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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98화


#98 미엘라 수녀는 이곳에 있는 모든 병자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연고가 없는 행려병자들이라도 소중한 사람들이며,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난나는 수녀가 아니었지만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봉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니 친절해져야지. 난나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수프를 한 입씩 떠먹였다. 남자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그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피부병을 앓고 있다는 말과 달리 그는 꽤 건강해 보였다. 그 피부병조차 심각한 병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종종 문둥병 환자들도 있어 난나는 겁을 먹었으나 수녀 역시 그가 그리 심각한 피부병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남자의 병은 시나브로 좋아졌다. 난나가 성가실 만큼 빠르게 회복되어 그는 졸졸 그녀를 쫓아다녔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또 옛날 생각을 하나 보군.” 마른 읊조림이 귓가에 번졌다. 그는 종종 과거를 더듬는 난나를 향해 무거운 얼굴을 했다. ‘옛날’이라고 해 봤자 난나에겐 8년 전이 전부였다. 그 이전의 시간들은 정말 편린으로라도 떠오르는 게 없어 그녀의 과거는 짧고 얕았다. 게다가 8년간 제대로 된 인연이라고는 ‘칼’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 말이다. 성가실 만큼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던 남자가 남편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나는 지난 기억을 찾기 위해 홀로 숲으로 걸음 했던 밤.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고를 잊지 못했다. 성난 이리들에게 에워싸인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은 그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난나는 산채로 이리들에게 물어뜯길 뻔했다. “난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름이 아직도 어색했다. 한 뼘씩 그를 뜯어보고 있던 난나는 조금 음울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난나’라는 이름은 그가 지어준 것이었다. 이름이 없어, 이름이 무어냐고 물어도 답할 수 없던 난나는 그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이후로 난나는 줄곧 난나였다. 싫은 것은 아닌데……. 궁금했다. 그러니까 본래의 이름. 그녀가 살아왔던 삶. 혹시라도 어딘가에 가족이 있는 건 아닐까. 그들이 자신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칼은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난나에게 왜 지난 삶이 중요하냐고 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그것은 고여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아직도 과거의 기억을 찾고 싶나 보군.” “그런 건 아니야.” “솔직해져도 돼.” “그냥…….” 난나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수도원을 떠나 안델라에 정착한 그들은 운 좋게 이 목조 저택을 구매하여 가정을 이뤘다. 작지만 뜰을 가꿀 수도 있고, 텃밭에 농작물도 심을 수 있어 더없이 마음에 드는 이 목조 저택에서 그들은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이웃의 도움을 빌려 리넨으로 하얀 드레스를 만들고, 직접 쓸 베일에 자수를 놓았다. 인심이 좋은 이웃 여자들은 혼자서 결혼을 준비하는 난나에게 기꺼이 도움을 베풀었다. 베일에는 난나가 좋아하는 들꽃과 새를 잔뜩 넣었다. 야생화를 꺾어 부케를 만들고, 가랜드와 그의 예복을 제작하기 위해 분주했던 기억이 났다. 결혼식이 얼마나 길고 행복했는지, 얼마나 많이 먹고 많이 웃었는지. 기껏해야 8년밖에 되지 않는 인생이었지만 난나에겐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았다. “아기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어.” “그래?” “응.” “여전히 갖고 싶어?” 칼이 물었다. 난나는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여러 번 시도 했는데 되지 않았던 일이다. 한때는 그 일로 인해 마음 상해서 종일 울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그래도 하나 정도 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칼은 몹시도 아름다우니까. 아기도 그를 닮았다면 아주 예쁘겠지. “입양을 해 볼까?” “입양?” “싫어?”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난나가 어깨를 웅크린 채 속삭였다. 물끄러미 닿는 시선이 묵직했다. 난나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다. 시선을 피해 눈을 감는 데 커다란 손이 그녀를 토닥거렸다. 난나는 자신이 잠드는 줄도 모른 채 잠에 빠져 들었다. * * * 난나는 꿈을 꾸었다. 꿈과 생시가 헷갈릴 만큼 선명한 꿈이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난나는 새틴으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광택이 반짝반짝 도는 새틴은 질감이 몹시도 훌륭했다. 난나는 거울 속에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 점점이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부채를 가린 채 난나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마치 꼭 자신이 얼굴에 무언가를 묻힌 것처럼. 난나는 손을 들어 손등으로 뺨을 더듬다가 어깨를 웅크렸다. 문득 먼 곳에 앉아 있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남들보다 높은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그런 곳을 황좌라고 하지 않을까. 난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아주 높은 지위의 사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나.’ 무심한 저음이 그녀를 불렀다. 난나는 걸음을 움직여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계단을 앞에 두고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 데 남자의 얼굴이 하얀 공처럼 보였다. 이상했다. 얼굴이 왜 공이지? 눈코입은 어디로 간 거지? 멀리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왜……. ‘이리로.’ 그가 난나를 향해 우아하게 손짓했다. 난나는 덜컹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그의 앞에 다다랐을 때 그가 입술을 땠다. ‘무릎을 꿇어야지.’ ‘네?’ ‘너는 그렇게 있어야 해.’ 날이라곤 조금도 서지 않는 음성이 고압적으로 들렸다. 난나는 그를 우두커니 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문득 그녀를 향해 손짓하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나는 그의 허벅지에 뺨을 묻은 채 멍한 시선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보았다.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공처럼 보였던 얼굴에 윤곽이 드러났다. ‘어…….’ 탄성이 입술 밖으로 흘렀다. 하늘색 눈동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칼?’ 난나가 망연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남편이 조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어리석고 가여운 난나…….’ 하고 속삭였다. 난나는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저 가볍게 쥐고만 있었을 뿐인데 무지막지한 완력이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했다. 난나는 씨근거리며 그를 보았다. 가슴이 벌벌 떨리는 가운데 칼이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삼키듯 베어 문 동작이 거칠고 제멋대로였다. 난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녀를 끌어안는 품에 의식을 잃었다. “부인?” 익숙한 음성에 눈이 떠졌다. 난나는 비몽사몽한 얼굴로 상대를 확인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는 통통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난나는 뻑뻑한 눈을 깜빡거리며 버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 아픈 데 있으세요?” “밀라?” “네. 저예요. 혹시 의원을 불러올까요?” “……아니.” “열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녀가 손을 들어 이마를 더듬었다. 난나는 식은땀이 났다고 말하는 소녀의 손을 걷어내며 일어났다. 밀라가 정말 괜찮으냐고 물었다. 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나쁜 꿈을 꾼 것일 뿐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종종 이럴 때가 있어.” “그래도…….” 밀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난나는 소매를 들어 이마를 닦은 후 밀라가 건네는 물을 마셨다. 밀라는 칼이 고용한 어린 하녀였다. 정원사 일을 하고 있는 그가 수입이 좋아지자 난나를 도와줄 사용인을 구했다. 기껏해야 살림을 하는 게 뭐라고. 애를 키우는 것도 아닌데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난나는 종종 이럴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건강이 좋지 못했다. 타고나게 그리 섬약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어 건강이 나빠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무리를 하면 이렇게 티가 나서……. 자상한 남편이 그녀를 위해 사용인을 구한 것이다. 난나는 전날, 혼자서 집 청소를 한 게 문제였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악몽을 꾼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밖에 빨래가 널브러져 있어서 다시 세탁을 하였어요.” “잘했어.” “정말 무슨 일 있는 것은 아니죠?” “당연하지. 아무 일도 없어.” “또 나쁜 꿈을 꾸신 거예요?” “응. 그렇지만 기억이 안 나.” “다행이에요. 악몽을 오래 기억하면 좋지 않으니까요.” 밀라가 난나를 부축하여 일으키며 말했다. 그녀는 식탁을 차려 놓았다며 난나를 거실로 데리고 갔다. 난나는 식탁 앞에 앉아 스튜를 한 스푼 떴다. 밀라는 바닥을 걸레로 닦으며 주인 나리께선 랜달 경의 초청으로 잠시 저택을 비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저녁, 칼이 그런 말을 했었지. 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꽤 이름난 정원사라고 했다. 높으신 분들의 초청을 받을 만큼. 실력이 좋다고. 덕분에 이렇게 좋은 집에서 하녀를 부릴 수 있는 거겠지. 난나는 밀라가 만들어둔 따뜻한 수프를 조금씩 먹으며 창밖을 보았다. 새벽에 내리던 비는 금새 그쳐 있었다. 이파리들이 젖어 있는 것을 보니, 비가 그친 지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난나는 일어나 뜰로 나갔다. 천둥번개가 요란히 치던 새벽이 무색하게도 하늘은 화창했다. 난나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남편과 함께 가꾸었던 뜰을 살펴보았다. 거창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뜰은 시골의 정취가 났다. 문득 집안일을 하던 밀라가 땅이 마르지 않았으니 그만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난나는 ‘응’ 하고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난나는 한창 화단을 서성거리다가 밀라의 재촉에 집안으로 돌아갔다. 부엌을 챙겨보던 밀라가 저녁에 필요한 식재료를 사러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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