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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임시 가주


Chapter 1. 임시 가주 뎅― 뎅― 검은 숲 너머, 멀리서 장례식의 마지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까만 상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개를 깊게 숙여 묵념했다. 천천히 관이 구덩이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덤은 모두 세 개였다. 란은 그 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막지 못했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왜냐면 그녀가 이 이야기를 썼으니까. 원작자니까. 그러니까 알고 있었는데도 막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남동생을 바라보았다.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동생. 그가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검푸른 아카데미 제복을 갖춰 입은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마른 눈을 들어 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빙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직시했다. 란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가 아차 싶어 그를 다시 보았지만, 이미 그는 시선을 돌린 후였다. 마지막 묵념이 끝나자 관 위로 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남동생 타스. 란은 검은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쥐었다. “란.” 란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숙부님.” 란은 경계심을 숨기려고 애쓰며 상대를 보았다. 드리워진 검은색 베일이 그나마 표정을 가려 주었다. 숙부인 린드버그 남작은 야심만만한 사내였다. 얼마나 야심만만하냐면, 공작가를 삼키고 싶어 할 정도의 야심가였다. “마음이 많이 상하겠지만 말이다. 너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구나.” “말씀하세요.” “란, 나는 널 친조카처럼 여기지만, 공작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 피도 섞이지 않은 네가 공작가에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야.” 린드버그 남작은 주변을 둘러보고 작게 속살거렸다. “하지만 난 너에게 공작가의 성을 준 형님의 의지를 따르고 싶다. 네가 차기 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란이 당혹스러워하며 말끝을 흐리자 린드버그 남작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넌 길바닥에 쫓겨나게 될 거다.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뺏기고 말이야. 네 드레스나 모자는 물론, 너 자신부터가 하루 먹을 빵도 없어서 길바닥을 구르게 되겠지.” 이제 갓 성인식을 끝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을 협박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린드버그 남작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란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 숙부를 믿으렴. 응?” “알겠습니다.” 흘러나온 란의 대답에 린드버그 남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잘 생각했다.” “숙부님, 잠시 다른 손님을 뵈어도 될까요?” 란의 말에 린드버그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그가 붙잡았던 어깨를 문지르고 싶은 생각을 떨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힐끗 남동생인 유스타프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그 역시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란은 당장 유스타프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꽉꽉 눌러 참았다. 대신 그녀는 흙이 떨어지는 무덤 가까이 다가갔다. “아가씨.” 흙을 덮던 사내 한 명이 난색을 보이자 란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그녀의 말에 서로 힐끗 눈치를 보고 사내들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매끄러운 관 위로 흙이 빠르게 덮이기 시작한다. 란은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4년. 그녀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4년째였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에 란은 이십 대 중반의 대학원생이었다. 주말이었고, 자차 운전으로 본가에서 자취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쿵! 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모든 게 암전. 일어나 보니 엉뚱한 세계에 떨어져 있었다. 한 주나 걸려서 간신히 파악한 것은 자신이 쓴 글 속 인물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제목을 ‘영원한 사랑’으로 지었었나. 열다섯의 센스란…….’ 그나마 내용이 기억났던 건, 본가에서 컴퓨터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폴더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했었는데 열어서 파일을 보자마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스위치가 팟 들어온 것처럼 촤르륵 내용이 생각나 웃음을 삼키며 글을 읽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들어와도 하필.’ 그것도 남주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계모의 딸이라니. ‘하필 태어나도 이쪽이야? 게다가 원작 한참 전이잖아?’ 자신이 쓴 이야기의 여주인공은 차원 이동자다. 남주가 여주와 만났을 때 남주의 나이는 스무 살. 지금 남주인 유스타프는 열일곱 살. 원작 이야기가 시작하려면 아직 3년이나 남아 있다. 자신이 4년 전에 떨어졌으니까 7년. 무려 원작 시작 7년 전에 빙의된 것이었다. 그래서 내용을 파악하는 게 더 어려웠고. ‘원래라면 란은 죽었어야 했는데.’ 란 로미아 드 라치아. 계모가 재혼할 때 데려온 딸로, 라치아 공작가와는 피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다. 사실 원작자인 자신은 이름도 설정해 두지 않았다.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여기에 와서부터였다. 하지만 젊은 새 아내에게 푹 빠져 있던 공작은 기꺼이 란을 입적시켰고, 그래서 자신은 공작 영애가 되었다. 그러다 계모가 새로 남동생인 타스를 낳으면서 전 부인의 아들인 유스타프를 향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란 역시도 거기에 한몫했고 말이다. 그래도 그녀가 죽기까지는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실수로 나무에서 떨어진 유스타프에게 깔려서 죽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그러고 나서 계모는 반쯤 미친 사람이 되어, 더더욱 유스타프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한다. 거기에 그에게 붙인 가정교사 역시 혹독하게 유스타프를 다뤄서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들어왔지.’ 자신이 이 몸에 들어오면서, 란은 살아났다. 그리고 분노에 몸을 떠는 계모에게 간곡하게 부탁해서, 유스타프를 제국 아카데미로 보내게 되었다. 계모도 그를 멀리 떨어트려 놓는 안에 찬성하며 영리하다고 란을 칭찬했다. ‘사실 그 가정교사에게서 유스타프를 떨어트리고 싶었을 뿐이지만.’ 유스타프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고 몇몇 가신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제국 아카데미로 떠났다. ‘그래, 유스도 그 가정교사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 란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나쁘지 않게 잘 처신해 왔다고 생각했다. ‘했는데…….’ 결국, 부모님과 타스가 마차 사고로 전원 사망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 수도에 있는 유스타프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제국 아카데미의 학술제가 열리는 중이었고, 란은 부모님을 졸랐다. 다 같이 유스타프를 보러 가자고. 그러고 정작 자신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열에 시달렸고, 긴 준비를 무를 수 없었던 부모님과 남동생만이 출발했다가 그만 산사태를 만나고 만 것이다. 전원 사망. ‘이게 아니었는데…….’ 분명히 자신이 쓴 글에서는 배 사고로 가족이 죽었다. 그러니까 배만 피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란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고작 4년이었지만, 긴 4년이었다.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억에 혼란이 있는 자신을 잘 대해 주었다. “누님.”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란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자신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이미 키가 자신과 비슷했다. “몸도 안 좋으신데, 이제 들어가시죠.” 걱정한다고 하기에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란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멀리 보이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공작령의 지역 대부분에서 산맥 초입에 있는 공작 저택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끝없이 높은 산맥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저택은 인간의 손이 만든 게 아니었다. 마법사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저택 뒤쪽에 서 있는 거대한 산맥. 그 산맥은 빙벽(氷壁)이라고 불렸고, 그게 라치아 공작가가 ‘빙벽의 라치아’라 불리는 이유였다. 저 거대한 산맥 안에는 아름다운 새하얀 문이 있다. 대현자 이브리아가 어둠을 밀어 넣고 봉인한 새하얀 문. 라치아 가문은 그 문의 수호자였다. 제국보다 더 오래된 가문. 대륙이 전란에 잠기고, 왕과 제후들이 바뀌어도 가문은 계속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토지가 척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란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라치아 공작령은 척박했다. 땅이야 넓다. 넓지만, 1년의 절반이 겨울이다.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고, 농작물이 자라는 땅은 적었다. 그러다 보니 공작가의 재정은 항상 빠듯했다. ‘지금은 파탄 직전이고.’ 어머니의 사치 때문이었다. ―녹음(綠陰)을 드리우시길. 라치아 가문의 안주인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인사였다. 녹음(綠陰)의 관(冠). 그렇게 불리는 티아라가 안주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절반인 공작령에서 녹색은 고귀한 색이다. 더군다나 녹음이 드리울 정도로 모든 것들이 충만해진다는 건 축복이다. 그래서 짙은 녹색의 최상급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백금의 관, 그것의 이름이 ‘녹음의 관’인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녹음이 축복이 되어 퍼지듯이, 안주인의 자비 역시 퍼지길. 녹음을 드리우시길. 이 인사는 그렇게 나온 인사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관을 싫어했다. 대신 루비나 사파이어로 만든 관을 새로 제작했다. 거기에 맞춰 사들인 목걸이며 반지, 드레스, 귀걸이, 팔찌, 허리띠 등등 모든 것이 흘러넘쳤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공작가 재정은 빠듯해.’ 긴 겨울에 대비도 해야 하는데 사치품을 사들이고 있으니. 빚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후계자인 유스타프는 아직 미성년이야.’ 란은 힐끗 자신의 옆에 걷고 있는 남동생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파란 눈동자. 극적인 대비로, 눈동자가 더 푸르게 보였다. 날카로운 인상만큼이나 그는 능력자였다. ‘그야 남주인걸.’ 하지만, 남주였으니 그에게는 시련이 많았다. ‘일단 계모와 가정교사의 괴롭힘도 그렇고.’ 이 이후의 일도 있다. 린드버그 남작.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가 미성년자인 걸 이용해서 숙부가 섭정 직위를 맡는다. 그리고 자신이 공작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공작가의 재산을 야금야금 린드버그 남작가의 재산으로 바꿔 놓는다. 남작가는 백작가가 되고, 결국에는 유스타프와 자신의 딸을 억지로 결혼시키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를 암살하려고 하는데, 충성스러운 가신의 도움으로 유스타프는 살아남는다. ‘그 가신은 죽지만.’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발 떨어져서 자신들을 쫓아오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와, 완전히 날 노려보고 있네.’ 눈길로 쏘아 죽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란을 쏘아 죽였을 거다. 로스 와일드. 원래대로라면 죽게 될 인물이다. ‘막아야 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에게 작게 말했다. “유스타프.” “네, 누님.” 란은 그가 그렇게 깍듯하게 누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비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님으로 불리는 건 싫지 않지만.’ 미묘한 이 기분. “나는 네 편이야.” 똑바로 내뱉은 말에 유스타프는 멈칫하지도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가 그러든 말든, 란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 마차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숙부님은 날 가주로 만들 작정인가 봐.” 그 말에 처음으로 유스타프의 걸음이 느려졌다. 란은 빙긋 웃고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난 가주가 될 거야.” “그리고요?” 이어진 그의 물음에 란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숙부님이 공작가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야. 그리고 네가 성년이 되면, 모든 걸 고스란히 너에게 돌려줄 거고.” 란은 그렇게 말했다. 마차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제 각자 마차를 탈 예정이었다. 둘이 한 마차에 타지 않는다는 것이, 둘 사이의 거리감을 보여 주었다. 살짝 무릎을 굽혀, 남동생에게 하기에는 정중한 인사를 하며 란이 낮게 속삭였다. “청염(靑炎)을 떨치시길.” 라치아의 가주에게 하는 인사다. 유스타프는 속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낮게 맞받아쳤다. “불꽃의 가호가 있길.” ✥✥✥ 유스타프는 관자놀이를 살짝 문질렀다. “그 여우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신의 기사가 묻는 말에 유스타프는 낮게 대꾸했다. “자신은 내 편이라고.” “쯧.” 로스는 통렬하게 혀를 찼다. “직접 그렇게 말했다고요?” “그래.” “여우도 못 되는군요.” “그런가.” “그렇지요.” 로스가 눈을 찡그리며 뭔가 더 말하려는데 유스타프는 생각에 잠겼다. 란 로미아 드 라치아. 물론 어렸을 때의 괴롭힘을 잊은 게 아니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그때를 기점으로 뭔가가 바뀌었다.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용돈을 보내기도 했다. 아카데미에 찾아오는 유일한 가족이기도 했다. ‘차기 가주인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지.’ 제 어미가 미모로 아버님을 홀렸듯이, 그녀도 그렇게 자신을 홀리려고 그러는 거라고. 반짝이고 보드라운 밀빛 머리카락에, 여름철 나무 같은 짙은 녹색 눈동자. 북쪽에서는 볼 수 없는, 익은 과일과 햇빛 냄새가 나는 듯한 외모는 확실히 진귀하다. 그는 목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가주의 상징인 청염이었다. 불꽃의 정령이 봉인된 이 반지는 가주가 아닌 사람이 끼면 그대로 사람을 불태워 버린다. 반지를 낀 사람은 정령의 힘을 빌릴 수 있고 말이다. 이게 가주에게 하는 인사가 ―청염을 떨치시길. 인 이유였다. “하지만 로스, 난 아직 미성년이야. 가주 직위를 잇기에는 나이가 부족해.” “지금은 비상시이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숙부가 섭정을 주장한다면.” 그 말에 로스가 얼굴을 구겼다. “그 너구리가 말입니까?” “침을 질질 흘리는 게 빤히 보이던데. 아까 란에게 접근한 것도 그런 이유겠지.” 란 본인도 그렇게 말했고. 뒷말을 삼키고 유스타프는 그녀를 다시 떠올렸다. ‘어떻게 할까.’ “선택지가 너무 적어.”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짓고 반지를 만지던 손을 놓았다. “란과 숙부를 이간하는 게 가장 낫겠어.” 그 말에 로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란은 자신의 차림을 점검했다. 새까만 상복이 그녀의 얼굴을 더 창백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란은 손으로 레이스 베일을 붙잡아 내렸다. 거미줄 같은 레이스가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이래야 표정이 잘 보이지 않을 테니까.’ 회의장 문 앞에 서서 란은 마지막으로 생각을 점검했다. 곧 회의가 시작될 것이고, 의제는 차기 가주직 문제가 될 터였다. ‘할 수 있어.’ 숙부의 섭정을 벗어던지고, 오롯이 우뚝 선 가주가 될 자신. 그 자신이 란은 있었다. ‘청염.’ 그녀는 청염을 낄 수 있었다. ‘물론 100% 확신은 아니지만.’ 이곳의 정령들은 이름을 가진다.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가진 것처럼, 정령 역시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은 숨겨져 있다. 그 이름을 알면 정령을 조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원작자다. 당연히 청염의 이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반지를 끼고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러면 자신을 태우지 않을 테지. 청염의 주인. 그것은 곧 라치아 가문의 가주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뭐, 나중에 혈통 문제로 걸고넘어질지도 모르지만, 그건 잠시 내가 맡아 두는 거라고 하면 되니까. 지금은 인정받는 게 가장 중요해!’ 아마 모두가 놀라 뒤집어질 거고, 그 틈을 노리면 어떻게든 될 거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가볍게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거대한 문은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란이 가볍게 인사하자 가신들이 몸을 일으켰다. 공작가를 가신으로 섬기는 가문은 셋이다. 와일드. 란스. 일루미니티. 세 가문의 가주들이 전부 와 있었다. 섬긴다고 해도, 예전처럼 영지전이 흔하지 않은 이 시대에는 그냥 형식만 남아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둘째와 셋째를 라치아 공작가 기사단이나 행정직에 잘 넣는다는 것 정도.’ 그리고 그 외 주요 직위에 있는 자들과 더불어 숙부인 린드버그 남작이 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역시도 공작가의 가신이어야겠지만, 숙부라는 위치를 구실로 충성 맹세를 슬쩍 피하고 있었다. “저희가 일찍 모인 거지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빼 주었다. 란은 검은 베일 아래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어 유스타프가 자리에 앉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크흠.” 하고 린드버그 남작이 헛기침을 해 시선을 모았다. “바로 의제로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여기에 모인 이유야 딱 한 가지 아닙니까?” 아직 유스타프나 란이 발언하지 않았는데도 가장 먼저 발언하며 회의를 끌어가려는 모습에 몇몇은 마음속으로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지요.” 린드버그 남작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형님 부부와 어린 조카가 떠난 것에 대해서는 저도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공작가는 아직 건재하지요. 조카가 둘이나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다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아직 미성년이니, 당연히 가주는 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란스 남작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란 님은 공작가의 성을 잇기는 했지만, 공작가의 혈통은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가주가 된단 말이오?” “어허! 란을 입적한 것은 전 가주님의 뜻이오!” 린드버그 남작은 전 가주의 권위를 들먹거렸다. 그 말에 란스 남작이 더 뭐라고 하려는데 란이 살짝 손을 들었다. 탁자 위가 조용해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느리게 말했다. “제가 가주가 되는 것에 대해 염려하시는 분이 많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아직 유스타프가 미성년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지요.” 란이 유스타프를 돌아보았다. 베일 때문에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서 저는 유스타프가 성년이 될 때까지, 딱 2년간만 임시 가주직을 맡고자 합니다.” 임시 가주. 새 단어에 가볍게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유스타프가 성년이 되는 대로, 전 그에게 가주직을 물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제 혈통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란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반지를 잠시 빌려주시겠어요?” 차가운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유스타프는 잠시 란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목걸이를 벗어서 란에게 건네주었다. 린드버그 남작은 가주의 상징을 탐욕에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청염. 저것을 낄 수 없으면 진정한 가주가 될 수 없다. 란은 반지를 목걸이에서 빼냈다. 푸른색 보석이 반짝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청염을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순간 푸른색 불꽃이 확 일어났다. “아니!” “저런!!” 몇몇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고,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스타프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스타리프! 잠잠해져라!’ 란은 마음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그녀를 삼킬 듯했던 불꽃은 스르륵 다시 반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침묵이 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란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모두가 볼 수 있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청염이 반짝인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았다. 유스타프의 푸른 눈 역시 크게 흔들렸다. 모두가 숨을 멈춘 듯했다. “말도 안 돼!”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것은 린드버그 남작이었다. “뭐가 말이 안 되나요, 숙부님.” 란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 반지는, 그 반지는, 혈통이 아니면 낄 수 없어. 가주가 아니면 낄 수 없단 말이다!” “맞습니다. 가주가 아니면 낄 수 없지요. 그러니 청염은 저를 임시 가주로 인정해 준 게 아닐까요. 차기 가주에게 무사히 직위를 넘길 사람으로요.” “그런…….” 린드버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란이 가주가 되어 봤자, 자신의 힘이 없으면 흔들리는 계집이다. 그러니 그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 자기 아들과 결혼을 시킬 수도 있다. 아니면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자신과 결혼하게 하면 된다. 하지만 저 반지의 주인이 된 이상, 란은 제 뜻대로 흔들리지 않아도 될 권위를 손에 넣은 것이다. ‘아냐, 아직 아니야.’ 린드버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봐야 어린 계집. 가주 직위에 눌려서 자질이 형편없다는 게 밝혀지면 결국 기댈 곳은 없다. 게다가 공작가의 빚은 산더미다. 저 계집은 모르겠지만, 공작 부인에게 사채업자를 소개해 준 것은 그였다. 또한, 자신에게 진 빚도 있다. 린드버그는 마른 입술을 핥고 말했다. “그렇군요. 청염도 란을 인정했다니.” 어차피 그녀의 편이 되기로 하지 않았는가? 조금 돌아가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린드버그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누구 이견이 있는 사람이 있소?”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도무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란이 임시 가주가 되는 것으로 회의를 마무리하겠소.” 린드버그가 큰 소리로 말하고 나니 다들 마법에서 풀린 듯 숨을 내쉬었다. 란 역시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녀는 반지를 손가락에서 뽑아 유스타프에게 도로 건네주며 말했다. “절 가주라고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청염의 인사도 하실 필요가 없고요. 전 어디까지나 임시 가주니까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가신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미심쩍은 얼굴로,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 세 가문 모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아니다. ‘와일드는 확실하게 유스타프의 편이고.’ 란스 남작은 고지식하니 공작가를 배신할 만하지 않아. ‘남은 건…….’ 란은 일루미니티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마치 사자 같은 모습을 한 백작은 이제 마흔 초반.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그녀는 그렇게 원작에서 그를 묘사했었다. 공작가의 방계인 일루미니티 백작가는 린드버그 남작가를 빼면 가장 가까운 승계권을 가지고 있는 친척이기도 했다. 하지만 숙부처럼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사람도 아니다. ‘유스타프의 힘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백작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흐흥, 하지만 난 원작자라고? 기본적인 설정은 다 안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며 란은 미소를 지웠다. “그럼 회의를 끝내도록 하죠. 남아서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들을 위한 시간은 따로 내겠습니다.” 란은 그렇게 말하며 회의를 닫았다. 하지만 모두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터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럼 뒤쪽의 알현실에서 한 분씩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같이 가시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 뒤쪽에 딸린 작은 알현실은 친밀한 대담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로, 부드러운 색조로 담백하게 꾸며져 있었다. 란은 한숨을 내쉬고 크림색 소파에 앉으며 그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앉아.” 유스타프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란은 그를 다리부터 머리까지 쭉 훑어보았다. ‘과연 남주.’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생겼으면서도, 생각했던 것과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응?” “청염을 끼신 것 말입니다.” “으음, 말했잖아. 임시 가주로 인정받는 것뿐이라고.” 란의 말에 유스타프의 푸른색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청염을 끼다가 죽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나도 라치아니까. 입적되어 있기도 하고…… 사실 확신은 없었어.” 란의 말에 유스타프의 동작이 일순간 멈칫했다. “도박한 거야.” “불에 타 죽을 도박을 말입니까.” “그거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보였으니까.” 숙부의 손을 빌리게 되면, 확실하게 유스타프와는 적대 관계에 서게 될 터였다. 본인은 아니라고 해도, 주변이 그렇게 된다. 유스타프는 그래도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는 눈치였지만, 곧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빚을 갚아야겠지. 재정 문제가 가장 시급하니까.” “저에 대해서는요?”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마저 졸업해 줘.” “제가 거절한다면요.” “네가 없는 사이에 내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란은 가볍게 웃고 말했다. “로스 경을 붙여 놓고 가도 괜찮아.” “누님에게 말입니까.” “감시 역을 붙여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헛된 짓을 하지 않도록 말이야.” 유스타프는 잠시 란을 바라보았다. 이건 로스 경을 자신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속셈인 걸까. 믿을 만한 호위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제국 아카데미야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지만.’ 그래서 그동안 공작 부인이 자신에게 손을 뻗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는 여기에 두고, 자신은 다른 자를 데리고 가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응?”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원작에서 내가 널 너무 심하게 굴려서 미안해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가족이니까.” 대신 대답한 말 역시, 거짓은 아니다. 진짜 여주가 올 때까지. 그녀가 와서 너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하게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응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서브 남자 주인공도 찾아봐야지.’ 왜 나는 남주와 서브 남주를 피폐하게 굴렸는가. 그야 열다섯짜리, 중2의 마음에 흑염룡이 자라며 피폐를 키웠겠지. 란은 느리게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은 빚부터 처리하자.’ 한참 후에야 여주가 발견하는 것이긴 하지만 란은 지금 미리 끌어다 쓰기로 했다. 바로 빙벽의 광산이었다. 마력석. 이 세계에는 마법사가 있다. 뭐, 빙벽을 끌어올리고, 문을 만들고, 저택을 세운 위대한 대현자 이브리아 이야기만 들어도 알겠지만 말이다. 마법사는 상당히 흔해서, 백작 이상의 영주라면 다들 마법사를 한둘은 데리고 있었다. 단, 라치아 공작가에는 마법사가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현자 이브리아가 빙벽 10km 내외에 마법사의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금기와 침묵의 룰은 지금도 완벽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법사 없는 공작가, 라고 하면 그건 라치아 공작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없는 귀족들도 마법의 혜택은 보고 싶어 했고, 그러면서 고안된 것이 마법 용품이었다. 마력석이라는, 마력이 담겨 있는 돌이 있다. 그걸 이용해 마법사들은 마력을 계속 주입하지 않아도 동작하도록 마법진을 고안해 냈다. 하지만 곧 마법 물품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일단 마력석의 순도가 높지 않아서 소모되는 양이 많아, 유지비를 생각하면 그냥 마법사를 고용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실패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마력석의 힘이 거의 들지 않는 희미한 조명은 꽤 오래가서 초 대신에 마력석을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마법 물품을 만드는 마법 세공사의 존재만 이어져오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빙벽의 마력석은 매장량도 어마어마한 데다가, 순도도 엄청나게 높으니까.’ 한마디로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했다. 화목 연료 시장에 석탄, 아니 석유를 들고나온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원작자인 나는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지.’ 수정과 똑같이 육각형으로 솟아오른 마력석은 순도가 높아 얼음처럼 투명하다. 처음에 여주가 발견하는 얼음수정은 무색투명. 하지만 광산에는 투명한 얼음수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붉은색과 푸른색 마력석.’ 이 마력석이 대현자 이브리아가 마법사들을 빙벽 근처로 다가오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이 마력석에서 나오는 마력은 지금의 마력과는 전혀 다른 형질을 가지고 있고, 마법사가 쌓아둔 마력을 변질시킨다. 즉, 그 마력석과 접촉하는 순간 마법사는 마법을 쓰지 못하고, 자칫하면 폐인이 되는 거다. 그래서 빙벽에 다가오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해 둔 것이었다. ‘인간은 다루지 못하지만.’ 서쪽 끝에 사는 이종족인 드워프와 엘프의 마법 체계에서는 마력석과 같은 물건이다. ‘즉, 이종족과의 교류를 할 수 있어.’ 란은 마음속으로 미소 지었다. 드워프나 엘프만 다룰 수 있는 광물들은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었다. ‘어차피 북부에 광대한 식량 사업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석유 산업(?)도 확보하지만, 중계무역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일단 첫발은 광산부터인가…….’ 생각하고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치가 어디쯤이더라?’ 그때 그녀의 생각을 끊으며 유스타프가 말했다. “누님.” “어? 응.”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카데미, 졸업할 거지?” “지금 가주는 누님이시니까요.” “임시지만.” “청염을 떨치시길.” “아냐.” 눈을 찌푸리며 란은 손을 들었다. “그 인사는 과분해. 청염은 네 것이야. 난 그냥 평범한 인사로 족해.” 란은 슬그머니 덧붙였다. “그리고 가족이고.” 그 말에 유스타프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님과 가족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푹. 마음이 푹 찔렸다. 란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니?” 하고 말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반응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깍듯한 인사를 하고 알현실을 떠났다. 란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직인가.’ 이러다가 진짜로, 가주직을 내려놓는 순간 유스타프에게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그래도 용돈은 따로 조금 모아놔야 할지도…….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설렁줄을 당겨 다음 사람이 들어오게 했다. ✥✥✥ 일주일간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고, 유스타프가 다시 수도의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그가 저택을 떠나는 순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거라는 걸 란은 잘 알고 있었다. ‘로스에게.’ 그가 유스타프에게 뭔가 간곡하게 여러 번 말하는 걸 보며 란은 한숨을 삼켰다. 드디어 로스가 유스타프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란은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잘 다녀와.” “네, 누님도 안녕하시길.” 란은 그의 목에 걸린 청염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유스타프를 보고 싱긋 웃었다. “수석으로 졸업해 줘.” 심술궂게 한 말이었는데, 그는 꿈쩍하지 않고 답했다. “원하신다면.” “그게 그냥 원하면 되는 거야?” 란의 되물음에 유스타프는 픽 웃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란은 뒤로 물러섰고, 풋맨이 정중하게 마차 문을 닫았다. 마부는 가볍게 모자를 들어 인사해 보이고 휙 휘파람을 불었다. 말이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하며 마차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란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로스 경.” “네.” 헤이즐색 눈동자가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똑바로 란을 보았다. “유스타프가 없는 동안, 당신이 제 호위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이미 유스타프와 말이 되어 있었던 일이라, 로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좋아요.” 란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죽겠다.’ 집사에게 회계 관련 서류를 전부 가져오라고 할 때만 해도 란은 일할 마음이 만만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안 좋은걸.’ 생각보다도 상황이 안 좋았다. ‘사채업자에게 영지를 저당 잡혔잖아?’ 그야, 라치아 공작령은 넓고, 쓸모없는 땅도 많다. 하지만 쓸모없는 땅을 저당 잡혔을 리는 없지. ‘유일한 곡창지대를 저당 잡혔어. 이거 없으면 우리 다 굶어. 굶는다고오.’ 물론 아직 상환 기간은 반년 정도 남아 있지만, 이자는 매달 나가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재정이 마이너스다. 마이너스. 마이너스라는 것은 현재 융통할 수 있는 목돈이 없다는 거고, 광산 개발에 목돈이 들어갈 거라는 건 비전문가인 란이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채굴권의 일부를 판매할까.’ 그 전에 일단 광산부터 발견해야 하는데. 린드버그 남작은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떠나자마자 그는 당장에 란을 만나고자 했다. ‘일이 많다고 미뤘지만.’ 툭툭 란은 깃펜대로 머리를 두들겼다. 공작가는 크고, 당연히 일하는 가신도 많다. 공작가에서 일하는 담당자는 크게 넷이다. 저택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집사와 시녀장, 시종장. 영지의 일을 담당하는 행정관. 회계를 담당하는 회계관. 병사나 기사단 같은 무력을 담당하는 기사단장. 그중에서 회계관은 쓰레기다. 공적자금을 자기 주머니로 착복하는 인간. ‘왜 회계관을 쓰레기로 설정했지. 아, 진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하긴 그러니까 공작가가 무너지는 게 그렇게 쉬웠던 거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머지 사람들은 공작가에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특히 기사단장은.’ 란은 로스를 보았다. 기사단장은 그의 큰형이었다. “로스 경.” “네.” “행정관과 기사단장을 불러 주겠어요?” 란의 명령에 로스는 별말 없이 시종을 시켜 두 사람을 부른 후 물었다. “무엇을 하시려고요?” “회계가 엉망이에요.” “공작 부인은 사치스러우셨죠.” “그랬죠.” 네 엄마가 잘못한 거야, 하는 비꼬는 말에 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사실이니까. “문제는 그런 보석을 팔아 봐야 헐값이라는 사실이에요. 가격이 비싸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란은 이어 말했다. “재정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죠?” “빠듯하다는 정도는 압니다.” “이건 빠듯한 정도가 아니에요.” 란은 서류 뭉치를 두들겼다. “우리 회계관이 공작 각하를 확실히 속였던 것 같군요. 하긴, 회계 장부를 들여다보시는 분은 아니셨죠.” 그런 건 귀족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회계관이 자금을 빌릴 수 있다거나, 융통할 수 있다고 하면 그렇다고 생각하셨겠지. 사채를 쓰는 것도,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고. ‘무섭다, 그 위기의식 없음이.’ 그녀의 말에 로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감히 회계관 따위가, 공작 각하를 속였단 말입니까?”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고, 란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꽉 막힌 귀족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보는데요, 하는 말은 아꼈다. 여기는 북부고, 저들은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이다. 금전의 유혹 앞에 상관을 속인다는 일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겠지. 마치 희귀 동물처럼 매력적이며, 좋은 상관이라는 보호막 없이는 사라질 사람들. 란은 미소 지었다. 유스타프는 더없이 훌륭한 보호막이지. 그녀의 미소에 로스가 눈을 찌푸리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들어와.” 의자를 살짝 뒤로 밀며 란이 뚜렷하게 말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행정관은 이제 마흔 중반 정도 나이의 여성이었다. 기사단장은 삼십 대 초반으로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행정관인 엘리자벳이 먼저 인사하고, 기사단장인 블레인이 따라 인사했다. 가주에게 하는 정식 인사를 하지 말라는 말을 잘 따라 주는 것 같아, 란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두 사람 다 자리에 앉아요.” 행정관 엘리자벳과 기사단장 블레인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문 앞에서 만났지만 두 사람 다 왜 그녀가 자신들을 불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 엘리자벳은 눈앞의 어린 가주를 바라보았다. 란이 청염을 낄 때, 엘리자벳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청염은 그녀의 손에 끼워졌다. 란을 불살라 먹지도 않았다. 란은 몇 번이나 자신이 임시 가주라고 말했지만, 발톱을 움키기 전에 몸을 낮추는 것이라면? 가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회계 장부를 살펴보고, 행정관과 기사단장을 부른다. ‘평범한 열아홉 살 여자아이가 할 행동은 아니지.’ 엘리자벳은 그렇게 생각하며 란과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갑작스럽게 두 사람을 불러서 어쩐 일인가 하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란이 쌓인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공작가의 빚이 어마어마하오.” “어마어마하다면요?” 엘리자벳이 되물었다. 란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영지와 작위를 다 팔아 치워야 할 정도, 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까?” 란의 말에 서재 안에 있던 세 사람 모두가 숨을 삼켰다. 그러나 곧 엘리자벳이 항의했다. “그럴 리가요? 저도 회계 자료를 보았습니다. 물론 빠듯하기는 하지만 나오는 이득은―” “분식회계였어.” “분식회계요?” 처음 듣는 용어에 블레인이 되물었다. 란이 손끝을 모아 탑처럼 세우며 말했다. “간단히 말하면 사기. 예를 들면―” 란은 잠시 생각했다가 가장 단순한 예를 들었다. “물건을 사지 않고, 샀다고 적어 두는 거야.” 란이 서류 한 장을 펴서 블레인에게 밀어줬다. “작년에 기사단 장비를 갖추기 위해서 3천 베라트를 지급했더군.” 그 말에 블레인이 허겁지겁 서류를 당겨 보았다. 정말로 지급금 3천 베라트라고 쓰여 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항의했다.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는 돈이었다. 오히려 너덜거리는 장비를 바꿔 달라는 장계를 수없이 올렸지만, 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런 것 같았어. 게다가 이쪽을 보면 말을 사는 데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는데, 우리에게는 말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 엘리자벳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행정 쪽에도 분명히 비슷한 일이 있을 겁니다.” “알아. 엘리자벳은 자금 요청 부분을 따로 기록해 뒀더군. 덕분에 비교해서 찾기가 쉬웠어. 하지만.” 란이 서늘하게 웃었다. “분식회계는 항상 횡령, 배임, 사기와 함께 다니는 법이지.” 재고는 없는데, 샀다고 적혀 있다. 입출장부가 엉망이다. 그렇다면. ―내가 손대도 모르겠는데? 당연히 그런 생각도 따라오는 법. “하지만 가주님, 저희는 어떻게 믿으시는 거죠?” 엘리자벳의 말에 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여기 와서 있는 동안 눈은 그냥 둔 게 아니거든.” 엘리자벳은 입을 꾹 다물었다. 란이 스스로 관찰하고 결정했다는데 그것만으로 믿는다니 이상하다고 하는 건 가주의 안목을 의심하는 발언이다. 게다가 자신을 믿어 준다는 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회계관을 쳐낼 거야.” 그녀가 목 근처에서 손바닥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나마 다행인 건 6개월 후가 상환이라는 것? 그리고 분할상환인지 일시상환인지 정해지지 않았어.” 블레인은 눈을 찌푸렸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의 물음에 란은 잠시 갸웃했다가 말했다. “일단은 회계관을 쳐내고, 조사해서 재산을 몰수하는 게 먼저인데, 그 전에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하명하십시오.” “북쪽 산맥을 조사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빙벽을요?” 이 상황에서? 그런 얼굴이었지만, 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그러니까…….” 란은 광산의 위치를 더듬어 보았다. 여주가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산맥을 헤매다가 발견한 장소니까 ‘문’에서 그렇게 멀지 않을 거다. “문 근처의 동굴을 집중적으로 찾아 줬으면 해.” “문 근처를 말입니까?” 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래, 내가 같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란은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문’. 그것은 이 이야기의 근원이기도 하고, 라치아 가문의 시작이기도 하다. 대현자 이브리아가 어둠을 봉인하며 만든 것은 세 가지. 빙벽이라고 불리는 이 산맥. 산맥의 핵심인 ‘문’. 그리고 문지기인 라치아 가문을 위해서 만들어 준 하늘 저택. 그래서 문은 북부에서는 두려움과 경외의 상징이었다. 물론 라치아 공작가의 기사단인 청염 기사단은 그나마 문과 가까웠지만, 그래도 문 근처를 조사하라는 건 내키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꼼꼼하게 조사해 줘. 그 동굴 안에 라치아 가문을 살릴 비책이 들어 있으니까.” “그렇습니까.” 블레인은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팀을 꾸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맡길게. 하지만 그 동굴에서 발견한 게 무엇이든 함구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자들로만 부탁하지.” 란의 말에 블레인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고 란은 블레인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에 서재를 나갔다. 그리고 란은 남은 엘리자벳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증거를 수집할 것도 없어. 내가 그냥 슥 보기만 해도 허점투성이야. 아마 몇 년 동안 해 왔는데도 문제가 없었으니까, 최근 들어서는 장부 조작도 귀찮아졌겠지.” “그래도 문서화하기를 원하시는군요.” 엘리자벳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벳은 책상 위의 서류를 바라보았다가 힘주어 말했다. “전부 제 방으로 보내 주십시오.” “부탁할게.” 란은 그렇게 말하고 엘리자벳에게도 나가보라고 말했다. 이어 시종을 불러 서류를 엘리자벳의 사무실로 옮기게 한 후, 란은 늘어졌다. ‘피곤하다.’ 슬쩍 로스를 보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 한 잔.” 란이 손가락을 하나 펴며 슬그머니 말하자 로스는 시녀를 불렀다. 란은 양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차가 우려지는 걸 기다렸다. ‘피곤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그녀는 머릿속을 가득 메운 숫자들을 하나씩 넘겨 보았다. 시녀가 조용히 차를 따라 찻잔을 내주었다. 시녀가 나가자마자 로스가 물었다. “일부러 보내신 겁니까?” “뭘?” 란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로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기사단장 말입니다.” “어딜?” “문 근처로요.” “방금 못 들었어?” 그렇게 말하며 란은 컵을 들어 후후 불었다. 우아한 귀족 영애의 표본은 아니지만, 뜨거운 차에 혀를 데는 것보단 낫다. 뜨거운 찻물을 조금씩 삼키는데 로스가 다시 물었다. “기사단장을 처리하려고 문으로 보내신 거 아닙니까?” 문 근처는 가장 위험한 마물들이 나오는 곳이니까. “내가 왜?” 그제야 란은 찻물에서 신경을 떼고 로스에게 집중했다. “유스타프 님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서 말입니다.” 음침한 어조로 말하는 그를 보고 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로스가 인상을 썼다. “뭡니까?”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거 이상하지 않아? ‘너 내 형을 살해하려는 거지!’라고 본인한테 물어보다니.” 명랑하게 웃고 란은 턱을 괴었다. 그녀의 비취색 눈동자는 이상할 정도로 투명했다. “그렇지 않아. 믿고 맡긴 것뿐이야.” “믿는다고요.” “유스가 믿으니까, 나도 믿는 거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로스의 얼굴이 미심쩍어졌다. 그가 이어 말했다. “게다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 겁니까?” “또 뭐가?” “당신은 가주로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죠. 물론, 최근에는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열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덜컥 가주 직위를 맡아서, 이렇게 능숙하게 일을 해낸다고? “마치 준비해 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건 아닌데.” 란은 그렇게 말하고 붉은 찻물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렇게 되는 사태를 가장 피하고 싶었다. 가족의 죽음을 막기를 바랐다. 하지만 가족은 죽어 버렸고, 란은 한 가지 이론을 세웠다. 아무리 자신이 난리를 쳐도 주요한 부분은 바뀌지 않는 게 아닐까? 운명의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어떻게 되든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냥 할 수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지. 이래 봬도 머릿속은 터질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고 란은 덧붙였다. “유스타프에게 전할 때는 너무 걱정하게 하지 말아 줘.” “그분이 당신 걱정을 하신다면요.” 로스의 말에 란은 웃었다. “그거 정답이네.” “화내지 않으십니까?” 로스의 물음에 란은 손끝으로 찻잔을 감쌌다. 홍차용 잔은 넓어서, 찻물이 금방 식는다. 적당히 식은 찻잔을 들며 란이 물었다. “왜 화내?” “그야…….” 드물게 로스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란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유스와 가족이 되고 싶어. 사이좋은 남매까지는 무리라고 할지 몰라도, 그렇게 되고 싶어.” 란이 로스를 보았다. “하지만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어. 난 나대로 그냥 열심히 할 뿐이야. 유스가 내 어머니에게 괴롭힘당했던 거나―” 그녀는 멋쩍게 말했다. “내가 그를 괴롭혔던 걸 없었던 거로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가고 싶어.” 달칵. 빈 잔을 내려놓고 란은 두 번째 잔을 따랐다. 수증기와 함께 달콤한 차 향기가 소용돌이치며 올라왔다. “그러니까 화내지 않아. 모든 건 유스에게 달린 문제니까.” 로스는 정말로 이상한 걸 본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란은 슬그머니 뒤쪽에 쌓인 서류 더미에서 서류를 끌어다가 책상 위에 올렸다. 재정 상황이 최악이라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밀린 일은 어떨까? 사실 행정관인 엘리자벳은 밀린 일을 해 달라고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을 거다. ‘그걸 티 내지 않다니. 훌륭한 행정관이지.’ 게다가 올라온 장계의 대부분은 자금이 필요한 일이다. 벌써 몇 년째 보수를 요청하고 있는 종탑이라든가……. ‘이것보다는 다리 보수가 먼저 아닌가. 아니 3년 전에 산사태로 덮인 길도 아직 복구가 안 되고 있잖아?’ 일단 저 서류의 산더미를 전부 훑어보는 게 목표다. ‘힘내자.’ 란은 심호흡하고 빠르게 서류를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속독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잡기 중 하나였다. 이 서류의 산에서, 속독이 가능한 게 다행이다. 게다가. ‘형식이 엉망이야.’ 서류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쯤 되면 서류라기보다는 영주에게 올리는 편지에 가까웠다. ‘이것부터 먼저 고쳐야겠네.’ 기본 서식을 지정해야겠다. 그것만으로도 서류를 보는 시간이 확 줄어들 거다. 팔락팔락. 빠르게 서류를 넘기는 속도에 로스는 그녀가 정말로 그 모든 글을 꼼꼼하게 읽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슬슬 그가 그녀의 속도에 질릴 때쯤, 문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로스도 란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로스가 검에 손을 올리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란!” 소리를 치며 들어온 것은 숙부인 린드버그 남작이었다. “숙부님.” 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도무지 널 만날 수가 없더구나.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했다.” 린드버그 남작은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로스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허락 없이는 가주님을 뵐 수 없습니다.” “난 그녀의 숙부다! 게다가 너같이 무도한 놈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더 걱정이야!” “숙부님, 그는 충성스러운 가신입니다.” 란이 그를 감싸, 로스는 내심 놀랐다. 린드버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충성은 무슨.” 란이 로스에게 말했다. “자리를 내어 드려.” 로스는 말없이 비켜섰고, 린드버그는 의기양양하게 들어와 앉으라는 말도 없었는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도무지 가신의 행위라고 볼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란은 별말 없이, 착석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너에게 다른 호위를 붙여 주려고 한다.” “다른 호위요?” “그래! 저런 충성심 없는 녀석이 아니라, 내가 권하는 진짜배기로 말이다.” 린드버그는 속내가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말을 했다. “아뇨, 로스 경이면 충분합니다. 제 호위를 더 늘려야 할 필요도 없고요.” 린드버그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란아.” “네.” “네 어머니가 나에게 빚을 졌다는 걸 알고 있니?” 린드버그 남작은 허를 찌르듯이 말하고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예전에 목걸이를 사느라 말이다. 갑작스럽게 빌린 돈이라, 나도 매우 힘들었단다.” 그가 서류를 란에게 내밀었고, 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열어 보았다. 차용증이었다. 어머니가 그에게 1만 베라트를 빌렸단 내용이었다. 이자는 월 10%. 매달 천 베라트씩 불어난다는 얘기다. 어마어마한 고리대금이었다. 3천 베라트면 기사단 장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는 게 가능하다. ‘만 베라트만 빌린 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하긴, 린드버그 남작이 현금으로 만 베라트 이상의 돈을 탁탁 내놓기도 어려울 것이다. 남작령에서 나오는 돈이 연 만오천 베라트 정도 되니까. 일단 베라트라는 돈 단위 자체를 귀족이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다. ‘만 베라트짜리 목걸이라니.’ 란은 어머니의 화려한 장신구들을 떠올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생각나는군.’ 그녀는 목에 걸어 보지도 못한 그 목걸이로 어마어마한 추문에 휩싸이고 만다. “이 차용증에 따르면, 갚는 날짜는 올해 말로 되어 있군요.” “그래, 하지만 네 어머니에게 큰 사고가 있지 않았니?” 남작은 짐짓 어두운 얼굴을 했다. “나에게도 큰돈이야. 그래서 혹시나 네가 모를까 싶어서, 특별히 알려 주는 거란다.”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더더욱 노골적으로 혓바닥을 놀렸다. “하지만 넌 내 조카지. 그래서 말인데, 이 빚을 탕감해 줄까 하고 생각도 하고 있단다.” “탕감이라고요?” 란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린드버그 남작은 잘 다듬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고 말했다. “너와 진짜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말이란다.” “이미 저희는 혈족인데요.” 가족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란은 다른 단어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거리감을 눈치채지 못한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내 아들을 너와 짝지어 주고 싶다는 말이란다.” 맙소사. 란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삼켰다. “아들이라면, 사촌인 로비 말인가요?” 그라면 란도 몇 번 얼굴을 봐서 알고 있었다. ‘남자답게’ 호방한 것을 앞으로 내세우며 그는 주색잡기를 즐겼다. 즉, 란의 기준으로 말하면 쓰레기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도박도 슬슬 손대고 있지, 아마.’ “그래. 너도 알고 있겠지, 나이 차이도 고작 네댓 살밖에 나지 않아. 딱 좋은 때지.” 개뿔. 하지만 란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 노골적으로 적으로 만들 때는 아니다. 좀 더 공작가의 재정과 사무가 튼튼해지고 나서. 그때. 청염으로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임시 가주가 된 사실에 불만을 가진 세력은 여전히 존재할 거다. 린드버그 남작이 여기저기 돈을 꽤 뿌렸으니 내부에도 줄이 닿아 있을 거고. ‘뭐, 남작만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원작자라 충성하는 가문이 누군지는 확실히 알고 기용할 수 있다는 거다. ‘다행이지.’ 란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숙부님, 말씀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너무 갑작스럽네요. 게다가, 음―” 란은 뺨을 긁적였다. “빚 때문에 그렇게 결혼하는 건 좀…… 그러네요.” 소녀다운 말이라면 소녀다운 말이지만, 린드버그 남작에게는 물정 모르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1만 베라트다. 너 이게 얼마나 큰돈인지 아는 거냐? 게다가 공작가에는 다른 빚도 있어.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린드버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좀 더 현명한 사람의 조언이 필요할 거다.” “숙부님 같은 분의 조언 말이지요.” “그래.” 드디어 말이 통하는가, 하고 린드버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아직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는데.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거 꼭 들어보고 싶네요.” ✥✥✥ “안 주무십니까?” 로스의 물음에 란은 “응…….” 하고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는 그녀가 전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까이 다가가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 그제야 란은 그를 바라보았다. “로스 경?” “새벽이 깊었습니다.” “조금만 더 보고.” “내일 아침에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럴까.” 란은 빡빡한 눈을 문질렀다. 초를 환하게 밝혀 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이 피곤한 건 피곤한 거였다. 로스는 그런 란을 바라보았다. 린드버그 남작이 와서 지껄일 때는 정말로 베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그가 독대할 때는, 올 게 왔구나 싶었고. ‘그런데.’ 그녀는 린드버그 남작과 나눴던 이야기를 전부 로스에게 해 주었다. 물론 전부 믿지는 않았다. 그렇게 신뢰를 쌓아 놓고, 배신을 때리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비밀 구멍을 알려 줄 때까지는 말이지.’ “다음부터 나랑 숙부랑 단둘이 이야기할 때는 이쪽으로 와서 들으면 돼.” 그녀는 안쪽 방과 연결된 다른 방으로 그를 안내해 주고, 연통을 가리켰다. “저걸 열면 소리가 잘 들려.” “그러고서 필담을 하거나 쪽지를 주고받는 거 아닙니까?” 로스의 말에 란은 눈을 깜박이더니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런가, 그런 방법도 있네. 그럴 생각은 없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시죠?” “으음, 오히려 역효과인가? 그야 신뢰를 쌓고 싶으니까 그렇지.” “신뢰.” “그래, 이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충분한 거지.” 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 말했다. “뭐, 유스타프가 졸업하고 오면, 그때는 좀 더 쉬우려나.” 올해가 마지막 학기다. 겨울이 지나면 졸업을 하고, 봄이 되면 저택으로 돌아올 거다. 그러면, 서로 가까이서 보면 그래도 신뢰가 좀 생기지 않을까. 란의 말에 로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군의 생각은 주군의 것. 감히 자신이 입을 댈 것이 아니다. 란은 서류에 갈피를 끼워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충고를 받아들여서 자러 가 볼까.” 로스는 눈을 내리깔았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란은 시녀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원래라면 가주의 방으로 옮겨야겠지만, 그녀는 계속 그녀의 방을 쓰겠다고 피력했다. 어차피 임시 가주라고 하며 말이다. 익숙한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 제국 아카데미. 이름 그대로, 제국에서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다. 전원 기숙사제로, 전통적으로 황제는 제국 아카데미 출신이기 때문에 귀족의 대다수가 아카데미로 자식을 보냈다. 그러면 졸업 기수가 생기고, 그것으로 학연이 생긴다. 본래 거기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 게 라치아였다. 그래서 라치아에서 최초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유스타프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제국의 공작가는 셋이다. 빙벽의 라치아. 백은의 미로. 장미의 우슬라. 그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곳이 바로 라치아였다. 그런 만큼 궁금증도 많고, 환상도 많았다. 대현자의 마지막이 잠든 곳. 빙벽. 마수. 실제로 존재하는 문. 그리고 제국보다 더 길고 길게 이어져 내려온 가문. 전통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귀족들에게, 라치아는 특별했다. 실제로 나라를 세운 첫 번째 제후들이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라치아의 핏줄이었다. 제국의 첫 황후 역시, 라치아 공녀였고 말이다. 심지어 그들만의 인사가 있는 것조차도 멋지게 들렸다. 정작 유스타프는 그런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자신에게 “청염을 떨치소서.” 하고 인사하는 건 달갑지 않다 못해 짜증이 났다. 그건 가주에게 하는 인사라고, 경멸하는 얼굴로 차갑게 내뱉은 후에야 그 인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 학년에 공작가의 특권으로 독실을 얻은 유스타프는 느긋한 마음으로 편지를 열었다. 란에게 온 편지였다. 그가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그녀는 일주일에 최소 한 통씩은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다.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저택에서 일어난 일을 소소하게 적어서 보내던 것이, 그녀가 임시 가주직을 맡은 후로는 보고서 같은 느낌을 띠고 있었다. 숙부와 했던 이야기, 빚에 관한 이야기, 재정 상황. 그리고 피곤해 죽겠어, 하는 하소연까지. 유스타프는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편지를 읽었다. 마지막은 ‘빨리 졸업하고 와서 도와줘’였다. ‘정말로.’ 정말로 그녀는 자신을 가주로 인정하고 올리려고 하는 건가. 유스타프는 손끝으로 글자를 훑었다. 그렇게 하면 진의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새어머니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런 금색 머리카락에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는 처음 봤다. 그리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서 있던 새 누이. 그는 그쪽이 더 편했다. 부드럽게 반짝이는 밀빛 머리카락에 북부의 여름빛 녹색 눈동자. 약간의 기대가 있었기에, 실망은 더욱 컸다. 그리고 실망을 넘어서 절망에 빠지던 찰나. ‘그날.’ 자신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란의 위로 떨어진 그날. 그날이 전환점이었다. 의식을 잃은 란은 한번 숨이 끊어졌었고, 다시 살아났을 때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스타프, 너와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와 다정한 미소. 유스타프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다음 편지로 손을 뻗었다. 두 번째는 로스의 편지였다. 로스는 란의 행적을 꼼꼼하게 적어서 보고하고 있었다. ‘동굴이라.’ 그 안에 뭐가 있는 걸까? 이건 란의 편지에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 동굴을 어떻게 알고? 그 안에 빚을 갚을 방법이 있다고?’ 의문이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유스타프는 망설임 없이 잉크병에 손을 뻗었다. 그는 자신의 의문을 가감 없이 적어서 봉인했다. 수신자는 당연히 란이었다. ✥✥✥ 회계관 러드의 처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의 죄목을 적은 방문이 영지 곳곳에 붙었다. 임시 가주라고는 하나, 가주의 첫 처벌이 사형이며 그게 부패를 잘라 내는 첫걸음이라는 것에 내부 가신 중 몇은 기뻐했고, 몇은 창백해졌다. 필사적으로 사형은 너무하다고, 도가 지나치고 새 가주가 잔혹하다고 외치는 소리도 있었다. 란은 다 무시했지만 말이다. 불행히도 몰수한 재산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니, 대체 이걸 다 어디에다가 쓴 거야?’ 란은 생각보다 적은 재산 목록에 신음을 뱉었다. 노름에 썼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많이 노름에 썼을지는 몰랐지. 회계관 쪽 라인 대다수가 징계받고 해고되었다. 행정 쪽 일이 가중되었지만, 행정관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가장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게 가주라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서재가 가장 늦게 불이 꺼지고, 가장 먼저 불이 들어왔다. 그래서 돌아온 블레인은 가주의 창백한 낯빛과 거뭇해진 눈 밑을 보고 놀랐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란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안 죽었으니까, 괜찮은 거지. 그래, 성과가 있었다고 들었네만?” “네,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도 발견했지만…….” 그가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란은 얼른 바구니 뚜껑을 열어 보았다. 팔뚝만 한 마력석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블레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보석은 아닙니다. 수정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응, 보석은 아냐. 이건 마력석이야.” “마력석이라고요? 이렇게 큰 것이?” 놀란 블레인을 보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투명함, 이 경도. 순도 높은 마력석은 이렇게 생겼어.” 블레인은 눈을 껌벅였다. 그도 마법 물품이나 마력석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본 마력석은 평범한 돌처럼 생긴 물건이 전부였다. 란은 마력석을 손마디로 가볍게 똑똑 두들겼다. “마법 물품 자체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 가격도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야. 하지만 마력석의 마력이 너무 적어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지.” 지금은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 물품에 들어가는 마법진만 만드는 마법 세공사가 따로 있었다. 큰돈이 되지 않는 일이니 고급 인력인 마법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진은 그릴 수 있는 거다. 마법 세공사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마력석이 공급되면, 완전히 달라질 거야.” 마법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해진다. 란의 중얼거림에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응. 이렇게 빠르게 찾을지는 몰랐는데. 블레인 덕분이야.” “아닙니다.” 블레인이 눈을 내리뜨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란은 히죽 웃으며 조각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거래처를 찾아봐야지.” 란의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원작자고, 본편에 써먹지 않은 설정도 상당히 있었다. 상단. 대륙에는 삼대 상단이 있다. ‘그중 한 곳과 거래를 튼다면.’ 역시 골든로즈지.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블레인 경, 혹시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 “부탁하실 필요 없습니다. 명령하시면 됩니다.” 그의 깍듯한 말에 란은 저절로 몸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란은 펜을 들어 가볍게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혹시 잎이 이렇게 생긴 나무를 본 적 있어?” 그녀의 그림을 보고 블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압니다. 북부에서는 꽤 흔한 나무지요.” “역시 그런가.” 란은 잠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음, 아냐. 계절이 아니니까, 이건 미뤄 두자.” 그렇게 말하고 란은 종이를 접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가서 쉬도록.” 블레인은 경례하고 서재를 나갔다. 란은 자리에 앉았다. 로스가 탁자 위의 마력석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저런 게 있다는 걸요.” “나도 확신은 못 했어.” 로스가 의아한 눈으로 란을 돌아보았다. 란은 그사이 짜 맞춘 이야기가 들어맞기를 원하며 말했다. “마법사들이 여기 못 오는 이유가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거 하나로 말입니까? 게다가 마법사와 마력석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로스는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그리고 예전에 문에 갔었을 때, 내가 사라졌던 거 기억나?” 란, 그러니까 자신이 아닌 실제 란은 어렸을 때, 문에 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유스타프가 일부러 자신의 딸을 길 잃게 만들었다면서, 계모가 그를 벌주는 첫 번째 사건이었다. “압니다.” 로스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날 계모는 매를 들었고, 어린 유스타프의 등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지금도 그의 등에는 매질의 상처가 남아 있다. “그때 발견했었어. 그래서 어릴 때 기억이랑 옛날 자료를 합쳤을 때 혹시, 하고 생각한 거지.” 란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만, 조각난 자료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결론일 경우 말이다. 하지만 란은 도출했고, 그게 정답이었다. ‘투명한 마력석.’ 상업을 잘 모르는 자신도, 가치가 어마어마할 거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공작가는 빚에서 벗어날 것이다.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틀리면 민망하잖아.” “…….” 로스의 눈초리에 란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까, 유스에게도 편지를 보내야겠어. 그리고― 골든로즈 쪽에도.” “골든로즈요?” “응, 대륙의 삼대 상단 중 하나지. 그쯤 되어야 이걸 거래할 수 있지 않겠어?” 가치가 높은 상품을 가지고 있다는 건 로또에 당첨된 것과 마찬가지다. 뒤통수를 맞을 일이 많다는 거지. 게다가 나중에 붉은 마력석과 푸른 마력석을 거래하려면 서쪽 끝까지 연줄이 있는 대상단이 필요했다. 이제 마력석의 마력이 부족해서 실행하지 못했던 일들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다. 앞으로의 가능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이런 순도 높은 마력석이 나오는 곳은 빙벽뿐이야.’ 즉 오일머니를 손에 넣은 것과 다름없다. 란은 히죽 웃었다. 이걸로 유스타프의 고생은 끝이다. 그리고 차원 이동해서 온 여주가 가난한 공작가 때문에 구르는 것도 끝이다. 여주. 란은 문득 그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여주의 이름은 이시나. 시나. 사랑스러운 여주였다. ‘열심히 굴렸지만.’ 생각하니 미안해진다. ‘이번에는 내가 호의호식하게 해 줄게.’ 그리고 유스타프와 시나는 행복하게 살게 되겠지. ‘물론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지만, 일단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니까.’ 그것만 해도 문제의 절반은 해결되는 듯하다. ‘일이 일단락되면 서브 남주도 찾아야 하고…….’ 지금쯤 노예로 부려지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아직은 아슬아슬하다. 내년이 지나기 전에 찾아야 했다. 내년에 불법 투기장으로 넘어가면 정말로 더더욱 심한 지옥이 시작되니까. ‘그래도 남주는 건져 냈어…… 일단.’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2년. 앞으로 2년만 버티면 유스타프가 가주 자리를 이을 거다. ‘그리고 어차피 반년 후면 유스타프도 졸업이고.’ 그러면 임시 가주직은 그냥 허수아비가 되는 거지. ‘빨리 그렇게 됐으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다시 한번 검토했다. 잘못 쓴 부분은 없었다. ‘아, 맞다.’ 란은 유스타프에게 쓴 편지에 추신을 덧붙였다. ―인재 좀 데려와! 유스타프는 편지 맨 마지막에 덧붙은 문구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인재라.’ 제국 아카데미는 확실히 연줄을 대는 곳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학생의 대부분이 귀족이지만, 백 년 전부터는 귀족 세력의 대항마를 키우기 위해서 황제가 평민의 입학도 허락했다. 시험만 통과한다면, 작위가 없는 자에게는 어마어마한 입학금이 면제된다. 그리고 졸업자 대다수는 황궁의 하급 관리가 되고, 하급 관리에서 끝난다. 유스타프는 책상을 가볍게 두들겼다. ‘눈에 드는 인물은 몇 있지.’ 아카데미에서 사교는 지겹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다. ‘본격적으로 해도 된다는 말이니까.’ 그는 아카데미에서 인물들을 주의 깊게 보면서도 절대로 직접적으로 영입하지 않았다. 가주인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계모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세요, 당신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당신 아들은 벌써부터 공작이 되려고 준비하는군요. 그런 말을 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란이 가주가 된 후에는. ‘가주가 직접 명령한 거니 괜찮겠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고 편지를 접었다. 공작가의 빚에 대해 자세한 자료를 보고, 그는 숨이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가에서 나오는 이익으로는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력석이라……. 유스타프는 청염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서늘한 표면은 아무리 만져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유스타프는 그게 좋았다. ‘정말로 네 선택이 옳았어.’ 청염을 향해 그렇게 속삭이고 그는 상념에 잠겼다. ✥✥✥ 란은 숨을 헐떡였다. 눈앞에 단두대가 시퍼런 빛을 내고 있었다. “죽여, 죽여, 죽여!”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있었다. 싫어, 싫어, 아냐, 아냐.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혀가 입천장에 딱 붙은 것 같았다. 유스타프가 차가운 파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청염의 주인이 된 나,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의 이름으로 사형을 집행한다.” 아냐. 난 란이 아냐. 나는, 나는― 양팔을 붙잡은 사람들이 그녀를 질질 끌어다 목을 구멍에 끼웠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단두대 칼날이 보이도록 거꾸로. “집행하라.” 푸른 칼날이 빠르게 내려오고― “―!!!” 란은 꿈에서 번쩍 깨었다. “윽, 하, 하아, 하…….” 꿈이었구나……. 목덜미를 만져보니 끈적한 땀이 느껴졌다. 자면서 어지간히 몸부림치고 식은땀을 흘린 모양이었다. 아직도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란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진짜 스트레스 심하구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된 자리끼를 마셨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얼굴은 전혀 다른 얼굴이고,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있고. ‘간신히 소설 속이라고 알아차리게 됐지만.’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난 건, 유스타프가 사과하러 왔을 때였다. ‘그때는 시간 개념이 좀 없어서…… 대충 내가 정신 차리고 한 달쯤 지난 후였나? 더 지났던가?’ 그가 사과하러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 남주가 오는 거야?’ 하는, 어딘지 현실감 없는 느낌이었다. 실제 유스타프를 만났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도무지 평범한 아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미안하다거나 사과의 감정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무표정한― 감정이 마모된 듯한 얼굴.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지 않다. 란은 스스로를 껴안듯 양팔을 꽉 움켜쥐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그렇게 말하며 깊게 허리를 숙이는 유스타프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미처 숨기지 못한 피맺힌 매질의 흔적이 소매 아래로 얼핏 보였다. 내가 저렇게 만들었어. 자신이 그렇게 글을 썼다. 하지만 지금 저 얼굴을 보자 도저히, 이건 소설이고 넌 나중에 여주인공을 만나서 행복해지니까, 지금 조금만 참으라는― ‘그딴 말은 못 하지.’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때부터 어떻게든 유스타프를 보호해 주려고 애썼다. ‘아직도 유스타프의 신뢰를 얻지 못했으니.’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이러다가 2년이 지난 후에 유스타프가 자신의 목을 치면? ‘아냐, 아냐, 괜찮을 거야. 2년 동안 열심히 잘하면 되잖아.’ 마력석도 찾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일할 거고. ‘목숨은 살려 주겠지. 에이.’ 스스로 그렇게 위로하며 란은 다시 목을 어루만졌다. 슬쩍 창문가로 다가가 덧창을 열어 보니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좋아.’ 오늘은 골든로즈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는 날이다. ‘지점장이라고 했었지?’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기 계약은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손을 모아 란은 그렇게 기원했다. 다크서클을 가려 주며 시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요즘 너무 고생하십니다.” “초반이니까, 어쩔 수 없지.” 란이 그렇게 대답하며 미소 지었다. 요즘 공작 저택 내에서 란의 인기는 나날이 상승 중이었다. 그녀가 가주가 되자마자 모든 시스템이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건 고용인들이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란은 방을 나섰다. 저택에 알현실은 모두 4개가 존재했다. 하나는 단체로 여럿을 만나는 회의실을 겸하는 알현실. 보통 이곳에서 신분이 낮은 자를 만났다. 여기는 그냥 알현실이라고 불렸다. 두 번째는 작위가 있는 사람을 위한 알현실인 비단 방, 세 번째는 귀빈을 위한 알현실인 에메랄드 방,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독대를 위한 알현실인 진주 방이었다. 상단 사람이지만 란은 귀빈을 위한 알현실인 에메랄드 방을 지정했다. 파격적인 행동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에메랄드 방은 그 이름에 걸맞게 녹색 빛깔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공작 부인이 손님을 대접하는 방이기도 하니까.’ 녹음의 관, 그 아름다운 티아라 주인에게 딱 맞는 방이기도 하다.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란이 방에 들어서자,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자를 벗고 우아하게 인사를 해 왔다. ‘여자.’ 란은 약간 놀라 눈을 깜박였다가, 상대의 외모를 보고 두 번째로 놀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정화되는 것 같은 굉장한 미녀였다. 어머니와 닮은 화려한 금발에 금색 눈동자가 마치 크게 박힌 샛별처럼 또렷했다. 무엇보다도 뾰족한 귀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이제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란은 까닥 묵례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상단주가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골든로즈의 상단주는 하프 엘프다. 란의 말에 여성이 “어머?”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라치아 공작가의 정보망을 얕보면 안 되겠군요.” 대외적으로 골든로즈 상단주는 남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로는, 심지어 이종족으로는 활동하기가 어려워서 그렇겠지. 하지만 상단의 힘이 커지면, 몇 년 안에 그녀는 그림자에서 나와서 전면에 서게 될 거다. ‘난 그걸 알고 있는 것뿐이고.’ 하지만 이걸 미끼로 상대가 자신의 정보망을 얕보지 못하게 첫 번째 흔들기를 해 뒀다. “란 로미아 드 라치아입니다.” 란이 자기소개를 하며 자리를 권했다. “청염을 떨치시길. 레버리 리버티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하고 덧붙이며 레버리가 붉은 입술로 뚜렷한 호선을 그려 보였다. 라치아 공작가에서 동봉한 작은 마력석 조각과 편지. 레버리는 그게 진짜 마력석인지 마법사에게 의뢰했고, 그 마법사는 거품을 물고 이게 어디서 난 거냐며 캐물었다. 이건 혁명이다. 라치아 마력석이 가져올 세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어마어마한 이익이 저절로 그려졌다. 절대로 놓칠 수 없다. 레버리는 그래서 직접 이 자리에 나온 터였다. 라치아 공작가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았다. ‘워낙 폐쇄적인 공작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빚을 줄일 수도 없고, 후계 싸움의 양상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없다. 레버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면서도 라치아의 가주가 된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밀빛 머리카락과 짙은 녹색 눈동자, 겉모습만 보면 훌륭한 미소녀다. 외모는 확실히 이점이나, 그것만으로 어찌 가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그것도 라치아의 피가 흐르지도 않으면서.’ 보통내기가 아닐 터. 심지어 자신이 상단주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망해 가는 공작가라고 해도 얕보면 당한다. 레버리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란은 레버리에게 자리를 권하고 직접 차를 타기 시작했다. 안주인이 차를 타 주는 것만 해도 환대의 표시인데, 가주가 직접 타는 차다. “진하게 괜찮으신가요?” 란의 물음에 레버리는 “좋아합니다.” 하고 답했다. 고급 찻잎을 아낌없이 포트 안에 넣고 뜨거운 물을 넉넉하게 부은 후, 티코지로 감쌌다. 일련의 동작을 하며 란이 말했다. “저는 돌려 말하는 걸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바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말씀하세요.” “골든로즈 상단에 마력석을 팔고 싶습니다.” 레버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희 상단은 언제든지 공작가와의 거래를 환영합니다.” “어차피, 공작가의 빚도 전부 조사했겠지요. 그래서 거래액을 제시하겠어요. 6개월간, 골든로즈 상단에 독점권을 주지요. 대신 선매금 100만 베라트를 원합니다.” 레버리의 얼굴이 굳었다. 란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숨기기 위해서 차로 시선을 내렸다. 이래서 일부러 차를 직접 끓인 거다. 그래도 뭔가 동작을 하면 침착해 보이니까. 100만 베라트.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라치아 공작령의 1년 수익금이 20만 베라트다. 공작령이 현재 지고 있는 빚은 80만 베라트고. ‘일부러 크게 불렀지만.’ 너무 크게 부른 게 아닌가, 하고 흔들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란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륵. 물소리가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것 같다. “가주님은 너무하시는군요.” 찻잔을 바라보던 레버리가 고개를 들어 란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여자는 보통이 아니다. ‘딱 내가 융통할 수 있는 자금 최대치만큼 불렀어.’ 도대체 공작가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걸까? 사실 란은 그냥 불러 본 것에 불과했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초기에 흔들어 놓은 게 유효타였다. 레버리는 란이 골든로즈 상단의 자금 사정까지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설탕 시럽을 차에 부어 넣었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선매금이라니요. 마력석이 정말로 이곳에서 나오는지, 어떻게 나오는 건지, 아무것도 알려 주시지 않고서요.” 란은 자신의 잔을 채운 후 자리에 앉았다. 설탕 시럽을 왕창 붓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설탕은 매우 고가의 물건이다. 매우, 매우. ‘설탕도 비싸서 아껴야 하는 공작가라니 누가 들으면 웃겠어.’ 그녀는 약간의 설탕 시럽을 차에 붓고 미소 지었다. “마력석에 얼음수정이라고 이름을 붙일까 해요. 빙벽에서 나오는 물건이니까, 모순적인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브랜딩을 해서 다른 저가 마력석들과 확실히 차별점을 두는 거지. 빙벽. 레버리의 귀가 쫑긋했다. 이 북부 산맥에서 저것이 나온단 말이지. 란은 말을 이었다. “상단주님도 그 가치를 알아보셨으니, 이 북부까지 직접 오신 거겠죠.” 그래, 북부의 길이 얼마나 험한데. 특히 빙벽에 위치한 라치아 저택까지 오는 길은 더하지. 란은 고개를 들고 똑바로 레버리를 바라보았다. 녹색 눈동자와 금색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상행위의 기본은 신뢰지요.” 레버리는 말없이 란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어린 가주는 보통이 아니다. “100만 베라트에, 공작가와 거래하는 신뢰를 산다면 어떤가요.” “이론을 따지지 않는 신뢰를 원하시는 건가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계약하겠다고 하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출구는 저쪽입니다.” 레버리는 찻잔을 비웠다. 달콤하고 따뜻한 차가 몸 안으로 들어가자 기분이 산뜻해졌다. 잔을 내려놓으며 레버리가 싱긋 웃었다. 그녀의 미모가 환하게 빛을 발했다. ‘남자라면 미인계라도 쓸 텐데.’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좋습니다.” 레버리가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대신 독점 기간은 1년으로 해 주십시오. 신뢰란 오고 가는 것이지요.” 레버리의 말에 란은 옳다구나, 하고 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1년이요.” “좋네요.” “좋군요.” 두 여자는 마주 보고 후후 웃었다. 란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는 식사라도 하면서 나눌까요?” “꼭 함께하고 싶네요.” 레버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 레버리는 일주일간 라치아 공작저에 머물렀다. 직접 광산까지 가본 것은 물론이었다. 란 역시 동행했다. 블레인은 기사단을 끌고 함께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레버리는 탄성을 내뱉었다. 사방이 다 얼음수정이었다. 거대한 마력석이 육각형 모양으로 비죽비죽하게 서 있었다. 동굴 안 가득한 그것들이 촛불을 반사해 반사광을 내뿜고 또 그것을 반사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장관이었다. 레버리는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그 양에 찬탄했다. “이 정도면 매장량이 어마어마하겠군요.” “그래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장량을 엄청난 양으로 설정했으니까. 동굴 안을 둘러보고 나오며 레버리가 생글생글 웃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빠르게 채굴을 시작하면 좋겠네요.” “그럴 계획이에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순도 높은 마력석이라니.’ 레버리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빠르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공증인을 두고 계약서를 작성한 후, 레버리는 계약금의 10%를 먼저 그 자리에서 지급했다. “상단으로 돌아가면 다시 절반을, 그리고 한 달 후에 나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레버리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자 란은 진이 빠졌다. “아, 진짜 죽을 것 같아.” 란은 소파에 늘어졌다. 서류를 가지고 들어온 엘리자벳이 그런 란을 위로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가주님.” “맞아, 나 고생했어.” 란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서류를 끌어당겼다. 서류를 가져왔으면서도, 엘리자벳은 불안해져 말했다. “조금이라도 휴식 시간을 가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급한 일이니까 직접 가져온 거 아닌가?” 중얼거리다가 란은 “어?” 하고 몸을 일으켰다. “코피 나…….” 그녀는 손으로 코 밑을 훔쳤다. 그냥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가주님!” 놀라 엘리자벳이 소리쳤고, 서 있던 로스도 서둘러 치료사를 불렀다. ‘헐, 나 코피 나는 거 처음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란은 몸을 일으키다가 핑그르르 시야가 도는 걸 느꼈다. “가주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란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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