령이었다. 검은빛의 창, 참격. 그리고 그 이름은― 란은 그 이름을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밝히는 게 좋을지 아닐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만약 알려 주면, 날 여기서 나가게 해 줄 거야?” 이스타리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다만 사실을 말할 때.” “막 100년 후에 깨어나는 게 아니라, 내가 정신을 잃은 현재로 무사히 날 돌려보내 줘.” 이스타리프는 가볍게 웃었다. “좋아.” “사실, 여기는 내 소설 안이야.” 이스타리프와 참격 둘 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란을 바라보았다. 란은 입술을 핥고 말했다. “알아, 이 사실이 이상하다는 걸. 하지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난 여기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었어. 그리고―” “프하니아스로군.” 참격이 말했다. 프와 스가 거의 입술 사이로 바람만 빼는 듯한 발음이라 얼핏 ‘하니아’라고 들리기도 했다. “프하니아스?” 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묻자 이스타리프가 설명했다. “‘읽는 자’라는 거지. 그랬군. 그래서 내 이름을 아는 건가.” “잠깐, 그쪽끼리 납득하지 말고 이야기해 봐. 내가 여기에 들어온 거랑 연관이 있는 거지?” 이스타리프와 참격은 서로 마주 보았다가 “잠깐.” 하고 손을 들었다. 그들은 눈으로 대화하듯이 서로 마주 보고만 있었다. 란은 초조해졌지만, 얌전히 기다렸다.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정령들이 아는 게 틀림없다. ‘그럼, 돌아갈 수 있어!’ “호오, 프하니아스라, 이건 또 진귀한 여행자로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개를 밀어내는 환한 빛과 함께 상대가 등장했다. 여섯 장의 날개, 인간형 상체에, 하반신과 머리는 표범. 란은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흉측하다는 건 아니었다. 정령들은 기묘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아, 안녕하세요.” 저절로 공손한 인사가 나왔다. 표범은 부드럽게 웃었다. 표범 얼굴로도 웃는 걸 알 수 있다는 걸 란은 처음 알았다. 표범이 가볍게 날개를 퍼덕이자 바람이 불며 안개가 밀려가더니, 일부 안개가 뭉쳐서 의자와 테이블을 만들었다. 테이블 위에 다시, 접시가 생기고 그 위에 둥글둥글한 안개 뭉치들이 놓였다. “앉으시게.” 란은 구름 의자를 바라보았다가 자리에 앉았다. 푹 꺼지지 않은 구름 의자는 푹신하고 탄력 있었다. 잠이 스르륵 올 것 같다. “구름과자도 좀 들고.” 란은 머뭇머뭇 안개 뭉치를 집어서 한입 물었다. 머랭과자 비슷한 맛인데, 동시에 시원하고 상쾌했다. 표범은 탁자 맞은편에 네 다리를 굽혀 앉았다. 그래도 워낙 덩치가 커서, 란을 내려다보는 정도였다. 이스타리프와 참격은 한쪽에 얌전히 서 있었다. ‘상급 정령? 아냐, 최상급 정령일지도 모르겠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표범을 힐끗힐끗 보았다. 여기 정령계는 철저한 계급제로 이루어져 있다. 태생부터 그렇게 태어나며, 한번 정해진 계급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그리고 정령왕. 이렇게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정령 세계였다. “그대는 이 세계에 대해서 얼마큼, 어떻게 썼지?” 표범의 질문에 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몽땅 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겪은 고생과 자신이 한 일도. 표범은 중간에 질문 한 번 없이, 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횡설수설하다, 표범의 침착한 태도 덕분에 점점 여유를 찾아 나중에는 꽤 자세한 사항까지 기억해 내어 얘기했다. “그랬군.” 표범은 그렇게 말하고 금색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말했다. “일단 첫 번째로 말해 둘 건, 이 세계는 네가 창작한 세계가 아니라는 거야.” 전제부터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었다. 란은 숨을 삼켰다. “뭐라고요? 하지만 내가 쓴 이야기랑 똑같다고요!” “이미 있던 세계를 네가 읽은 거지. 같은 세계를 읽는 자를 인간은 흔히 예언자라고 부른다지.” “…….” 란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야? 내가 이 세계를 만든 게 아니었어? 그냥 읽은 거라고? 잠깐, 그럼 유스타프가 남주가 아니야? 혼란에 빠진 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표범은 말을 이었다. “읽는 자들은 각자 읽는 방식도, 읽는 내용도, 읽는 때도 전부 차이가 나. 같은 세계를 읽어도 글로 기록해 두면 그게 예언서가 되지.” “그럼 여기는 원래 존재하는 세계라고요?” “그래.” “하지만, 제가 생각해 내서 이런저런 설정도 분명히 썼다고요!” “그래. 읽은 거지. 넌 읽은 걸 모른 것뿐이야. 상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 자들도 있지. 하지만 넌 그 후로 계속 이야기를 썼나?” “……아뇨…….”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지만 어릴 때는 다들 한 번쯤 그렇게 글 쓰고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이세계랑 연결돼서 그 세계를 읽은 거라고? ‘그, 그런가?’ 그때는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와 설정이 떠올라서 적기도 벅찼다. 내가 천재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럼 전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 부분은 나도 확실히 알 수가 없군. 하지만 읽은 바에 따르면 그 몸의 주인은 죽었다는 거지?” “네.” “그리고 원래의 자네도 죽은 거 아닌가?” 란이 헛숨을 삼키는데 정령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하나 맞춰 볼까? 그대의 본래 이름과 지금 그 몸의 이름은 같겠지.” 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이다. 그녀의 본디 이름 역시 란이었다. 그래서 이 몸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정령은 중얼거리듯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끌렸다. 흔하지는 않은 일이지만…… 사실 세계가 어떻게 구성이 되는지 우리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대가 우리 세계를 읽었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겠지. 더해서 그 몸 근처에는 ‘문’이 있었으니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죽어?’ 물론, 차 사고가 난 후, 눈을 떠 보니 책 속에 들어와 있다! 이 상황을 보면서 ‘난 죽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쪽에서 깨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스타프에게 죽여도 된다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했었던 것도 있었는데. 확실치 않으니 안이하게 미뤄 두고 있었던 사실에 확신을 얻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란이 넋을 잃고 앉아 있는데, 표범이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청염, 그래서 궁금증은 풀렸나?” “풀렸어요.” 이스타리프가 싱긋 웃었다. 그녀가 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읽는 자를 만나는 건 희귀한 일이지요. 만나서 즐거웠어요. 내 이름을 아는 이방인이여.” 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방이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잠깐만요!” 그쪽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의문만 풀면 다야? 푸른색 불꽃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가볍게 몸이 공중에 뜨는 듯하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 란은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깨워 줄 거면 좀 더 친절하게 깨워 주면 좋잖아.’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깜박였다. ‘어라?’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여기는 또 어디야? 잠깐, 또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 있거나 그런 건 아닌 거지?’ 란은 허둥지둥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상반신을 더듬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근처 화장대의 거울을 보니, 여전히 란이었다. ‘다행이다.’ 그런데 왜 내 방이 아니지? 찬찬히 살펴보니 눈에 익은 방이었다. ‘공작 부인의 방이잖아?’ 어머니의 방이었다. 어머니 취향의 사치스러운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으, 제길.’ 란은 침대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제대로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정령과의 이야기는 뒤로 미뤄 두고.’ 신기할 정도로 머릿속이 맑아서 휙휙 생각을 굴릴 수 있었다. ‘일단 내가 살아 있으니 유스타프가 아니네.’ 그럼 누군가가 반역이라도 일으킨 건가? ‘그런 거치고 나는 자유롭게 풀어 두고 있는데? 게다가 나무그늘이고?’ 공작 부인에게 주어지는 방의 별칭이 나무그늘이었다. “아가씨!” 그때 뒤에서 너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자신의 시녀 중 한 사람이었다. “깨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유스타프 도련님께 알려야겠어요. 얼마나 기다리셨다고요.” “잠깐 기다려.” 란이 호들갑 떠는 시녀를 저지하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건데?” “자세한 사항은 저도 잘 모릅니다. 도련님께서 설명해 주실 거예요.” “그럼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3일 정도 쓰러져 계셨습니다.” 시녀의 태도로 보아하니 역시 독을 탄 건 유스타프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적에게 잡혀 있는 상황도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설령 그런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씻을래.” 식은땀까지 나서 찜찜하다. “씻고 수프라도 먹고, 그다음 유스타프와 이야기하겠어.” 시녀는 눈을 깜박였다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란은 씻고 나오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진짜란 말이지, 이게 다 진짜.’ 분명히 진짜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짜 진짜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보다. ‘어라? 그러면 난 피폐물로 사람을 굴린 원작자가 아닌 거잖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잖아! 심지어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공작가에 막 광산도 알려 주고! 무임금인데 야근에 주말도 없이 일하고! 유스타프도 지켜 주고! ‘나 사실 정말 좋은 사람이네.’ 란은 자신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학원 생활부터 이세계에 떨어진 지금까지 계속 란을 지켜 주었던 성격이었다. 나 좀 대단한 듯?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히죽 웃었다. 머리카락에 향유를 바르고 수건으로 말려 주던 시녀가 힐끔 란을 바라보았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봐요?” “응.” 란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시녀를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였지?” “소다입니다.” 시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다, 그래 소다였구나. “그럼 아까 날 깨워 주러 왔었던 시녀는?” “그분은 카라 님이세요.” “그분?” “저보다 직급이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아아.”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감이 사라지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도 많아지고. “가주님은 머릿결이 너무 좋으세요. 저도 이런 머리카락 색이면 좋겠어요.” “난 소다의 머리카락 색도 좋은걸.” “너무 어둡죠.” 소다는 짙은 헤이즐넛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여기는 남부로 갈수록 머리카락이 밝고, 북부로 갈수록 어두우니까.’ 사람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걸 가지고 싶은 법이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빗질까지 끝내자 배가 매우 고파졌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한번 인식하니 뱃속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났다. ‘씻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까, 바로 음식이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거실로 나오니, 기다리고 있는 건 유스타프였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란이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은 무의식적으로 로브 앞을 다시 단단히 여미며 물었다. “유스?” “깨셨다고 들었습니다.” “응, 깼어. 무려 사흘 만에 깼다는 것도 들었고.” 유스타프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걱정했습니다.” “유스가 아닐 줄 알았어.” 한숨 쉬며 란이 말하자 유스타프가 “그거 감사하군요. 그렇게까지 멍청이는 아니라.” 하고 대답하고 드물게 다시 한번 말했다. “걱정했다는 건 진심입니다.”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고 묻고 싶지만 지금 너무 허기져서.” “안 그래도 듣고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힐끗 돌아보자 시종이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둥근 은제 뚜껑으로 덮여 있는 것만 봐도 저절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란의 시선을 의식해서일까. 시종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접시를 세팅하고 뚜껑을 열었다. 클램차우더와 콥샐러드였다. ‘맛있겠다!’ 숟갈을 얼른 집어 들고, 란은 힐끗 유스타프를 보았다. “유스는?” “전 괜찮습니다.” 그가 사양하자 란은 재빨리 수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혼자 먹으면 진짜 후루룩 마셔 버릴 텐데, 눈앞에 사람이 있으니 그래도 숟갈을 사용하게 된다. ‘맛있어. 진짜 맛있어.’ 농후하고 진한 맛에 간간이 씹히는 조갯살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수프를 반쯤 비우고서, 란은 콥샐러드로 손을 뻗었다. “누님.” 유스타프가 그녀를 불러 란은 “응?”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수면제가 들어간 음료를 드시고도 그게 넘어가십니까?” “유스가 가져온 거잖아? 그럼 괜찮은 거겠지. 적어도 네 성인식이 끝나고 가주가 될 때까지는 내가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지요.” “그지?” 싱긋 웃고 란은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찔렀다. 오랜만에 식사하는 그녀를 배려한 것인지 채소 위주로 가볍게 버무려져 있었다. 포크로 잘게 썰린 채소를 떠먹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고 란이 그제야 물었다. “먹으면서 들어도 될까?” “기꺼이요.”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란이 쓰러지자 시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허둥지둥 뒷문으로 향했다. 하인용 통로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로비가 몸을 드러냈다. “저, 정말로 빚은 탕감해 주시는 거지요?” 시녀의 물음에 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그리고 내가 라치아 공작이 되면, 이 일에 공을 세운 너 역시 잊지 않으마.” 그의 뒷말에도 시녀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비가 도박 빚을 잔뜩 지고 있었고, 그걸 어떻게 린드버그 남작이 알아서 차용증을 산 것이다. 그걸 빌미로 처음에는 작은 정보들을 요구하더니 점점 더 큰 것을 요구했고, 결국 란의 약에 수면제를 타라는 것까지 왔다. 그녀에게 약을 준 치료사는 직전에 타야 효과가 있다고 신신당부했다. 도무지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일만 끝내면 놓아주겠다는 말에 허락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너 말고도 할 사람은 많다.’ 하는 린드버그 남작의 말도 한몫했다. 시녀가 봐도 곳곳에 린드버그 남작의 끄나풀들이 있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또 약을 타고,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그럼 그게 자신이 되면 어떻단 말인가? 시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인용 통로로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해 벗어나다가 누군가와 마주쳤다. 절대로 이 통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도, 도련―” “쉿.”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그가 속삭였다. 유스타프의 파란 눈이, 불빛이 적은 하인용 통로 안에서도 새파랗게 빛났다. 시녀는 너무 놀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얌전히 있으면, 그나마 살길이 있을 거야.” 유스타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녀는 그가 미소 짓는 건 처음 보았고, 그런 불길한 웃음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야, 유스타프의 뒤에 있는 블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좋아. 도망칠 수 있다면.” 웃음을 지운 뒤 말한 유스타프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 걷기 시작했다. 발발 떨던 시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감히 도망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눈을 본 순간, 오금이 저려 왔다. 시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트렸다. 로비는 끙끙거리며 란을 침대까지 옮겼다. 이렇게 움직여도 깨지 않으니, 정말로 독한 약인가 보다. 그는 약간의 떨림과 죄책감, 그리고 즐거움을 느끼며 란의 잠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억도 하지 못할 테니, 처녀 혈을 받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로비는 꺽 하는 소리를 냈다. 목에 칼날이 대어져 있었다. 칼날이 그의 목을 누르고 있었기에, 따끔하며 피가 배어났다. 그 상태에서 목을 돌리면 크게 베일 게 틀림없어서 로비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누, 누구냐.” “누구겠습니까. 형― 아니, 개자식아.”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로비는 그제야 칼을 댄 상대가 그라는 걸 깨달았다. “유, 유스타프냐, 뭐,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오해요? 무슨 오해 말입니까? 제 누님을 약으로 재우고, 옷을 벗기는 것에 무슨 오해가 있을까요?” 블레인은 로비가 저렇게 혓바닥을 놀리는 건 순전히 그가 도련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스타프가 블레인에게 따로 란 주변에 감시를 늘리라고 이야기한 것은 조금 된 일이었다. 게다가 유스타프가 지명한 시녀나 시종의 뒤를 캐면, 꼭 린드버그 남작과 연결점이 나왔다.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표정이나 태도. 그걸 보면 안 좋은 걸 숨긴다는 것 정도는 알지.’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했을 때, 블레인조차도 등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상사라니. 그런 마음을 눈치챈 듯 유스타프는 “집중하지 않으면 힘들지만.” 하고 덧붙였다. 그런데 요즘 끄나풀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활발해져서, 블레인은 슬그머니 팔을 걷어붙였다. 그래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니 기가 찼다. 아니, 분노와 구역질이 함께 일어났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태연히 “숙부님이 생각할 법한 일이지.” 하고 말해 블레인은 기분이 이상했다. 란은 가주로 썩 훌륭하게 행동했고, 곁에서 지켜보았던 가신들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란의 존재는 상당히 커져 있었다. 그런데 유스타프가 너무 태연하자 ‘정말로 란 님을 나쁘게 생각하고 계신 건가. 이 일이 일어나게 놔두실 건가.’ 하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었다.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뼛속 깊이 깨달았지만.’ 블레인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눈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주군으로 섬기는 분의, 보면 안 되는 부분을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길까?’ 유스타프는 뭔가 지껄이고 있는 로비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슥 검을 당겨 버릴까. ‘아, 란에게 피가 튀겠지.’ 침구와 침대에도. 란을 미끼로 쓰는 것에 저항감은 없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란을 이용해서 제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도 불쾌했다. 유스타프에게 라치아는 철저하게 자신의 것이었다. 계모가 어떻게든 그에게서 빼앗으려고 그렇게 발버둥 치던 자리. 그래서 유스타프는 라치아를 놓지 않았다. 꽉 움켜쥐고 절대로 내놓지 않았다. 라치아에 속한 것이라면 전부, 실 한 오라기조차 내 것이다. 그런데 내 라치아에, 내 것에, 손을 댈 생각을 해? “감히.” 입술 사이로 마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산한 목소리에 로비는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자, 잠깐만. 검을 떼고 이야기하자, 응? 이 자세로 계속 있는 것도 그렇잖아?” “그렇군요.” 산뜻하게 유스타프가 대답하며 검을 뗐다. 로비가 허둥지둥 침대 위에서 내려오는데 유스타프가 그의 정강이를 검집으로 후려쳤다. “악―!” 비명을 지르며 그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유스타프가 그의 등을 있는 힘껏 밟자 ‘컥’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해 볼까요?” 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수저에서 스프가 주르륵 흘러 다시 접시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유스타프를 바라보다가 란이 입을 열었다. “로비가? 날 덮치려고 했다고? 숙부까지 공모해서?” “네.” “허, 아냐. 그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법해. 네가 가주가 됐으면 자기 딸을 붙여 줬을걸.” 실제 그렇게 하기도 했었고. “그렇겠죠.”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누님의 방을 옮겼습니다.” “아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지. 거기에 계속 있어도 찜찜했을 거야. 그래서? 그 다음은?” “누님이 쓰러지시고 사흘간 추궁하니 꽤 많은 이름과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로비가?” “로비와 잡힌 공모자들이요. 파렴치한 짓이라는 걸 알았는지, 기쁘게 협력해 주더군요.” “그, 그랬어?” 기쁘게 협력했을 리가 있나……? 어쩐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네.” 유스타프가 자신을 의심하느냐는 얼굴로 란을 봐서, 란은 “네가 그렇다면.”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린드버그 남작이 정말로 의뢰한 건가?” “네, 린드버그 남작도 이미 신병을 구속해 두었습니다.” “빠르네.” “이런 일은 빠르게 처리하는 게 상책이지요.” “하긴 그렇지. 본인은 뭐래?” “억울하다는 말뿐입니다.” “아이참, 숙부님도.” 란이 히죽 웃었다. “너무 진부한 말씀을 하시는 거 아니실까?” “상상력이 있으신 분은 아니니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램차우더를 마지막 한 스푼까지 먹고, 란은 머리를 굴렸다. ‘지금 해치워 버릴까?’ 린드버그 남작은 앞으로도 사사건건 불리하게 나올 거다. 신병 구속까지 했으니, 아무래도 앞으로 관계가 회복되기는 어렵지. ‘유스타프가 죽이는 건 안 돼.’ 정말로 친혈육이니까. 혈육 살해자라는 오명을 쓰는 건 좀 그렇지. 자신이야 그와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까. ‘결재하려면 지금이야!’인가. ‘하지만 사형까지 가는 건 무겁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어쩐다.’ “일단 작위는 박탈해야겠지. 재산도 몰수하고, 영지 바깥으로 추방하는 정도면 어때?” 뭐, 처가살이 정도 하게 되려나. “괜찮겠지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여, 란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말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네.” 대답하는 유스타프를 란은 빤히 바라보았다. 남주가 아닌 유스타프. 유스타프 역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기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내 희생자가 아닌, 유스타프. 정말로 한 사람인 유스타프. 그건 란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에 란이 물었다. “유스타프.” “네.” “알고 있었지?” “뭘 말입니까?” “숙부님이 움직일 거라는 거.” “누님이 너무 빠르게 움직인다고 생각을 했지요.” “빨랐나?” 란이 눈을 살짝 찡그리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빨랐습니다. 따라가는 자들이 벅찰 정도로, 누님을 믿는 사람조차 두려워질 정도의 속도로 질주하셨죠.” “그랬어?” “네.” “아니, 그보다 날 믿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구나.” 감탄하고 란이 입을 비죽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미리 알려 줬으면 좋았잖아? 숙부님 일도 그렇고.” 난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고. 가주인데……! “그쪽도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으니까요. 궁지에 몰릴 만큼 몰렸다는 거겠죠.” “그런가.” 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일부러 일이 일어나게 방치했지?” “네.” 그의 대답은 매끄러웠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느릿하게 말했다. “현장에서 잡는 게 가장 쉬우니까. 일이 일어나자마자 전부 쳐 버린다.” 어지간히 대담한 실행력이 없으면 하지 못할 작전이지만, 그만큼 성과는 좋을 터였다. 헛생각하는 놈들을 일소할 수 있겠지. 그래도. 혹시 유스타프가 좀 늦었다면―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 란은 팔을 가볍게 문지르고 말했다. “구해 줘서 고마워. 유스타프가 아니면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물론 미리 말해 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정보를 차단당하고 미끼로 쓰이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물론 숙부가 그렇게 나올 거라고 예측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누님이 알게 되면,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범위로 상대가 움직일까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유스타프는 담백하게 말했다. “절 믿으시니 호위를 맡기신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행정적인 일이 아닌, 블레인 경이나 경비와 관련된 일은 유스타프에게 모조리 맡겨 두고 있었다. 란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인 듯했다. “음, 그리고 유스. 이런 상황에 이런 말을 하니 좀 이상하기는 한데.” “말씀하십시오.” “나 전에 했던 말 취소해도 될까?” “뭘 말씀이십니까?” “나 죽이지 말아 줘, 하는 말 있잖아?” 그 이야기를 꺼내자 유스타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 안 죽을 거야.” 유스타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은 푸우― 하고 입술 사이로 바람을 떨리게 밀어내고 웃었다. “깜짝 선언이었는데?” “죽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죠.” “응, 그때 원하면 죽어 주겠다고 했는데, 그거 취소야. 미안. 원해도 못 죽어 줘. 더해서― 아마 반격도 하지 않을까?” 나 이제 너에게 채무감이 없거든. 그래서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란의 말이 끝나자 유스타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선연한 미소였다. 란은 가볍게 숨을 삼켰다. ‘맙소사.’ 흑발청안 미소년 만세. 그냥, 그냥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건 반가운 소식이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했다. 한참 멍하게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려 란은 시선을 내렸다. 너무 바라보고 있었다. “반가운 소식인 거야?” 민망함을 없애려 되물으니, “네.” 하는 경쾌한 대답이 돌아온다. “저는 싫었거든요.” 극히 드물게도, 유스타프는 제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싫었어?” “네, 정말로. 치가 떨리게 싫었습니다. 그러니 취소하신다는 말이 기쁘지요. 반격해 주신다는 말은 더더욱 즐겁습니다.” “어째서?” ‘고난을 즐기는 성격인 건가?’ 하고 슬그머니 그를 보니 유스타프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답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까요.” “걱정?” “네. 여러모로. 게다가―”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전 쉽게 죽는 사람은 싫습니다.” “음, 확실히…….”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튼튼한 사람이 좋겠지. 그건 그럴지도. “그래서 계획이 바뀌셨습니까?”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이 “계획?” 하고 되물으니 그가 말했다. “절 가주로 세운다는 계획 말입니다.” “아니, 그건 완전 유지 중인데?” 틀린 문법으로 강조까지 해 가며 란이 덧붙였다. “2년 후, 네가 열아홉이 되면 가주 자리는 너의 것. 거기서 계획이 달라지지 않았어.” “그런가요?” “그래.” 란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미쳤다고 이 일을 계속하겠니? 힘든 일은 부디 네가 가져가 줘.’ 하는 게 솔직한 그녀의 마음이었다. 유스타프가 물었다. “그럼 누님은요?” “응?” “제가 가주가 되고 나면요?” “글쎄,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갸웃했다가 맞아, 하고 란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동맹을 맺자.” “제가 가주가 될 때까지 말이군요.” “응, 네가 가주가 되고 나서 나 죽이거나 그런 거 없기야?” 어투는 가벼운데 내용은 심각하다.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에 잠겨 란을 바라보았다. ‘보통 그런 일을 겪고도 납죽납죽 음식을 받아먹나.’ 그 행동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질 거다. 어떤 사람은 멍청하다고 하겠고, 어떤 사람은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담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 자신에게는? 그의 침묵이 길어졌지만, 란은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걱정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유스타프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그는 의심하는 성격이었고, 교활한 성격이었다. 그게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는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알았다. 유스타프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누님은 절 배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란이 그 말에 눈을 찌푸렸다. “안 할 거야.” “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의 눈이 샐쭉해졌지만 유스타프는 스스로 말하고도 새삼 놀랐다. 배신당한다는 건 믿었다는 말이다. 신뢰. 유스타프는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인간을 처음 본 새끼 사슴이 호기심에 차서 다가와 제 손안의 소금을 핥아 먹는 걸 본다면, 아무리 사냥꾼이라 해도 그 목을 찌르지는 못할 거다. 유스타프가 보기에는 란이 하고 있는 짓이 그것과 똑같았다. 제 목을 내밀고서 “날 믿어” 하고 말하는 것. ‘의심스러운 일은 잔뜩 일으키고 있으면서.’ 하긴, 자신도 그녀에게 정직한 것은 아니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맺지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럼 세부 사항을 정해도 될까? 나 용돈도 필요하고.”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눈썹을 가볍게 치켜 올리며 말했다. “돈은 내탕금(가주의 개인 재산)에서 얼마든지 꺼내 쓰십시오.” “마이너스 내탕금.” 란이 중얼거려 유스타프는 “그건 그렇지만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돈이 들어온다면 원하시는 만큼 가져다 쓰셔도 됩니다.” “아냐, 라치아 가주에게 주는 게 아니라 란에게 주는 거, 나 개인에게 주는 용돈이 필요해.”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다시 떠졌다. “좋습니다.” “좋아, 그럼 동맹 설립이네.” “성립이군요. 그러면 제가 가주가 되고 나면 뭘 하실 겁니까?” “글쎄?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본 적 없네…….” 으음, 계속 라치아 공녀로 남아 있으면 역시 결혼인가? 보통 이런 패턴이면 서브 남주랑 내가 연결되거나 그런 거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 서브 남주는 내 취향이 아닌걸. 란이 갸웃거리는데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가와 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스타프의 손가락이 가볍게 그녀의 눈 밑을 스쳤다. “다 사라졌네요.” “뭐가?” “피로의 흔적이요.” 그 말에 란은 웃었다. “그야 3일 내내 잤으니까.” 아아, 그래서 머릿속이 맑았던 건가. 하긴 요즘 엄청나게 업무에 시달리기는 했어.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럼 저녁에 이야기를 좀 더 해도 될까요? 처분과 동맹에 대해서요.” “좋아.”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의 손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그녀의 로브 깃을 가볍게 당겨 더 여며주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깍듯이 인사하고 유스타프는 방을 나섰다. 란은 샐러드를 한입 더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유스타프는 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이용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 싫어하는 사람에게 밥을 챙겨 줄 리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란은 마저 샐러드를 해치웠다. ✥✥✥ 일은 생각보다 골치 아프게 돌아갔다. 숙부는 란을 강간하려고 한 일은 로비 혼자 생각해낸 일이며, 그가 그녀를 너무 사랑했기에 그랬다고 주장했다. “사랑하면 강간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란이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젊은 날의 열정이라고 하던데요.” 하고 차갑게 대꾸했다. 젊은 날의 열정이라니. 사랑하니까 뭐든 해도 용납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 작태에 란은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짜증이 났다. 게다가 강간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냥 잠든 모습을 지켜보려고 했을 뿐, 이라고 숙부는 아들을 옹호했다. 아름다운 사촌 누이를 흠모해서, 가주가 된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서 대담한 계획을 감행한 사내. 린드버그 남작은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옹호했다. “흠.” 란은 유스타프에게 물었다. “유스는 어떻게 생각해?” “이대로 놓아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란은 히죽 웃었다. “내가 좀 독한 여자가 되면 되겠지.”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응? 왜?” 확실히 린드버그 남작가를 끝장내 놔야 한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인데? “원래라면 그를 사형시킬 생각이었지만, 하지 않고 추방령을 내리는 것으로 하죠. 그리고 린드버그 남작가는 승계 작위를 빼앗는 것으로요.” “단승 작위(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는 작위)로?” “네.” “사실은 작위를 회수하고 전원을 쫓아내려고 했잖아? 그게 더 나은 거 아냐? 좀 강하게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영지민 사이에서 가주의 평판이 안 좋아질 겁니다. 게다가 그렇게 할 만한 가치도 없고요.” 란은 “그래?”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숙부의 세력을 이 기회에 뿌리 뽑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본인까지 말려들게 하는 것은 무리한 작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택 내에 있던 숙부의 끄나풀들은 전부 잡아냈으니까.’ 이 정도면 선방한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로비는 무기(無期)로 감옥에 가두는 게 낫지 않을까?” “아뇨.” 유스타프가 선명하게 대답했다. 그가 푸른 눈을 들어 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추방하세요.” 그게 더 안 좋은 벌인가. 하긴 호사스러운 감옥에서 호의호식한다든가 그럴 수도 있겠다. 란의 약점이 이거였다. 그녀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고, 특히 관습이나 사법 제도에는 약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대신 숙부의 하늘 저택 출입도 금지시키겠어.” 유스타프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게 좋겠지요.” “그럼 그렇게 하자.” 란은 그렇게 말하고 인장을 꽝 찍은 후 서류를 넘겼다. 영지 내 재판은 영주의 주요한 일 중 하나였다. 물론 라치아 공작령은 넓기 때문에 재판부를 따로 두고 있기는 했지만 이건 혈족간의 문제라 그녀 스스로가 재판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중에 린드버그 남작이 탄원서를 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무시할 작정이었다. 이걸로 린드버그 남작 편에 서는 게 가주의 적이 되는 일이란 걸 보여 줬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라면, 라치아 공작가를 버리고 린드버그 남작가를 선택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잘린 사람을 뽑는 게 문제이기는 한데. 어차피 재정 감축할 때 사람도 줄이려고 했으니, 굳이 당장 새로 뽑을 필요는 없겠지.” 사람을 검증하는 데에도 사람이 필요하니까. 란이 휙휙 서류를 넘겼다. 유스타프가 자신의 서류를 펼쳐 보며 말했다. “마법 세공사를 수배하는 일도 진행 중입니다. 길드에 연통을 넣었는데 두 명 정도 자원자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얼른 와 줬으면 좋겠네. 레버리 쪽도 착착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고.” “채무자들이 수상한 눈치를 채지는 않은 것 같습니까?” “응, 아직은? 하지만 사람을 써서 채굴을 하는 이상 소문이 나겠지. 일단은 광부들에게 수정 광산을 발견했다고 해 뒀지만.” “수정과 다른 점을 금방 발견하게 되겠죠.” “응,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5, 6개월 정도만 숨기면 금방이야. 아, 그래서 말인데 어머니의 장신구 중 몇 개를 골든로즈 상단에 팔까 해.” “장신구를요?” “응, 그래서 마련한 돈입니다. 하고 일단 가신들에게 빌린 돈부터 갚으려고. 낯부끄러워서 원.”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다 쓴 모양인데 가장 만만한 건 역시 가신에게 꾸는 것인지 세 가문에 골고루 돈을 빌렸다. 그들에게 빌린 돈만 대략 5만 베라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토지를 저당 잡혀서 근처의 살몬 후작에게 빌린 것이 30만 베라트, 시밀 백작에게 빌린 것이 20만 베라트……. 돈 단위가 크다 보니 이자도 어마어마해서 매년 이자 갚기에도 허덕허덕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거래하고 있던 상단을 통해 고리대금으로 빌린 돈이 15만 베라트 정도. ‘설마 라치아 공작이 돈을 떼어먹겠냐 했겠지.’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라면 숙부가 섭정하며 라치아 토지를 해체하듯이 조각조각 팔아버린다. 남은 것은 작위와 하늘 저택뿐인 지독하게 가난한 공작가. 이쯤 되면 공작가라고 칭하기도 민망할 수준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전염병이 크리티컬 히트를 때려 숙부가 죽고, 백성 대다수와 가신들이 죽어 버리고 어마어마한 빚만 남은. 그런 공작가를 유스타프가 잇게 된다. 이제 얼마나 고생길이 열릴지 보이시는지? ‘나라면 라치아를 그냥 포기했을 거야. 알게 뭐야, 정말.’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도 유스타프는 라치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냥 남주니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유스타프에게 라치아는 정말로 소중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시나가 오지.’ 차원 이동자인 여주가 날아오고, 가난한 영지에서 구르고 굴러 조금 행복해지는 그 순간! 또 다른 시련이!! 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스.” “네.” “유스만 아니었으면 난 진즉에 패물 들고 공작가에서 튀었을 거야.” 이게 자신이 쓴 책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가 그 책을 쓰면서 느꼈던 인물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뭔가 말하려는데 로스가 끼어들었다. “그거 주군이 계셔서 정말로 다행이군요.” 달칵,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찻물이 살짝 넘쳐서 유리잔 가장자리로 흘렀다. 로스는 몸을 돌려 이번에는 정중하게 잔을 유스타프 앞에 내려놓았다. 얄미워라. 그를 노려보면서도 란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래도 유스타프에게 저렇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때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 잔과 란의 잔을 바꾸었다. 로스의 얼굴이 벌게졌다. 유스타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끝이 더러워지십니다.” “어? 난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란은 로스를 향해 히죽 웃어 주고 얼른 잔을 들었다. “고마워, 유스.” “별말씀을.”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로스가 다가와 자신의 손수건으로 유스타프의 잔 표면을 닦았다. 그러니까 누가 넘치게 잔을 내려 놓으랬나. ‘그나저나 유스도 대단해.’ 말로 ‘그러지 마라.’라고 하는 것보다 한 번 행동으로 뚜렷하게 보여 준 거다. 로스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저런 행동을 하지 않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냉차를 홀짝이며 서류를 넘겼다. “누님, 아까 장신구 이야기 말입니다만.” “어, 응.” 란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유품을 처분해도 괜찮은 겁니까?” “응, 하지만 다시 팔아 봐야 큰돈은 안 될 테니까, 몇몇 손해 보지 않을 것들만 팔 거야. 그래도 소문은 충분히 나겠지.” 란이 씩 웃으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미래의 공작 부인을 위해서 남겨 놓을게.” 시나를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예쁜 사람일 테지. 이번에는 고생시키지 않으리라. 아니, 미래를 읽은 거면 ‘이번에는’은 아닌 건가? ‘하지만 나에게는 원작이랑 다름없는 감각이라.’ 이렇게 말해도 상관없겠지. 하고 란은 결론을 내렸다. “미래의 공작 부인이요.” 유스타프가 되묻듯 말해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늘에서 뚝 떨어질지도 모르잖아?” 농담처럼 진담을 이야기하며 란은 다시 웃었다. 나중에 시나가 와서 사랑에 빠지면 이 이야기 꼭 다시 써먹어야지. ‘내가 그때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고 했지?’ 하고. 하지만 어째 유스타프는 떨떠름한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란은 당황했다. ‘어라? 설마 생긴 건가? 여성 혐오증.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도 내가 열심히 막았는데?’ 계모와 가정교사 때문에 생기는 트라우마 중 하나가 바로 여성 혐오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심하지 않았었는데…….’ 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음, 가벼운 증상일지도 모르지. 크면 나아지지 않을까?’ 일단 열심히 관찰하기로 하자. 란은 그렇게 결심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흡한 점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죽었다가 살아난 란을 애지중지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란이 혼란스러워한 탓에 더욱 그랬다. 정말로 친딸을 잃어버린 그녀가 불쌍해서도, 란은 최대한 어머니의 말을 따라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유스타프에게 호의를 어필할 수가 없었다. 란이 한 최대의 공적은 유스타프를 아카데미로 보낸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유스타프의 가신들에게는 미운털이 박혔지만. 아마 멀리 쫓아낸 걸로 보였겠지. ‘하지만 그게 내 최선이었다고요?’ 적어도 어머니가 유스타프의 식사에 독을 섞고, 수시로 벌을 주고, 매질하고, 모욕을 주는 일은 막은 거니까. ‘무섭다. 무서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처분할 보석 종류를 몇 개 떠올렸다. 아, 맞다. 그리고― 일루미니티 백작 영애를 고칠 의사도 레버리에게 부탁했는데, 한번 물어봐야지. 겸사겸사해서 란은 레버리에게 마법 통신구로 연락을 취했다. 마법 통신구라고 해도 거리가 멀면 통하지 않는데, 다행히도 레버리는 아직 라치아령 안에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얼음수정 운반 작업 때문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다행이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버리 씨.” “오랜만입니다, 가주님.” 레버리의 목소리가 약간 지쳐 있는 듯 느껴져 란이 물었다.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한창 바쁠 때죠. 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이렇게 일하겠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시간이 금인 사람다웠다. 란이 장신구를 팔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부탁했던 치료사 이야기도 꺼냈다. “장신구는 제가 따로 사람을 보내죠. 그리고 말씀하신 치료사 말인데요.” 레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요. 엘프 치료사는 돈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란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그럼 제가 물건을 하나 보내죠. 그걸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합시다.” “어머?” 레버리의 목소리에 즐거운 호기심이 가득 찼다. “무슨 물건일까요?” “그건 편지와 함께 보낼게요.” “그럼 제가 연락해서 내일 당장 인편을 보내죠. 그쪽을 통해서 보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뭐 또 필요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후후, 12월이 기다려지네요.” 12월은 사교 시즌이 시작되는 때다. 레버리의 말에 란 역시 웃었다. “저도 기다려지네요.” ✥✥✥ 시간이 훌쩍 흘렀다. 레버리가 보낸 사람은 어머니의 목걸이 세트를 몇 개 감정해 후하게 돈을 쳐주었다. 그리고 그가 란이 전해 주는 작은 납 상자를 소중하게 안고 돌아간 지도 벌써 한 달째였다. 란은 일단 와일드 남작과 란스 남작에게 돈을 갚았다. 두 남작은 벌써 갚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안도하는 듯 보였다. ‘그만큼이나 빌렸으니.’ 두 남작가에도 부담이었을 거다. 블레인 경은 불편한 얼굴로 “보석을 파셨다고요.” 하고 물었지만 란은 웃음으로 넘겼다. 하지만 저택에서 소문은 빠르게 도는 법. 가주인 란이 전 공작 부인의 보석을 전부 처분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공작가 재정 상태에 대한 속삭임이 고용인들 사이에 퍼졌다. “이런 소문이 생길 줄이야.” 란이 중얼거려서 유스타프가 갸웃했다. “소문이 퍼질 거라고 하셨으면서요?” “아니, 공작가가 보석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하는 소문이 생길 줄 알았지. 공작가가 파산 위기래, 이런 소문이 생길 줄이야?” 란은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현대인인 자신과 이곳 사람들의 사고방식 구조가 좀 다르다. 자신이야 빚이 있으니 보석을 팔아서 빚을 갚는다, 이게 당연한 일인데 여기서는 그게 어마어마하게 수치스러운 일인가 보다. “어쩌지?” “잘됐죠.” 유스타프의 대답에 란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았고 유스타프 역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진짜로 못 맞춰?’ 하는 얼굴로. 이거 못 맞추면 누나의 위엄이……. “아!” 란이 곧 깨달아 짧게 소리를 냈다. “그렇구나. 사람을 골라낼 수 있겠네.” “그렇습니다.” “그럼 잘된 거네?” “어차피 얼음수정이 공개되면 소문은 사라질 테니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지 않은 덤까지 생겼네?’ 이걸로 고용인을 확연히 둘로 가를 수 있다. 돈을 보고 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물론 돈을 보고 섬기는 사람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돈을 보고 섬긴다면, 이쪽 역시 고용인 그 이상의 취급은 하지 않을 뿐.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지. ‘하긴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게 가장 어렵다니까.’ 란은 본의 아니게 생긴 기회까지 탈탈 털어서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귀찮으니까 은근슬쩍 유스에게 맡기자.’ 그러는 사이 마법 세공사 두 명도 저택에 도착했다. 한 사람은 나이가 마흔 중반쯤 되는 여성이었고, 한 명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마법 세공사치고는 드문 조합이라 란은 호기심이 생겼다. “청염을 떨치시길. 미천한 마법 세공사인 리디아라고 합니다.” “프란체입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세공사는 라치아 인사말을 건넸다. 멀리서 온 사람에게 그런 인사 안 받는다 하기도 그래서 란은 인사를 받았다. “불꽃의 가호가 있길. 이런 걸 물으면 실례겠지만, 혹시 두 사람의 관계가……?” “모자간은 아닙니다.” 많이 들었던 질문인 듯 리디아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흰머리가 섞여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은 그녀는 세공사라기보단, 문학사처럼 보였다. “라치아에 온 걸 환영해요. 오느라 고생이 많았지요.” “아닙니다.”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하녀가 안내해 줄 겁니다. 거기에 짐을 풀면 됩니다. 필요한 건 뭐든 요청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작업은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리디아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란이 힐끗 프란체를 보았다. 이제 열셋이나 되었을까? 어린 소년 역시 얼굴을 붉히며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란이 눈짓하자 옆에 공손히 서 있던 시녀장(house keeper : 여성 고용인 전체를 통솔하는 여성 고용인의 정점)이 재빠르게 쟁반 위의 천을 걷어 내밀었다. “뭔지 아시겠나요?” 란의 말에 리디아가 신중한 얼굴로 쟁반 위의 마력석을 집어 들었다가 숨을 삼켰다. “이건, 이게, 이게 설마?” 리디아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법 세공사가 된 지도 어언 20년이 훌쩍 흘렀지만, 그 세월 속에서 이런 마력석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더듬거리는 리디아에게 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걸로 마법 세공을 해주길 바랍니다.” 리디아의 손끝이 떨렸다. “이런 귀한 것을 저에게 맡겨 주시는 겁니까?” 란이 그 말에 피식 웃고 말했다. “더는 귀하지 않아요.” “예?” “그 마력석이 잔뜩 있거든요.” 리디아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런 순도 높은 마력석이 잔뜩 있다고? 자신이 이걸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나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그래서 돈이 있다, 하는 사람이 계속 우리 마력석을 사용할 수 있게. 곳곳에 우리 마력석이 퍼지도록. 그게 제 목표예요. 이름도 마력석이 아니라 얼음수정이라고 지었답니다.” “그렇군요.” 간신히 목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란이 히죽 웃고 말했다. “길드에서 당신을 보낸 건, 여기가 라치아이기 때문이겠죠?” 란의 말에 리디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법사는 라치아 반경 10km로 접근하면 안 된다. 그게 마법사의 규정이다. 마법 세공사는 그 규정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그래도 마법 세공사들은 라치아에 접근하고 싶지 않아 했다. 자신들이 마법사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여자인 자신과 어린 프란체를 보낸 것이었다. 란이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도 여자죠. 그러니 여자끼리 돕고 지내야 하지 않겠어요? 부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줘요, 리디아. 그리고 공작가의 전속 세공사가 되어 줘요.” “반드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리디아 역시 저절로 목소리를 낮췄다. “말씀하세요.” “제가 먼저 주문하고 싶은 물건이 있어요.” “뭡니까?” “전기장― 아니, 이불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 도구요.” 그녀의 말에 리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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