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99화
#99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올게.”
“부인 혼자서요?”
“왜? 못 믿겠어? 너 오기 전까지는 장도 내가 봤는데.”
저보다 한창 어린 주제에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소녀를 향해 난나가 말했다. 밀라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나는 그녀가 내미는 장바구니를 받아 든 채 인근 광장에 위치한 식료품 가게를 찾았다. 밀라는 호박과 순무, 양고기를 넣은 스튜를 할 거라고 했다. 마침 양고기는 정육점을 하는 자비스 씨가 오후에 가져다줄 거라고 했으니 난나는 호박을 비롯한 다른 먹거리를 사 오면 된다고 했다.
난나가 사 온 재료에 맞춰 요리를 할 거라고. 하여간 나이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단한 애였다.
난나는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밝은 기분으로 식료품 가게에 발을 내디뎠다. 밀라의 말대로 순무와 호박을 사고, 말린 살구와 체리도 샀다. 식료품 가게를 나와 생선을 사보려다가 문득 빤히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분수 근처 벤치에 앉은 남녀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 모두 클로크를 쓰고 있어 작은 얼굴의 이목구비가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 근방의 사람은 아닌 게 확실했다. 난나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이방인들은 불에 덴 것처럼 서둘러 시선을 돌렸으나 난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먼 데서 오셨나 봐요.”
“아…….”
“옷이 다 젖으셨네요.”
“그, 그렇게 되었어요.”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가 황급히 자리를 일어나며 대답했다. 난나가 가까이 다가올 때부터,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허둥지둥 클로크를 털며, 그녀의 앞에서 멀어지려 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난나는 행색이 이상한 그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장바구니에서 체리를 한 줌 꺼냈다.
“이거 먹을래요?”
엷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희고 작은 손안에는 빨갛게 익은 체리가 빛나고 있었다.
* * *
스텔라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맥박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내내 오라비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그 역시 얼이 나간 것처럼 제 모친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엄마는……. 그대로였다. 그들이 기억하는 만큼 아름다웠다. 앳된 얼굴로 첫 아이를 안고 있던 초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풍성한 은발은 여전히 물결치고 있었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하늘색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슬란은 그래서 조금 넋이 나갔다.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으니까. 나이도 들었고, 궁 밖에서 생활하는 만큼 모든 게 달라졌겠지. 그러나…….
“그래서 새벽 내내 이동했다고요?”
“네. 그게…….”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겠어요.”
보닛을 쓴 모친이 스텔라를 돌아보며 엷게 웃었다. 스텔라는 가슴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빠르게 뛰는 맥박을 어찌하지 못해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억거리고 있자,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모친이 그들을 돌아보며 ‘여기예요.’ 하고 말했다.
“우리 집.”
“아.”
“걱정 마요. 남편은 잠시 집을 비웠어요.”
난나가 해사하게 웃었다. 스텔라는 눈을 깜빡이며 아름다운 목조 주택을 보았다. 말 그대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집이었다. 목가적이고 아기자기한……. 소박하되 결코 투박하지는 않은 훌륭한 집이었다.
스텔라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니까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멀지 않은 곳에 외가 댁이 있다고 말하려는데 지나치게 얼어붙어서인지 혀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모친이 먼저 앞장을 섰다.
스텔라는 제발 어떻게 해 달라는 얼굴로 오빠를 돌아보았으나 슬란은 무슨 생각인지 그녀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죽을 것 같았다.
“아주 멋진 집에서 사시는 군요.”
“그렇죠? 신혼부터 산 집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에 들어요.”
모친이 밝게 웃었다. 손님이 온 것을 안 하녀가 ‘어떻게 아신 분들이에요?’ 하고 물었다. 모친은 광장에서 우연히 만났다며 차를 좀 내어와 달라고 말했다. 하녀는 뚱하니 그들을 쳐다보다가 냉큼 부엌으로 갔다.
슬란은 고요하게 가라앉는 심장을 느끼며 집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황궁은 물론 낮은 작위의 귀족이 머무는 저택과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소박한 저택이었으나, 정감이 느껴지는 따뜻한 집이었다.
황궁에서는 이 저택을 ‘사택’이라고 불렀다. 황제. 아니 상황의 개인 사택을 줄여 그리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부른다고 해도 가신들이나 시종들 중 이 사택을 방문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보아하니 하나 있는 하녀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 중 고용한 것 같고…….
수행 인력 대부분이 근위들이라는 말이 맞았다. 슬란은 벌건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누이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며칠을 쉬지 않고 움직여 안델라에 도착했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워낙 작은 동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또한 신의 뜻일까. 그는 음울한 시선으로 모친을 쳐다보았다.
기억을 잊은 그녀는 무척이나 밝은 얼굴이었다. 근심 걱정 따위 없는 유복한 부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 한편이 씁쓸했다. 그들이 모친을 잊지 못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동안에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품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인 일이지.’
슬란은 억지로 입술을 당겼다. 모친에게 삶은 상처였다. 그들 역시 깊은 생채기에 불과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이란 모든 그런 것이었다. 자식을 향한 사랑도, 그 애틋한 모성애조차 그녀의 목을 죄는 속박의 수단이었다. 그러니 다 잊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 행복이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무슨 상관일까.
“그런데 두 분은 어디서 오신 거예요?”
“벨다브라라고, 수도와 맞닿은 도시입니다.”
“그렇군요. 바쁜 일이 있었나 봐요. 새벽에도 이동하신 걸 보면…….”
“누이가 얼마 후 결혼을 하거든요.”
“어머?”
슬란의 대답에 미소 짓고 있던 난나가 눈을 크게 뜨고 슬란의 옆에 앉은 스텔라를 보았다. 클로크를 벗은 소녀의 얼굴은 말 그대로 ‘소녀’였다. 풍성한 검은 머리칼에 호박색 눈동자가 아주 아름다운……. 붓으로 그린 것처럼 정교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는 어딜 가나 주목을 받을 만큼 대단한 미소녀였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미소녀’였지 다 큰 처녀로 보이지는 않았다. 난나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난나의 축하에 스텔라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미소로서 화답을 해야하는 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별거 아닌 일이었다. 의례적인 축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스텔라는 주책없이 뛰는 가슴을 슬그머니 움켜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모친은 신랑이 좋은 사람이냐고 물었다.
스텔라는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르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정혼자라서 좋은 사람인 게 아니라 정말로 좋은 남자였다. 자상하고 다정했다. 그런 남자를 만나 다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스텔라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엄마도 이렇게 행복하니까. 엄마도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그녀의 기억을 뺏었다고 했을 때, 스텔라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오빠와 자신마저 잊게 만들었으니까.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이해되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모친에겐 자식들마저 그런 존재였다. 원하지 않은 아이였으니까. 하나하나, 그녀의 인생에서 한 뼘, 한 뼘 채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아프고 괴로운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스텔라도 놓아줘야지.
아니. 이제는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인. 나리께서 돌아오셨어요.”
문득 하녀가 낭랑한 음성으로 상황의 행차를 알렸다. 스텔라는 파랗게 질려 슬란을 돌아보았다. 그는 겁에 질린 누이와 달리 편안한 얼굴이었다. 시선을 잠시 내리깐 그가 ‘어떡해?’ 하고 속삭이는 누이에게 ‘괜찮아.’하고 대답했다.
스텔라는 벌벌 떨며 현관을 들어오는 부황을 보았다. 이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아버지에게 사죄하려 입을 떼려는데, 슬란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제야 스텔라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품에 안기며 입맞춤을 받았다. 스텔라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광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네.”
“수도에서 왔나 보군.”
“그렇대요. 여기에 외가 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난나가 그의 품에 안긴 채 미소 지었다.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라, 더듬고 있던 스텔라의 앞으로 슬란이 나아갔다.
“부인의 초대를 받아 이렇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실례일 것까지야.”
오레스터는 초췌한 행색의 자식들을 차례로 돌아보다 픽 웃었다. 그 서느런 미소에 딸아이가 잘게 떨었으나 그는 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문득 난나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이렇게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은 오랜만이라고.
오레스터는 남매를 둘러보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